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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과  함민복 시인  :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벗습니다. 불알 두 쪽이 흔들렸지만 저의 다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샤워를 합니다.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입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니 너무 일찍 차비를 차렸습니다. 집에서 개를 키운 사람이라면 외출복을 미리 입은 채 집안에서 뒹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개털은 옷에 묻거든요. 


옷을 다시 벗은 다음에 밍기적거리다가 두 시간 후에 다시 입고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일찍 집을 나설 것인가 ?  고민하다가 집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예상보다 2시간 일찍 서초역에 도착했지만,  서초역은 이미 인산인해로 발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서초역 7차 촛불집회 때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8차 집회에는 << 기생충 >> 에서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리 계획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 출발 두 시간 전에 샤워를 한다. ㉡ 샤워를 끝마치면 옷을 입고 대문을 박차고 교대역 9번 출구로 향한다. ㉢ 서초역은 이미 포화 상태이니 3호선 교대역에서 내려 산책을 즐기며 서초역 방향으로 걸어가리라. 


㉣ 미리 편의점에 들려 생활용품을 마련한다. 아버지, 저에게도 계획이란 것이 있습니다 !  브라보 ~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5분 동안 샤워를 하고 25분 동안 머리를 말리고 4B 연필로 눈썹을 그리고 옷을 입었습니다. 지난 집회에서는 밤이 되면 날씨가 쌀쌀해질 것을 대비하여 따스하게 입고 갔으나 날이 더워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는 얇은 홑옷 하나 입고 양말을 신자마자 개털에 옷에 붙기 전에 횡, 대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3호선을 타고 교대역에 내렸습니다. 교대역에 내리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교대역 9번 출구는 인구 혼잡으로 인해 막힌 상태이니 다른 출구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


아닌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역 안에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계획이 어긋나는 시발점이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9번 출구에서 가장 먼 출구로 빠져나왔으나 이미 거리를 포화상태였다. 어떻게 한자리 꼽싸리 껴서 앉을까 틈틈이 기회를 엿봤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군중에 휩쓸려가다 보니...... 니미, 예술의전당까지 내려왔습니다. 되는 일이 없군 !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거리를 본 적이 없었지만 혼잡하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예술의 전당을 서성거리다 보니, 이 집회 현장에서 문득 함민복 시인의 < 흐린 날의 연서 > 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 또한 계획에 없었죠.   한때, 이 시를 좋아했습니다. 집회는 따분했습니다.  선동의 문장들은 촌스러웠고 때론 감동 없는 격문이어서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집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내가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숟가락 하나를 보태야죠. 그게 식구니까.  밤이 되자 지난 집회와는 달리 날씨가 꽤 쌀쌀했습니다.  정말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더군요.  그날,  저는 자주 함민복 시인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집회 1부가 끝날 때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샀습니다.  계획에 없는 음주가무였습니다. 술을 마시며 함민복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좋았습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옛 여자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 또한 계획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취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를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ㅡ 흐린 날의 연서,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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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0-0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르나우의 1927년작 << 일출 >> 을 보았다. 좋더라..

겨울호랑이 2019-10-06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는 교대역부터 통제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강남역에서 조금 들어간 곳부터 통제가 되고 교대역에서 더는 앞으로 못나갈 정도였습니다. 정말 많은 인파였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0-08 12:24   좋아요 1 | URL
진짜 많이 왔더라고요. 그런데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었어요. 길을 꿇어놓아서걷는 데에는 불편이 없더군요. 오랜만에 강남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십자대로 전부 구경한 듯.. ㅎㅎㅎ

수다맨 2019-10-08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함민복 시인을 광장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았기에 본인이 맞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드렸더니 흔쾌하게 맞다고 하시더군요. 자신의 얼굴도 아는 일반 독자가 있냐면서 꽤나 신기해 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저녁이 되어서 집회가 끝났고 (아마도 문인으로 보이는 남자분들이) 함 시인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함 시인은 다음날 인삼 장사를 해야 한다면서 곧바로 강화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답변하더군요. 생활인의 무게랄까,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 직장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분의 처지가 문득 떠오르네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함 시인이 좋은 작품을 쓰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0-08 12:25   좋아요 0 | URL
함 시인 시가 좀 촌스럽고 때론 감정이 앞선 느낌이란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게 또 함 시인 시의 매력이더라고요..
온통 똥폼 잡고 절제 절제한 시보다 때론 이런 시들이 매력적으로 읽힐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