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이 부쩍 많아진 건 아니고, 그냥 몇 권의 평전 류들이 눈에 띄어서 정리해둔다. 당장에 구입하거나 읽을 책들이 아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탓에 몇 마디 '신소리'를 해두는 것이다. 여우처럼.  

첫번째 책은 '자유로운 여자, 삶과 전설'이란 부제를 가진 <루 살로메>(해냄, 2006)이다(가운데 표지는 작년 가을에 나온 러시아본). 저자는 잡지 <엘르>의 편집장과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등을 역임한 걸출한 여성 언론인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이다(지루의 책으론 <나는 행복하다> 등이 소개돼 있다). 원저가 2002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으니까 그녀의 유작이지 않을까 싶은 책인데, 루(1861-1937)나 지루나 모두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의 대명사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가 '루 살로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데, 230쪽 정도의 분량이니까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도'는 아니므로 단숨에 읽어볼 만하다.

책의 부록으로는 루가 자신의 '연인들'이었던 니체, 릴케, 프로이트와 교환한 편지들이 발췌돼 있는 듯한데, 이 또한 흥미로운 자료가 될 듯하다. '루 살로메'를 전설적인 여인으로 만들어준 이 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권의 책들이 나와 있다. 지루의 책이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면, 마저 소개될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절판된 걸로 나오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루의 책으론 <선택된 자들의 소망>(투영, 2000)을 기본도서로 들어야겠다. 소개를 옮겨보면, "'한 남자가 루와 정열적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9개월 후쯤 그 남자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다'는 말의 주인공인 루 살로메. 그러나 스스로 훌륭한 작가이자 정신상담가이기도 했던 그녀의 중편소설과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 광범위하고 신선한 살로메의 지적세계를 알게 한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은 그 중편소설의 제목이다. 책에는 루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나와 니체', '나와 릴케', '나와 프로이트'가 실려 있으므로 유익한 참고자료도 겸한다. 릴케 사후에 그녀가 릴케에 관하여 쓴 책 <하얀 길 위의 릴케>(모티브, 2003)는 아직 구할 수 있는 책이다. 릴케의 <소유하지 않는 사랑>(고려대출판부, 2003)과 짝이 될 만한 책이므로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루 살로메, 그리고 루와 릴케에 대한 짧은 설명은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여성>과 <커플>에서 읽어볼 수 있다.

두번째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1917- )의 자서전 <또 다른 나>(북앳북스, 2006)이다. 그의 책들은 "180여개국에서 5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 8천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까 이 '대중문학의 거장'은 '직업작가'들의 우상이자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의 소설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작품들이 워낙에 많이 드라마화, 영화화되었기에 '친숙한' 작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게다가 인상도 좋지 않은가?). 아래 사진은 1999년에 나온 시드니 셀던 기념 우표(시트).

소개에 따르면, "시드니 셀던은 약국 배달부로 일하던 열일곱의 나이에 자살을 결심하고, 이를 만류하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생애에서 가장 지독하고 처절했던 바로 그 순간의 회고에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나>는, 그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았던 시드니 셀던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취향이 다소 '고약한' 나는 그의 소설들보다 이런 자서전에 더 끌린다.

 

 

 

 

내게 이름이 친숙한 셀던의 책들은 <천사의 분노>, <악마의 유혹> 등인데, 요즘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은 <텔미 유어 드림>(북앳북스, 2000)인 모양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셀던의 책들은 자서전을 낸 '북앳북스'와 '문학수첩리틀북스'(셀던의 독자층이 주로 청소년인 모양)에서 거의 전담하고 있는 듯하다. 전담하는 만큼 고른 수준을 갖춘 양질의 번역서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해본다(청소년 권장 도서인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초인격심리학자 켄 윌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출판사, 2006). 지난 주 언론의 북리뷰란을 보고 알게 된 책인데, 켄 윌버와 그의 아내 트레야의 사랑과 아내의 (5년 동안의) 유방암 투병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 등이 담겨 있는 책이다.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로도 읽히지만(줄거리만으로도 딱 '우리 드라마'이다) 실화이며, 영성(靈性)학자 켄 윌버 입문서로도 적합해 보인다. 아래는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책에서 두 사람은 "특유의 방대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접근과 뉴에이지적인 접근 모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 심리학, 종교적 해석을 더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론 윌버를 '뉴에이지 사상가' 정도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혹 편협한 선입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켄 윌버'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김상일 교수의 책에서였다(김교수는 켈 윌버를 최고의 현역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수운과 화이트헤드>(지식산업사, 2001)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지식산업사, 2003), <한의학과 러셀역설 해의>(지식산업사, 2005) 등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러셀 역설과 과학 혁명 구조>(솔출판사, 1997)는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카오스와 문명>(동아출판사, 1994)은 좀 '허한' 책이었고.

 

 

 

 

네번째 책은 '영성'과는 다소 무관한 철학자 네그리의 대담집 <귀환>(이학사, 2006)이다. 지난 2001년에 출간된 <제국>으로 전세계 사상가에 한 차례 태풍을 몰고 왔던 이 이탈리아의 골수 좌파 철학자의 책들은 꾸준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혁명의 시간>, <혁명의 만회>, <전복적 스피노자> 등의 제목들만으로도 그의 철학적 주제가 자나깨나 '혁명'에 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바, 이 '혁명'은 맑스주의의 캐치프레이즈이면서 (이론으로서의 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대담 형식의 자서전에서 "네그리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요약하는 핵심어들을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따라가며 자신의 가족사와 성장 배경에 대해, 그에게 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의 자양분이 되었던 정치 격변기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네그리 입문서로 적합해 보인다.

국내 필자들의 네그리 입문서로는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와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가 있다. 전자는 무겁고, 후자는 가볍다(책의 무게가). 편한 쪽으로 구해잡으면 되겠다. 국외서로는 보론(Atilio A. Boron)의 <제국과 제국주의>(Zed Books Ltd, 2005) 정도가 신간이다. 160쪽 분량인데, 국내에 네그리주의자들이 많은(?) 만큼 벌써 번역중인 책인지도 모르겠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리뷰를 포함하고 있는 지젝의 책도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네그리의 시간'을 따로 내보려 한다면 참고하시길.

 

 

 

 

끝으로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1947-1990) 변호사의 일생을 다룬 안경환 교수의 <조영래 평전>(강, 2006). "조영래 변호사의 대학 1년 후배인 서울법대 안정환 교수가 5년여의 준비 끝에 펴낸 이 책은 고인의 사후에 나온 최초의 평전이다."(청소년을 위한 현대인물사 시리즈의 <조영래>가 있긴 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조영래를 통해 격동기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 있"고, "둘째, 조영래의 삶에서 서울대 법대가 차지하는 자리에 특별한 관심과 무게를 두고 있"으며, "셋째, '인권변호사, '공익변호사'로서 조영래의 활동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등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조영래가 보여준 열정과 치밀함을 감동적인 필치로 옮기고 있다"니까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의 증언자료로서도 의미가 있겠다. 

한편, 그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2001)은 전태일의 누이 전순옥 박사에 의해 영역되기도 했다. 'A Single Spark'(돌베개, 2003)가 그것인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영화의 영어제목이기도 하고). 그 영화에 나오는 교내 시위 장면 촬영 현장을 바로 옆에서 보던 기억이 새롭다. 박광수 감독의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공을 들였을 법한 장면은 60-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장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비인간적 노동환경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눈떠간다. 노동법에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 분신자살로 경종을 울린다. 1970년의 일이다."



엊그제 잠시 읽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저자는 전태일의 분신과 3년전 자살한 한 대학강사의 죽음을 비교하면서(그는 내 친구였다) '지식산업 사회'의 역군이라는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30여년전 '시다'들의 열악한 삶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굳이 그렇게 일러주지 않아도 다 아는 바이거늘, 꼭 그런 식으로 대놓고 얘기할 건 뭐란 말인가? 박노자는 한국인으로서의 '교양'이 아직 좀 부족하다. '너도 시다지?'라고 몰상식하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늘도 헐값의 '박음질'을 해놓고 보니까 괜히 부아가 나는군(이렇게 투덜거리면 그 친구도 웃어주곤 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06.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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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2 10:55   좋아요 0 | URL
지루&레비의 <남자와 여자>라는 대담집을 읽은 적이 있어요. 지루의 '살로메'는 아주 재미있겠어요.

로쟈 2006-02-02 11:20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오래전에 읽어본 적이 있는 책인데,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안되네요...

비로그인 2006-02-02 13:12   좋아요 0 | URL

춫현하고 퍼갑니당^^


로쟈 2006-02-02 18:08   좋아요 0 | URL
**님/ 평소대로입니다.^^

호랑녀 2006-02-03 09:42   좋아요 0 | URL
평소 목록보다 이번 건 더 땡기네요 ^^
일단 땡스투입니다.

돈케빈 2009-10-18 05:10   좋아요 0 | URL
켄 윌버의 주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중심 내용?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기적이란 무엇인가'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로쟈님 책을 더 좋게 읽었지요.
켄 윌버는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하고 책에서도 자주 인용합니다.
윤리적인 주장에서도 화이트헤드, 바이첵커 등과 비슷한 인상을 받습니다.
49년생으로 슬라보예 지젝과 동갑인 점도 흥미롭네요.
 

저녁에 아주 오랜만에 동창회 모임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하는데, 30분 정도 남은 자투리 시간에 잠시 작년 이맘때 생각이 났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써내려가던 모스크바통신. 그건 이렇게 시작했었다:

"예정대로 마지막 통신문을 쓰기로 한다. 지난주에 결혼이야기호모 레겐스(Homo Legens), 책을 읽는 인간이란 제목의 통신문을 더 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말년 휴가를 보내는 기분으로 그냥 쉬었다. 물론 지난 수요일에 모스크바에서 사들인 책들을 서울로 배송하는 중대사(重大事)를 치르긴 했다(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그러니 나름대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젬피라의 노래 다스비다냐(러시아어의 작별인사)를 듣던 2주 전부터 마음은 이미 모스크바를 떠나가고 있었다(안녕, 내가 사랑하는 도시여…”). 예정대로라면, 나는 모스크바에서 10개월 10일째를 맞는 날 한국행 아에로플로트(러시아항공사)에 몸을 싣게 될 것이다." 오늘 밤에는 그 젬피라의 라이브나 감상해야겠다(여러분도 한번 들어보시길 http://www.youtube.com/watch?v=vOTA1r9oUTM).

그리고, 모스크바. "며칠 전부터 모스크바의 기온도 제법 떨어졌다. 낮기온이 영하 15도 안팎이고 밤에는 18-20도 정도까지도 떨어지는 듯하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눈보라까지 치는 바람에 체감기온은 더 떨어졌었고. 모스크바의 겨울에 다소간 실망(?)하고 있던 차에 이번 추위는 모처럼 겨울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간혹 한국에서 맛보던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아니다. 수북하게 쌓인 눈들과 함께 찾아오는 추위라서 눈보라만 없다면 오히려 포근한 느낌마저 전해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건 곤란하지만." 물론 올해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영하 40도까지도 내려갔었으니!

사진은 내가 기숙하던 모스크바대학 본관 건물의 초저녁 야경이다. 오랜만에 대하는 '친숙함'이군! 아래는 정문쪽에서 바라본 모습. 스탈린 양식의 이 건물은 1949-1953년에 지어진 것이며 독일군 포로들이 대거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그리고 크레믈린의 야경. 모스크바에서 '열린음악회'가 개최되던 날 본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자주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놀이들...

이젠 기억 속으로...

동창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또다른 기억 속으로...

06. 02. 01.   

P.S. "어디라고? 강남역 8번 출구? 알았어. 그래 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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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한 페이퍼를 두 편 쓰는 것이 오늘의 일정 중 하나이다. 그게 단지 '하나'일 뿐이니 다른 일정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에 할일은 많고 갈길은 멀다(곧 도서관에도 다녀와야 하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두번째 텍스트 '벤야민의 이름'을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텍스트는 재작년에 읽고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글로 정리한 바 있다. 데리다의 벤야민 읽기에 대한 정리는 차후로 넘겼었는데, 대충 그 '차후'의 시간이 된 것. '법과 폭력'을 키워드로 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책들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해서 읽어나가고자 한다.

'폭력'에 관한 책들은 세상의 폭력만큼이나 많이 나와 있지만,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들은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나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 등이다. 만약에 더 여유가 생긴다면,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인류학 책들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겠다(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은 예전에 읽었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예외 상태> 같은 책들이 필독 목록이다.  

국역본 <법의 힘>을 읽으면서 내가 참조한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이다. 영역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Routledge, 1992)에 실린 것인데, 이 텍스트는 영어판 데리다 선집인 'Acts of Religion'(Routledge, 2001)에도 재수록돼 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데리다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정리하겠지만, '현지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않아서 일단은 텍스트의 문턱까지만 정리해두도록 한다('읽기 위하여'란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영역본의 경우 국역본 72쪽의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본문이고, 이 강의의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63-72쪽)은 미주로 돌려져 있다. 그걸 읽겠다는 얘기이다. 이 '서언'에서 데리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이란 제목의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왜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를 시도하는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해명을 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먼저,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령의 논리'에 들려 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 이상이고 살아있는 것 이상"인 이 유령의 논리 혹은 법칙은 (나치의 유태인 '청소'라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벤야민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의 텍스트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다.

(2)그리고 또 관심사가 되는 것은 벤야민의 특유의 언어관이다. 벤야민은 표상(=재현)으로서의 언어를 명명(=이름부름)으로서의 언어와 대립시키는데, 전자가 기술적, 효용적, 기호론적, 정보적인 차원에서 언어를 사고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명과 호명, 이름 속에서 현전의 선사 내지는 호출"을 언어의 소명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사상이 신들림 및 유령의 논리와 접합되는지 묻게 된다."(65쪽)

  

(3)벤야민의 폭력비판론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는 한편으로 형식적인 의회/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며 때문에 1920년대초의 반의회주의적, 반계몽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독재론>의 저자 칼 슈미트가 벤야민의 논문을 칭찬한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칼 슈미트에 관한 문장은 영역본에 빠져 있다).   

(4)벤야민의 이 기묘한 논문에서 대의(=표상)이라는 다면적/다의적인 문제는 그가 제시하는 정초적/보존적 폭력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는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하여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벤야민이라면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질문한다. "벤야민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데리다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의견에 따르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볼 때,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본다. 오히려 "표상의 언어에 대립하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나 시학의 복귀, (...) 그것들의 도래를 말하게 될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데리다는 1942년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벤야민의 1921년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텍스트로 읽겠다는 것. 그게 그의 취지이다. 그리고 이 취지가 놓여 있는 두 가지 맥락.  

(1)먼저, 데리다 자신이 '철학적 민족성 및 민족주의'라는 3년짜리 세미나를 기획하면서 '칸트, 유대인, 독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이미 1년간 진행했다는 것. 칸트에게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유대계 독일 사상가/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면서 데리다가 주목하게 된 것은 몇몇 유대인 독일 사상가와 비유대인 독일 사상가들 사이의 유사점들(analogies)이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이기도 하다)"(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누락된 부분)가 코헨이나 로렌츠바이크, 그리고 부분적으로 후설 등에 나타난다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니다(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지적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벤야민과 칼 슈미트, 그리고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텍스트들 간에 보이는 어떤 '친화성'이다.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70쪽) 이 대목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이는데(굵은 글씨 '적개심'이 빠져야 한다), 영역본을 인용하면 이렇다:

"Not only because of the hostility to parliamentary democracy, even to democracy as such, or to the Aufklarung, not only because of a certain interpretation of the polemos, of war, violence and language, but also becasue of a thematic of 'destruction' that was very widespread at the time."(66쪽)

구문상으로는 'Not only A, not only B, but also C' 형태이며, 'A나 B뿐만 아니라 C도'란 뜻이겠다. 여기서 '적개심(hostility)'은 A에 나열된 항들에만 걸리며 '해석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내가 본 불어본의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벤야민, 슈미트,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것은 (1)의회 민주주의,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개심과 (2) 투쟁(polemos)과 전쟁, 폭력, 그리고 언어에 대한 특정한 해석 (3)해체/파괴라는 주제, 세 가지인 것. 물론 하이데거식의 '해체/파괴(Destruktion)'와 벤야민의 '해체/파괴(destruction)'론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양차 대전 사이에 '해체/파괴'라는 주제가 거의 강박적인 수준이었다는 데 데리다는 주목한다.

(2)또 다른 맥락은 뉴욕 예시바 대학의 카르도조 법학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콜로키움(사진은 이 콜로키움에서 강연하는 데리다의 모습). (서문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법의 힘>의 제1부)라는 강연문을 읽어나갔으며, '벤야민의 이름'은 비록 낭독되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데리다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궁극적으론 '벤야민의 이름'이란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을 낳은 것은 벤야민 텍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나팔)처럼 울려퍼진다." 나중에 다시 반복되겠지만, 벤야민의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125쪽, 서명은 내가 집어넣은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을 따라가면,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Walter)과 '주권적인 것(die walten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 발텐발터 사이의 이러한 '유희'는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의 '논증적' 힘의 역설은 이 힘이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의 분리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71쪽)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고틀리히 게발트(신의 폭력)... 발텐데(주권)... 발터(벤야민)'라고 하여, 시적인 음성논리에 따르자면 '신의 폭력=주권=벤야민'이라는 유사 계열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유희'는 합리적/논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논증도, 어떠한 확실성도 산출할 수 없다." 한데, 역설적으로 '논증적(demonstrative)' 힘을 갖는다(이것은 '논증 아닌 논증'이기에 '역설적'이다) . 이때 '논증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게 하는 힘', 곧 (신비한) '설득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인지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이 분리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의 논리와 기표 논리의 분리이다. 가령 아래서 (A)의 번역문은 기의의 논리를 따른 것이고, (B)를 음역해서 읽을 경우 기표의 논리를 따른 것이 된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이름'이 갖는 효과는 낭독할 경우에만 발휘될 수 있다).  

(A)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것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

(B) Die gottliche Gewalt, welche Insignium und Siegel, Niemals Mittel heiliger Vollstreckung ist, mag die waltende heissen. Walter Benjamin.

벤야민 텍스트에서 이 두 논리는 서로 따로 논다. 그래서 유희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는 전혀 유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벤야민이 특히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논문에서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치들(고유명사들이야말로 이것들의 고유한 장소이다)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유희는 한편으로 의도된 것이면서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데리다의 본격적인 독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벤야민 텍스트의 이러한 면모가 포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데리다 텍스트의 입구이자 문턱이다(그리고 이 글의 출구이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인내심을 바닥내지 않았다면, 이제 다른 스타일로, 다른 리듬에 따라 벤야민의 짧지만 당혹스러운 한 텍스트에 대해 약속했던 독해를 시작해보자."(72쪽)   

06. 01. 31.

P.S. 데리다에 대한 또 다른 페이퍼는 시간관계상 다음으로 미룬다.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에 대한, 역자의 취향에 대한 낭패감과 유감을 담은 글이 될 텐데, 몇 마디 앞당겨 쓴 글은 조금 전에 날아가버렸다. 때로 신의 은총과 폭력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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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Se 2009-02-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퍼갑니다. http://cafe.naver.com/hanthese/38
 

  

 

 

 

지난주에 교보에 들렀다가 미술사 책 한 권과 함께 구한 책이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이다. 얼마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책인데, 책에 대한 흥미와 일말의 책임감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육체'와 관련한 독서계획을 급조했는데(급조한 제목은 '낯선 육체를 찾아서'),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문학과지성사, 2000),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 2003)이 가장 먼저 꼽은 책들이다.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낯선 육체>는 원서를 구하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원서를 갖고 있던 책들이다). 버틀러는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도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지젝의 재비판을 더불어 읽어볼 수도 있겠다. 다른 책들은 고려중이다.    

 

 

 

 

한데, 조금 유감스러운 것은 '육체'보다도 먼저 일부 눈에 띄는 오역들. 대개 책을 구하게 되면, 서문과 목차, 그리고 색인 등을 들춰보는데, <낯선 육체>의 색인에는 '유어세너, 마거리트'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다. '낯선' 이름이지만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면 'Marguerite Yourcenar', 즉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이다. 국내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세계사, 1995)으로 일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명망 높은 작가이고 이미 여러 권의 소설들이 번역돼 있는데, '유어세너'라는 건 좀 무례한 호명이다. 전문 번역가들이 우리말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데는 '전문가들'보다 나은 편이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종종 실수를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낯선 육체>의 원서를 구할 때까지(이번주 안으로 구해질 것이다) 먼저 <육체와 예술>을 읽어보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좀 실망스럽다. 저자인 'Peter Brooks'를 '피터 부룩스'라고 옮긴 것부터가 의아한 대목인데(이게 얼마나 갈망질팡이냐면, 겉표지/속표지에는 '룩스'이고 본문과 서지정보란에는 '룩스'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었다는 얘기이다. 하기야 발음상으로야 대수롭지 않은 차이이지만), 이런 경우 검색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이런 무신경이 오직 저자명의 표기에만 국한될 리는 만무하다.  

<육체와 예술>의 원제는 'Body Work'이고, 부제는 '근대 서사에서의 욕망의 대상들'이다. 국역본 뒷표지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 육체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왜 육체를 다루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육체와 의미, 육체의(에 의한) 글쓰기를 탐구하고 있다." 저자인 브룩스는 예일대학의 불문과 교수로서 <플롯을 위한 독서(Reading for the Plot)>이란 대표적인 저작을 갖고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권택영 교수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동서문학사, 1991; 문예출판사, 1995)를 참조할 수 있다. '육체'와 관련한 주제로는 권택영, <몸과 미학>(경희대출판부, 2004)도 출간돼 있다).

그런데, 국역본의 표지에는 유감스럽게도(?) 원서 표지에 실린 앙리 제르벡스(Henri Gervex)의 그림 <롤라(Rolla)>(위의 그림)의 상당 1/5 정도만이 사용되고 있다. 나는 첫눈에 번역 또한 그렇게 '에누리'한 수준은 아닐까 우려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첫페이지의 번역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지 못했다. 첫 페이지라는 건 1장 '서사물과 육체'가 시작되는 21쪽을 말하는데, 가령 이런 대목을 읽어보자.

"상상적 문학에 있어 육체는 항상 매혹의 대상이 되어왔다. 육체는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상하는 중간과정이며, 물질성을 넘어서는 의미의 생성 작업에 있어 타자로서 작용한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 생성의 매개가 되고 하며(예를 들어, 글을 쓰는 손 같은 경우), 심지어는 작업의 장소로도 사용된다."

이 대목의 원문: "In imaginative literature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 which,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 takes a stand outside materiality -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this living hand that writes), perhaps even its place of inscription."(1쪽)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본 인상으로 판단하건대, 국역본은 대개 '의역'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문장에서 'as an exercise of mind and will on the world'을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세상에 행사하는 중간과정'이라고 옮기는 것도 그런 사례인데, '중간과정'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임의적'인 첨가어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body'가 아니라 'signifying project'이다. 문장의 요체만 간추리자면, "[T]he body has always been a object of fascination, at once the distinct other of the signifying project and in some sense its vehicle..."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의미화 작업'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 즉, 육체는 의미화작업과는 무관한 타자이면서(의미화작업은 주로 '대뇌'에서 담당한다) 한편으론 그 수단이라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손(this living hand that writes)'이 바로 그 '수단'이다. 그리고 때로 육체는 심지어 '그 기입의 장소(its place of inscription)'가 되기도 한다. 육체에 뭔가를 쓰거나 새겨넣는 경우도 있으니까. 가령,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필로우북>(1995)이 좋은 예가 되겠다.

한국영화로는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에서도 '육체에 씌어지는 글자들'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았던 원미경은 80년대 초중반 여러 사극영화들에서 연기력 좋은 '육체파' 배우로 각광받았었다(<변강쇠>, <사노>, <물레야, 물레야> 등이 그녀의 주연작들이다). 이야기가 언제 또 '육체파'로 새버렸나? 

어쨌든 나의 요점은 <육체와 예술>의 번역이 '예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임의적인 의역/오역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주의해 읽어야 한다는 것.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에 '역자 후기'가 빠져 있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인데, 번역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알길이 없기에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육체와 예술>에 대한 읽기는 한동안 더 진행될 것이며 독후감은 나중에 따로 올리기로 한다.

06. 01. 31.

P.S. <의미를 체현하고 있는 육체>도 읽을 만한 번역이지만,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라캉의 '실재(계)'를 '실제계'라고 옮긴 것 등의 대표적이다). 서문에서 일인칭 주어 '나'를 '본인'이라고 옮기는 경우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이걸 오역이라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공통감각'의 부재를 탓할 밖에. 이 책에 대해서도 브리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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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페이퍼인데,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행을 돌이켜보면서 정리하기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보 여행이 아닌 기차 여행이었기에 내가 여정은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 떨어지자 역사에 상징처럼 서 있는 표트르 동상 앞에는 페테르에 있는 후배들이 마중나와 있었다(거의 동일한 역사 구조인데, 동상으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역사는 구별된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에는 레닌동상이 서 있다). 아래는 '모스크바'역의 야경.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때의 기록을 잠시 따라가본다: "며칠 전 소시지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났다는(그래서 못나온) 후배가 집에서 저녁을 준비해놓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네프스키) 거리와 바로 통한다. 넵스키의 밤거리는 보도블록 공사를 하느라 좀 어지러웠는데, 함께 간 후배가 '남대문 시장 같다'는 얘기는 하는 바람에 페테르의 문화시민들에게 핀잔을 들었다(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페테르를 보통 문화의 도시라고 지칭하며 장사꾼들의 도시인 모스크바를 보통 무시한다). 택시는 네바강을 건너서 바실리 섬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더 달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페테르의 거의 끝에서 끝까지 타고 온 셈이었다(나중에 버스를 타보니 종점에서 종점이었다)." 아래는 그 넵스키 거리의 이미지이다(이 거리를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고골의 '넵스키 거리'이다. 이 거리명은 '네바'강에서 따온 것이다). 흑백 사진은 1906년의 넵스키 거리. 이하에서는 여행기를 간추린다.

 

 

다음날 아침 늦게서야 식사를 하고 우리는 투어에 나섰다. 페테르부르크 초행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첫번째 목적지는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었다(참고로, 학생증을 소지하면 에르미타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이다). 소장 작품들을 전부 보려면, 5 7개월이 걸린다는 둥, 10년이 걸린다는 둥 하도 전설이 많은지라 우리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3시간만 돌기로 하고 후배의 가이드를 받으며 인상파의 그림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상파부터 둘러보기로 시작한 게 아니라,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인상파 그림들이 튀어나왔다. 19-20세기 프랑스 회화 방부터 돈 것이다(143-146번 방). 아래 사진이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는 에르미타주박물관이다.  

 

 

여행안내 책자인 'Lonely Planet'을 참조하면(여행안내서로서 훌륭하다. 에르미타주의 경우 각 방별로 소개돼 있다), 고호, 고갱을 비롯하여 이 방에 있는 모네, 드가, 르느와르, 세잔, 피카스, 등의 그림 74점은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훔쳐온 것이다(물론 원래 독일 것이 아니고, 독일은 프랑스에서 훔쳐왔다). 이 그림들을 러시아에서는 50년 동안 입다물고 보존하고 있다가 종전 50년이 되는 1995년에 숨겨진 보물들의 전시회를 개최했다(그러니까 이 그림들이 에르미타주에서 전시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안된다). 물론 '가진 자가 임자'라고 그 시점부터 소유권은 러시아로 넘어와 있다(프랑스도 훔쳐온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걸 가지고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서 이득이 될 게 없다). 하여간에 이 그림들을 포함해서 대표적인 전시물들은 에르미타주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두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3시간의 관람에서 이런저런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구경했지만(그리고는 <포켓용 에르미타주>란 책을 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푸슈킨과 동시대인이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가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이다('Portrait of Henrietta Sontag', 1831). 다음날 이곳의 전문가이드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니까 그림이 걸려 있는 방번호와 위치까지도 정확히 기억해내고 있었다(내심 자기도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하여간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학 1학년 때인가 방에 걸어놓았던 듯하다(내 방에는 선물로 받았던 시슬레의 풍경화와 함께 이 여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니 그녀는 잊혀진 여인이다. 그런데, 17년이 지나서, 먼 객지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그것도 오리지널로). 물기를 약간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여인을, 나는 앞으론 오래도록 잊지 못할/않을 것이다(그래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았다!). 우리가 걸작들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인연의 그림들이다.

 

여정을 조금 건너뛰어서 푸슈킨시로 향한다. 푸슈킨시는 원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이란 뜻)라고 불렸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여름궁전)이 위치하고 있다(이 궁전은 소설 <대위의 딸>의 결말 부분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궁전과 연결되어,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특수학교, 리체이가 위치하고 있는바, 푸슈킨은 그 학교의 제1회 입학생으로서 6년간의 요람기를 보내게 된다(입학 동기생은 30). 그걸 기념하여 이 차르스코예 셀로는 1937, 시인 사망 100주년을 맞아 푸슈킨시로 개명된다. 일정상 여름정원과 푸슈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 일행은 푸슈킨을 골랐다.  

이 리체이 건물 역시 지금은 푸슈킨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4층짜리 건물에는 학생시절 푸슈킨의 스케치 그림들과 함께 성적표 등이 보존돼 있고(4층에 있는 그의 기숙사방은 내 방보다 작았다), 박물관 가이드들은 푸슈킨이 앉았던 책상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얽힌 각종 일화들을 유머와 감동을 섞어가며 설명해준다. 하지만, 기대만큼 잘 꾸며진 박물관은 아니었는데, 푸슈킨이 1815 1월 상급반 시험장에서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제르자빈(1743-1816)을 앞에 두고 전해의 가을에 쓴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을 낭송함으로써 일약 2의 제르자빈으로 호명된 문학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인상을 더욱 굳게 했다. 문화적 신화는 러시아의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I. Repin, 1844-1930)의 그림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 속에서도 전승되고 있는데, 소위 러시아 국민문학이 탄생하는 장면이다(아래 그림).

 

 

푸슈킨시는 페테르부르크 남쪽으로 25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시내로부터 가는 데는 40-5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교외로 빠져나가서 20분쯤 차를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푸슈킨 동상과 함께 <푸슈킨>이란 표지판이 등장하는 데(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 동상으로 유명한 것은 러시아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다), 우회전해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림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이 푸슈킨시의 리체이 박물관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궁정 앞의 정원은 기대 이상이었다(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궁전 안은 둘러보지 않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을의 차르스코예 셀로는 각종의 조각상들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오리떼들이 뛰놀고 있는 호수의 정경이 눈길을 끌었는데, 푸슈킨이 <예브게니 오네긴>(1831)에서 자신의 시들을 물오리떼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바로 그 호수였다. 여제(女帝)의 궁전이 서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날 저녁은 네바강변의 일식집에서 보드카를 양껏 마셨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이 네바강에 한번 빠져봐야 한다고 손님을 독려했지만, 물에 빠지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여름이었다면 도전해봤겠지만).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저녁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오후 시간을 친구와 함께 도스토프예프스키의 행적을 찾아 다니며 보냈다. 먼저, 지난번에 얘기한 쿠즈네츠느이 5번가의 박물관을 찾아가서 1시간 동안 안내 테이프를 들어가며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방과 그가 생활했던 방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새삼스러운 그의 작품세계가 아니라 그의 생활이었다(아래 세번째 이미지가 도스토예프스키 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속기사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두번째로 결혼한 이후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1870,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을 전후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첫아이와 막내 아이는 일찍 죽는다(1868 2월에 태어난 첫딸 소피야는 그해 5월에 죽고, 1875년에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알료샤는 78 5월에 죽는다). 특히 알료샤의 죽음은 작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안나의 회고에 의하면, 남편은 곧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을 병적일 정도로 사랑했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묘사하는 절절한 장면이 나온다). 성격이 괴팍할 것 같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지만,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아빠여서 그는 언제나 저녁식사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당연히 낮에는 집필에 몰입할 수 없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11-12시부터 서재로 들어가서 아침시간까지 소설을 집필했다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그림인 라파엘의 성모상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선물한 것이라 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해서 느낀 건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할 수 없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 그걸 관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형이상학적 고뇌만을 흉내낸다고 해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과 염려이다. 그의 소설이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리얼한 소설이 되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작가의 성실한 아내, 안나의 책상에는 남편의 작업량과 원고료 등이 빼곡하게 적힌 가계부가 놓여 있었다(안나는 작가 톨스토이도 부러워한 작가의 아내였는데, 사실 톨스토이의 아내 또한 객관적으로 말해서 조강지처였다. 하다못해 그녀는 아이를 열셋이나 낳았다! 하여간에, 악처를 요구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작가에게는 처복이 좀 있어야 한다). 작가의 사후에 쓴 그녀의 회고록은(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최근에 안 것이지만, 그의 딸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쓴바 있다(좀 얇은 책이다). 아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나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란 큰 지도와 함께 같은 제목의 팜플렛을 샀다. 팜플렛의 말미에는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술학교에 다니기 위해 형 미하일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1837(그의 어머니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부터 1881년 사망할 때까지의 주소지들이 적혀 있는데, 모두 22곳이다. 1867 2월 안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14년의 결혼생활 중 8차례 주소지가 바뀐다(그러니까 7번 이사했다).

 

 

내가 박물관에 이어서 찾아간 곳은 결혼 바로 직전에 그러니까 1864년부터 67년까지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을 쓴 집인데, 이전 지명은 메샨스카야 거리의 알론킨의 집이었지만 현재의 주소는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 7번지이다. 이 건물의 벽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상 부조와 함께 <죄와 벌>의 씌어진 곳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몇몇 지명을 찾아 나섰는데, 정확한 주소를 안 가지고 있어서 약간 애를 먹었다. 사실, S. 벨로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2002)란 책에 주소들이 다 나오는데, 나는 방심하고서 그 책을 안 갖고 갔던 것. 팜플렛에서 대략적인 주소와 판화 그림만을 찾아가지고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소냐의 집과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은 카즈나체이스카야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 730걸음 떨어져 있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찾아나섰는데, 걸어서 간 게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가는 거라서 오히려 더 찾기가 힘들었다. 친구와 합의를 봐서 어느 집이겠거니 하고 찍었지만 맞는지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참고로, <죄와 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재의 주소를 벨로프의 책을 참조하여 밝히면 이렇다.

 

<라스콜리니코프 그라주단스까야 거리 1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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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노파 그리보예도바 운하 10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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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그리보예도바 운하 7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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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의 경찰서 발샤야() 포쟈체스카야 거리 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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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그런 것이 나의 공식적인 여행 일정이었다. 투어 첫날 카잔성당과 이삭성당 등을 둘러보고,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있었던 원로원광장(지금은 제카브리스트 광장)을 거쳐서 네바 강변의 청동기마상(푸슈킨의 <청동기마상>을 모른다면, 이 동상을 구경하는 일도 별 의미가 없다)을 구경한 다음에 넵스키 거리를 종주한 일 등은 따로 기록하지 않겠다. 아래 이미지가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의 1782년작 '청동기마상'. 오른쪽은 알렉산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가 그린 <청동기마상>의 삽화(1904). 에르미타주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청동기마상'에 대해서는 따로 그에 걸맞는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여정을 마무리하자.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서 내가 탄 모스크바행은 밤 9 55분발 열차였다. 플랫홈까지 친구가 배웅을 나왔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열차는 정시에 또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스르르 플랫홈을 출발했다. 밤기차라 침대차였는데, 내가 끊은 건 좀 싼 6인용이었다(역시 13,000원 가량). 그보다 비싼 건 꾸페라고 해서 4명이 한 객실에서 타고 가는 식이다. 6인용이라고 한 건 통로쪽으로 2층짜리 잠자리가 더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따름이고 이건 객차 전체가 그냥 다 개방돼 있다. 침대보 등의 침구는 30루블(1,200)을 주고 객차 승무원에게 사와서 잠자리는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자리가 위층이었는데, 대략 옆에서 하는 걸 보고 나름대로 처음은 아닌 듯이 행세하며 잠자리를 만들고는 누웠다. 8시간쯤 앉아서 가면 어떠랴 싶었는데, 눕고 보니까 역시 누운 게 편했다. 게다가 조명도 끄기 때문에 책을 읽을 형편도 아닌지라 나는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View along a River (still Sparrow Hill)

 

기차는 5 55분에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그라드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한 시간 전에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고 승무원들이 침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즉 자기 잠자리를 정리해서 다시 반납해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종착역에 이르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방송도 없었고 승객들은 알아서들 내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지하철을 타고 슬레두유샤야 스딴찌야-(다음역은-입니다)란 낯익은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비로소 모스크바에 안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몇 달 정이 붙은 지라 모스크바가 내겐 더 편한 느낌을 준다(사진은 모스크바국립대학이 있는 '참새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의 전경.하절기에는 유람선이 왕래한다. 본래 더 장쾌한 이미지를 축소할 수밖에 없어서 아쉽다). 남성명사인 페테르부르크와 달리 모스크바는 여성명사이다. 여자들은 화려한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더 좋아할 만하지만, 남자인 나로선 수더분한 모스크바가 더 맘에 든다. 모스크바(=여자)는 페테르부르크(=남자)의 미래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06. 01. 28-29.

 

P.S. 연휴가 지나면 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지 딱 1년이 된다.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에서의 추억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현재'가 아닌 '추억'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정도이다. 나이 먹는 일에 대해서 내가 별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주변의 눈총 속에서 그나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2006년의 오프닝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메인이벤트'로 넘어가야겠다. 아시겠지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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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6-01-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어린이를 학살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오싹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던져올리고 칼을 받친다든지, 아이와 얼굴을 한참 맞대다가 해맑게 웃기 시작하면 방아쇠를 당긴다든가 하는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장면인 것 같군요. 즐거운 설 선물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6-01-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로소지음'이라고 하는데,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6-01-3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들의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문제이지만, 채산성을 앞세워 절판시키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유유상종하는 수밖에요...

털세곰 2008-01-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위의 뻬쩨르부르그 도-끼와 "죄와 벌" 주변의 파노라마 사진들, 어디서 좀 더 크고 "장쾌한" 버전으로 구할 수 있나요...? 예전에 뒤져보다 저도 어디선가 보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수가 없네요. 러시아쪽 인터넷이 그 열악한 인터넷 사정에 비춘다면 컨텐츠는 정말 우리보다 풍부하고 압도적인데 이상하게 사진 등의 이미지는 확실히 약하더군요. 혹시 원본 옮겨오시면서 줄이고 하셨으면 원본 어디서 구할수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