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몇 년전부터 예고돼 온 그리스 원전 번역 '플라톤 전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우선은 지난주에 1차분 세 권이 출간됐고, 나는 그 중 한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이다. 수고한 역자들(정암학당 연구원)들과의 인터뷰 기사가 마침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문자 그대로 접수하지는 않더라도 이 서양철학의 '시초'에 대해서 그간에 우리말로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래저래 갑갑한 노릇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가져도 좋을 법한데, 사실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움직이는 지경을 거쳐서 '말문'이 트이는 경지까지는 아직도 장구한 여정을 남겨놓은 듯하다. 구두끈을 다시 묶어야겠다. 이제 각주도 제대로 달아가면서... 

경향신문(07. 04. 17) 그리스어 원전 ‘플라톤 번역판’ 나왔다

다들 알지만 제대로 읽지 못한, 아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서양철학의 주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대화편’이 그러하다.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정암학당에서 지난 13일 연구원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창연, 김재홍, 정준영, 김주일 연구원. 박재찬기자

때문에 지난주 나온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1차분 ‘뤼시스(강철웅 옮김)’ ‘알키비아데스 I·II(김주일·정준영 옮김)’ ‘크리티아스(이정호 옮김)’의 출간은 반갑고 값지다. 이 책은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 원전을 저본으로 하여 정암학당을 중심으로 뭉친 국내 학자들이 오랜 기간의 세미나와 연구를 바탕으로 펴낸 플라톤 번역서다.

앞으로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위서를 포함해 플라톤의 저작 43편이 5년간 순차적으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이는 정암학당 김재홍 박사의 말대로 “한국 인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 유입된 것이 길게 잡아봤자 1세기가 안됩니다. 그간 늘 일본어 혹은 영어로 된 번역본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지요. 텍스트로 삼을 한글 번역본도 없었고, 상호검증하기도 어려워 서양고대철학사 연구가 사상누각인 상태였지요.”



플라톤 역주사업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2000년 설립한 정암학당에서 주도하고 있다. 20여명에 달하는 연구원들은 철학을 전공한 석·박사들로 지난 7년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저작들을 읽어왔다. 이들은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아’의 교수법처럼, 그리스어 원전과 발제자가 준비해온 한글 번역문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엄격한 토론을 통해 검증을 하는 방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독자 대상은 고교생 이상으로 삼았다. 이정호 교수는 “총기 있는 고등학생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정암학당 정준영 연구원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전문용어가 아니라 당시의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함의를 담고 있지요. 철학적 사고의 밑바탕이 되는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역자들은 최대한 쉽고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데 역점을 뒀다. 동시에 작품 해설과 주석에 신경써 전문연구자들을 배려했다. 실제로 ‘뤼시스’ 편을 보면 에로스와 필로스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을 뜻하지만 육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와 상호성을 기반으로 사랑·우정을 주고 받는다는 의미의 필로스를 구분하기 위해 역자는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주석을 달아 설명을 더했다.

숱한 토론을 거치며 뜻을 다듬었지만 정리는 역자의 몫. 이 과정에서 번역어의 선택이나 복잡한 그리스어 문법에 맞춰 의미를 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교생 독자 수준으로 맞추려고 하는데 번역투의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리스어의 의미를 살리려고 하다보면 우리말 같지 않은 겁니다. 그러다 우리말에 맞추다보면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더라고요. 그 중도를 가는 게 어려웠습니다.”(김주일 연구원)



플라톤 전집은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부터 출간된다. ‘뤼시스’는 소크라테스와 뤼시스라는 청년의 대화로, 우정 혹은 사랑으로 번역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크리티아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로 이상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자들은 인문학 연구의 1차 자료가 되는 원전번역이 활발한 해외의 사례를 부러워하면서 “앞으로 이 전집이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윤민용기자)

07. 04. 16.

Платон. Избранное

P.S. 참고로, 러시아어 플라톤은 3권 짜리 전집 외에 다양한 형태의 선집들이 출간돼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 중 <국가> 등이 포함된 책과 15개의 대화편이 수록된 저럼한 선집 등이다(비교적 널리 알려진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이번에 나온 국역본 대화편들 가운데서 <뤼시스>와 <알키비아데스>는 빠져 있다).

Наследники Платона 

관련서들을 검색하다 보니까 존 딜론의 <플라톤의 유산>(2005) 번역본이 눈에 띈다. 원서는 2003년에 나왔고 250여쪽이니까 만만한 분량이다(원제는 'The Heirs of Plato: A Study of the Old Academy (347-274 BC)' 그러니까 플라톤의 제자들 얘기인 듯). 러시아어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인정받는 책인 듯하다.

플라톤 전집도 출간되는 김에 우리의 독자적 시각에 따른 연구/주석서들도 속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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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6 23:12   좋아요 0 | URL
지난주 교보에 깔렸더군요. 저도 한 권만 택한다면 <뤼시스>. :D

biosculp 2007-04-16 23:20   좋아요 0 | URL
깔리자 마자 3권 다 구입했는데, 가독성은 좋더군요.
제일 좋은것은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들고,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길때 그리고 꽉 잡을 때 뽀드득 소리가 첫눈 밟는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로쟈 2007-04-16 23:24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알키비아데스>를 먼저 골랐습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때문에...
biosculp님/ 서평은 좀 기다려봐야겠지만, 고전 번역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면 좋겠네요...

나비80 2007-04-16 23:31   좋아요 0 | URL
<국가-정체>만 아주 예전에 통독해둔 형편이라 욕심이 생깁니다.
이런 책들은 어디 진득하니 입원하기 전에는 읽기 힘들다는 자조섞인 농담들도 하더라구요. 이것도 로쟈 님 페이퍼에서 본 말인것 같기도 하고. ^^

2007-04-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7 01:20   좋아요 0 | URL
**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제가 좀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네요.^^;

자꾸때리다 2007-04-17 06:35   좋아요 0 | URL
호옷 나왔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1:00   좋아요 0 | URL
"‘국가론’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대화편’은 일부만 한글로 번역됐을 뿐더러 그나마도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영어판, 일어판 등을 바탕으로 한 중역본이다."라는 평가는 서광사에서 나온 박종현 등의 번역에도 해당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마늘빵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오홋. 이런 것두. 음...

biosculp 2007-04-17 11:17   좋아요 0 | URL
기자가 확인안하고 쓴것 같군요. 지금 원전 번역된것이 박종현번역본들과
한길사에서 나온 소피스테스, 정치가(김태경역), 철학과 현실사에서 나온 송영진번역의 파르메니데스(책이름은 플라톤의 변증법), 문지에서 나온 향연등이 있을텐데요.

코스모폴리스 2007-04-17 12:28   좋아요 0 | URL
biosculp / 한겨례 서평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습니다. "<국가〉를 비롯해 그의 저작 몇 편이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파편적·단속적이었을뿐더러 대개는 일어판의 중역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2870.html

로쟈 2007-04-17 15:01   좋아요 0 | URL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 전무했던 건 물론 아니지요. 몇 권 나와있습니다. 이번 '전집'의 차별성을 좀 내세우려다가 보니까 약간 오버성 멘트가 들어간 듯한데, 저는 '전집'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언제 다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biosculp 2007-04-19 18:44   좋아요 0 | URL
정암학당 운영자가 쓴 글인데요.
"전집 출간과 관련한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 중 학당 전집 출간이전에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본이 없는 양 보도 된 것은 전혀 잘못된 사실입니다. 발간사에서 밝힌 것 처럼 이미 우리나라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박종현 선생님 등의 노력으로 상당수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성취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전집 발간계획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대화편들의 원전 역본 출간 자체가 처음인 것으로 기자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학당에서는 해당 일부 언론에 유감을 표하였습니다."


로쟈 2007-04-19 19:07   좋아요 0 | URL
역시나 기자들의 '게으름'이 문제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