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참을 먹으면서 잠시 여유를 부린다고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대번에 '필을 받은 책'은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갈무리, 2007). 작년 바로 이맘때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가 출간된 바 있어서 벚꽃소식과 함께 '최근에 나온 책들'로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57338) 다시 1년만에 그들의 주저라고 할 <앎의 나무>가 마저 출간된 것.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로 출간된 바 있어서 '오래된 새책'에 해당한다.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보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낸 듯하다. 물론 제목은 '앎의 나무'로 바뀌었고.

 

 

 

 

소개에 따르면,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생물학 책"으로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삶과 앎의 근본과정에 관한 자신들의 체계관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선보이고 있다. 다윈주의의 영향아래 생물을 객관적인 바깥세계에 얽매여 있는 일종의 '노예'로 보는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이들은 생물의 '자유함'을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오토포이에시스'이다. 나는 작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독어판은 영어판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출간됐고, 영역본의 경우엔 지난 1992년에 개정 3판이 출간됐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 갈무리판은 자작아카데미판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인식의 나무>는 내가 따로 원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전작인 <오토포이에시스와 인지>(1980)는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이다. 추세로 보아 이 책은 내년 이맘때 번역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07.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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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1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음에서 함으로...
니콜라스 루만 언급되는 부분부터 어려워서 포기했어요.ㅜ.ㅜ

로쟈 2007-04-1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을 도서관에 주문했었는데, 구하게 되면 읽어볼 참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몇 년전부터 예고돼 온 그리스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난주에 1차분 세 권이 출간됐고, 나는 그 중 한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이다. 수고한 역자들(정암학당 연구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마침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문자 그대로 접수하지는 않더라도 이 서양철학의 '시초'에 대해서 그간에 우리말로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래저래 갑갑한 노릇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가져도 좋을 법한데, 사실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움직이는 지경을 거쳐서 '말문'이 트이는 경지까지는 아직도 장구한 여정을 남겨놓은 듯하다. 구두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이제 각주도 제대로 달아가면서... 

경향신문(07. 04. 17) 그리스어 원전 ‘플라톤 번역판’ 나왔다

다들 알지만 제대로 읽지 못한, 아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서양철학의 주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이 그러하다.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정암학당에서 지난 13일 연구원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창연, 김재홍, 정준영, 김주일 연구원. 박재찬기자

때문에 지난주 나온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1차분 ‘뤼시스(강철웅 옮김)’ ‘알키비아데스 I·II(김주일·정준영 옮김)’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의 출간은 반갑고 값지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 원전을 저본으로 하여 정암학당을 중심으로 뭉친 국내 학자들이 오랜 기간의 세미나와 연구를 바탕으로 펴낸 플라톤 번역서다.

앞으로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위서를 포함해 플라톤의 저작 43편이 5년간 순차적으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이는 정암학당 김재홍 박사의 말대로 “한국 인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 유입된 것이 길게 잡아봤자 1세기가 안됩니다. 그간 늘 일본어 혹은 영어로 된 번역본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지요. 텍스트로 삼을 한글 번역본도 없었고, 상호검증하기도 어려워 서양고대철학사 연구가 사상누각인 상태였지요.”



플라톤 역주사업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2000년 설립한 정암학당에서 주도하고 있다. 20여명에 달하는 연구원들은 철학을 전공한 석·박사들로 지난 7년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저작들을 읽어왔다. 이들은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아’의 교수법처럼, 그리스어 원전과 발제자가 준비해온 한글 번역문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엄격한 토론을 통해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독자 대상은 고교생 이상으로 삼았다. 이정호 교수는 “총기 있는 고등학생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정암학당 정준영 연구원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전문용어가 아니라 당시의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지요. 철학적 사고의 밑바탕이 되는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역자들은 최대한 쉽고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데 역점을 뒀다. 동시에 작품 해설과 주석에 신경써 전문연구자들을 배려했다. 실제로 ‘뤼시스’ 편을 보면 에로스와 필로스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을 뜻하지만 육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와 상호성을 기반으로 사랑·우정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의 필로스를 구분하기 위해 역자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석을 달아 설명을 더했다.

숱한 토론을 거치며 뜻을 다듬었지만 정리는 역자의 몫. 이 과정에서 번역어의 선택이나 복잡한 그리스어 문법에 맞춰 의미를 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교생 독자 수준으로 맞추려고 하는데 번역투의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리스어의 의미를 살리려고 하다보면 우리말 같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우리말에 맞추다보면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더라고요. 그 중도를 가는 게 어려웠습니다.”(김주일 연구원)



플라톤 전집은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부터 출간된다. ‘뤼시스’는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라는 청년의 대화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크리티아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로 이상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자들은 인문학 연구의 1차 자료가 되는 원전번역이 활발한 해외의 사례를 부러워하면서 “앞으로 이 전집이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윤민용기자)

07. 04. 16.

Платон. Избранное

P.S. 참고로, 러시아어 플라톤은 3권 짜리 전집 외에 다양한 형태의 선집들이 출간돼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 중 <국가> 등이 포함된 책과 15개의 대화편이 수록된 저럼한 선집 등이다(비교적 널리 알려진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이번에 나온 국역본 대화편들 가운데서 <뤼시스>와 <알키비아데스>는 빠져 있다).

Наследники Платона 

관련서들을 검색하다 보니까 존 딜론의 <플라톤의 유산>(2005) 번역본이 눈에 띈다. 원서는 2003년에 나왔고 250여쪽이니까 만만한 분량이다(원제는 'The Heirs of Plato: A Study of the Old Academy (347-274 BC)' 그러니까 플라톤의 제자들 얘기인 듯). 러시아어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인정받는 책인 듯하다.

플라톤 전집도 출간되는 김에 우리의 독자적 시각에 따른 연구/주석서들도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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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6 23:12   좋아요 0 | URL
지난주 교보에 깔렸더군요. 저도 한 권만 택한다면 <뤼시스>. :D

biosculp 2007-04-16 23:20   좋아요 0 | URL
깔리자 마자 3권 다 구입했는데, 가독성은 좋더군요.
제일 좋은것은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들고,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길때 그리고 꽉 잡을 때 뽀드득 소리가 첫눈 밟는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로쟈 2007-04-16 23:24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알키비아데스>를 먼저 골랐습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때문에...
biosculp님/ 서평은 좀 기다려봐야겠지만, 고전 번역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면 좋겠네요...

나비80 2007-04-16 23:31   좋아요 0 | URL
<국가-정체>만 아주 예전에 통독해둔 형편이라 욕심이 생깁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 진득하니 입원하기 전에는 읽기 힘들다는 자조섞인 농담들도 하더라구요. 이것도 로쟈 님 페이퍼에서 본 말인것 같기도 하고. ^^

2007-04-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7 01:20   좋아요 0 | URL
**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제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네요.^^;

자꾸때리다 2007-04-17 06:35   좋아요 0 | URL
호옷 나왔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1:00   좋아요 0 | URL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라는 평가는 서광사에서 나온 박종현 등의 번역에도 해당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마늘빵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오홋. 이런 것두. 음...

biosculp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기자가 확인안하고 쓴것 같군요. 지금 원전 번역된것이 박종현번역본들과
한길사에서 나온 소피스테스, 정치가(김태경역), 철학과 현실사에서 나온 송영진번역의 파르메니데스(책이름은 플라톤의 변증법), 문지에서 나온 향연등이 있을텐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2:28   좋아요 0 | URL
biosculp / 한겨례 서평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국가〉를 비롯해 그의 저작 몇 편이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파편적·단속적이었을뿐더러 대개는 일어판의 중역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2870.html

로쟈 2007-04-17 15:01   좋아요 0 | URL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 전무했던 건 물론 아니지요. 몇 권 나와있습니다. 이번 '전집'의 차별성을 좀 내세우려다가 보니까 약간 오버성 멘트가 들어간 듯한데, 저는 '전집'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언제 다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biosculp 2007-04-19 18:44   좋아요 0 | URL
정암학당 운영자가 쓴 글인데요.
"전집 출간과 관련한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 중 학당 전집 출간이전에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본이 없는 양 보도 된 것은 전혀 잘못된 사실입니다. 발간사에서 밝힌 것 처럼 이미 우리나라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박종현 선생님 등의 노력으로 상당수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성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전집 발간계획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대화편들의 원전 역본 출간 자체가 처음인 것으로 기자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학당에서는 해당 일부 언론에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로쟈 2007-04-19 19:07   좋아요 0 | URL
역시나 기자들의 '게으름'이 문제였군요...
 

'비극의 탄생을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에 이어지는 또다른 워밍업이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던, '헤르메스의 빛으로' 연재 중에서 '니체 vs 빌라모비츠' 편을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어제 <비극의 탄생>과 함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잠시 뒤적거렸는데, 조만간 몇 마디 쓰게 될 듯하다(도서반납 기한 때문에라도). 분량은 많지 않으므로, 출간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이 문제적 텍스트를 이 참에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지...  

경향신문(07. 04. 14) [헤르메스의 빛으로](14) 니체 vs 빌라모비츠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비극의 탄생’을 출판한 해는 1871~1872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죽음을 논의한다. 그는 예술은 원래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의 이중적 결합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한다. 본래 두 요소는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사이인데, 주기적으로 화해의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화해의 기간에 탄생한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

따라서 비극은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인 무엇이다. 이 혼연일체의 무엇에 소크라테스라는 소피스트가 나타나 논리와 이성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내부 배신자가 등장해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비극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는 것이 ‘비극의 탄생’의 핵심이다.

그러면 비극의 사망에 대해서 니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무대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다름 아닌 에우리피데스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신들린 힘(Daimon)에 의해서 말이다. 에우리피데스도 아니다. 그도 실은 가면에 불과하다. 이 신들린 힘, 그것은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탄생한 다이몬이다. 이름하여 소크라테스다. 그리스 비극에 사망에 이르게 한 자가 바로(‘비극의 탄생’ 제12장)” 이 자, 곧 소크라테스가 저 술취한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광란의 굿판을 무대에서 추방하고,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펼쳐지는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리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미친 괴물”이 나타나자, 그리스 비극엔 아폴론적인 힘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고 니체는 천명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그 아폴론적 예술의 전형적인 파편이라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철학이 신학에게 (시녀로)봉사했듯이, 문학을 변증론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철학의 시녀로 만드는 이가 바로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다이몬의 압력에 눌려서 말이다.”(‘비극의 탄생’ 제14장)



‘비극의 탄생’이 출간되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은 니체와 동학이었고, 실은 4년 후배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1848~1931)라는 고전문헌학자였다. ‘(고전)문헌학의 미래(Zukunft der Philologie)’라는 문건을 통해서 그는 “(그런 의미에서라면)나는 기꺼이 디오니시우스의 제물이 되겠다.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이 욕의 대명사라 한다면, 나는 그 욕을 기꺼이 듣겠다”고 선언한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선, 니체가 뭐라 하든 워낙 든든한 후손들을 두었기에, 굳이 빌라모비츠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졸지에 비극의 살해 하수인으로 몰린 에우리피데스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사로, 곧 에우리피데스의 구원자로서 빌라모비츠는 자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세계를 자신이 본 그대로 재현한 작가이다. 거기에는 어떤 수치도(aidos)와 원한(nemesis)도 없다.” 세계 묘사 혹은 세계 재현에 있어서 ‘쿨’한 에우리피데스의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적”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는 “현대적 사유 방식의 예시자”이며, “구시대적 사고와 전통을 흔들고 일소하는데, 어떤 소피스트도 못해낸 일을 그가 해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자.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어느 날 남편이 새 장가를 가겠다고 한다. 배신이다. 이 여인은 아이들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다. 복수의 다른 수단도 있는데, 왜 아이들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냐고? 복수의 극대화를 위해서다. 남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복수이므로. 단순 원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비극으로 탄생한다. 비극인 이유는 다음에 있다. 곧,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울질 된다면, 그중 어떤 것이 더 힘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가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동가의 규범들이 부딪힐 때, 예컨대 사랑과 의무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작품은 던지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겪을 법한 모순적 상황, 딜레마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들 간의 충돌이 이야기 전개(플롯)의 중핵이라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비극임에 틀림없다. 물론 비극의 전경(前景)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이라는 특정 인물들의 갈등이지만, 배경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가치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이 힘겨루기가 인물 간의 적당한 타협과 화해를 통해서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라, 규범들의 전쟁이고, 이 전쟁의 끝에서 어떤 가치가 어떤 필연적 강제(Ananke)의 힘을 얻어 승리하는지와 이러한 종류의 싸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한 번 살펴 보자는 점에서 비극인 셈이다.

이런 종류의 고급 싸움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 싸움은 때때로 우리의 삶 안에 투영되어 서로 부딪히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니까. 그래서 싸움이 어디까지 가는지, 그 충돌의 끝점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싸움을 직접 겪는 것이 아니므로, 한 걸음 물러나서 관조(theorein)해봄으로써, 사태를 객관적으로 한 번 통찰해 보자는 것이다.

‘쿨’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그대로 재현해 보고, 그 사태의 배경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와 규범들의 줄다리기를 ‘쿨’하게 지켜보자는 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핵심이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을 혼연일체의 현장에서 보편의 관객으로 끌고 올라간다. 이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비극의 살해 하수인이라 보는 니체의 견해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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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문학과작가 사이'에 초대된 시인은 '허를 찌르는 솔직함'이 장기라는 김민정 시인이다(한데, 나는 그 '솔직함'이 가장된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라는 은유로 분장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솔직함 말이다). 드문 경우이지만 한권 나온 시집을 예전에 통독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옮겨놓는 마음이 편안하다. 다만, 그때 몇 가지 감상을 적어놓지 않은 게 약간 후회스럽지만. 세칭 '미래파' 시인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놓으려고 했었다. 그 시인들을 아직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계속 미뤄지고 있지만. 하긴 그런 글이라면 나보다 더 잘 쓸 만한 비평가들이 여럿 되므로 굳이 수고를 무릅쓸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예컨대 평론가 신형철씨 같은.  

경향신문(07. 04. 14) [작가와 문학사이](14)김민정-허를 찌르는 솔직함

예컨대 그녀는 “삐친 자지처럼”(‘거북 속의 내 거북이’)과 같은 비유를 쓰는 시인이다. 이 직유는 실로 허를 찌른다. ‘시(詩)’라는 제도와 남근주의의 허장성세를 동시에 밟아버린다. 천박하고 외설적인가? 아니, 짜릿하고 통쾌하다. 우리가 차마 못 한 말을 그녀는 한다. 이 솔직함은 포즈가 아니라 불가피한 전략이다. 위선적이지 않은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전에는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관용구가 없다. 솔직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그러나 분명히 ‘시적’이다.

예컨대 그녀는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눈알나무, 라고 그냥 읽어버리지 말고, ‘눈알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가 휘청거리는 나무’를 나의 감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쓸쓸하고 오싹하다. 온 몸이 눈이 되어 세계를 경계해야 할 만큼 상처가 많은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쓸쓸하고, 그 수많은 눈알들이 일제히 심술궂게 나를 째려본다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 눈알들이 세상을 굴러다니면서 유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이 솔직한 발성과 역동적인 감각이 협업해서 그녀의 시를 굴려나간다. 김민정. 197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시인이 되었고 2005년에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냈다. 조화와 화합이 아니라 반목과 적대를 이야기하고, 거죽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살의 실재를 현시한다. 그녀의 시집을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시화(詩化)로 읽어도 좋다.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마침내 날아오르는 사연.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댄다 난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 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가지 꽉 물어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스물네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그 애인의 애인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 (‘나는야 폴짝’)

줄이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씬(scene)이 바뀐다. 그 찰나의 순간에 한 여자의 연대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철없는 소녀가 스물여덟 처녀가 될 때까지 여자의 삶은 크고 작은 전쟁의 연속이다. 꼬마-소녀-사람은 늘 어른-남자-사람한테 시달리면서 자란다. 잠깐만 방심해도 줄에 발이 걸린다. 삶의 어떤 고비들을 그녀는 이렇게 ‘폴짝’ 넘어 왔을 것이다. 이 폴짝은 무겁고 또 가볍다. 이 이중성을 이해하는 일이 김민정 시의 외부와 내부를 함께 보는 첩경이다.

예컨대 ‘미친 년 널 뛰듯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 년’을 미치게 한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고슴도치 아가씨의 ‘폴짝’은 제도의 중력을 거스르는 무거운 도약일 것이다. 물론 그녀의 시 역시 한국 여성시의 어떤 계보를 잇는다. 문학사에는 돌연변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폴짝’에는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다. 그래서 힘이 센 변종이다. 씩씩한 아가씨가 널을 뛴다. 원한도 신파도 없이, 미친 년 널 뛰듯이.

젊은 시인들의 시는 다 요령부득이라는 식의 무지막지한 히스테리가 창궐하고 있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거북 속의 내 거북이’) 맞다. 그녀는 때로 “안 들리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고 왜 너는 염산을 타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렸느냐고 힐난할 것인가. ‘점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불구다. 너와 내가 “껴안고 뒹굴어야 온 몸에 새겨지는” 노래, 미련곰탱이 아저씨는 모르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들은 아는 그 노래. 자, 박수.(신형철/문학평론가)

07. 04. 15.

P.S. 캐리커처와 사진에서 알 수 있지만 시인은 정말로 눈이 큰다. 탤런트 김민정 뺨칠 만큼. '나는 한 그루의 눈알나무'란 은유가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나는 시집을 이 '눈알공주'의 가족사로 읽었다). 여느 여성시인들과의 차이점이라면 히스테리적 상상력이 아닌 도착적 상상력을 펼쳐보인다는 것. 그건 어쩌면 시인도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불편' 동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지도 모르겠다('불편' 동인들의 인터뷰 기사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02/2007040200003.html 김민정 시인의 동영상 인터뷰도 짦게 포함돼 있다). 블편한 시? 하지만 해롭지는 않다(그게 치명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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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2007-04-16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얼마 전에 이 시집을 통독해서....뭐랄까, 왠지 로쟈님이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네요. ^^

로쟈 2007-04-16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란 게 생각날 때 써두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지금은 시집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끼사스 2007-04-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보니 눈만 큰 것이 아니라 키도 크더군요. ^^:

난다김 2007-04-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너무하세요. 하고 많은 사진 중에 하필 저... 술 먹고 눈 뻘건 사진을...--; 간간 들어와보곤 했습니다. 부끄러워 이만 도망갑니다. 휘리릭

로쟈 2007-04-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미모의 흑백사진이 있지만 사이즈가 너무 커서 대체했었습니다.^^;
 

학술저널 담론비평에서 진화생물학에 관한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는 '[통섭논쟁] 진화론도 진화한다'는 기획기사의 일부로 연세대 대학원신문(152호)에 게재된 것인데(사회생물학에 관한 내용이 다음호에서 다루어진다고 한다) '헌대 진화생물학의 전망'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상식 차원에서 정리해둘 만하다.

담비(07. 04. 13) 현대 진화생물학의 전망

다윈과 진화생물학 

‘진화(Evolution)’라고 하면 흔히 생물의 진화가 연상된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정의에도 그러하듯 ‘진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진보’ 또는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생물진화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진행되는 생물들의 진보 또는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일례로,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 그 주된 논리는 흑인들이 진화적으로 백인들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나 나치의 게르만주의의 배후에도 역시 그런 왜곡된 논리가 숨어있다.  

과학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의 하나로 간주되는 진화의 개념과 그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연구자가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근 5년 동안 영국의 군함 비이글호를 타고 세계 전역을 일주하면서 생물 진화의 증거들을 풍부히 수집했다. 이런 증거들에 바탕 하여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하게 된다.

다윈은 맬서스(Thomas Malthus)가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맬서스에 의하면 모든 생물종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만약 기아나 질병과 같은 재해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으면 그 수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생물들이 대부분 안정된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각 세대에서 소수의 자손을 제외한 대다수 개체들이 강제로 죽기 때문이다.

멜서스의 이론을 따라 다윈은 각 세대에서 도태되는 자손들은 아마도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한 개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가축이나 곡식들이 인간에 의해 선택됨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종자가 개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 어떤 선택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물종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윈 이후의 진화생물학

다윈은 자연선택의 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이론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를 동료 과학자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것이 자연선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다윈조차도 자연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납득시키는 데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다윈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화론 연구가 현대의 진화생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다윈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에서부터 시작된 유전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금세기 초엽, 멘델의 업적이 재발견됨으로 해서 과학계는 비로소 유전자와 자연선택 사이의 관련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유전학적 지식이 처음부터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초기의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은 돌연변이가 대부분 개체에 해로우며 그 영향도 점진적인 것이 아닌 아주 대규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정도였고,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에서 요구되는 새롭고 유용한 변이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점차 유전학에 수학이 가미되면서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자연선택설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전학과 자연선택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원리가 종합되었는데, 이를 ‘신다윈주의(Neodarwinism)’라고 부른다.

사회생물학의 등장

신다윈주의가 출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도브잔스키(Dobzhansky), 메이어(Mayr), 심프슨(Simpson) 등은 집단유전학, 계통학, 고생물학 등에서의 연구 결과들이 신다윈주의의 원리들과 모순되지 않음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대 종합설(The Modern Synthesis)’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진화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설이 타당하다는 점을 전 세계 생물학자들이 인정한 쾌거라 하겠다.

그러나 진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이 신종합설의 제창으로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신종합설이 대두되기까지 주로 고생물학, 계통분류학, 유전학 등에 의존해서 발전했던 진화생물학은 1950년대부터는 주로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과정 중에서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비롯한 일단의 신다윈주의자들은 생물들 사이의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많은 현장 생물학자들의 관찰을 근거로 정말로 중요한 진화의 메커니즘은 생식을 위한 개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들 사이의 경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킨스, 윌리암스(Williams), 스미스(Smith) 등에 의하면 진화는 다음 세대에 가능한 한 더 많은 유전정보를 남기려는 유전자들의 투쟁으로 정의된다.

1970년대에 출현한 윌슨(Edward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이러한 유전자 중심 진화론의 연장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생물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을 부추기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옳다면 어떻게 생물들 사이에서 다른 개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현상이 빈번히 관찰될 수 있으며, 또 흰개미나 꿀벌의 집단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협조하는 공생 체제가 구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다윈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논의하기로 한다).

현대인과 진화생물학

다윈 이래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때로는 그런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과학으로서의 진화생물학을 반대하는 일부 비전공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창조(?)해서 진화생물학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것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단체를 결성해서 한 과학 분야를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진화생물학은 비단 창조과학자들과 같은 비전공 과학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빈번하게는 일반 대중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한 예가 아래의 풍자만화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화생물학은 앞에서와 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야를 크게 해서 널리 바라본다면, 학문으로서 진화생물학의 중요성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장래 문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에의 적응을 다윈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했는데, 우리는 자연계에서 지나치게 적응에 성공했던 나머지 나중에 갑자기 새로 변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에 이르렀던 많은 생물종들의 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재 지나치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리고 이런 지나친 적응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인류의 번영은 환경 파괴와 병행하고 있다. 우리는 열대우림, 산호초, 바다와 호수, 늪지, 강과 하구 등 생물상이 가장 풍부한 장소들을 파괴하고 있으며, 오존층을 훼손하고 있고,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더해서 온실효과를 부추기고 있다. 또, 매년 그 사용이 늘어나는 유독성 화학물질들은  우리의 식량원인 곡식의 품종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환경 훼손과 파괴는 필경 새로운 환경 조건을 조성해서 우리 인류로 하여금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살 것을 강요할 것이다. 과연 인류는 이러한 적응에 성공해서 영원히 번영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구하는 학문이다.(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07. 04. 15.

P.S. 필자인 홍욱희 소장은 생물학과 환경학 전공자로서 여러 권의 저역서를 갖고 있다. <생물학의 시대>(범양사출판부, 1998)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물론 박스보관도서인지라 소장의 의미가 없는 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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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4-1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생물학' 이란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진화'란 말은 생물학 분야 자체에서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훨씬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담아가겠습니다.

책읽기는즐거움 2007-04-15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책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를 링크해 놓으실꺼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위 본문의 풍자만화 중에서 일반 대중들이 오해한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좀 설명해 주시면 안될까요....-_-;;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04-1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는 윗것과 아랫것의 내용이 다른 거 같습니다. 윗것은 '창조과학자'에 대한 풍자가 맞고요(더불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양립가능하다고 보는 대중에 대한), 아랫것은 제 생각엔 진화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같습니다(물론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란 책의 저자는 여성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