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거든. 흉터를 얻게된 사연은 결코 잊을 수 없지. 안 그런가?

- 모두 다 예쁜 말들 中

 

 

 

오늘 생각없이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멕 메카시의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른다. < 아비정전 > 을 생각하다가, 장국영을 생각하다가, 장만옥을 생각하다가, 실패한 내 연애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이 떠오른 것이었다. 다시 읽기 위해 찾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냥... 찾고 싶었을 뿐이다. 다섯 개의 책장에서 코멕 메카시의 소설을 모두 골라냈다. < 핏빛 자오선 > < 국경을 넘어서 > < 평원의 도시들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로드 > . 하지만 여전히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은 보이지 않았다. 분실한 모양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천장이 낮은 옥탑에서 산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 여자와는 헤어졌다. 그 책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책인 레비스트로스의 < 슬픈 열대 > 가 내 책장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이란 늘 이렇게 의뭉스러운 점이 있다.  생각해 보니, 이 아비정전'도 그녀와 함께 본 영화였다. 책을 다시 사야 할까 ?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잃어버린 책을 다시 사는 것은 어리석다. 더군다나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헤어진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도 어리석다. 더군다나 헤어진 여자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젠 소년다운 고집은 버려야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 < 모두 다 예쁜 말들 > 에 대한 리뷰'를 읽어보았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쓴 글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천장이 낮은 옥탑에 살았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코맥 메카시의 소설을 유독 좋아했다고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 모두 다 예쁜 말들 > 은 그 남자의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이었으나 이렇게 자신의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2009년의 리뷰였다. 범종 같은 울림이 밑바닥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밑에는 글쓴이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의 덧글이 달렸다. 덧글은 2012년의 것이었다. 그러니깐 글쓴이의 동료는 3년이 지난 글에 뒤늦게 덧글을 단 것이다. " 우연히 네가 쓴 글을 보았다 " 로 시작한 글이었다. " 우연히 네가 쓴 글을 보았어. 내가 ** 샘'에게 보내던 메일 주소 아이디'와 알라딘 아이디가 똑같더라... 너무 아파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 **샘'이 그렇게 불의의 사고로 허망하게 떠나고 나서, 나... 샘의 빈 자리'를 보며 많이 울었어. 여긴 마치 나를 위한 숨은 보물 찾기 쪽지 같아. 자주 올께. 주인 없는 집에 너무 자주 온다고 눈치를 주지는 마. 보고 싶다. 그립다... "

 

내일은 4월 1일'이다. 하루 앞당겨서 이리 쓴다. 

 

 

 

 


 

  

 

 

 

 

 

 

소년다운 고집.

 

 

 

장국영이 죽었다. 같은 날 김정일은 군부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고,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심형래는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58건이나 되는 허위 신고가 119에 접수되었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죽었다가 깨어나는 기적을 이루었으나 장국영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빌딩 24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그랬던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스스로를 발 없는 새'라고 말했던 남자는 거짓말처럼 죽었다.나는 그 소식에 휘청거렸다. < 아비정전 > 을 스무 번 넘게 보던 즈음이었다. 그날 밤, 다시 아비정전을 보았다. 살아 있는 배우의 걸작'을 보는 것과 죽은 배우가 남긴 유작'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 영화를 생각날 때마다 보았다. 볼 때마다 생각났다. 이런저런 일로 이 영화를 마흔 번 넘게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습관처럼 본다는 것은 소년다운 고집'에 속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오마쥬인 셈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7년 봄, 낙원동 시네마떼끄'에서였다. 그때,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성공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소년의 불순한 고집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끊으면 사탕을 찾듯이, 나는 고집을 버리는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태도는 지금 생각해 보니, 또 다른 고집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고집을 버리고 새 고집을 얻은 셈이다

.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장국영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았을 때'이다.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는 만남을 거부한다. 어머니에게서 다시 한번 버림받은 그가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을 때, 화면은 재촉하는 걸음과는 달리 어느 순간 슬로우모션'이 되어 느린 걸음으로 바뀐다. 재촉은 지연된다. 이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은 주인공이 품고 있는 겉과 속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빠른 걸음이 그가 어머니를 향해 내뱉는 위악'이라면, 느린 걸음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은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초라한 어깨'다.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아비정전 스틸 컷

 

오늘 우연히 이 스틸 사진'을 발견했다. 편집에서 삭제된 장면 중 하나'다. 장만옥은 왜 천장이 낮은 양조위의 방 창가에 앉아 있(었)을까 ? 나는 엔딩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 양조위'를 장국영'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다. 세 번째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인물'은 장국영이 아니라 양조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질 나쁜 모니터 화질 탓만은 아니었다. 둘은 묘하게 닮았다. 그녀는 여전히 첫사랑인 장국영을 잊지 못한 것이다. 장만옥에게 있어서 양조위는 장국영의 헛것이다. < 첫 > 의 반대말은 < 끝 > 이 아니다. < 헛 > 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반대말은 헛사랑'이다. 나는 그 후로 양조위를 볼 때마다 장국영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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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3-3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이지 내일이 바로 그날.. 거짓말처럼 저 배우가 간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네요.
제게 곰발님 오늘 글은 특히나 좋네요. 가슴에 팍팍 꽂힙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8:37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아니라 저 영화가 가지는 독특한 매력 때문일 겁니다.
어제 한번 다시 보았습니다. 42번째 관람입니다.

달사르 2013-03-3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터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치유의 과정을 반복하나봐요.
제게도 흉터가 있는데 가끔 나도 모르게 손이 갈 때면, 지나간 과정이 도르르 말리면서 재생되더라구요.
나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내 흉터 또한 사랑해줬으면..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구요.

내일은 만우절보다는 장국영이 떠난 날로 더 먼저 기억되는 거 같아요. 이것도 흉터여서 그렇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9:53   좋아요 0 | URL
5월은 가정의 달이고, 4월은 장국영의 달이죠. 이젠 전 그렇게 기억합니다.
4월 1일 혹은 4월 16일을 장국영의 날로 정해야 합니다.
영화 속 장국영과 장만옥이 만나는 날이 4월 16일이거든요. 장국영은 공교롭게도
4월에 세상을 뜨고 말이죠. 4월은 이래저래 장국영이 떠오르비다.

포스트잇 2013-03-3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 장국영, 양조위, 장만옥... 제게 90년대는 화양연화였네요...,영화의 시대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00:01   좋아요 0 | URL
화양연화도 좋죠. 이참에 다시 보아야겠습니다.

라로 2013-04-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라는 말 인상에 남네요,,
첫의 반대는 헛! 이군요,,,,미리 앞당긴 만우절 페이퍼인가요?????ㅎㅎㅎ
늘 멋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22   좋아요 0 | URL
네에. 하루 앞당긴 만우절 페이퍼입니다.
전 이상하게 그 사람이 뒤돌아서면 그때부터는 어깨만 보이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스누피 2013-04-0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장국영에 빙의된 저 인물이 장학우라고 얼핏 착각하고 있었다는.
그런데 곰곰 발로 생각해 보니 머리 빗는 장학우는 영화전차 엔딩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당시의 홍콩영화들은 죄다 비빔밥이 돼 버려서
기억이란 놈 참 의뭉스럽다,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21   좋아요 0 | URL
저 영화를 볼 때 모니터가 심각하게 어두웠어요.
왜 오래되면 어두워지잖습니까. 가뜩이나 어두운데
화면도 어둡다 보니 전 마지막 머리 빗는 남자가 정말 감쪽 같이
장국영인 줄 알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그 스누피 님 맞으시죠 ? 후후..

그 놈 맞음 스누피 2013-04-01 17: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스누피란 놈도 워낙 의뭉스런 놈이라;; ㅋㅋㅋㅋㅋ
맞아요. 심각하게 어두웠지요. 원래 화면도 그런데다 그 땐 죄다 닳고 닳은 비디오로 아비정전을 봤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처음엔 응? 장국영인가벼? 저 놈 안 죽었나? 회상씬인가? 그랬다는; ㅋㅋㅋ

아마도 왕가위가 일부러 그런 걸 노리고 관객들을 놀려 먹은 게지요, 분명히.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1 17: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왕가위가 워낙 뒤죽박죽 편집 대마왕이라서..
저도 과거의 한 장면이겠거니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편집으로 잘려나간 장면이 무지 많았다고 하죠 ?
하여튼 잘리기 전에는 장만옥과 양조위가 한방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인이 되었나 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