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한국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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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본 소설’을 할리퀸 로맨스 문고 시리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저질 소설’의 대명사’로 판단해인지, 내가 일본 소설’을 읽고 있으면 “ 많고 많은 책 중에 그런 책 “ 을 읽는다고 타박을 한다. 많고 많은 책의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일본 소설 대부분을 싸구려 대중 소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높다.
그들은 태백산맥, 아리랑, 토지’와 같은 좋은 책을 읽으라고 강요한다. 혹은 이상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수상집’을 사서 읽는 것은 교양인의 필수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이 즈음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의 기준은 명확하다. 순문학은 좋은 책이고, 장르문학은 나쁜 책’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나는 그해의 이상문학상 후보 명단에 오른 단편(들)을 읽을 때마다 < 참고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한 참치의 울화통 > 이 되어서 책을 집어 던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 이 참치의 울화통’이 기초적인 소양과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해력에 문제가 발생해서 생긴 심리적 자격지심’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한국 단편 소설’이 지나치게 지적 허영’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화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트라우마가 전적으로 아버지/어머니 부재’에 기초한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 억압 서사’에서 벗어나려하지 않으려는한국 소설가들의 게으른 천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소설가만큼 상상력이 빈곤한 창작 집단’을 본 적이 없다. 무조건 아버지 때문이라고 징징거리는 단편’을 읽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그들은 담당 교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학생처럼 보인다. “ 문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학교 안의 문학 담당 교수가 아니라 시장의 독자” 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프랑코 모레티의 말이다.
현대 일본 소설’은 집단적 요구에 의한 개인의 욕망’을 다루지 않는다. “ 가족과 나 “ 의 연대가 불러오는 트라우마’는 없다. 그보다는 순수한 개인의 욕망과 취향’을 다룬다. ( 류는 재즈’로 빠지고, 하루키는 와인에 빠진다. ) 신경숙은 현대인의 결핍을 엄마의 부재’로 읽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새빨간 사기극이며,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의 부재’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인은 엄마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엄마를 대체할 케어 시스템/사회 복지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국가의 복지’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회 안전망인데, 대한민국은 이 대체 어머니’가 부재한다.
국가 복지 시스템’이 잘 된 나라일수록 가족 서사’에 목숨을 걸지 않는 이유는 “ 이 세상에 가족 말고 믿을 놈’이 생각보다 “ 꽤 많기 때문이다. 복지’가 케어’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후진국들은 이 세상에 믿을 놈은 < 가족 >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경숙이 문제를 제기했어야 할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다. 그녀는 개인의 <케어>를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으로만 판단한다. 그것은 소설가가 사회를 읽는 눈이 부족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엄마는 만병통치약인가 ? 엄마만 있으면 행복은 민들레 홀씨처럼 착박한 황무지에도 꽃을 피우는가 ? 이런 가족 신파’는 좋은 소설이 될 수 없다.
순문학의 대표주자인 신경숙의 한심한 사회 인식’보다는 장르문학의 미야베미유키’의 소설이 더 사회 비판적이며 날카롭다. < 화차 > 는 그 정점에 다다른 소설’이다. 그녀는 추리 장르’라는 대중적 친화력과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든다. 한국 작가들이 엄마 없어, 아빠 없어, 고양이도 없어, 다 없어. 어떡해 ! 라며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말투로 징징거릴 때, 일본 작가들은 사회 곳곳에 침투한 병폐’를 읽는다. 미유베는 신용 사회와 소비 사회’가 개인을 파멸시키는 무간지옥’을 화차를 타고 주위를 돌며 서술한다.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정확히 십 년 후의 한국 사회’를그대로 반영한다.
그런데 한국 소설가는 대중에게 읽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 아니면 대중에게 읽히는 소설을 쓸 능력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편혜영의 소설들이 현대인의 불안을 다룬 훌륭한 단편이라는 평단의 판단에는 동의하지만 대중적 친화력에는 완벽하게 실패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장편 소설 < 재와 빨강 > 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 작가가 대중적 소통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작품도 형편없었지만, 재미도 형편없었다. 쉽게 말해서 평단과 흥행 모두에 실패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훌륭한 작가는 많다. 김연수는 선전할 것이고, 박민규 또한 건재할 것이며, 김애란은 첫번째 장편 < 두근두근...> 의 완벽한 실패를 딛고 다시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천명관도 좋은 소설’을 쓸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작가는 김중혁이다. 그의 소설은 늘 궁금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백민석은 고집을 꺾고 다시 소설을 쓸 것이다. 개인적으로 윤대녕은 여행 가서 묘령의 아가씨와 < 하는 > 서사’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하고, 신경숙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지독한 탐미주의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은희경은 적당히 쿨했으면 하고, 공지영 소설은 솔직히 왜 잘 팔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작가라 생각한다. 그리고 조경란은 제발 정신을 차렸으면 한다. 너무 고고한 척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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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이치’라는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은 기괴하고, 유치하며, 때론 무섭기도 하다. < 작가는 불안과 고뇌’가 팔 할이야! > 라고 외치는 순문학 지망생들이 보면 참... 한심한 작품만 쓰는 작가’다. 제목도 얼마나 유치하냐면<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 < 암흑 동화 >, 리스트컷 사건 > 등이 있다. 그의 작품 중에 <평면개> 라는 중편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주인공인 여고생’은 엄마가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아빠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받는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남은 남동생마저 불치병으로 6개월 후면 죽는다. 그러니깐 6개월 후면 주인공 말고는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이들은 가족회의’를 통해서 서로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된다. 얼마나 우울한가!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들이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고 밝혀졌으니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겠네 !쯔, 쯔, 쯔....
그런데 이러한 나의 생각은 뒤통수를 맞는다. 가족들은 다음날부터 신나게 웃고 떠든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 두고 집안에 쳐박혀서 책만 읽을 결심에 기뻐하고, 엄마도 이 기간을 6개월의 휴가’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남동생은 아주 긴 방학이라며 기뻐한다. 뭐... 함께 뿅 하고 사라질 것이니 그리 억울한 것도 아닌 것이다. 주인공 소녀는 그들 사이에서 소외를 느낀다. 가족은 발랄하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에 박수를 보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아, 아아아아니... 이건 우리가 익히 보았던 가족의 풍경이 아닌 것이다. < 억압받는 한국 가족 서사 > 에 익숙했던 한국 독자들은 이런 식의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오츠이치는 가족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쓴다.“ 반년 뒤. 세 사람 모두 죽었다. “이 간단한 문장은 가족 서사’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