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예이론가이자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바흐찐)의 <밀의 미학>(길, 2007)과 미국의 바흐친 연구자인 게리 솔 모슨과 캐릴 에머슨의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도 책소개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910803) 이 분야에서 근래에 출간된 가장 무게 있는 번역서들이다. 연세대학원신문에 이 두 번역서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바흐찐 소설론의 재검토'가 부제이다)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의 공역자이기도 한 최건영 교수이다(기사 말미에도 언급돼 있지만 필자의 책임편집하에 15권의 바흐친 전집이 하반기부터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왔다.

연세대학원신문(07. 06. 04) 시학(詩學)과 맞장 뜨는 산문학(散文學)의 출현

바흐찐 저작 출판과 재출판 붐
구간들이 대부분 절판된 상태에서 한동안 소개가 뜸했던 미하일 바흐찐 관련 저작들이 다시 번역 출판 붐을 맞게 된 것일까.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바흐찐의 소설론 모음집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는 쇄를 거듭하여 인문학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언어와 이데올로기』(푸른사상, 2005)와『도스또예프스끼 창작론』(중앙대출판부, 2003)이 새롭게 재출판 됐다. 전자는 1929년 러시아에서 나온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이 원제목이고, 후자는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1963년 출판된 바흐찐 도스또옙스끼론의 개정증보판이다. 라블레론(『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과 이번에 나온 『말의 미학』을 포함하면 현재 다섯 권의 한국어판 바흐찐 단행본이 유통 중인 셈이다.

『말의 미학』은 1919년부터 1970년대까지 바흐찐의 전체 시기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논문집이다. 기존의 소설론과 작가론(도스또옙스끼론과 라블레론)을 제외한 바흐찐의 중요 저작들을 드디어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바흐찐 초기의 저작 중 「행위의 철학」과「내용 소재 형식론」등은 빠져 있지만 「작가와 주인공」이라는 미완의 대작이 포함돼있다. 구체적 시공간으로 한정된, 즉 ‘신체화된 정신’이라는 측면의 인격에 관한 논의를 통해 사실상 부정신학적 종교론까지 촉발시키는 이 문제작은 비록 미완의 초고로만 남아 있지만, 기존의 대화성, 폴리포니 등으로 요약되는 바흐찐의 핵심사상을 종교적 인격론을 중심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기도 하는 문제작이다.

바흐찐 생존 시 본인 명의의 단행본으로는 도스또옙스끼론(1929, 1963)과 라블레론(1965)만이 출판되었고, 그의 사후 보차로프와 꼬쥐노프라는 두 학자가 두 권의 논문 모음집을 편집하여 각각 1975년 1979년에 출간한 바 있다. 『말의 미학』의 원저는 이 두 권 중 1979년에 나온 논문집으로(역자들은 이 책의 1986년판을 사용한 듯하다), 원제목은 ‘언어(예술)적 창조의 미학’이다. 여기에 실린 가장 길고 중요한 논문「작가와 주인공」(필자의 번역으로는 ‘작자와 작중인물’)은 1920년대 초에 집필된 것이다.

이 육필원고는 1979년 논문집이 출간된 이후 일부 단어들이 추가로 해독되고, 누락된 앞 장이 별도로 공개되어, 러시아어판 전집에는 최종적으로 바로잡은 ‘결정판’이 수록되었는데 이번 한국어판에는 그러한 보정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고, 역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해설에서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추가된 앞 장은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현재로서는 영어판으로 보완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영어판에는 그 논문 맨 뒤에 별도 항목으로 이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초기의 대작 「작자와 작중인물」
문예학의 이론, 혹은 작품과 창작에 관한 미학적인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작자와 작중인물」이 갖는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작중인물과 작자’라고 하는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닌 두 능동성의 만남으로, 일종의 미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그 접근 방법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바흐찐은 당시 미학의 지배적인 두 조류를 비판하고 있다. 미적 활동이라는 것을, 대상을 향한 감정이입 혹은 공통체험으로 해석하는 감정이입의 이론이 그 하나이고, 포르말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소재주의 미학이론이 다른 하나인데, 문제는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미적 가치를 한 개의 의식에 의해 내재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감정이입의 이론에서는 결국 작자의 부재가, 소재주의 미학에서는 주인공의 부재가 지적되어야 하는데, 이는 두 가지 경우 모두 미적 사건이라는 개념 자체가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최근까지도 문예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나타났던 문제들의 기저에 암초와 같이 상존하고 있었다. 사실 구조주의든 기호론적인 접근이든 할 것 없이 그 연구대상이 텍스트인 이상 이제는, 그 텍스트라는 장이 결국 ‘나와 타자’라는, 결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한번만 존재하는 사건(가치, 의미)의 관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함을 ‘바흐찐 이후(After Bakhtin)’의 연구자나 작가나 모두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바흐찐의 1950년대 ~ 1970년대 저작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저작을 90년대 전후해서야 접하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인 이 논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사실상 지금 막 접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상세한 편자 해제가 담긴 러시아어 원서 결정판이 최근에야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단일 의식에 근거한 모놀로그적 인식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대화의 원리를 내세우고 작품을 작자와 작중인물의 능동성이 만나는 장으로 파악하는 방법론은 이후 바흐찐 전 저작을 통해 여러 형태로 확장, 변주된다. 「생활의 언설과 시의 언설」(1926)이나 『프로이트주의』(1927)에서는, 언설이 ‘발화의 장’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검토되고,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에서는 악센트, 인토네이션, 화법(타자의 말)의 문제들이 원리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1929년 나온 도스또옙스끼론 초판에서는 바로 이 언설(言說)의 개념, 목소리의 문제를 도입하면서, 전권을 쥐고 있는 의식들의 대화가 만들어내는 폴리포니적 소설로서의 작품세계의 본질이 그려지게 된다. 이어 30년대의 소설론, 시공간론으로 가면 서술자, 타자의 말, 장르의 문제가 재검토되고, 40년대의 라블레론으로 가면 그로테스크, 카니발적 세계의 문제가 문명론적, 문화론적 스케일로 전개된다. 이렇게 바흐찐은 평생 전 저작을 통해, 현실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이데올로기적 기호의 차원에서, 근대의 독백적 세계인식을 비판하는 역동적인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바로 이 논문이고 이 논문에 이 모든 문제의식들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끝으로 이번 한국어판에서는 누락된, 이 논문의 맨 앞에 오는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이 글은 미래의 소설이론가 바흐찐이 서정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논하는 초기의 희귀한 단편 초고이다. 서정시에서는 작자의 영역과 주인공의 영역이 융합하게 되고, 작자는 주인공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기에 주인공은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고독하고 타자에게는 의식되지 않고 있는 듯한 외관을 표출한다는 지적은, 서정시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면이 있다 하겠다.



바흐찐의 산문학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러시아문학자 모슨과 에머슨의 1990년 연구서『바흐친의 산문학』의 한국어 번역은 기념비적인 연구번역으로 평가할 만하다. 홀퀴스트와 클락에 의한 전기 형식의 연구서와 함께 바흐찐 연구의 대표적인 저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책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도전적이다. 언어예술 작품을 포함하는 인류의 모든 예술형식론을 말할 때 마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는 ‘시학’이라는 용어와는 별도로, 일상의 산문적 언어를 소재로하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새로운 명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바흐찐의 소설론 출현 이후, 소설적 구축학, 언설(담론)의 유형학, 소설적 철학 등 여러 형태로 불리던 것을 두루 수렴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도 생각하게 하는 용어라 하겠다.

바흐찐 자신이 소설을 논하면서 ‘시학’이라는 용어를 ‘불가피’ 사용했던 사실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바흐찐을 응용해서 산문의 이론을 구축한 또도로프 같은 연구자가 ‘산문의 시학’이라는 표현을 ‘근사하게’ 사용한 것을 떠올려 볼 때, ‘산문학’이라는 용어는 매우 대담한 제안이라 하겠다. 게리 모슨이 이미 80년대 말부터 사용한 이 용어는 사실 그의 19세기 러시아 소설 연구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산문에 관한 접근 방법론적 측면만이 아니고 문화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현하는 개념으로, 그가 인문학과 똘스또이의 소설(특히「안나 까레니나」!)을 논하는 과정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바흐찐이나 모슨만의 의견은 아니겠지만 특히 그 두 학자에게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매우 커다란 소설적 우주라 하겠다. 바흐찐이 뿌슈낀이라는 ‘소설’의 행간을 읽으며 살았던 학자라고 한다면, 모슨은 바로 그 바흐찐의 행간을 읽으면서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그리고 체홉을 통해 자신의 ‘산문학’ 논의를 도출한 학자라고, 지난 수년간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강의하면서 필자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소설 연구의 ‘악동’이라고 불러야 할 모슨의 생각은, 그의 전 저작을 두루 살펴볼 때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러시아 정교의 종교철학, 그리고 상기의 세 소설가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 같다. 과학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과학적 논리와 같이 역사의 법칙이 설명 가능하다는 사상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의 논쟁사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바로 그러한 러시아 사상사의 주류에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체홉이 어떠한 소설과 어떠한 세계관으로 도전하고, 반박하고, 전복시켰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모슨 작업의 핵심인 듯하다. 바로 현재 이 순간의 무게를 논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가 존재하고, 결국 시간은 닫혀 있는 것인가 열려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으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의 대립을 요약한다.

우리의 관심이 인문학이든 소설연구든 영화나 기호학이든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역사성과 그 현재적 위력에 ‘맞장 뜨는’ 장면을 맛보는 것, 바로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독파에 도전할 가치가 있다.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어쩌면 인류역사의 모든 예술적 장르와도 다른 새로운 세계관과 세계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거창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왜 우리는 소설이라는 작은 언설에 이끌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이 책을 집어 든다면, 분명 모슨과 에머슨의 바흐찐 독해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알게 될 것이다. 국문학도들의 번역으로 그 용어 선택이나 해석에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가령 금년 말부터 출간이 시작되는 한국어판 바흐찐 전집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전집의 번역팀 모든 구성원에 커다란 타자가 되는, 연구번역의 모범이고 역작이라고 확신한다.(최건영/ 외국어문학부 교수)                                   

07. 06. 22.

P.S. 본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산문학'이란 말은 모슨의 독창적인 창안이다. 이 용어가 갖고 있는 '대담성'을 좀더 밀어붙이자면, 나는 문예이론의 패러다임이 '시학 vs 산문학'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건 세계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늬만 소설인(그래서 실상은 시에 더 가까운) 소설들이 주변에 많아지면서 '산문학'에 대한 이해와 음미가 우리에겐 좀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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