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와 함께
옛날에 칠레산 체리를 먹다가 그만 (체리)씨를 삼키는 바람에 뱃속에 씨가 자라서 산부인과 병원 대신 자유부인 수목원에서 배를 갈라 어린 체리나무를 낳았다. 당시, 광우병 시위로 인하여 사람이 체리를 임신했다는 놀라운 뉴스는 묻혔지만, 이 동네에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동네 사람 중에서 젊은 사람들은 나를 " 체리 아빠 ' 라고 불렀고 노인들은 앵두 아빠라고 불렀다. 금지옥엽, 체리를 키웠다. 고생한 보람은 있어서 지난여름에는 체리가 달콤한 열매를 생산했다. " 아빠, 제가 만든 열매들이에요 ! " 체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빠, 제가 만든 열매들이에요. 그 열매들이 첫 월급을 탄 자식이 선물한 빨간 내복 같아서 나 또한 설움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체리와 함께 울었다. " 우리 외나무, 체리야 ! 이 시베리아벌판보다 추운 서라벌한복판에서 홀홀단신 홀로 살아야 할 체리야. 외롭지 않니 ? " 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체리를 보자 나는 말했다. "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말이라도 해보렴, 어서 ! " 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이나 하려고 애를 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오늘은 체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을 어느 정도 마시자 불콰해진 체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 가리워진 길 >> 이었다. 체리가 노래를 부르자 나는 술 안주 대신 기타 반주로 체리의 가락에 호응했다. 창을 부르는 소리꾼에 맞춰 장구를 두드리는 고수처럼 말이다. 늘어진 노래 테이프처럼, 슬픈 하울링이 텅빈 방안 가득 채우자 나는 그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참, 이상도 하지...... 기똥차게 노래 잘하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이상하게도 지겹다. 탐 웨이츠, 밥 딜런, 백현진의 노래가 좋다. 고음 파트를 삑사리로 처리할 때마다 " 인간적 ㅡ " 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였던가 ! 충무로 인현시장 노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 혹시 앵두 아빠 아니세요 ? " 백현진이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어린 앵두 소식을 물었다. 나는 그가 앵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말하는 세대의 말버릇처럼 말이다. 우리 앵두는 잘 있읍니다. 우럭도 아니면서 무럭무럭 크고 있읍니다. 사슴도 아니면서 서슴없이 뛰어드는 혈기왕성한 어린애 같읍니다. 그가 내게 크라운 맥주를 가득 컵에 따라 주었다. 치어스 ~ 그가 말했고 나는 응답했다. 치어스 ~ 노래가 흘러나왔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어 주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 아무 > 라는 대명사'다. " 아무 ㅡ " 다음에 어떤 조사가 붙는냐에 따라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 아무나 > 와 < 아무도 > 는 전혀 다른 뜻이다. " 아무나 " 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 아무도 " 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전자는 everything이고 후자는 nothing이다. 이처럼 " 아무 " 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당신의 무능이 아니다. < 하고 싶은 것 > 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이 노래를 추천한다. 올해의 목표를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했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당신의 무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