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단신으로만 뜬 출판기사들 중에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숨겨져 있었다. 독일 사회학의 거장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이 드디어 번역돼 나온 것. 하지만 이 책을 담당했던 출판사 편집자의 감회(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6221338000067) 외에는 마땅히 참조할 만한 리뷰가 아직은 눈에 띄지 않는다(본격적인 리뷰들은 다음주에 나오는 것인가?).   

대신에 참고할 만한 것은 작년봄 교수신문에 '니클라스 루만의 전성시대'란 특파원 보고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860407).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는 그 기사의 말미에는 "하지만 예정대로 올 상반기에 루만의 주저로 꼽히는 <사회체계>(1984)가 박여성 제주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그것이 루만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바로 그 책이 이번에 나온 <사회체계이론>이란 타이틀로 나온 것이다. 작년에 나온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나남, 2006)에 이어서 이번에 루만의 주저까지 번역/소개됨으로써 비로소 이 두 거장의 이론적 대결, 가령 표도르 대 크로캅 식의 '빅매치'가 한국에서도 성사된 셈.

잠시 알라딘의 소개를 옮기면 "빌레펠트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니콜라스 루만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의 이론>과 더불어 과학을 구성하는 가정 자체의 메커니즘의 공통분모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룬 책으로 꼽힌다."

'과학을 구성하는 가정 자체의 메커니즘의 공통분모인 커뮤니케이션'이란 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루만의 책을 하버마스의 책과 겹쳐 읽을 필요성은 감지할 수 있다. '루만이냐 하버마스냐'란 제목을 달았지만 사회를 보는 시각 자체는 체계이론과 비판이론으로 양분될 수 있고 두 사람은 각각의 이론적 포지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이것은 문학이론에서 '로트만이냐 바흐친이냐'로 변주될 수 있다).  

"루만은 이 책에서 일상언어를 사용해 종래 사회학에서 거의 성공하지 못했던 개념적 복합성과 상호의존관계를 서술한다. 그가 구상하는 이론적 단위는 한편으로는 사회학적 전통을 회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이버네틱스, 생물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및 진화론에서 얻어진 업적들에 연계하여 수많은 개념적 결정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버마스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국내에 덜 소개되거나, 후기의 담론들이 주로 소개되어있던 차에, 그의 이론의 핵심을 담은 이 책의 출간은 루만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줌과 동시에 사회학이라는 연장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 사회를 볼 것인가 고민하는데 그 폭을 넓혀줄 것으로 보인다."

Social Systems (Writing Science) Covercover for Art as a Social SystemReality of the Mass Media (UK Edition) Cover

<사회체계이론>의 독어본은 1984년에 출간됐으며 영어본은 1995년에 스탠포드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됐다. 아마도 그맘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영풍문고의 양서부에서 두툼한 하드커버의 영역본을 손에 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내려놓았던 기억이 있다(당시 가격으로 5만원쯤 했었나?). 이후에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사회적 체계로서의 예술>(영역본 2000) 등을 구했다. 이제 비로소 이론의 지류가 아닌 본류와 대면할 수 있게 되어 반갑긴 한데 그런 만큼 여러 모로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 책들을 다 언제 읽을 것이냐!..

07. 06. 23.

 

 

 

 

P.S. 루만의 책들은 앞으로 더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 많은데, 이미 소개된 책으로는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유영사, 1996)를 필두로 하여 <복지국가의 정치이론>(일신사, 2001), <현대사회는 생태학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가>(백의, 2002,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책으로 보인다), <대중매체의 현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등이 있다. 루만 사회학에 대한 해제로는 발터 리제 쉐퍼의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사상>(백의, 2002)과 국내 필자들이 쓴 <사회학의 명저20>(새길,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기타 아래의 책들에서도 루만과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읽어볼 수 있다. 특히 김덕영의 <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한울, 2003)에는 루만과 하버마스의 논쟁이 소개돼 있다.

 

 

 

 

P.S.2. 한편 러시아에서는 지난 2001년부터 니클라스 루만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아직 <사회체계이론>은 번역되지 않았고 대신에 <권력>, <진화>, <사회체계로서의 사회>, <대중매체의 현실> 등의 타이틀이 출간돼 있다(<대중매체의 현실>은 작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그 중 <권력>, <사회체계로서의 사회>, <대중매체의 현실> 세 권의 이미지는 차례대로 아래와 같으며(영역본의 이미지들이 시원찮아서 러시아어본의 이미지들이라도 띄워놓는다) 나는 앞의 두 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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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23 11:23   좋아요 0 | URL
루만은 또 처음 들어보는데요. 로쟈님 덕에 생소한 이름을 많이 접합니다. :)

로쟈 2007-06-23 11:42   좋아요 0 | URL
루만은 생소한 이름이 아닌데요.^^ 후기 저작 몇 권도 소개돼 있고...

마늘빵 2007-06-24 00:4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거기까지 관심이 미치지 못했나봅니다.
하버마스도 사실 이름만 많이 들었고, 그의 주저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 무슨 말을 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

yoonta 2007-06-23 17:1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루만의 주저가 번역되었군요. 반가운 일이긴 한데 역자가 박여성씨라.. 흠.

로쟈 2007-06-23 18:56   좋아요 0 | URL
구성주의쪽 전공인지라 역자로서는 학문적 생애가 걸린 번역이 아닐까 싶네요.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고...

드팀전 2007-06-24 12:10   좋아요 0 | URL
대학다닐때 소개하신 <사회학의 명저>를 보고 루만을 처음 알게되었는데..^^
하버마스는 저희 교수님들이 워낙 좋아라들 하셔서...맨날 들었지만 '소통의 장' 이야기만 하셔서.어쨋거나 이름으로는 친숙한 그의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도 작년에야 국내 번역되었다니까 의외네요...유명했다는 <루만.하버마스 논쟁>을 <효도르 대 크로캅 대결>이라고 하니까 확 와닿습니다. 내용은 깊이 모르지만 말이죠.

로쟈 2007-06-24 12:46   좋아요 0 | URL
'고전' 번역이 더디 되는 건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니까요. 사실 요즘 강조/강요되는 것처럼 영어강의가 보편화되면 '번역' 자체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주 한겨레 북리뷰에서 영국의 지성사가 퀜틴 스키너(1940- )의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주의>(푸른역사,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번역본이 저자명까지 집어넣어 제목을 만든 것은 다분히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2006)을 의식해서일 텐데, 책 자체가 그러한 의식하에 씌어졌다고 한다. 스키너에 대해서는 연초에 출간된 <탐史>(푸른역사, 2007)에 유익한 대담이 실려 있으므로 미리 참조해보는 것도 좋겠다(http://blog.aladin.co.kr/mramor/1052446).

  

한겨레(07. 06. 23) '새장 속 자유’ 넘어 진짜 자유 꿈꾸다

1987년 민주화 이전에도 사람들은 잘 살았다. 밥 먹고 돈 벌고 놀고 여행하는 데 큰 불편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시대 이른바 ‘친북 좌파’가 나라를 망쳐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3공, 5공 시대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게 ‘자유’였을까? 그 시절 경찰서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더욱이 감방 같은 곳은 선량한 사람들과는 무관한 범죄자의 세계로만 여긴 사람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한눈팔지 않고 산 사람들은 그때 자유로웠을까?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가치의 선전원’이었던 아이제이아 벌린(1909~1997)의 관점에 서면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벌린은 타인 또는 외부의 간섭, 강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 규정했다. ‘소극적 자유’다. 그것은 권리청원, 찰스1세의 처형, 공화정 수립으로 이어진 17세기 영국혁명을 거부했던 토머스 홉스와 18세기 미국혁명을 부정했던 제러미 벤담이 일찍이 역설했던 자유론과 일치한다. 왕당파와 절대주의 지지자들의 자유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선한 왕이 지배했던 고대왕국의 신민이 21세기 민주국가 시민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을 수 있다.

벌린이 1958년 옥스퍼드대 사회정치이론 강좌교수 취임강연에서 그런 자유론을 설파한 지 40년이 지난 1998년 케임브리지대학 근대사 왕립석좌교수가 된 퀜틴 스키너는 취임강연에서 벌린의 자유론에 도전했다. 그가 지지하는 17세기 영국혁명 때의 공화정 의회파 저술가들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선 “부당한 간섭 없이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유인이 아니어도 특정한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예컨대 옛 로마나 미국 노예들도 드물지만 좋은 주인 만나면 즐거운 놀이와 휴식, 맛난 음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주인의 기분이나 생각이 바뀌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그들이 누린 자유가 이처럼 전적으로 타인의 자의적 의지, 선의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한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따라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적극적 자유’다.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도, 복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마음대로 만날 수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었으며,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뱉는 순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던 빅 브러더의 세계, ‘유신’ 독재 이후 군사정권에 고개 쳐들지 않은 대가로 얻은 자유가 진짜 자유였을까. 스키너에 따르면 왕이나 빅 브러더는 그들이 신민을 구속하든 말든 그 존재 자체가 자유를 자유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가 크게 진전됐다는 지금 사람들은 자유로울까? 벌린이나 홉스의 자유론에 따르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병실을 나올 수 없는 것은 자유를 누릴 힘이 없어서지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지금의 신자유주의시대에 극빈자나 사회적 낙오자, 소수자에게도 얼마든지 자유는 있다. 다만 그걸 누릴 힘이 없을 뿐이다. 정말 그들에게 자유가 있을까? 무한경쟁의 우승열패식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강자는 권력을 독점하고 약자는 가속적으로 더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처지에서 평등한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선 소수 강자, 상위 20%만이 자유롭다.

18세기 공리주의 등장 이후 ‘적극적 자유’론은 쇠퇴했고 자유가 아니라 국가보호 아래 안전과 행복 추구가 최선이라던 왕당파 홉스와 벤담의 소극적 자유론이 세상을 지배했다. 이 때문에 “자유에 대한 좀더 넓고 좀더 깊이 있고 무엇보다도 좀더 민주주의적인 생각이 대부분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게 스키너의 생각이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펴냄)는 바로 이 ‘시야에서 사라진’ 적극적 자유론, 공화주의적 또는 신로마적, 민주주의적 자유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좌파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간섭의 부재라는 의미의 개인의 사적 자유를 옹호”한 벌린의 자유론,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정전’이자 ‘무기’가 됐던 그 자유론을 넘어서서,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론마저 불온시했던 이 땅에선 친숙하지 않은 스피노자, 루소, 헤겔, 마르크스, 자코뱅, 좌파들의 자유론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영국 역사상 자유론을 둘러싸고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17세기 영국혁명 당시, 홉스와 벤담의 자유주의가 판치기 ‘이전의 자유’다.(한승동 선임기자) 

07.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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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란 아직 쟁취가 아니라 정의의 대상!
    from 쏠다의 펠트 2007-06-23 13:16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 보다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싶군요: 권리없는 자유는 부당하고 역량없는 자유는...

주말에 해야 할일은 미리 해치우기로 한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 23번째는 젊은 작가 한유주 편이다. 씨네21의 기사와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7. 06. 23) [작가와 문학사이](23)한유주-읊조리다, 태초의 시간을 향해

‘달로’. 한유주의 첫 소설집 제목이자 등단작 제목이기도 한 이 낯선 어휘는 한씨의 독특한 소설작법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달로, 달로, 먼 옛날이야기로, 어느 왕들의 무덤은 무수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끝이 없는 미로와 바닥이 없는 함정이 있다는, ……그런, 비정한 고대의 시간처럼, 달의 뒷면에는 어느 바다가 있고, 그곳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는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서, ……, 그는 몸을 세워 일으켰고, 장대를 손에 쥐었다. (중략) 그의 장대는 몽상을 걷고, 백일몽을 걷고, 환영을 걷고, 기억나지 않는 꿈들과 희미한 이야기들을 걷고, ……, 허공을 한 아름 휘돌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달을 배경으로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 느리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복문과 우리를 잠시 침묵과 어둠 속에 붙잡아두는 생략부호, 그리고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문장의 리듬감. 우리는 그저 이 문장들을 읊조리면 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현실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우리는 낯선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 그곳은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야만 도달하는, 이 세계의 ‘뒤쪽’이자 ‘건너편’이다.

‘달로’는 바로 태초의 신화적 말씀의 세계를 향한 한씨 소설의 어떤 지향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지향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씨에게 ‘달로’ 가려는 의지란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시간, 모든 매혹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에 다름 아니다. ‘달’이 태초의 시간과 옛날이야기의 세계라면, ‘로’는 그곳으로 가고자하는 작가의 바람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한씨는 시간을 거슬러 ‘달로’ 가려고 하는 걸까. 왜냐하면 이 ‘세계의 사진첩’에는 슬픈 일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파울 첼란의 삶과 시를 쫓아가며 쓴 ‘죽음의 푸가’에서 묵시록적으로 기록된 현대사의 비극은 지금의 문명세계에 대한 작가의 환멸과 그 세계의 변화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독문학 전공자답게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두서없이 배회하는 과정을 기록한 ‘베를린·북극·꿈’에서도 이러한 문명 비판적 독백은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과 슬픔이 한씨에게 태초의 과거를 향해 움직이도록 부추긴다.

한씨 소설이 탐색담의 성격을 띠면서도 자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개 탐색담의 주인공은 세계를 향해 바깥으로 나아가는 반면, 한씨 소설의 화자들은 스스로를 “어두운 방 한구석” “좁다른 페이지들 안”(‘그리고 음악’)에 유폐시킨다. 그래서일까. 고통스러운 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진술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이다. 마치 통각(痛覺)을 상실한 자의 고통에 대한 진술과도 같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 대한 진술은 사실 간접적이고 매개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란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세대에게 세계는 언제나 매개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떠돌던 인간을 한 곳에 정착하게 하고 인간들이 가족과 사회를 이룰 수 있게 한 ‘뼈의 시대’는 지나갔다. “단단히 맞물려 있던 뼈들은 헐거워져서” 이제 “유령의 가벼운 몸, 없는 기억, 한없는 시간……(‘뼈’)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사랑하고 기억을 기억하는, 혹은 두려움을 두려워하고 무서움을 무서워하는 유령이 된다. 그래서 마치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 비현실적으로 가늘고 긴 팔다리 때문에 무게감이 없는 듯한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이 유령들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계에 대해 경험하고 진술하는 한씨 소설에 특유한 어떤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6. 22.

P.S. 바흐친-모슨의 시학/산문학의 구도를 가져오자면 한유주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로 분류되어 마땅하다('시적인 소설'이요 '산문시'이다).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시간, 모든 매혹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바람"을 그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고통스러운 현대사에 대한 작가의 진술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이다. 마치 통각(痛覺)을 상실한 자의 고통에 대한 진술과도 같"은 이유도 마찬가지겠다. 아름다운 모든 것이 굳이 소설일 필요는 없다...

씨네21(07. 06. 15) [신진 여성작가 3인] <달로>의 한유주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언어가 미끄러진다. 허공을 맴도는 단어들, 의미에 정박되지 않는 문장들, 응집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문단들. 한유주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편하며, 종종 난독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고통스러운 체험이다. 문장은 읽어내림과 동시에 기억에서 휘발되기 일쑤고, 문단과 문장, 단어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해 읽는 과정을 거듭해야 한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달로>는 각각의 작품이 사실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잠언에 가까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로, 달로, 세계는 현재를 그대로 간수하려는 오랜 습관이 있다.”(<달로>)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죽음의 푸가>) 하나의 몸짓으로 수렴되지 않는 단어들의 윤무 속에서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들은 행간을 떠돌며 이미지의 맥박을 느껴야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을 하나 정도 짚어보자면 바로 자기분석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생각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쓰는 것이었다. 인과관계나 서사적인 요소로는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지금의 글쓰기로 이어진 것 같다.”

그래서 한유주의 글에는 우리가 흔히 소설에 기대하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매끈한 서사의 흐름에 독자를 흡입하는 대신, 역으로 몰입 자체를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이인성의 평을 빌리자면, “체질적으로 이야기에서 자유로운” 한유주의 작법은 넘쳐나는 “가짜 이야기들”에 대한 반작용의 지점에 있다. 전파를 타고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수신되는 메시지들, “세계를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하는 폭력적인 이야기들. 삶을 간결하게 재단해 틀에 집어넣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적어도 내 삶은 기승전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거기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지 않나. TV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뻔하면 쉽긴 하지만, 너무 설명을 하려 드니까.”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채워 넣는 것은 온전히 읽는 자들의 몫이다. 예컨대 <달로>는 우주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기억과 역사, 신화를 경유한 상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각자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을 정서를 환기하고, 촉발한다.

“달은 정말 흔해 빠진 상징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딱 하나의 달을 두고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이 있고, 각자 부여한 의미가 있지 않나.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독자들의 편지를 보니 그들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느꼈더라.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고.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가장 기쁜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말줄임표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빈 공간을 채워 넣을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일방향처럼 보이던 독백은, 백지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수신받기보다는 끊임없이 발신할 것을 촉구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탐닉했다는 한유주이지만, 등단은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문예창작론 수업을 듣던 중 기말과제로 소설을 완성하게 됐고, 친구의 권유로 문예지에 응모한 것이 바로 등단으로 이어졌다. “당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얼떨떨했다. 지금은 그래도 덜하지만,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작가라는 자의식도 거의 없었다. (웃음)”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스스로는 “남들이 새롭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렇지 않다”고 털털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내가 10년 뒤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를 곰곰이 자문하는 타입이다. 의미의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자신의 작품처럼, ‘작가’라는 타이틀의 무게보다는 글쓰기 자체가 주는 매혹에 더욱 관심이 많다.

“글을 쓰다보면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다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저 아, 내가 정말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지나갈 때, 그게 너무나 좋다.” 대학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아마도 졸업 뒤 “9시 출근, 6시 퇴근하는 직장에 취직해 밥벌이와 글쓰기를 병행”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작정이고, 운이 좋다면 대륙의 공기 속에서 첫 장편이 탄생할 것이다. “대단한 걸 써야지, 하는 마음은 없다. 그냥 쓰는 것뿐이다. 10년쯤 뒤에 누군가가 한명이라도 내가 쓴 책을 읽어준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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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6-23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고 싶어졌어요.
 

러시아의 문예이론가이자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바흐찐)의 <밀의 미학>(길, 2007)과 미국의 바흐친 연구자인 게리 솔 모슨과 캐릴 에머슨의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도 책소개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910803) 이 분야에서 근래에 출간된 가장 무게 있는 번역서들이다. 연세대학원신문에 이 두 번역서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바흐찐 소설론의 재검토'가 부제이다)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의 공역자이기도 한 최건영 교수이다(기사 말미에도 언급돼 있지만 필자의 책임편집하에 15권의 바흐친 전집이 하반기부터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왔다.

연세대학원신문(07. 06. 04) 시학(詩學)과 맞장 뜨는 산문학(散文學)의 출현

바흐찐 저작 출판과 재출판 붐
구간들이 대부분 절판된 상태에서 한동안 소개가 뜸했던 미하일 바흐찐 관련 저작들이 다시 번역 출판 붐을 맞게 된 것일까.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바흐찐의 소설론 모음집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는 쇄를 거듭하여 인문학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언어와 이데올로기』(푸른사상, 2005)와『도스또예프스끼 창작론』(중앙대출판부, 2003)이 새롭게 재출판 됐다. 전자는 1929년 러시아에서 나온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이 원제목이고, 후자는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1963년 출판된 바흐찐 도스또옙스끼론의 개정증보판이다. 라블레론(『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과 이번에 나온 『말의 미학』을 포함하면 현재 다섯 권의 한국어판 바흐찐 단행본이 유통 중인 셈이다.

『말의 미학』은 1919년부터 1970년대까지 바흐찐의 전체 시기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논문집이다. 기존의 소설론과 작가론(도스또옙스끼론과 라블레론)을 제외한 바흐찐의 중요 저작들을 드디어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바흐찐 초기의 저작 중 「행위의 철학」과「내용 소재 형식론」등은 빠져 있지만 「작가와 주인공」이라는 미완의 대작이 포함돼있다. 구체적 시공간으로 한정된, 즉 ‘신체화된 정신’이라는 측면의 인격에 관한 논의를 통해 사실상 부정신학적 종교론까지 촉발시키는 이 문제작은 비록 미완의 초고로만 남아 있지만, 기존의 대화성, 폴리포니 등으로 요약되는 바흐찐의 핵심사상을 종교적 인격론을 중심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기도 하는 문제작이다.

바흐찐 생존 시 본인 명의의 단행본으로는 도스또옙스끼론(1929, 1963)과 라블레론(1965)만이 출판되었고, 그의 사후 보차로프와 꼬쥐노프라는 두 학자가 두 권의 논문 모음집을 편집하여 각각 1975년 1979년에 출간한 바 있다. 『말의 미학』의 원저는 이 두 권 중 1979년에 나온 논문집으로(역자들은 이 책의 1986년판을 사용한 듯하다), 원제목은 ‘언어(예술)적 창조의 미학’이다. 여기에 실린 가장 길고 중요한 논문「작가와 주인공」(필자의 번역으로는 ‘작자와 작중인물’)은 1920년대 초에 집필된 것이다.

이 육필원고는 1979년 논문집이 출간된 이후 일부 단어들이 추가로 해독되고, 누락된 앞 장이 별도로 공개되어, 러시아어판 전집에는 최종적으로 바로잡은 ‘결정판’이 수록되었는데 이번 한국어판에는 그러한 보정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고, 역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해설에서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추가된 앞 장은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현재로서는 영어판으로 보완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영어판에는 그 논문 맨 뒤에 별도 항목으로 이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초기의 대작 「작자와 작중인물」
문예학의 이론, 혹은 작품과 창작에 관한 미학적인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작자와 작중인물」이 갖는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작중인물과 작자’라고 하는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닌 두 능동성의 만남으로, 일종의 미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그 접근 방법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바흐찐은 당시 미학의 지배적인 두 조류를 비판하고 있다. 미적 활동이라는 것을, 대상을 향한 감정이입 혹은 공통체험으로 해석하는 감정이입의 이론이 그 하나이고, 포르말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소재주의 미학이론이 다른 하나인데, 문제는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미적 가치를 한 개의 의식에 의해 내재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감정이입의 이론에서는 결국 작자의 부재가, 소재주의 미학에서는 주인공의 부재가 지적되어야 하는데, 이는 두 가지 경우 모두 미적 사건이라는 개념 자체가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최근까지도 문예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나타났던 문제들의 기저에 암초와 같이 상존하고 있었다. 사실 구조주의든 기호론적인 접근이든 할 것 없이 그 연구대상이 텍스트인 이상 이제는, 그 텍스트라는 장이 결국 ‘나와 타자’라는, 결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한번만 존재하는 사건(가치, 의미)의 관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함을 ‘바흐찐 이후(After Bakhtin)’의 연구자나 작가나 모두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바흐찐의 1950년대 ~ 1970년대 저작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저작을 90년대 전후해서야 접하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인 이 논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사실상 지금 막 접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상세한 편자 해제가 담긴 러시아어 원서 결정판이 최근에야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단일 의식에 근거한 모놀로그적 인식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대화의 원리를 내세우고 작품을 작자와 작중인물의 능동성이 만나는 장으로 파악하는 방법론은 이후 바흐찐 전 저작을 통해 여러 형태로 확장, 변주된다. 「생활의 언설과 시의 언설」(1926)이나 『프로이트주의』(1927)에서는, 언설이 ‘발화의 장’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검토되고,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에서는 악센트, 인토네이션, 화법(타자의 말)의 문제들이 원리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1929년 나온 도스또옙스끼론 초판에서는 바로 이 언설(言說)의 개념, 목소리의 문제를 도입하면서, 전권을 쥐고 있는 의식들의 대화가 만들어내는 폴리포니적 소설로서의 작품세계의 본질이 그려지게 된다. 이어 30년대의 소설론, 시공간론으로 가면 서술자, 타자의 말, 장르의 문제가 재검토되고, 40년대의 라블레론으로 가면 그로테스크, 카니발적 세계의 문제가 문명론적, 문화론적 스케일로 전개된다. 이렇게 바흐찐은 평생 전 저작을 통해, 현실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이데올로기적 기호의 차원에서, 근대의 독백적 세계인식을 비판하는 역동적인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바로 이 논문이고 이 논문에 이 모든 문제의식들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끝으로 이번 한국어판에서는 누락된, 이 논문의 맨 앞에 오는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이 글은 미래의 소설이론가 바흐찐이 서정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논하는 초기의 희귀한 단편 초고이다. 서정시에서는 작자의 영역과 주인공의 영역이 융합하게 되고, 작자는 주인공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기에 주인공은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고독하고 타자에게는 의식되지 않고 있는 듯한 외관을 표출한다는 지적은, 서정시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면이 있다 하겠다.



바흐찐의 산문학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러시아문학자 모슨과 에머슨의 1990년 연구서『바흐친의 산문학』의 한국어 번역은 기념비적인 연구번역으로 평가할 만하다. 홀퀴스트와 클락에 의한 전기 형식의 연구서와 함께 바흐찐 연구의 대표적인 저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책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도전적이다. 언어예술 작품을 포함하는 인류의 모든 예술형식론을 말할 때 마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는 ‘시학’이라는 용어와는 별도로, 일상의 산문적 언어를 소재로하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새로운 명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바흐찐의 소설론 출현 이후, 소설적 구축학, 언설(담론)의 유형학, 소설적 철학 등 여러 형태로 불리던 것을 두루 수렴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도 생각하게 하는 용어라 하겠다.

바흐찐 자신이 소설을 논하면서 ‘시학’이라는 용어를 ‘불가피’ 사용했던 사실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바흐찐을 응용해서 산문의 이론을 구축한 또도로프 같은 연구자가 ‘산문의 시학’이라는 표현을 ‘근사하게’ 사용한 것을 떠올려 볼 때, ‘산문학’이라는 용어는 매우 대담한 제안이라 하겠다. 게리 모슨이 이미 80년대 말부터 사용한 이 용어는 사실 그의 19세기 러시아 소설 연구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산문에 관한 접근 방법론적 측면만이 아니고 문화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현하는 개념으로, 그가 인문학과 똘스또이의 소설(특히「안나 까레니나」!)을 논하는 과정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바흐찐이나 모슨만의 의견은 아니겠지만 특히 그 두 학자에게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매우 커다란 소설적 우주라 하겠다. 바흐찐이 뿌슈낀이라는 ‘소설’의 행간을 읽으며 살았던 학자라고 한다면, 모슨은 바로 그 바흐찐의 행간을 읽으면서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그리고 체홉을 통해 자신의 ‘산문학’ 논의를 도출한 학자라고, 지난 수년간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강의하면서 필자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소설 연구의 ‘악동’이라고 불러야 할 모슨의 생각은, 그의 전 저작을 두루 살펴볼 때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러시아 정교의 종교철학, 그리고 상기의 세 소설가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 같다. 과학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과학적 논리와 같이 역사의 법칙이 설명 가능하다는 사상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의 논쟁사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바로 그러한 러시아 사상사의 주류에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체홉이 어떠한 소설과 어떠한 세계관으로 도전하고, 반박하고, 전복시켰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모슨 작업의 핵심인 듯하다. 바로 현재 이 순간의 무게를 논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가 존재하고, 결국 시간은 닫혀 있는 것인가 열려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으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의 대립을 요약한다.

우리의 관심이 인문학이든 소설연구든 영화나 기호학이든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역사성과 그 현재적 위력에 ‘맞장 뜨는’ 장면을 맛보는 것, 바로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독파에 도전할 가치가 있다.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어쩌면 인류역사의 모든 예술적 장르와도 다른 새로운 세계관과 세계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거창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왜 우리는 소설이라는 작은 언설에 이끌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이 책을 집어 든다면, 분명 모슨과 에머슨의 바흐찐 독해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알게 될 것이다. 국문학도들의 번역으로 그 용어 선택이나 해석에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가령 금년 말부터 출간이 시작되는 한국어판 바흐찐 전집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전집의 번역팀 모든 구성원에 커다란 타자가 되는, 연구번역의 모범이고 역작이라고 확신한다.(최건영/ 외국어문학부 교수)                                   

07. 06. 22.

P.S. 본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산문학'이란 말은 모슨의 독창적인 창안이다. 이 용어가 갖고 있는 '대담성'을 좀더 밀어붙이자면, 나는 문예이론의 패러다임이 '시학 vs 산문학'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건 세계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늬만 소설인(그래서 실상은 시에 더 가까운) 소설들이 주변에 많아지면서 '산문학'에 대한 이해와 음미가 우리에겐 좀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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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아버지가 무너졌다'"라는 동향 기사를 옮겨놓는다(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언제나 귀환한다! 아버지=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기사의 내용은 이미 지적되어온 것들이어서 새롭지 않지만 2학기 내내 한 독서모임에서 '아버지'란 주제로 <오이디푸스왕>부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까지 강의하도록 예정돼 있기 때문에 자료로서 챙겨둔다. 그러고보니 여름호 <문예중앙>의 특집이 '아비들의 변천사'이다. 강의준비하느라 손에 물 묻히지 않아도 되겠다...

동아일보(07. 06. 22) "한국문학, ‘아버지’가 무너졌다"

한때는 금기이고 규율이었으며, 그래서 저항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아버지’. 한국문학사에서 ‘아버지’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아버지가 요즘 젊은 작가들에겐 다른 의미다. 김애란(27) 씨가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도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달려라 아비’)고 썼듯, 최근 한국소설에서 ‘아버지’의 무게는 확 줄었다.



평론가 손정수 씨가 계간 문예중앙 여름호에 기고한 ‘오이디푸스 극장’에 따르면 우리 문학이 갖고 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바뀐다. 서정주 시인은은 ‘애비는 종이었다’(‘자화상’에서)고 식민지 시대의 정체성 문제를 드러냈고, 이문열 씨의 ‘남로당 아버지’는 분단 이데올로기 시대를 대표했으며, 1990년대 장정일 씨가 장편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신버지’(신격화한 아버지)를 무너뜨리려고 온 힘을 다했던 게 그간의 ‘아버지들의 변천사’다.

평론가 서경석 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둘러싼 서사가 우리 소설에 절대적인 우위를 점해 왔다”고 말한다. 가부장으로서 봉건시대를 지나 근대 이후 그 위엄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아버지의 억압은 여전히 존재했던 게 사실. 그렇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억압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 두고 김정현 씨는 소설 ‘아버지’(1996년)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상이 추락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지만, 요즘 소설에선 그런 안타까움마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아버지’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놓는 게 젊은 작가들의 경향이다. 아버지가 현실의 무게를 가지고 삶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 버리는 것이다. 한유주(25) 씨의 단편 ‘K에게’에서 화자는 자신의 존재와 연관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백과사전’을 찾는다. 김애란 씨의 ‘달려라 아비’에서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화자는 그 문제를 고민하는 대신 ‘반짝이는 야광바지를 입고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이문열 씨가 소설 ‘영웅시대’ 등에서 부재하는 남로당 아버지를 커다란 상처이자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데 대해 김애란 씨는 “아버지가 나에게 금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해 버린다.

심지어 박민규(39) 씨는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사라져 버린 아버지가 기린이 돼서 돌아온다는 극단적 설정을 내놓는다. ‘아버지’가 이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의미 없는 동물 같은 대상’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박 씨는 한발 더 나아가 단편 ‘깊’에서 아버지가 아예 없는 미래사회를 그려놓았다.

새로운 소설은 달라진 사회 현실을 반영한다. 아버지가 위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친구 같은 대상이 되면서, 소설에서도 이제 삶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손정수 씨는 “새로운 형태의 오이디푸스 구조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약화된 현실로부터 생산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현실을 드러내는 소설적 징후들”이라고 설명했다.(김지영 기자)

07.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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