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 편
1. 넘버3
유한계급은 재산이 많아서 생산 노동 활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한가롭게 백수 생활을 하며 유희와 쾌락에 탐닉하는 계급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불한당이 바로 유한계급이다. 불한당(不汗黨)이라는 단어가 땀(汗)을 흘리지 않는(不) 무리(黨)를 뜻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유한계급과 불한당은 닮았다. 인간 고라니 가족 대한항공 JOSSY FAMILY'(조씨 패밀리)가 대표적인 불한당'이다. 한국의 재벌 상류층은 유한계급이자 불한당이며 조폭이고 양아치'이며 무산 계급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층이다. 대한민국 노블레스 계급의 현주소이다. 피 빨아먹는 고라니라니. 당최, 이게 뭐라니 ? << 유한계급론 >> 의 저자 베블린은 " 유한계급은 평화에서 호전적 생활 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출현했다 " 고 지적한다. 소수인 유한계급이 다수인 노동계급 사회 전체를 자지우지(좌지우지)하는 현상은 곧 한국 사회가 " 평화적 ㅡ " 이라기보다는 " 호전적 ㅡ " 문화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태왕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였고, 자라나는 청소년의 꿈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다. 조물주를 섬기는 목사조차 그의 장래희망은 대형교회 건물주'다. 그들은 조물주를 팔아서 건물주가 되고자 열심히 평화를 외친다.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건물주는 무노동의 환상을 도착적으로 현실화하려는 욕망의 투사 대상이 되었다. 이제 한국인의 장래 희망은 불한당이 되는 것이다 ! 영화 << 넘버 3 >> 는 유한계급이 되기 위한 하빠리-들의 무간지옥을 다룬다. 이 영화가 뛰어난 점은 한국 사회의 병폐를 꿰뚫는 송능한 감독의 통찰과 성찰에 있다. 영화 << 하녀, 1961 >> 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컬트라면, << 넘버 3 >> 는 당대의 유이무이한 컬트 영화이다.
2. 밀양
영화 << 밀양 >> 에서의 " 미용실 "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골머리를 앓던 행간이었는데, 김영민은 이것을 신애가 반만 용서하는 행위(영화 속에서 신애는 머리를 반만 깎인 상태에서 미용실을 뛰쳐나온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실패도 아니고 성공도 아닌, 중단이다. 용서는 중단되었지만 그렇다고 용서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원수를 완벽하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만지는 일이 워낙에 금기와 관련된 탓에 원수의 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도록 용인하고 그 절반을 자르도록 허락한 것은 용서의 의도가 있었으나 중간에 중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원 원장과 신애의 관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였다면, 신애와 학원 원장 딸의 관계에서 신애는 더 이상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학원 원장 딸은 신애보다 더 낮은 약자의 위치에 있다. 살인자의 딸은 도시의 한켠 구석에서 또래 남자애들에게 얻어맞는다. 그는 살인자의 딸이기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다. 신애가 약자라면 원장 딸은 그보다 낮은 희생양이다. 그렇기에 신애는 원장 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위대한 한국 영화 한 편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 영화를 선정하겠다. 보면 볼수록 사유의 폭이 넓고 깊다.
3. 기생충
노릇은 롤(: ROLE )에 가깝고, 버릇은 룰(: RULE )에 가깝다. 무릇, 노릇은 역할 놀이이다. 아비 노릇, 자식 노릇, 사위 노릇 따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릇은 직위에 대한 책무의 무거움이 투사된 낱말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 대통령 못해 먹겠다 ! " 라고 한 소리도 알고 보면 < 노릇 > 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하소연인 셈이다. 반면에 버릇은 습관이 고착화된 행위 일반이다. 그렇다면 노릇과 버릇은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다. < 노릇 > 은 나이가 듦에 따라 역할이 바뀐다. 자식일 때는 자식 노릇을 해야 하고, 아비일 때는 아비 노릇을 해야 한다. 만약에 아비 노릇을 해야 할 때 자식 노릇을 하면 철없다는 소리 듣기 쉽다. 즉, 직위(노릇)에 따른 책무도 나이가 듦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반면에 버릇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노릇을 해야 하는, 인간으로 둔갑한 천 년 여우가 밤마다 닭의 생간을 먹는 것은 생래적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버릇의 불변을 상기시킨다. 바디 체인지'를 다룬 영화 << 내 안에 그놈, 2018 >> 은 노릇과 버릇이 충돌하는 영화이다. 양아치 아재와 겁쟁이 고딩이 우연한 사고로 인해 몸이 바뀌게 되는데, 이런 류의 영화는 노릇과 버릇이 혼동을 일으키며 발생하게 되는 왁자지껄을 다룬다. 겁쟁이 고딩의 몸으로 들어간 양아치 아재'는 고딩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만 아재 때 습속을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양아치 아재의 몸으로 들어간 겁쟁이 고딩은 아재 노릇에 충실해야 하지만 부지불식 간에 고딩 때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다. 영화 << 기생충 >> 도 일종의 노릇과 버릇이 뒤섞일 때 발생하게 되는 곤경을 다룬다. 하류층 가족이 상류층 가족과 동화되기 위해서는 하류층의 버릇을 감춘 채 상류층 노릇을 모방, 흉내, 척하기와 같은 연기를 해야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불쑥 하류층의 버릇이 튀어나온다. 상류층도 마찬가지'이다. 상류층은 종종 부지불식간이 상류충(ㅡㅡ蟲)을 드러낸다. 뭐, 아님 말고1) ■
1) 참고로 << 기생충 >> 과 관련된 리뷰는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지 않고 쓴 글이다( 영화 예고편 한 편 본 게 전부다. 이 영화와 관련된 리뷰나 기사 그리고 평론도 읽지 않았다 ). 읽지 않고 읽은 척하는 기술을 터득하다 보면 보지 않고도 본 척하는 내숭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김영민은 알면서 모른 척하라고 충고하지만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보다 상위는 "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 이다. 그거시 바로 관심법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본 척하는 글에 화가 나서 가래침을 툭 내뱉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 누가 지금 가래침 뱉는 소리를 내었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