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소개한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을 어제 받았다. 이달말쯤 배달되는 걸로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배송되었다. 덕분에 나의 '가을'이 좀 일찍 시작되었다. 하긴 내일모레면 이미 '새학기'가 아닌가? 문학과 여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을 맡은지라 지젝의 몇몇 책들을 재독하며 정리해둘 필요성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느낌만으로 뭐가 될 리는 만무하고 책을 손에 잡을 여가를 그간에 갖지 못했다.

다급한 처지에 '요약정리'라도 미리 읽어두기 위해 펼쳐든 것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책의 4장이 '성차이의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한데, 조금 읽다가 곧 주마간산으로 뒤적거리게 됐다. 어제 서문을 읽으면서 번역본이 별로 미덥잖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원서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볼 만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이다. 그런 걸 몇 가지 지적하기 전에 먼저 번역본이 다소 무성의하다는 걸 꼬집고 싶다. 혹은 교만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게 아니라 그간에 출간된 지젝 번역서들의 제목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무성의/교만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역자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삐딱하게 보기>, <향락의 전이>, <까다로운 주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서명을 갖다 쓰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너의 증상을 즐겨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물어보지 못한>으로, <진짜 눈물의 공포>는 <진정한 눈물의 공포>로, <환상의 돌림병>은 <환상의 역병> 등으로 다르게 옮겼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대신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옮기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나는 두번 읽어봤지만 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역으로 범벅돼 있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도 제목이 참조된 걸로 보아 여기에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임의적인 것이다. 역자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도 국역본 제목인 <앙띠 오이디푸스>를 취하고, 버틀러의 책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도 제목을 그대로 갖고 오는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랜덤'이다.

그리고 인명 표기의 경우 'Lacan'은 가끔씩 '라캉'이란 표기도 나오지만 대부분 '라깡'으로 통일시키고 있는데, 그게 '원칙'이라면 'Foucault'는 왜 '푸꼬'가 아니라 '푸코'이고, 'Guattari'는 왜 '가따리'가 아니라 '가타리'이며, 'Althusser'는 '알뛰세'가 아니라 '알튀세'일까?(그런 한편으로 '쥬디스 버틀러'는 '쥬디쓰 버틀러'로 표기됐다.) 또 지젝의 동료이자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주요 멤버인 'Mladen Dolar'는 어떤 표기 규칙에 의해 '믈라덴 돌라르'가 아닌 '밀러던 돌러'로 표기되는 것일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냥 임의적이란 것. "모두가 번역자 맘이다!"

그러니 나의 참견은 좀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자의 맘 혹은 구매자의 맘이란 것도 함부로 무시할 건 아니라는 뜻에서 몇 마디 참견을 보탠다. 내가 잠시 들여다본 페이지들에 국한하자면, 먼저 133쪽에서 "그러나 그는 페니스(penis)와 남근(phallus)의 차이점에 대해 개의치 않기 때문에 종종 둘을 혼돈한다"라고 옮겼는데, 페니스/남근의 이분법을 택한 것은 역자의 권리이지만, '혼동한다'를 '혼돈한다'로 적은 것은 오류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역자 자신의 것이기도 해서, 분명 역자후기에서는 'enjoyment'를 '향락'으로 'pleasure'를 '쾌락'으로 번역했다고 설명해놓고 있지만 상당수의 'enjoyment'는 그냥 '쾌락'으로 옮겨졌다(가령 <까다로운 주체>의 부제인 '정치적인 요소로서의 쾌락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그런 차이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인가? 

"사실 지젝은 성 인식이라는 사회적 내용에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에서도 '성 인식'은 (좀 놀랍게도) 'gender identity'의 번역이다. '성 인식'과 '성 정체성' 사이엔 그래도 개념상 얼마간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는데, 역자는 그런 데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란 문장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한다는 표현은 "challenging the universal as non all"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non all'(흔히는 'not all'로 영역되는데)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옮긴 건 역자의 부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게 '무지'가 아니라 '부주의'인 것은 몇 페이지 뒤인 138쪽에서 "그러므로 이것은 여성적인 전부가 아닌 것(non-all)을 나타낸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면 '무성의하거나 부주의하거나'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논증불능(undecidability)'(138쪽)인 것일까?('결정불가능성'으로 옮겨져야 한다.) "어떻게 실제로 경험된 보편성이 특수한 현실이 되는가라고 지젝은 묻는다."(133-4쪽)도 역자에게 묻고 싶은 문장인데, 원문은 "How, he asks, is the universal experienced as a lived, particular reality?"이다. "어떻게 보편성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현실로서 경험되는가, 라고 그는 묻는다."란 뜻 아닌가? 여러모로 영문학 전공자의 번역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다(교양과정부 학생들의 번역인가?).

 

 

 

 

사실 서문에서부터 몇 가지 암시/단서는 이미 주어졌었다. 저자 사라 케이가 '지젝 연구'의 창시자로서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에드먼드 라이트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서문은 시작되는데(엘리자베스 라이트의 책들은 언젠가 소개한 바 있다), "<지젝 독본>과 그들이 편집한 지젝에 관한 <문단>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미개척 분야의 서막을 열었다."(7쪽)고 한 대목에서 '문단'은 'Paragraph'란 원어가 병기돼 있지만 잡지명으로서 고유명사이기에 그냥 '패러그래프'지라고 해야 했다.

참고문헌에 나오지만, 라이트 부부는 패러그래프 지 24호(2001)의 슬라보예 지젝 특집호를 같이 편집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젝 독본The Zizek Reader>(Blackwell, 2001)과 함께 '지젝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지젝에 관한 <문단>"이라고 모호하게 옮길 게 아니라 "지젝에 관한 <패러그래프>지의 특집호"라고 옮기는 게 나았다.    

저자 사라 케이는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만 불문학자이자 중세문학 연구자이다: "중세 연구가로서 살아있는 사람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적어도 우리말 독자들에게까지 공유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 "비록 이와 같은 책을 쓴다는 바로 그 행위가 지젝 본인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라는 걱정이 들지만, 라깡은 그의 통찰력을 저지시키고 그로 인해 그를 망쳐놓으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8쪽)

인용문의 원문은 "Lacan resisted all attempts to arrest and therby stultify his insights."이고, '저지시키다'로 옮긴 'arrest'는 문맥상 이런 류의 '입문서'를 쓰고자 하는 시도를 가리킨다. 라캉은 그런 류의 시도들에 저항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라캉은 입문서를 쓰기가 어렵고(폴리티 출판사의 이 시리즈 목록에 '라캉'은 아직 포함돼 있지 않다), 견적도 잘 안 나온다는 얘기겠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 하지만, "그의 통찰들을 엉성하게 포획함으로써 결과적으론 망쳐놓으려는 시도들"이 어찌 저지들만의 것이겠는가.

애초에 폴리티 출판사측으로부터 지젝에 관한 책을 청탁받고 케이 교수는 자신이 저자로서 부적합하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공이 프랑스 중세연구인 나는 그런 일에 결코 알맞은 인물이 아니(었)다.(A French medievalist by profession, I might seem the last person in the world to take it on.)"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Which is precisely why, on reflection, I did so."

역자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고 옮겨놓았는데, 거꾸로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바로 그것이 내가 그 일을 떠맡은 이유이다." 왜? 뒤이어 <삐딱하게 보기>에서의 <리처드 2세> 인용을 저자가 재인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부적합하 듯 보이는 유리한 지점"이 지젝의 작업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를 식별해낼 수 있는 좋은 지점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니, 내가 읽기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는 토로는 저자의 것이 아니라 역자의 것이다. 그걸 독자의 반응으로 옮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가 그 일을 맡았던지." 이 책의 번역 또한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중세 불문학 전공자가 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06. 08. 26.

 

 

 

 

P.S. 덧붙이자면, 사라 케이의 입문서는 토니 마이어스의 책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뽐낸다. 국역본에는 옮겨져 있지 않지만, 원서의 뒷표지에 보면 조운 콥젝과 맬컴 보위 같은 저명한 정신분석/라캉 연구자들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보위는 "이번엔 지젝이 사라 케이에 관한 책을 씀으로써 보답하기를 기대해본다. 케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적었다). 좀더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 거듭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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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러시아 인터넷 서점(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서점은 '오존'이다)에 주문했던 책들을 소포로 받았다. 정확히 4주 정도가 소요됐는데, 내심 오늘 책을 받았으면 했는지라 배달된 책들이 반갑고 기특했다(그래서 이런 페이퍼까지 쓰는 것 아니겠는가). 내친 김에 러시아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늘어놓는다(아래 사진은 우리의 교보문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의 '돔 끄니기', 직역하면 '책들의 집').

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러시아책들은 대략 주문 접수 후 발송까지 2-3주의 기간이 소요되고 실제 배송에 8-10일 가량이 소요된다. 이번에 받은 책들은 8월 17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데, 8일만에 받을 수 있었으니까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발송까지 걸린 기간이 거의 20일이었다. 그건 한꺼번에 책주문을 할 경우 발송대기까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책들이 한두 권은 있기 마련이어서이다.

아마존 같은 미국서점과의 차이는 배송료를 건수가 아니라 책의 무게로 문다는 것. 그러니까 여러 권을 주문할수록 배송료 부담은 더 줄어든다. 이번에 주문했던 책은 모두 6권인데, 책값은 대략 55,000원이었고 배송료는 13,000원 가량이 들었다. 무거운 책이 없긴 했지만, 건당 9,000원 가량 하는 아마존의 배송료에 비할 바가 아니다.

Деррида за 90 минут

두 권의 전공관련서를 제외하면 오늘 받은 책들은 지난달에 검색하다가 발견한 데리다의 신간들과 벤야민의 책이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먼저 <90분에 읽는 데리다>(악트, 2005). '90분에 읽는 철학' 시리즈는 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절에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작년에 데리다편이 출간된 것. 호기심에 주문한 것이고 책은 거의 팜플렛 수준이다. 112쪽이고 가격은 1,500원 정도. 참고로, 폴 스트라턴의 원저는 지난 2000년에 출간됐다. 96쪽이고 가격은 7.95달러, 그러니까 7,000원 정도이겠다.

두번째 책은 드디어 러시아어본이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로고스알테라, 2006). 받아보고 나니까 소프트카바라서 별로 본때가 나는 책은 아니지만(아래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어쨌거나 매우 반가운 책이다. 256쪽이고 가격은 15,000원 가량이니까 상당히 고가의 책이다(우리와는 달리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의 책값이 시중에 비해 약간 더 비싼 경우가 많다).

Призраки Маркса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경우는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는 영역본(루틀리지, 1994)이 15달러 정도 하니까 이번에 나온 러시아어본이 얼마나 '고가'의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현재 품절상태인 국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은 당시 9,000원에 출간됐지만, 근간 예정으로 있는 새 번역본은 최소 20,000원 이상의 가격이 붙지 않을까 예상된다(한번에 좋은 번역본이 나오지 않으면 이렇듯 이중으로 돈을 쓰게 된다). 우리의 책값이 싸다는 얘기는 이젠 먹히지 않을 얘기이다.

Маркс и сыновья

그리고 세번째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같이 나온 <마르크스와 아들들>(로고스알테라, 2006). 이 책도 거의 팜플렛 수준인데, 104쪽이고 10,000원이 좀 안되는 가격이다(역시나 저렴하진 않다).

불어본은 2002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독역본(2004)을 대신 띄워놓는다.

   

한편, 이 책의 영어본은 (내가 알기에) 아직 단행본으로 나와 있지 않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 발표논문들을 마이클 스프링커가 묶어서 펴낸 <유령적 경계들(Ghostly Demarcations)>(Verso, 1999)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글 'Marx & Sons'가 원본 노릇을 하는 텍스트가 아닌가 한다. 

Происхождение немецкой барочной драмы

이제 끝으로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아그라프, 2002)(러시아어 제목은 <독일 바로크 드라마의 기원>이다). 이 책을 구함으로써 러시아어로 번역된 벤야민의 책들은 대부분 손에 넣게 되었다. 지난 2000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지만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얼마전 오존에서 발견하고 주문했던 것. 288쪽의 하드카바이며 가격은 9,000원 가량.

지난 1998년에 버소(Verso)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하드카바의 영역본은 42달러나 하니까 좀 비싼 책이다(중고 소프트카바는 주로 10달러선이다). 나는 영역판의 복사본을 갖고 있다. 듣기에는 벤야민 선집의 한 권으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아무려나 여기에 띄운 이미지들을 전부 국역본으로 자신있게 대체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06. 08. 25.

P.S. 당장 다음주부터 개강이어서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한 며칠이다(이건 마치 리허설도 제대로 못 끝내고 부랴부랴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의 처지 같다). 이번 가을에 내가 꿈꾸는 것은 미뤄두었던 데리다 읽기를 얼마간 보충하는 것이다. 그게 소위 여가이고 휴식이다. 생각만큼의 여가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지는 확실히 미지수이지만, 여하튼 서재의 이미지도 며칠전에 데리다로 바꾸었다. 평일엔 지젝을 읽고 휴일엔 데리다를 읽는다? 평일엔 푸슈킨을 읽고 휴일엔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물론 그 전에 고래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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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에 관한 얘기를 쓰다 보니까 문득 아침 신문에서 읽은 작가 박영한씨의 별세 소식이 생각났다. 한때 이문열만큼의 지명도와 인기를 누렸던 작가이지만 근간의 소식은 뜸했었는데,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병상에서는 "문학이 암보다 더욱 고통스럽다"고 토로했다니까(그만큼 치열했던 작가정신의 토로이기도 하겠다) 그가 건너간 세상은 문학이 없는,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이기를 기원하면서 그의 명복을 빈다.

아침에 내가 읽은 건 경향신문의 기사였지만 한겨레의 기사를 발췌해서 읽어본다.

한겨레(06. 08. 24) <왕룽 일가> <머나먼 쏭바강>의 작가 박영한씨가 23일 오후 6시30분 경기도 고양시 일산백병원에서 별세했다... 박영한씨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산 초량동 산동네를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3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부랑 생활을 경험했다. 스물셋 나이에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며, 베트남전 파병을 자원한다.

 

 

 



-1976년 서른 살 늦은 나이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중편소설 <머나먼 쏭바강>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나선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살린 이 작품은 곧 장편으로 개작되어 작가에게 제2회 ‘오늘의 작가상’을 안겨주며, 책으로 출간되자마자 10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당대의 화제작이 된다(*제1회 수상자가 한수산씨였고 제3회 수상자는 이문열씨였다). <머나먼 쏭바강>은 한국문학에서 베트남전쟁을 다룬 최초의 소설로 꼽힌다. 베트남전쟁의 국제정치학에 대한 엄밀하고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한국문학이 베트남전쟁을 형상화하는 데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안정효씨의 <하얀전쟁>과 황석영씨의 <무기의 그늘> 등은 <머나먼 쏭바강>의 바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머나먼 쏭바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방 한 칸’을 장만하기 위한 작가의 고투는 계속되었다. 덕소, 능곡, 김포 등 서울 부근의 도농 접경지대를 떠돌며 목격한 변두리 인생들의 삶의 세목은 <왕룽일가> 연작으로 갈무리되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우묵배미의 사랑>이 바로 이 연작에 포함된 작품들이다.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 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 근처에 있는 변두리 마을 ‘우묵배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연작들은 서울에서 밀려난 이주민들과 예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이 어울려 펼치는 ‘반농 반도(半農半都)’의 독특한 풍경을 돋을새김한다(*<왕룽일가>는 TV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우묵배미의 사랑>을 표제로 삼은 책의 후기에서 작가는 “인간을 생짜배기 알몸뚱이 그대로, 충분히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밑바닥 인간들의 삶의 진면목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드러내려는 박영한식 소설 작법의 표현에 해당한다. 박영한씨의 다른 작품으로는 <인간의 새벽> <장강> 등이 있으며, 2002년에 펴낸 <카르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됐다...

장선우 감독이 만든 <우묵배미의 사랑>(1991)은 그가 만든 가장 좋은 영화에 속하는데, 원작 자체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다. 한편, 타계 며칠 전에 작가를 인터뷰한 세계일보의 조용호 기자가 아마도 그의 생전 소식을 전한 마지막 기사를 쓴 듯하다. 카피라이트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마지막 육성을 보존하는 것도 그만큼은 중요하겠기에 부분적으로 옮겨온다(앞으로 서평이 아닌 인터뷰 기사들은 필요할 경우 옮겨올 예정이다).

세계일보(06. 08. 21) “문학으로는 안 돌아가… 그거, 암보다 더 고통스러워.” 1978년 <머나먼 쏭바강>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문단에 나와 도시 변두리의 삶을 다룬 <우묵배미의 사랑> <왕룽 일가> 등을 펴내며 한국 문단의 중추적 작가로 살아온 소설가 박영한(59·사진)씨. 그가 지금 위암으로 생사의 접경을 넘나들며 힘겹게 투병 중이다. 20일 전 일산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의사의 권유로 일반실로 내려와 진통제로 생을 버티고 있다.

-의사는 지인들에게 연락해 평소에 보고 싶었던 이들을 만나보도록 권유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병상에서 만난 그는 “퇴원하면 어떤 작품을 쓰겠느냐”는 질문에 암보다 더 문학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얼마나 문학의 길이 힘들었으면 흙빛이 된 얼굴로 메마른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문학을 증오할까.

-박씨는 2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위의 3분의2가량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그가 평소에 즐기던 술과 담배를 여전히 끊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통음과 하루 2갑이 넘는 흡연이 일과였다. 술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술, 그거 만만한 놈이 아냐. 괴로워.” 오랜 친구의 병상을 지키던 김영창(59)씨가 “이제야 철이 든다”며 농을 한다.

-병실에는 그가 투병 중에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던 인터넷 문학카페의 제자들 6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제자들이 든든하지 않느냐는 말에 “하나도 안 든든해”라며 일축한다. 그는 “처음에는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져버린다”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일일이 그들의 아이디를 호명했다. “네오, 똑순이… 가만, 너는 누구더라. 말하지 마. 내가 맞혀볼게…” 그는 제자들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고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제자들은 스승이 기적처럼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특유의 호통을 치며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기원하며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06.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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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4 20:46   좋아요 0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자림 2006-08-24 20:57   좋아요 0 | URL
앗, 오늘 신문 안 봐서 몰랐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암보다 더 고통스러운 문학"이란 말에서 문학을 대하는 고인의 치열한 장인 정신을 읽으며 숙연해집니다.

비로그인 2006-08-24 21:25   좋아요 0 | URL
마음이 아픕니다.

비연 2006-08-24 21:41   좋아요 0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푸른괭이 2006-08-24 23:24   좋아요 0 | URL
<머나먼 쏭바강> 재미있게 읽었고, <왕룽일가>는 어릴 때 티브이로 본 기억이 나네요. 요즘은 웬만하면 70, 80은 넘기는데, 안타깝습니다.
 

제목을 붙여놓으니까 무슨 이야기거리가 될 법도 하지만, '덧없는 행복'과 '섹스와 공포' 각각은 근간 예정인 책 제목들이다. 아침에 나오다가 우편함에 <문학과 사회>(2006 가을호)가 꽂혀 있길래 밥먹으러 갈 때마다 끼고 가서 여기저기 들춰보고 있는데(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대한 서평이다), 근간 소식을 전하는 문학과지성사측 광고란의 한 단락이 이렇다.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로 루소 사상의 현대성을 짚어보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고봉만 옮김)이 역시 9월초에 나올 예정이다. 또한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과 함께 2부작으로 집필한 에세이로, 기독교가 우리의 성(性)과 쾌락을 어떠한 방식으로 청교도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는지를 고대 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섹스와 공포>(송의경 옮김)가 오랜 번역 작업 끝에 10월경에 선보일 예정이다."

 

 

서지에 좀 밝은 독자라면 토도로프(1939- )의 <덧없는 행복>의 경우 이미 <환상문학서설>과 같이 묶여서 한국문화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1996년에 초판이 나왔고 작년에 판을 다시 찍었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억에는 영어(혹은 일어)에서 중역된 책이기 때문에 새로 깔끔한 번역이 나온다면 반가운 일이다. 영역본도 갖고 있는 김에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라고 해서(그 탓인지 <세상의 모든 아침>은 가장 먼저 번역된 키냐르의 책이다) 눈길이 갔던 작가 파스칼 키냐르(1948- )의 책들은 '키냐르 전문번역가'로 나선 송의경씨의 수고 덕분에 우리말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전공자에 따르면 키냐르는 '어려운' 작가군에 속한다). 그간에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만 사서 꽂아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섹스와 공포>가 출간되면 나란히 읽어봄 직하겠다(*2007년 2월에 책이 나왔다!).

 

 

특별히 <섹스와 공포>를 거명하는 것은 주제에 대한 흥미 이전에 재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러시어어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미지로 띄운 건 좀 고급스러운 판본이고 내가 갖고 있는 건 클래식 문고본이다. 참고로 키냐르는 러시아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막심네 가게에서 샀던가? 그런 까닭에 잊고 지내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10월이 오면 다시 만나게 될 친구...

 

참고로, 키냐르에 관한 약간의 전기적 사실을 옮겨오면, "1948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두 차례의 자폐증을 앓았고, 20대에는 68혁명의 열기와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다." '함께'? '밑에서'가 아닐까? 3-40년의 나이차가 나는데 말이다.


"1969년에 <말 더듬는 존재 L'etre du balbutiement>를 출간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하기도 했다. 1967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고 심사 위원으로 발탁되고 199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94년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현재 파리에 살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요컨대,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에 속하겠다. 미셸 투르니에 같은...

 

06. 08. 24.

 

 

 

 

 

 

 

 

 

 

P.S. 주문받은 원고를 마감을 놓치고도 미적대다가 잘 안 풀린다는 이유로 잠시 머리를 식힌다. 키냐르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오래전에 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1991)인데(제라르 드파르디유 부자가 출연했었다), 마지막 대사가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였던가?(시인 유하는 이를 패러디한 <세상의 모든 저녁>을 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오늘도 두 지인의 초상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세상을 뜨신 분들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갓 꿈이런가 하겠다. 덧없는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P.S.2. <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 2007)의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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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모스크바 통신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과 부조리극의 기하학'이란 제목으로 올린 글을 옮겨놓는다. 그해 9월 서울에서 몇 권의 책을 소포로 받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하여 예전에 써둔 걸 정리한 글이기도 하다.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오후에 후배가 다른 방 호수로 주소가 잘못 적힌 우편물 수령증을 (다행히도) 갖다 주어서, 구내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찾아왔다. 소식이 감감하던 다른 소포와 함께(알고 보니, 이곳 중앙우체국의 실수인지 배송카드에 수신자 방 번호를 빼먹은 바람에 2주 넘게 우체국 창고에 자고 있었고, 나는 엉뚱하게 ‘보관료’까지 물었다). 후배는 무슨 먹을 게 왔을까 봐 수령증을 건네주며 “오빠, 좋겠어요!”라고 했지만, 두 덩이 소포는 모두 책소포였다(매일같이 책을 사들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책소포까지 받는다!). 하나는 지인에게 논문 관련으로 부탁한 책 3권이고, 다른 하나는 선물로 온 책 2권이다.

 

 

 

 

선물로 받은 2권은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b출판사)과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이다. 책을 받고서 나는 약간 놀랐는데, 그건 책의 부피 때문이었다(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부피 있는 책들을 좋아한다).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쯤은 더 두툼했다.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고진의 책을 모두 갖고 있는 나로선 이번에 나온 책도 다른 책들과 비슷한 분량의 것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 ‘가라타니 고진 종합선물세트’는 가볍게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두 책은 본문 분량이 엇비슷했고 책값도 똑같았는데, (러시아 책값에 좀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는 부담스러울 만한) 상당히 ‘거액’을 들여야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이었다. 적어도 액면가로는 내가 모스크바에 와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러시아어판보다도 더 비싸다(나는 그 책을 헌책방에서 500루블, 즉 20,000원을 주고 샀는데, 이 가격이 현재까지 내가 산 600여권의 책 중에서 최고가이다). 거기에 물론 배송료도 만만치가 않다. 해서, 보내주신 분들의 ‘성의’에 (다시금)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데, 내가 당장에 답할 수 있는 일은 두 권의 책을 애써 읽고 그에 대한 소감을 띄우는 것이리라. 분량상, 그게 가까운 시일 안에 가능할 듯싶지는 않지만, 일단 시작은 하고 본다. 이 글은 그 시작이다.

저녁을 먹고 내가 잠시 읽은 건 <언어와 비극>의 4장 “도스토예프스키의 기하학”이다. 사실 유사한 내용을 이미 <탐구>에서 읽었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고진 이전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강의할 때면 그 부분을 빼놓지 않았다) 그에 대한 논문을 써볼 생각도 한 적도 있었다. 오래 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관련 참고문헌으론 수십 년 전에 <콘티넨트(Kontinent)>란 저널에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룬 논문 한편이 실린 바 있다(당시에 그 저널을 구할 길이 없어서 나의 ‘관심’이 흐지부지됐었다). 참고로, 내가 후기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구원의 변증법’이다.

고진의 논의에서 새로운 건, 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 즉 경제학비판을 비유클리드적인 세계, 폴리포니적인 세계에 평행한 것으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경제학에 대해서 다소 문외한인 나로서는 (고진의 강연을) ‘경청’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강연에 대한 ‘수업료’로 나는 나대로 생각했던/정리했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대학원 시절에 나는 '러시아 부조리극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다닐 하름스의 경우'란 리포트를 쓴 적이 있는데, 주로 하름스(D. Kharms)의 부조리극 <엘리자베타 밤>을 자세하고 분석하고 있는 본론을 제외한(*작품이 번역돼 있지 않기 때문에, 라고 적었었는데, 반갑게도 <작가세계>(2006년 겨울호)에 번역/소개되었다) 서론(“부조리극에서의 곡률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과 결론(“부조리극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교육적 의의”)에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편의상, 각주와 표 등은 생략한다. 참고로 2005년은 하름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글-읽기는 러시아 부조리극의 주요 작품들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상의 반영으로 보고자 하는 전체 그림의 한 조각이다. 소비에트 NEP(=신경제정책) 시기의 마지막 ‘좌파’문학그룹 오베리우(1927-1930)의 리더, 하름스(1905-1942)의 <엘리자베타 밤>(1927)과 베젠스키(1904-1941)의 <이바노프네 크리스마스>(1938), 그리고 이 ‘마지막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부록’과도 같은 아말릭의 <우리 아줌마는 볼로콜람스크에 산다>(1963)와 망명작가 브로드스키의 <대리석>(1982) 등에 대한 글-읽기가 전체의 나머지 조각들을 이룬다(*이 조각들을 다 맞추는 일 또한 나의 ‘하고 많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러시아 부조리극의 ‘원조’ 고골과 그의 <검찰관>(1836)이다. 이때의 <검찰관>은 19세기 풍자 드라마가 아닌 20세기 아방가르드 드라마로서의 <검찰관>이다. 1920년대에 메이어홀드-버전(1926년)과 테렌치예프-버전(1927년)으로 새롭게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메이어홀드의 공연은 러시아 연극사상 가장 훌륭한 공연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베리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경우, 고골과 오베리우는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들은 동시대 작가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깨동무하게 해주는 새로운 연극적 세계, 새로운 세계비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비유클리드적 세계상’이라 주장하고 싶다.

그러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글은 먼저 부조리극에서의 비유클리드적 곡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간략하게 전개한 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와 그것의 의의를 소개할 것이다(서론). 그런 이후에 하름스의 부조리극 <엘리자베타 밤>에 대한 ‘비유클리드적’ 다시-읽기를 통해 이 작품이 어떤 식으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본론), 결론에서는 보다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부조리극=비유클리드적 연극의 의의를 제시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개념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은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클리드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뚤어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비뚤어짐을 통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한번쯤 반성해보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고골부터인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은 자신이 ‘희극’이라고 명명한 <검찰관>의 이마에 “자기 낯짝이 비뚤어진 건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러시아 속담을 붙여놓고 있는데, 여기서 거울 밖(=현실)의 비뚤어진 낯짝과 비뚤어진 거울상의 대비는 우리에게 유익한 암시를 던져준다. 왜냐하면 부조리극의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세계야말로 순진한 관객/독자들이 질타하는 ‘비뚤어진 거울’에 다름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뚤어짐’의 정도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곡률’이라고 부른다.

비뚤어진 거울, 즉 곡률≠0인 거울은 동어반복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반영(reflect)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굴절(refract)시킨다. 그러한 굴절 행위를 통해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지각, 다시 말해서 유클리드적 지각세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거나 억지로 지워져 있는 어떤 굴곡들을 복원해낸다. 이때의 굴곡들은 한결같은 굴곡이란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영속성이 아닌 순수한 시간성과 유연성으로 되돌린다.



바로 그러한 세계가 비뚤어진 거울의 세계, 비유클리드적인 세계이다. 고골은 바로 이 곡률≠0의 세계를 러시아 문학에 도입한 작가이며, 나보코프의 말대로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문체(=스타일)에도 곡률이 존재한다”는 걸 입증한 작가이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푸슈킨의 산문이 3차원적이라면, 고골의 산문은 적어도 4차원적이다. 그는 동시대의 수학자인 로바체프스키에 비유될 수 있다. 로바체프스키는 유클리드를 뒤집어 엎어놓고 이미 한 세기 전에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발전시키게 될 이론들을 발견했다. 만약에 평행선들이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만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걸 밝혀놓은 것이다.”

두 가지를 지적하기로 하자. 먼저, 여기서 러시아 문학에서 푸슈킨과 고골의 문체적 전통을 3차원적/4차원(혹은 n차원) 세계의 대비로 본 나보코프의 견해는 비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고골의 계보를 따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몇몇 장식체 산문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조리극 작가들을 이 4차원적, 비유클리드적 작가의 계보 속에 넣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곡률≠0인 세계의 작가들이며, 고골은 그들의 원조이다.

다음, 나보코프는 로바체프스키란 이름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완전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가우스의 제자인 리만에 의해서이다(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 사용한 것은 리만의 기하학이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크게 보아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는 각각을 L-기하학(=로바체프스키 기하학)과 R-기하학(=리만 기하학)으로 구분해서 부르고자 한다. 그럼 이 두 기하학은 표준적인 기하학인 E-기하학(=유클리드 기하학)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먼저 이들의 내용과 차이를 정리해보기로 하자(*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얼마간 식견이 있는 독자라면 이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유클리드의 저서 <기하학의 원리>는 서구 문명의 전 역사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중의 하나이다. 이 기하학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2천 년이 넘도록 경탄을 금치 못할 대상이었으며, 수천 개에 이르는 유럽의 정교한 대성당들은 이 기하원리에 따라 축조되었다. 그리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은 일종의 종교가 되어, 그것과 다른 기하학을 얘기하는 이는 미친 사람이나 이단자로 몰렸다. 그러나 차츰 몇몇 수학자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와 씨름해오면서 평면적인 3차원 공간을 대상으로 한 이 기하학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품고서 새로운 기하학의 가능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빌미가 되어준 것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공준 중에서 제 5공준이었다.

공리 또는 공준이라는 용어는 자명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진리, 증명없이 수용된 진리를 뜻한다. 하지만 “평면 위에 놓여 있는 두 직선이 제 3의 직선과 만나고 한쪽 방향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은 방향으로 충분히 연장하면 그 두 직선은 만난다.”는 유클리드의 제 5공준은 제 1공준: “임의의 두 점 사이에 직선을 그릴 수 있다”나 제 2공준: “임의의 유한한 직선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등과 비교해 볼 때, 서술하기 복잡하고 다소 자명하지 않게 보인다.

평행선 공리라고도 불리는 이 제 5공준을 이와 동치관계인 명제로 다시 서술하게 되면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과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플레이페어의 공리)라는 것이 되는데, 이 평행선 공리가 다른 공리들과 달리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수학자들은 발견하였고, 따라서 그에 모순되는 명제를 채택하는 것과 새로운 공리 체계로부터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것이 적어도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수학자 사케리(1667-1773) 등은 이 제 5공준을 부정하고 ‘사케리의 사변형’을 내세우는데, 사케리는 A와 B가 직각이고 ‘변AD=변BC’인 사변형 ABCD를 연구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AD와 BC는 평행이고 각 D와 C는 모두 직각이지만, 제 5공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1. 각 C와 D는 모두 직각이다.
2. 각 C와 D는 모두 둔각이다.
3. 각 C와 D는 모두 예각이다.

여기서 2와 3은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반하기 때문에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케리의 가정에 근거하여 정합적인 새로운 기하학이 성립가능하다는 사실이 19세기에 로바체프스키(1793-1856) 등과 리만(1826-1866)에 의해서 발견된다. 이것을 각각 로바체프스키 기하학(또는 쌍곡 기하학)과 리만 기하학(타원 기하학)이라고 부른다(리만의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 2공준과도 대치된다). 이 두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리에 각각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로바체프스키 기하학: 평명 위에 주어진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에 평행한 직선이 적어도 두 개 있다.
-리만 기하학: 평명 위에 주어진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에 평행한 직선은 하나도 없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리는 세계는 보통 말하는 평면에 비유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세계, 즉 우리 감각에 가장 친숙한 세계에서 직선은 평면 위에 놓여 있는 직선을 말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그리는 세계는, 비록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리만 기하학을 채택했고 시각공간에 대한 한 연구는 로바체프스키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다소 상상적인 세계이다.

현재 수학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실은, 세 종류의 기하학과 관련된 세 종류의 세계가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서로 잘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모델의 표면을 이용하여 쉽게 그려볼 수 있다. 먼 거리에서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가짜 구(트럼펫 2개를 연결한 모양)와 진짜 구 그리고 평면들이 서로 혼동되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좁은 시야로 바라보면 이들은 모두 똑같은 평면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우리의 선조들이 곡면으로 된 지구 표면을 평평한 것으로 잘못 판단하였던 추론과정과 일치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유클리드는 현대인이 인식하고 있는 지구에 적합한 기하학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지구는 평평하다는 가정에 따라 건설하였다. 일상적인 용도(거리의 실측 등)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과의 차이는 거의 보잘것없는 정도라 하겠으나 문제의 소재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이 합리적이고 인간경험에 적합하다는 데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마찬가지 정도로 정확하게 물리적 공간의 성질을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은 물리적 공간의 필연적인 기하학은 아닌 것이다. 즉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지 결코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결론은 전통적 세계관뿐만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중대한 도전의 의미를 갖는다. 뉴튼 물리학에 대응하여, 이 세계가 인간의 오성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오고 근대의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한 칸트(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공간은 기하학의 종합적 판단을 선험적, 즉 보편적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만일 공간 그 자체가 경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하학도 선험성을 상실하게 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이것은 우리의 기하학에 관한 상식에 어긋난다. 따라서 기하학이 선험적이기 때문에 이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공간 역시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때 칸트가 말하는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며,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가 선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공간 또한 선험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유클리드 공간의 개념을 결코 경험적인 근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필연성이다.” 즉 그에 의하면, 공간은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체제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의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이며,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새로운 기하학을 제시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험적 공간에 대한 칸트의 확신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전혀 다른 기하학이 가능하며,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다. 이럴 경우,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창조의 산물이다. 신이 아닌 우리가 우주의 법칙을 부여하는 자이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서술이지 신의 규정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이교적 성격, 다신론적/무신론적 성격을 짚어볼 수 있다(*혹은 폴리포니적 성격).

공간의 유클리드적/비유클리드적인 이중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때까지 물리학은 기하학의 공리를 물리학의 자연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 자명한 기반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만일에 여러 가지 종류의 기하학이 수학적으로 대등한 것으로서 간주된다면 이 기하학 중 어느 것이 물리적 실재에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반드시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수학은 물리학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 여러 개의 기하학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적 형태를 제시한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 이후 물리적 공간과 가능적인 공간의 이중성이 인식되었다. 이때 수학은 가능한 공간을 시사하고, 물리학은 그 중에서 물리적 공간에 대응하는 것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수학은 인간 정신의 임의의 창조로서 출현하게 되었으며, 수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지시된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을 E. T. 벨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소설가가 저자이자 창조주로서 등장 인물의 성격과 대화 및 상황을 창조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수학자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수학적 체계가 근거할 공준을 고안해낸다. 소설가와 수학자 모두는 소재를 선택하고 취급하는데 환경에 의해 조건지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자연적이고 불멸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성격을 창조하거나 어떤 체계를 발견하도록 강요받지는 않는다.”(<수학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는 새로운 지적인 흐름을 형성시킨 점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것이 가져온 지적인 비약은 그보다 3세기 앞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는 거만한 지위에서 끌어내린 것처럼, 로바체프스키와 리만은 유클리드 공간을 기하학에서의 절대적 위치에서 끌어내렸다. 공간의 곡률이란 개념을 발명한 리만의 업적은 수학자들에게, 어떤 기하학도, 어떤 공간도 인간의 지각작용의 필연적인 양식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공간에 마지막 숨통을 끊음으로써, 19세기 물리학에서 ‘절대자’의 종말을 고하는 최초의 종소리가 되었다(*여기까지가 서론이다. 언급한 대로 본론을 건너뛰고 결론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러시아 부조리극의 원조는 고골이며, 로바체프스키와 동시대인이었던 고골의 문학세계에서부터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상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앞에서 우리가 이미 던진 것이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에도 L-기하학과 R-기하학의 서로 다른 종류가 구분되듯이, 고골의 계보를 따르는 비유클리드적 작가들의 문학세계도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3차원적 현실세계를 어떤 값으로 굴절시키느냐는 문제인데, 가령 곡률이 양수(곡률>0)인가 음수(곡률<0)인가에 따라서 변환되는 비유클리드적 세계상은 분명 서로 차이가 날 것이다.

나보코프는 고골의 경우를 두 종류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이해했지만, 사실 고골은 비록 두 종류의 양상이 다 드러내 보여주는 듯도 하다. 즉 수축적인 세계와 팽창적인 세계가 그에게서는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납작해진 사람들’(subman)의 테마는 분명 L-기하학(곡률<0)의 세계이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장광설과 과대망상은 R-기하학(곡률>0)의 세계처럼 보인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그의 세계는 상상력과 먹을 것이 남아도는 풍족한 세계이다. 예컨대, <검찰관>에서 흘레스타코프의 과장된 자기자랑과 허풍을 보자.

안나 안드레예브나: 정말로 운치가 있는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리겠죠?
흘레스타코프: 그야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테이블 위엔 수박이, 이를테면 7백 루블짜리 수박이 놓여 있습니다. 수프는 냄비에 담은 채로 파리에서 곧장 배로 가져옵니다. 뚜껑을 열면 김이 확 오르는데 그건 이 세상에서 비길 것이 못 되는 겁니다.(...)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받던 연봉이 4백 루블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백 루블짜리 수박은 대단한 허풍이 아닐 수 없다. 고골의 언어는 이 수박만큼이나 과장되어 있으며 문체적으로 풍족하다. 그래서 수박의 구 모양처럼 양의 곡률을 가진 세계이다. 즉 그의 세계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분명 180°보다 크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는 고골의 비유클리드적 세계를 극한까지 밀어부친 경우라는 점에서 문체적 적자(適者)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을 알고 있었으며(*<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참조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에서 2×2=4(합리주의)의 논리라는 것을 유클리드 기하학의 논리로 본다면 그가 주장하는 2×2=5의 인간적 의지/욕구의 세계는 그러한 의지와 욕구에 의해서 굴절된 비유클리드적 세계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단순하게 합리주의/비합리주의로만 이해하는 것은 미흡한데, 비유클리드적 세계에도 자체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욕망에도 법칙이 있다!).

 

 

 



또한 그의 후기 대작들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시간은 현실시간과는 관계없이 늘어나고 팽창하여 일상적인 시간에서라면 도저히 다 담길 수 없는 사건들까지도 담아낸다. 거기에 인물들의 과장된 감정과 장광설은 문학사에서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골-도스토예프스키의 계보를 R-기하학의 세계상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부조리극의 세계는 축소되고 납작해진 수축된 세계이다. 인물들의 말도 일상적인 경우보다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

이반 이바노비치 (의자에 뛰어오르며): 펜실베니아의 목동이여 영워어-어-하-아!
엘리자베타 밤 (의자에 뛰어오르며): 이반 이바-아-아-아!
아빠 (상자를 보여주며): 상자는 나므-으-으-으-로.
이반 이바노비치 (의자에서 내려오며): 아-아-안-녀-어.
아빠: 와아서 바-아-아.
엄마: 루-우-우-우-우!

언어뿐만 아니라 작품의 파토스에서 우리는 두 세계를 구별할 수 있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가 파토스(pathos)의 거울상인 바토스(bathos)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부조리극의 세계는 (새로 이름을 붙이자면) ‘하토스(xathos)’의 세계쯤이 될 것이다. 하토스의 세계는 웃음(유머)과 공포(경악)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고골이 <검찰관>의 마지막 1분 30초 동안의 정지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기대한 충격적 효과를 원조로 가지고 있다.

<검찰관>의 무대지시에서 특별히 이 장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주의사항: “배우들은 특히 마지막 장면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마지막 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쇼크 같은 것을 주어야 한다. 일동은 한 순간에 자세를 바꿔야 한다. 경악의 외마디 소리는 마치 가슴에서 터져 나오듯이 모든 부인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와야 한다. 이 같은 주의 사항이 준수되지 않으면 모든 효과는 없어질 수 있다.” 이런 효과가 유발하는 정서적 파토스는 잘 정의할 수 없는 x의 세계이고, 기괴한 웃음(xa xa xa)의 세계이다.

이미 우리는 서두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한 가지 이성, 즉 도구적/계산적 이성에만 맹목적으로 의지해온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과 비판의 뜻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굴곡을 지우고 평면화하며, 사고의 편익을 위해 곡선을 직선으로 대체하고, 세계를 엄격한 주-객관의 구별에 기초한 인식론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가져온 폐해를 우리는 여러 역사의 현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의하면, 이러한 근대의 근본과정은 세계를 상(Bild)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말은 이제 표상하면서 산출하는 행위의 총체적 상을 뜻한다. 이 총체적 상 속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에게 척도를 제공하고 원칙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존재자일 수 있는 입장을 마련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입장은 세계관으로 자신을 확실히 하고 분류하고 언표한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사육하기 위해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한다. 연구로서의 학문은 이런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한 형태, 즉 근대가 그 참여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속도로 자신의 본질 성취를 몰아치는 행로들 중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세계관들에 대한 투쟁과 함께 근대는 자신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가장 지속력 있는 국면에 접어든다.”(<세계상의 시대>)

여기서 모든 사물을 표상으로 만들면서 “모든 사물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사육하기 위해 무제한 폭력을 행사”하는 근대적 주체를 우리의 맥락에서 유클리드적 주체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산출한 결과는 그것의 폐해에 대해 눈감아주게 할 만큼 눈부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의 미망에서 깨어나 이 ‘당신들의 천국’의 세계에서 더 이상 지탱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적극적으로 항의해야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서인가?

가령 “m×n수의 무고한 다른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n명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이 가해져도(죽임을 당해도) 옳은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n과 m의 적정한 수치는 얼마인가?” 이런 유의 물음에 대해 잘 근거지어진 이론적인 대답이 존재한다고, 즉 이런 유의 도덕적 딜레마를 푸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R. 로티의 말을 빌면, 그들은 여전히 신학자나 형이상학자이다. 그런 사람은 인간이 존재하는 요점을 결정하며 동시에 책임의 우선 순위를 수립해주는,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어떤 질서를 믿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로부터 파시즘과 스탈린이즘 사이의 거리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알고리즘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라면 반지름이 r인 원의 둘레 C를 구하는 공식은 C=2πr로 간단하게 표시될 수 있지만, L-기하학에서는 아주 복잡한 수식으로 표시되고 R-기하학에서는 아예 공식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대하는 삶의 굴곡들이 낳고 있는 문제들은 이렇듯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고 정답을 가질 수 없는 문제들이다. 2×2=4라는 단순한 알고리즘 하나만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무지와 오만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가져왔으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을 제물로 희생시켜 왔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그러한 어떤 질서가 없다고 믿는 아이러니스트 지식인들이고 작가들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비유클리드적 지식인들이고 작가들이다. 그리고 부조리 작가들은 바로 그러한 아이러니스트 작가, 비유클리드적 작가의 대표적인 한 유형으로서 그 의의가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넌센스의 세계를 말하면서 그들은 센스의 세계, 상식적인 세계가 더 이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가르치고 폭로한다. 세계제작의 유일한 방법(the way)이 있는 것은 아니라 다양한 방법들(ways)이 있다는 걸 그들은 문학적 실천을 통해 예시한다. 그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개념,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훈육자이며 교육자이다. ‘다닐 하름스의 경우’를 통해 그러한 점이 제대로 지적되었기를 희망한다.



하름스는 “시간과 공간, 존재에 관하여”란 자신의 한 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세계의 존재의 문제를 놓고 그는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1.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통합적이고 동질적이며 연속적인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에는 어떠한 부분도 존재할 수 없으며 부분이 없다면 전체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존재하는 세계는 이질적이어야만 하고 부분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자기-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질적, 이종적이어야 하고 또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지만 반드시 부분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직선 L과 L 위에 있지 않은 점 P에 대해서, P를 지나고 L과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고집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적 세계관, 단의성의 신화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그와는 대비되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다. 부분(조각)들로 이루어진 세계,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장르와 문체들의 병치를 통해 이어적이며 다성적인 말들의 잡화상을 차려놓은 것이다(스탈린-기계에 대항하는 우리의 언어-기계들!) 이들 말들의 충돌과 불일치, 부조화 속에 진정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 리얼한 현실이 담길 수 있다고 그는 믿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러한 현실, 그러한 사회의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혼들’의 세계라는 고골의 예언적인 진단은 아직도 유효하다.



진정 살아 있는 삶의 세계가 우리 현실에 보다 밀착되지 못하고 극장의 무대라는 공간에만 한정되어 버린 것은 비단 아방가르드 작가들, 혹은 하름스만의 불행은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진정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모든 ‘좌파’ 지식인-작가들의 불행이며 비극이 아니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를 창문에 던지면 창이 깨진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직도 얼마나 적은 것일까! (구부러짐과 굽신거림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일까!)

강물은 오늘도 무서운 속도로 상류의 물들을 하류로 실어나르고
둔덕의 풀꽃들은 그림자 길게 휘어 달빛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은 휘휘 젓는 직선에 괴로워한다
등이 구부러진 과일들, 등이 구부러진 노인들, 등이
구부러진 황소, 야! 아예 온몸이 구부러짐의 시작의 끝인 시작의
둥근 공과도 같은 하루는 있는 것일까
-박용하, <구부러지는 것들>

04. 9. 9./ 06.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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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2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정말 노문과 대학원에서는 이렇게 시적인 (문장도 시적인, 또한 말미에 분석 외적 시도 인용되는) 레포트를 제출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노문과 수업을 청강해볼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노어를 못하지만;;;; 역시.. 대학원 수업은 무리이겠죠? ^^;;; )

마노아 2006-08-2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중간에 그림이 하나 안 보여요.

로쟈 2006-08-2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그냥 어느 과나 좀 튀게 쓰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죠...
마노아님/ 로바체프스키인데, 다른 걸로 바꾸었습니다...

yoonta 2006-08-25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칸트가 말한 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이었다는 이야기는 정확히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이야기한 칸트와는 반대되는군요.

님이 인용하신 이부분..

“공간은 기하학의 종합적 판단을 선험적, 즉 보편적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만일 공간 그 자체가 경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기하학도 선험성을 상실하게 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이것은 우리의 기하학에 관한 상식에 어긋난다. 따라서 기하학이 선험적이기 때문에 이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공간 역시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 인용문장에서 보시다시피 칸트는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지 선험적 ‘분석판단’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용하신 위 문장은 오독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근데 순수이성비판 몇쪽에서 인용하신것인지 궁금하군요.)공간이 경험적이지 않고 선험적이라는 것 그래서 수학도 선험적이라는 말하는 것이 칸트가 규정하는 기하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고진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할 당시 비유클리드기하학의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하더군요.(트랜스크리틱104~8쪽)

여기서 중요한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분석판단이 아닌 종합판단이라고 본 것인데, 분석판단 즉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져서 형식적 모순율만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 낼수있는 판단이 아니라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지 못하는 즉 모순율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종합판단인 것으로 수학을 규정했죠. 이것은 기존의 수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의미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그의 철학 전체는 근대적 이성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이성의 경계를 너머서는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특히 그는 그런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수학에 있어서의 분석판단적인 ‘공리’의 성격을 비유클리드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통해 규명하였던 것으로 압니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시,공간의 초월적 성격 즉 경험적이지 않고 경험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로 이것 역시 분석적인 수학적 형식의 가능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석판단의 경계를 너머서는 종합판단의 가능근거로 사용되는 것이죠. 다시말하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객관적 대상의 형식이 아니라 순수직관의 형식이라는 겁니다..수학은 그러한 순수직관의 선험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종합판단이라는 것이고요.

때문에 위에서 해석하신 칸트 인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제가 님글에서 재인용한 칸트의 문장 그리고..

“유클리드 공간의 개념을 결코 경험적인 근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필연성이다.”


라는 인용부분도 공간의 ‘선험성’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지 공간의 분석판단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죠. 님은 칸트적 의미의 선험성을 유클리드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칸트가 수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수학은 유클리드적이고 근대적인 어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의 선험성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어떤 것 혹은 경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경험이전의 순수직관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험성이라는 거죠.

이야기가 좀 장황하게 길어진것 같은데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칸트가 수학을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말을..


“공간은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체제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의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이며,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행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새로운 기하학을 제시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다.”

라고 말하신다면 칸트의 생각을 완전히 오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칸트는 고진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로바세프스키나 리만이 체계화 시켰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점에서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과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이고요.




로쟈 2006-08-25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을 다셨네요. 맞습니다. 옮겨놓으면서 미처 신경쓰지 못한 대목인데 잘 짚어주셨네요. 한데, 제가 페이퍼를 쓴 건 거의 10년전이고 당연히 고진을 읽기 전입니다(물론 2년전에도!).^^ 지금은 고진의 (새로운)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옛날엔 보통 칸트하면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절대적 시공간)을 연결시켰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칸트를 연구했을 리는 만무하고 당시의 상식적인 견해에 의존했던 것이니까 너무 염두에 두시지 않아도 됩니다(그리고 인용문의 출처는 백종현본이 아니라 최재희본입니다)...

yoonta 2006-08-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초월transcendental 철학이 가지는 비유클리드적 성격 특히 수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다라는 것에 대한 비판혹은 오해는 당대에(헤르더)도 그리고 후대에(러셀)도 이루어졌던 걸로 압니다. 결국 그의 철학이 가지는 비유클리드적 성격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였다는 것인데 그의 철학의 탁월함은 리만기하학과 괴델의 불완전성증명이 등장한 이후인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을수 있게 되는것 같아요. 칸트철학의 이런면을 지적한게 사실 고진이 최초는 아니죠. 백종현씨같은 경우도 하이데거와의 비교를 통해서 칸트철학이 가지는 제일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비판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칸트의 철학이 근대적 시공간을 개념화한것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는 그동안 얼마만큼 칸트철학이 대중들에게 잘못이해되어왔나를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6-08-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칸트론은 예전에 두어 차례 정리하다가 중단됐는데, 언제 시간내서 마저 정리해놓도록 하지요. 그때 한번 더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yoonta님도 거드시면 더 좋을 듯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