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그는 몸으로 울었다
나는 이름이 없어. 너도 이름이 필요 없어. 우리는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이 방에서 만나는 거야 !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김애란 소설을 다시 보기 시작한 계기는 << 두근두근 내 인생 >> 이었다. 이토록 " 형편없는 " 소설을 " 형편있다 " 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문단의 허세가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명색이 대한민국 문학상을 싹쓸이한 소설가가 쓴 소설치고는 지나치게 미숙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실망했으나 기대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저지른 실수이겠거니 했으나...... 그 후에 나온 작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쁜 문장으로 예쁜 감성을 탁마하는 기술이야 김애란만 한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의 절망과 빈곤을 이야기하면서 지나치게 예쁜 문장만으로 상황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소녀 감성처럼 느껴졌다. 김애란 소설은 가난한 달동네 담벼락에 칠해진 예쁜 벽화 같다(구경꾼이 보기에는 예쁜 그림이나 동네 주민에게는 불편한 관심일 뿐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달달한 소설보다는 담담한 문학이 좋아진다. 권정생의 << 몽실 언니 >> 는 꾸미려는 수작이 없어서 좋다. 현실에 대한 직시와 시대에 대한 증언은 이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김애란이 명심해야 될 것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미문이 아니라 직시와 증언이라는 점이다. 가난한 마을의 담벼락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한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소설 << 몽실언니 >> 에서 몽실이는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길 위에서 헤어진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몽실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름이 뭐예요 ?
몽실이는 왜 그토록 사람의 이름에 집착했을까 ? 양돈장에서 처음 일하게 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새끼 돼지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 녀석은 똘똘이, 이 녀석은 촐랑이, 그 녀석은 얼룩이. 이름이 생기는 순간에 각각의 고유한 개성도 생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돼지를 키워서 도축장으로 보낼 때에는 마음의 상처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양돈장에서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짐승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혹은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가짐의 출발이다.
앵무새를 키우는 친구가 있었다(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1080922232 : 숙녀와 새). 혼자 사는 그는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기 이름을 반복적으로 앵무새에게 상기시켰다고 한다. 내 이름은 ○○○이야. 따라해 봐 ! 혼자 사는 그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하는 말은 혼잣말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나를 만나면 항상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앵무새를 칭찬했다(정확히 말하자면 친구가 아니라 아는 동생이었다).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몇 달 후였다. 새가 사라진 것이다. 친구는 술자리에서 앵무새를 잃어버렸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지금은 그 앵무새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는 내내 앵무새 이름을 부르며 슬퍼했다. 그때는 다 큰 사내가 작은 새 한 마리 때문에 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혼잣말이 늘어날수록 그 친구의 슬픔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