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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ㅣ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평점 :
머 리 털 나 고 지 금 까 지 :
아내의 맛
머리털 나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티븨 방송 프로그램 제목 가운데 최악의 제목 한 편을 뽑으라고 한다면 1초의 주저도 없이 티븨 조선의 << 아내의 맛 >> 을 뽑겠다.
아마도 이 제목은 내가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여전히 최악의 방송 프로그램 제목으로 선정할 가능성이 높다. 조강지처라는 사자성어가 술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해결한 아내라는 뜻이니 아내의 맛이란 " 막걸리 쉰내 " 라는 뜻일까 ? 시바,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조선 방송국 놈들아. 놀라운 점은 이 외설스러운 제목이 방심위 심의를 무사히 통과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티븨 조선 제작진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 아내 " 는 어떤 맛이니 ? 사지선다형으로 답하라. ① 된장찌개 맛 ② 김치찌개 맛 ③ 삼겹살 맛 ④ 돼지껍데기 맛.......
우리가 이 지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티븨 조선 방송 제작진은 < 여성 > 이라는 대상을 맛의 기호로 전환하여 " 여성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 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에 대해 " 성욕을 식욕화 " 해서 표현했다. 여자를 먹다, 맛없게 생겼다, 저년 맛있겠다 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종 식인 선망이자 육식 행위인 셈이다. 만약에 제작진이 대상을 " 아내 " 대신 " 남편 " 으로 설정했다면 << 남편의 맛 >> 이라는 타이틀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먹진 제목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 두둥. 남자의 향기 !!!
섹스를 고기 섭식으로 이해하는 남성의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 페니스는 나이프이자 포크'이다. 그리고 삽입 섹스 행위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고 포크로 고깃덩어리를 찍는 행위다. 여성보다 남성이 육식에 대한 식탐이 과도하게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육식 문화는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흔적이다. 옛날만 해도 고기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제삿날이 되어야 비계 한 점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제사 문화라는 것이 여성이 배제된 남성 조상-들'에게 바치는 음식을 음복하는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육식은 철저하게 남성을 위한 레시피'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기는 곧 정력이다.
고기는 남성 지배의 상징이자 이 지배를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페미니스트 중에서 유독 채식주의자가 많은 이유도 육식에 내포된 남성 폭력에 대한 저항 때문이 아닐까 ? 사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고기(MEAT)이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시체(CORPSE)이기도 하다. 온실가스의 주범인 축산업이 햄버거 한 개에 들어간 소고기 패티 한장을 생산하기 위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자동차가 67KM를 주행할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와 같다고 한다. 자연생태계에서 지구가 온도를 1도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2500년인데 비해 인간이 지구의 온도 1도를 올리는 데 걸린 시간은 100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속도는 가파르게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있다. 이제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육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육식을 포기하는 일은 식도락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옛날에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라는 속담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무엇을 먹느냐는 곧 정치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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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도시'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장애인도 생활하기에 편한 도시'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편리한 도시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장애인은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는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든 이유는 장애인이 살기 힘든 도시라는 의미이다. 반대로 장애인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도시는 비장애인도 생활하기에 좋은 도시'일 수밖에 없다. 소수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여성도 행복한 나라'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이 행복한 나라는 남성도 행복한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비장애인보다는 장애인, 남성보다는 여성, 인간의 권리보다는 동물권, 어른보다는 아이의 행복추구권이다. 그들의 행복추구권을 질적으로 높이기 위해서 조금의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의사가 행복한 나라와 환자가 행복한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 의사의 행복추구권은 환자의 생명권보다 소중할 리 없다. 생명권은 어떤 식으로든 행복권보다 앞선다. 불의보다 불이익에만 눈깔이 뒤집어지는 쓸개 같은 대한의협의 총파업을 보면서 그들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좋겠다. 시바. 오래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