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개정판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 수오서재 / 2017년 3월
평점 :
주옥 같은 문장의 향연
사람들을 만나면 책을 선물하는 취향을 가진 나에게 " 책 선물 " 은 고약한 구석이 있다. 독서 모임이나 독서 토론을 통해 알음알음 알게 된 이'가 선물하는 책은 " 백퍼 오케이 탱큐 " 이지만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내게 책을 선물할 때는 난감해진다.
그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책을 선택하곤 하는데 이런 책을 선물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읽자니 짜증나고 안 읽자니 책을 선물한 이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성의에 보답하는 것과 무시하는 것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게 된다. " 무성의 " 하게 읽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무성의도 성의의 한 종류이니까. 혜민의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 >> 도 오래 전에 A가 내게 선물한 책이었다. 21세기 자기계발서의 한 획을 그은 책을 선물받았을 때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책을 선물한 이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 앞으로 이 인간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겠구나. "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은 내가 예상한 경멸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고라니 새끼도 아니고 교양의 수준이 마구니처럼 날뛰는구나, 시발 ! 이 책에 사용된 문장 구조는 대부분 : 슬퍼하지 마세요, 기쁜 날도 올 거예요. ㅡ 이런 식'이다. 이 문장 구조에서 핵심어만 슬쩍 갈아끼우면 책 한 권이 만들어진다. 이 책을 읽은 지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났고, 우싸인 볼뜨와 같은 속도로 무성의하게 페이지를 넘겨서 기억에 남는 문장은 거의 없지만, 단 한 문장만은 기억이 또렷하다. " 잠 잘 자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토닥토닥 ! "
당시, 나는 살인적인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었는데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멘탈이 붕괴되는 경험을 했다. 생의 번뇌에 고민하는 청춘에게 땡중이 한다는 말이 고작 잠을 잘 자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소리라니. 이게 무슨 고라니 같은 소리'라니 ? 그 자리에 이 반질반질한 땡추가 내 옆에 있었다면 등짝 스매싱 천 대를 때렸을 것이다. 그의 말대꾸대로라면 체중이 늘어서 고민하는 친구에게는 똥 잘 싸면 몸이 가벼워져요 _ 라는 즉문즉답도 가능하리라.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해악은 노예 근성과 거지 근성을 독자에게 세뇌시킨다는 점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정서는 저항하지 마라, 순응하라 _ 로 요약할 수 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웃어요. 하아.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고 노예도 이런 노예가 없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심은 팔더라도 간과 쓸개 정도는 버리지 말고 챙기세요, 플렉 스님. < 좆 > 같은 문장을 < 주옥 > 같은 문장으로 받아들이는 독자도 문제이지만 < 지옥 > 을 < 주옥 > 으로 포장하는 출판업자'도 문제다. 이외수가 이 책을 위해 쏟아낸 뒷광고 문장을 읽다 보면 혀를 찰 정도다, 참...... 주옥 같다, 줙 같아 ■
+
세상에는 악서보다는 양서가 많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까지 독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양서보다는 악서가 대중에게 인기가 더 많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유니클로(혜민)를 에르메스(법정)과 비교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대중의 수준에 맞춘 대중서를 옹호하는 이도 있으나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비유가 합당하려면 가격에서 차이가 나야 한다. 하지만 법정의 << 무소유 >> 나 혜민의 << 멈추면... >> 은 동일한 가격대'이지 않은가 ?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속담이 있다. 잘 팔리는 책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듯이 안 팔리는 책이 반드시 나쁜 책도 아니다. 이종미 작가의 에세이 << 혼자 살아갈 용기 >> 는 다홍치마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