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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마당 Vol.10 어른 찾아 삼만리 - 2018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8년 3월
평점 :
놀 고 있 네 :
애나 어른이나
잡지 << 언니네 마당 봄호 >> 에 게재된 글을 옮긴다. 글자 수를 늘릴 요량으로 중언부언하다 보니 글이 산으로 갔으나 담당자가 요술을 부려서 정상적인 꼴을 갖춰주셨다. 편집의 묘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훌륭한 작가에게는 반드시 훌륭한 편집자가 있다. 만고불편의 진리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동의하겠지만 글을 늘리는 것보다 글을 줄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진실이다. 담당자가 제대로 된 글꼴을 갖춰 보내주신 한글 파일을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 중구난방 상태인 그지같은 원본을 올린다. 이번 호는 읽을거리가 많다.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강추 !

- 피터 브뢰헬, 아이들의 놀이 1599년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어쩌다 어른이 된 사람과 어쩌다 어른이 될 사람. tvN 프리미엄 특강 쇼 << 어쩌다 어른 >> 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떠밀려서 어른이 된 사람과 어쩌다 어른이 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 쇼다.
“ 어쩌다 - ” 라는 부사에는 준비 없이 어른이 되었다는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억울함도 살짝 묻어 있다.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제가 감히 어른이 되었습니다아. 이 방송 프로그램이 주요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라고 말하는 캔디형 어른이다. 사실은 외롭고 슬프지만 어른인 척하느라 내색도 못하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마침내 참치가 된 캔디를 겨냥한 것이다. 인류와 어류 사이. 당신은 사람입니까, 참치입니까. 이는 지금의 세태와 맞물리면서, << 어쩌다 어른 >> 은 홀로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1인 독립 가구의 증가, 시대 변화에 따른 디지털 호모루덴스의 탄생,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처럼 놀이에 탐닉하는 키덜트,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취직할 나이가 되었지만 취직도 못하고 경제적 사정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88세대와 캥거루 계층에게 호소한다.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자격에서 살짝 벗어났다는 데 불안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라는 단어 앞에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붙은“ 어쩌다 ㅡ ” 라는 표현이 자꾸 거슬린다. 사람들은 유년 시절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뉜다는 단순한 분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헬의 풍속화 << 아이들의 놀이, 1559 >>를 감상하면서 시작되었다.
<< 아이들의 놀이, 1559 >> 라는 그림에는 아이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출연한다. 그들은 각자 혹은 끼리끼리 모여서 다양한 놀이(75가지)를 재현한다. 물구나무서기, 팽이 돌리기, 굴렁쇠 굴리기, 말뚝박기, 뜀틀 넘기, 통 굴리기, 카드놀이, 소꿉놀이, 공기놀이, 기마놀이, 돌치기 놀이 등 말 그대로 놀이 백화점인 셈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아이들은 생김새로 보아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설상가상, 이들이 입고 있는 복장도 어른이 입는 옷이 똑같아서 복장만 가지고는 어른과 아이를 구별할 수도 없다. 그림을 확대해서 세세하게 살펴보면 아이가 어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른이 아이를 흉내 내며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 내린 최종 결론은 이렇다. 놀고 있네,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구나. “ 어쩌다 어른 ”이라는 제목은 나이가 들면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요구에 떠밀려서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필연이자 숙명이다. 이 가정법은 반드시 상대적 개념인 아이라는 계층이 존재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만약에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어른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올챙이 시절 없는 개구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린이라는 개념이 근대가 낳은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어린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 워워. 말도 안 되는 신소리라며 나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다.
그 주장은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한 말이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 아동의 탄생 >> 에서 아동은 필요에 의해 근대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7세 이후가 되면 어른들 세계로 편입되어 그들과 섞였고, 어른들의 공동체에 소속된 아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었으며 일과 놀이를 공유했다. 궁금하여 그 시대 풍속사를 살펴보니 옛날에는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따로 없어서 아이들은 어른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똑같은 놀이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과 섞여서 카드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하고 돈을 걸고 도박을 했고 술도 마시며 기방도 출입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의 달콤한, 아 ! 아밀라아제를 교환하며 사랑을 나눈 나이가 14살이 아니었던가. 반대로 어른들도 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를 즐겼다고 하니 키덜트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족속이었다. 이를 두고 서구가 동양보다 도덕적으로 더 개방적이고 성적으로 더 타락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 사회도 아이를 작은 어른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이몽룡이 기방을 제 집 드나들 듯 출입하며 기생들에게“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 라고 했을 때가 16살이었고,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15세에 결혼을 했으며, 벽초 홍명희는 13살에 결혼을 해서 나이 서른이 되어 손자를 보았다.
그리고 조혼 풍습으로 인해 10살에 장가를 간 꼬마 신랑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고 ? 아니다, << 임꺽정 >> 의 저자 홍명희는 20세기 인간이었다. 어린이라는 말은 17세기부터 써온 말인데 중세 국어에서 어리다는 의미는 " 나이가 적다 " 는 것이 아니라 " 어리석다 " 는 의미였다. 이 말은 20세기에 와서야 아동 문학가였던 소파 방정환(1899~1931)이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로 사용했으니 그 이전에는 나이가 적다는 의미에서의 어린이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어른이라는 개념
또한 근대가 만든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른이라는 개념은 판타지다. 그렇기에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구별 짓기는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다. 대부업 광고 문구 중에 " 여자니까 쉽게 ( 대출 가능 ) " 라는 표현이 있다. 여성 계층에게는 다른 계층보다 특별 우대하겠다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 여자는 멍청해서 복잡한 것은 못해 " 라는 뉘앙스로도 읽을 수 있다. 여성 우대보다는 여성 홀대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세를 살아가는 어른들은 어린이 인권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것이 억압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기 하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 나는 짊어져야 할 어른의 무게 때문에 힘들다며 징징거리는 어른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며 자위할 때마다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다. 그렇기에 어른이기 때문에 겪는 특별한 성장통은 허구라는 점에서 환상통이다. 애나 어른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인간의 성장 과정을 어린것와 어르신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을 올챙이와 개구리로 나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 과정에는 변태라는 극단적 형태의 변신은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묻고 싶다. 인류와 양서류 사이. 당신은 인간입니까, 개구리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