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와 조국
가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경우가 발생한다. 나도 그때 질풍노도보다 무섭다는, 폭풍의 언덕보다 매섭다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었다. 아니......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영화 상영관 안'이었으니까 !
영화는 장국영이 축구장 매점 아가씨인 장만옥에게 수작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계산을 하기 전에 코카콜라 병뚜껑부터 딴 후에 그 유명한 " 1분 이야기 " 를 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개수작이었다. 나는 첫 장면부터 매료되었으나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도 있었고 음료수가 든 종이컵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에는 사람들이 매표소로 몰려가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영웅본색처럼 화끈한 총질 액션 영화를 기대했는데 영화에서는 두 남녀가
멜랑꼴리한 발 없는 새 이야기를 하고 앉아 있으니 불알후드들은 그들의 멜랑꼴리에 배알이 꼴린 모양이다. 아비정전 극장 폭동은 번지수(예술영화 장르를 액션영화 장르로 착각한)를 잘못 짚은 데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극장 문화사에서 전무 후무했던 사건이었다. 아비정전 극장 개난동 사건은 훗날 왕가위 감독 귀에도 들린 모양이다. 영화 프로듀서가 왕가위에게 당분간 한국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귀뜸 했다고 한다. 갔다가는 성난 관객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영화를 보고, 보고, 쓰리고, 보고, 보고, 버티고, 보고, 보고, 보고 보다 보니 어느덧 마흔 번 넘게 이 영화를 보았고, 그 이후로는 수를 헤아리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쓰레기일지라도 나에게 내 인생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조국대전은 " 아비정전 극장 난동 사건 " 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조국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선보인다고 했을 때 시청자는 따스하고 훈훈한 교양 건전 드라마'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까 보니 교양 드라마가 아니라 통속 드라마'가 아니던가 ! 부부가 딸의 스펙 쌓기에 열을 올렸으니
그들이나 저잣거리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몇몇은 분개했을 것이다. 액션 영화 장르인 줄 알았는데 예술영화 장르여서 화가 잔뜩 났던, 그 옛날의 관객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는 통속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런데 장르 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찰이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통속 드라마를 조폭 장르로 다시 한 번 꺾게 된다. 조폭 장르에서 쉽게 등장하는 소품인 짜장면은 화룡점정이었다. 왜냐하면 짜장면은 양아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그들의 소울푸드이기 때문이다.
서초동 촛불집회는 정치 검찰이 통속 드라마를 조폭 드라마 장르로 변주해서 화가 난 시청자의 반란인 셈이다. 누군가는 윤석열의 귀에 대고 속삭였을 것이다. 당분간 저잣거리를 혼자 걷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갔다가는 성난 시청자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덧
내가 동양대 표창장이 위조되었다는 의혹을 믿지 않는 까닭은 지폐위조범은 오만 원짜리 지폐는 위조해도 천 원짜리 지폐는 위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나 소나 받을 수 있었다는 동양대 표창장의 가치만 놓고 보자면 이 상장의 가치는 십 원짜리 동전과 같다. 이 세상에 십 원짜리 동전을 위조하는 화폐위조범은 없어요, 총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