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을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에 이어지는 또다른 워밍업이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던, '헤르메스의 빛으로' 연재 중에서 '니체 vs 빌라모비츠' 편을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어제 <비극의 탄생>과 함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잠시 뒤적거렸는데, 조만간 몇 마디 쓰게 될 듯하다(도서반납 기한 때문에라도). 분량은 많지 않으므로, 출간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이 문제적 텍스트를 이 참에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지...  

경향신문(07. 04. 14) [헤르메스의 빛으로](14) 니체 vs 빌라모비츠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비극의 탄생’을 출판한 해는 1871~1872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죽음을 논의한다. 그는 예술은 원래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의 이중적 결합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한다. 본래 두 요소는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사이인데, 주기적으로 화해의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화해의 기간에 탄생한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

따라서 비극은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인 무엇이다. 이 혼연일체의 무엇에 소크라테스라는 소피스트가 나타나 논리와 이성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내부 배신자가 등장해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비극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는 것이 ‘비극의 탄생’의 핵심이다.

그러면 비극의 사망에 대해서 니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무대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다름 아닌 에우리피데스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신들린 힘(Daimon)에 의해서 말이다. 에우리피데스도 아니다. 그도 실은 가면에 불과하다. 이 신들린 힘, 그것은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탄생한 다이몬이다. 이름하여 소크라테스다. 그리스 비극에 사망에 이르게 한 자가 바로(‘비극의 탄생’ 제12장)” 이 자, 곧 소크라테스가 저 술취한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광란의 굿판을 무대에서 추방하고,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펼쳐지는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리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미친 괴물”이 나타나자, 그리스 비극엔 아폴론적인 힘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고 니체는 천명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그 아폴론적 예술의 전형적인 파편이라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철학이 신학에게 (시녀로)봉사했듯이, 문학을 변증론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철학의 시녀로 만드는 이가 바로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다이몬의 압력에 눌려서 말이다.”(‘비극의 탄생’ 제14장)



‘비극의 탄생’이 출간되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은 니체와 동학이었고, 실은 4년 후배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1848~1931)라는 고전문헌학자였다. ‘(고전)문헌학의 미래(Zukunft der Philologie)’라는 문건을 통해서 그는 “(그런 의미에서라면)나는 기꺼이 디오니시우스의 제물이 되겠다.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이 욕의 대명사라 한다면, 나는 그 욕을 기꺼이 듣겠다”고 선언한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선, 니체가 뭐라 하든 워낙 든든한 후손들을 두었기에, 굳이 빌라모비츠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졸지에 비극의 살해 하수인으로 몰린 에우리피데스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사로, 곧 에우리피데스의 구원자로서 빌라모비츠는 자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세계를 자신이 본 그대로 재현한 작가이다. 거기에는 어떤 수치도(aidos)와 원한(nemesis)도 없다.” 세계 묘사 혹은 세계 재현에 있어서 ‘쿨’한 에우리피데스의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적”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는 “현대적 사유 방식의 예시자”이며, “구시대적 사고와 전통을 흔들고 일소하는데, 어떤 소피스트도 못해낸 일을 그가 해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자.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어느 날 남편이 새 장가를 가겠다고 한다. 배신이다. 이 여인은 아이들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다. 복수의 다른 수단도 있는데, 왜 아이들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냐고? 복수의 극대화를 위해서다. 남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복수이므로. 단순 원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비극으로 탄생한다. 비극인 이유는 다음에 있다. 곧,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울질 된다면, 그중 어떤 것이 더 힘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가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동가의 규범들이 부딪힐 때, 예컨대 사랑과 의무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작품은 던지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겪을 법한 모순적 상황, 딜레마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들 간의 충돌이 이야기 전개(플롯)의 중핵이라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비극임에 틀림없다. 물론 비극의 전경(前景)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이라는 특정 인물들의 갈등이지만, 배경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가치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이 힘겨루기가 인물 간의 적당한 타협과 화해를 통해서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라, 규범들의 전쟁이고, 이 전쟁의 끝에서 어떤 가치가 어떤 필연적 강제(Ananke)의 힘을 얻어 승리하는지와 이러한 종류의 싸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한 번 살펴 보자는 점에서 비극인 셈이다.

이런 종류의 고급 싸움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 싸움은 때때로 우리의 삶 안에 투영되어 서로 부딪히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니까. 그래서 싸움이 어디까지 가는지, 그 충돌의 끝점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싸움을 직접 겪는 것이 아니므로, 한 걸음 물러나서 관조(theorein)해봄으로써, 사태를 객관적으로 한 번 통찰해 보자는 것이다.

‘쿨’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그대로 재현해 보고, 그 사태의 배경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와 규범들의 줄다리기를 ‘쿨’하게 지켜보자는 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핵심이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을 혼연일체의 현장에서 보편의 관객으로 끌고 올라간다. 이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비극의 살해 하수인이라 보는 니체의 견해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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