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에 대한 강의를 위해서 쇼아 혹은 홀로코스트 관련서 몇 권을 훑어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책까지 몇 권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최호근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8년 03월 11일에 저장
품절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지음, 송충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4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8년 03월 11일에 저장
구판절판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3월 11일에 저장

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2008년 03월 11일에 저장
구판절판


2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쿠자누스 2008-03-17 01:23   좋아요 0 | URL
핀켈스타인를 제외하면 대부분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쓴 책 같네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란 중동에 이스라엘이라는 테러국가를 세우려고,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없으면 유대인은 멸종한다는 위기감을 전세계에 불어넣고 또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중동으로 보내기 위해서 영/미 찌오니스트들이 부풀린 이야기였지요.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의 중동 점령, 침략으로 인한 중동 분쟁을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하려는 그들의 비밀 계획은 9/11 테러를 계기로 세상에 드러났고요. 영/미 공군이 아우슈비츠로 달리는 독일 철도는 건드리지도 않고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천 여개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 가공할 파괴와 게르만 인종학살은 아우슈비츠의 범죄를 아이들 장난처럼 보이게 했으나 이런 역사는 독일에서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고 있습니다. (http://www.amazon.de/Brand-SPIEGEL-Band-35/dp/3877630359) 대한민국에서 번역되는 책들이 대게 쉰들러 리스트 수준의 신파극이니 이 바보들의 행진이 언제 끝날려는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03-12 17:54   좋아요 0 | URL
나치와 일부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그들의 비밀협상도).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테러국가를 세우려고" 동족 600만을 학살하거나 학살을 방조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책이 다 나와 있을 정도의 '음모론'도 음모론이 되는 건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테렌티우스 2008-03-12 08:3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최호근 박사님의 관련 책들은 아주 좋은 책들입니다...^^

http://www.alad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

이중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도 훌륭합니다.

로쟈 2008-03-12 17:49   좋아요 0 | URL
네, 의외로(?) 충실한 책이더군요.^^

2008-03-1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2 17:49   좋아요 0 | URL
네, 몇 권 추가했습니다.^^

쿠자누스 2008-03-13 00:17   좋아요 0 | URL
테렌티우스//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는 상당히 공들인 작품입니다. 영/미 식민주의자들이 북미 대륙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겨오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보았지요. 그러나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는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도 마찬가지지만 그 범죄의 국제적 배후에 대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공식사관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쿠자누스 2008-03-17 01:18   좋아요 0 | URL
로자// 정말 6백 만명이 학살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6천 만 명이 희생되었다 해도 문제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찌오니스트, 더 정확히는 나찌-Zionist라는 세력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요한 묵시록 2:9)이니까요. 그 둘을 혼동하도록 조작하는 게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 작업이 아닐까요? 보통 사람의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 범죄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일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 사변과 이스라엘의 연관 관계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3-13 00:36   좋아요 0 | URL
'신의 섭리'나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이나 제겐 모두 '신학적'으로 보입니다...

쿠자누스 2008-03-13 01:02   좋아요 0 | URL
로자// 마인드 컨트롤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요 미 의회에서 그 실체가 검증된 것이지요 ( There had been a number of earlier secret U.S. governmental projects to study mind-control... 출처는 http://en.wikipedia.org/wiki/MKULTRA) 정치심리학의 중요한 연구 분야이기도 합니다.


로쟈 2008-03-13 00:55   좋아요 0 | URL
제가 말씀드린 건 '찌오니스트의 마인드 컨트롤 작업이 아닐까요'하는 믿음입니다. 하기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분들도 제 주변엔 많으니까요...

쿠자누스 2008-03-17 22:42   좋아요 0 | URL
로자// 친일파가 조선 민족의 적이듯이 찌오니스트들은 유대민족의 적이지요. 그것을 숨기는 작업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위에 소개하신 번역본 목록이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8/03/16/0601080100AKR20080316003600071.HTML)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국내 수용 의미를 짚어보는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75). 랑시에르에 대해서라면 이미 '충분히'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한번 더 옮겨오는 것은 먼저 필자가 곧 출간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의 역자이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이런 기사들이 이미 나온 두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이다(책을 다 읽을 만한 독자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랑시에르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세번째' 책부터 손에 들기를 권한다.  

교수신문(08. 03. 10)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

작년에 우리는 랑시에르가 조만간 국내에 상륙할 것이라는 공습경보를 들었다. 올해 들어 이미 두 권의 책(『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이 출간됐고, 근간목록에 올라있는 책들만 해도 여럿이다. 하지만 앞서 번역된 책들에서 그의 사상을 맛보기 어렵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랑시에르의 저작들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감성의 분할』 부록을 참조할 수 있고, 그를 ‘불화’의 철학자, ‘평등’의 철학자로 잘 소개한 글들 역시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이정표를 굳이 더 세우기 위해 국내에 번역된 두 책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 ‘감성론’, ‘민주주의’ 등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로 하자. 랑시에르의 철학을 ‘감성의 정치’라는 기획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의 책들을 읽는 한 가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감성의 분할』의 원제는 ‘Le partage du sensible : esthtique et politique’이다. 이미 앞에서 적었듯이 우리는 그것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 감성론/감각학과 정치’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랑시에르가 말하는 ‘partage’는 사회 안/바깥의 개인들에게 각자의 몫과 자리를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 몫과 자리에 따라 사회에 참여하도록/배제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두 뜻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은 ‘나눔’이다. 또한 랑시에르는 이러한 나눔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감각하는 방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등이 ‘le sensible’이다. 이 단어는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는 감성보다는 문자 그대로 감각적인 것-감각되는 것과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

정치,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재편성
감각되는 것/감각할 수 있는 것을 나눈다니 무슨 말인가.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1권의 표현에 주목한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불쾌의 감각에 바탕을 둔 소리(phon)가 공적인 공간에서 하나의 말(logos)로 ‘들리지 않게’ 함으로써, 소리와 말,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눴다. 이러한 나눔에 따라 사적 공간에 유폐됐던 노예, 여성, 노동자들은 동물과 다름없는 소리만을 가질 뿐, 의미 있는 무언가를 논할 수 있는 말을 갖지 않은 존재로 지각돼왔던 것이다.

그의 대안은 명쾌하다. 자신의 말이 말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 자신의 활동이 오로지 사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던 자들-랑시에르가 ‘몫-없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바로 이 나눔의 방식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이나 활동이 말로 그리고 공통적인 것으로 셈해지고 나눠지는 세계를 연출해야 한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두 나눔의 방식이 충돌하는 바, 이를 랑시에르는 불일치(dissensus), 係爭(litige)이라고 이름 짓는다. 한 마디로 정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그에 대한 재편성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esthtique’은 단순히 미학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게다가 랑시에르는 ‘esthtique’을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론이나 예술론, 혹은 감수성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그 단어의 기원인 ‘aisthsis’―어떤 대상, 행위, 표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 감각적인 것을 겪는 방식―에 주목하는 동시에, 칸트가 말하는 감성적(미감적) 판단에서 그 단어를 끌어온다. 따라서 그것은 ‘감성(적)’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 요컨대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esthtique’은 ‘감성(적)’, ‘감성론/감각학’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랑시에르는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감성적 판단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주목한다. 감성적 경험의 주체는 어떤 목적에 대한 앎이나 욕구 충족을 향하지 않고, ‘무관심’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새로운 감성적 경험에 기초해 감각적 확실성의 범주로 간주되는 것들을 다시 짜는 것이야말로 ‘감성적 혁명’인 것이다.



19세기 노동자 운동 문서 속에서 10년 보내
랑시에르가 68년 이후 알튀세르의 이론주의와 결별하고 10여 년간 먼지 쌓인 19세기 노동자 운동 관련 문서고에서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 감성적 혁명이다. 구두수선공이 자신에게 권리상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신(뮤즈)에게 호소하며 시를 써내려가고, 소목장이가 철학을 하거나, 자유를 셈하는 대항 경제론을 만들어내는 등등.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자리와 기능에 무관심한 채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노동자들의 경험이다. 19세기 노동자 운동의 독특함은 인민의 삶을 위와 같이 감성화하려는 노력, 자신이 부르주아 못지않게 가진 감성적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경험 속에 있는 것이다. 감성화는 일상적인 지각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지각 방식의 틀 혹은 나눔 자체를 재편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성적 혁명이란 노동자들을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 안에(혹은 바깥에) 자리를 배정하고, 그들을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인’ 영역에 놓는 전통적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집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지배적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 반대로 19세기 초중반 노동자들은 밤에 더 많은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물꼬를 텄다. 밤에 안자고, 쓰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이자 이름인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시작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또한 밤을 새로이 전유함으로써, 시간의 짜임을 바꾼 것이다. 다른 예도 있다. 19세기 중반 노동자들은 사장들 역시 작업장 안에 들어올 때 모자를 벗으라고 요구했다. 이는 단순히 사장의 예절과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을 사적 공간이 아니라 공적 공간으로 다시 나누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해방은 시간과 공간의 나눔―칸트가 선험적 감성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감성의 정치다. 다시 말해 랑시에르에게 정치와 감성론(감각적인 것의 나눔, 재편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정치는 처음부터 감성적이다.

사회(학)적인 범주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감성적 경험은 탈정체화, 탈계급화라 불러 마땅하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계급의 소멸로서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급진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빈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빈자, 프롤레타리아는 중요하지 않은 자들, 셈해지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프롤레타리아는 본디 proles(자식, 아이)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이를 낳는 한에서만 로마에 봉사할 몫을 갖는 계층, 다시 말해 아이들을 통해서만 국가에 셈해지는 계층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 형상을 고대 그리스의 데모스를 다시 규정함으로써 발견한다. 그리고 데모스(인민)의 권력/역량이야말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실 그것의 적대자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이 정당성도 없이 쪽수로 밀어붙이고, 제비뽑기로 자리와 직무를 분배하는 정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이 역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이름도 자격도 없는 ‘아무나’가 공통의 장소에 침입해 (통치의 관점에서) 난장을 피우며 자신들의 평등을 보여주는 삶의 방식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늘 우연적이다. 반대로 이 통제할 수 없는 과잉과 초과로 가득찬 ‘민주주의적 삶’을 자본의 논리와 다름없는 무제한적인 사적 욕망의 추구로 돌리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바로 그 데모스를 정치판에서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자들의 과제였다.

랑시에르는 오늘날의 모든 사회, 경제적 혼란을 민주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선다. 정치의 시대는 끝났고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만 중요하다거나, 반대로 사적인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곧 국가적인 사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치’를 다시 발명해야 한다고 랑시에르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간 국내에서 프랑스 철학자들을 수입하는 방식은 다소 비슷했다. 가장 먼저 수입되는 것은 그들의 정치철학이며, 그것이 얼마나 현실 정치를 설명하는데 쓸모가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알다시피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랑스 철학은 말만 많고 알맹이는 없으며, 기껏해야 자본주의의 첨단에 있는 향락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고심해 만들어내는 것들, 특히 랑시에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10년 넘게 노동자들의 말과 글을 추적했다.

속된 표현으로 ‘날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타국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날로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랑시에르는 끊임없이 이론 체계만을 구축하는 존재론에 반대해 왔다. 오히려 그 때문에 아름다운 체계에 혹하는 이들에게 그의 철학은 간단하며 싱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80년 5월이나 87년 6월은 386 정치인들의 변신 및 종언과 더불어 헐값에 넘겨야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쓰고 반복해야할 사건이다.

이 땅의 무수한 아무개들의 웅성거림이 학자들-안다고 가정하는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목소리를 준다면서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본인의 학문분과의 경계에서 벗어나 보는 것. 이 어려운 과제야말로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가 아닐까.(양창렬/ 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 자크 랑시에르는 누구인가

알튀세르 사단의 일원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로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함께 21세기 프랑스 철학계에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1940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태어난 그는 이십대 중반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1965)의 공저자로 정식 데뷔했지만, 오히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알튀세르와의 결별이 기점이다. 68혁명의 과정에서 스승을 떠난 후 당대의 거목 알튀세르를 향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낸 것이 관심을 불러일으킨 배경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교훈』(1974)에서 알튀세르가 확고부동한 지적 지배의 위치를 보존하는 것만이 주된 관심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스승과의 결별, 곧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의 단절 이후 랑시에르는 어떠한 주체도 배제되지 않는 평등과 정치의 원리를 탐색해 온다. 이 말은 곧 이전의 철학들이 빈자, 시민, 프롤레타리아 등의 개념들로 정치의 영역에서 일부를 배제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깨달음에서 그는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밤』(1981)에서부터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와 정치철학적 원리를 도출하기 위한 지적 여정을 걸어오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유들은 비교적 뒤늦게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역시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프랑스에서 동시대에 주목받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국내에 소개(『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경제학 비판』, 윤소영 옮김, 1991)된 데에 비해 한동안 홀대받았던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인 상륙을 진행 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백승대 옮김, 인간사랑)와 『감성의 분할』(오윤성 옮김, b)이 이미 나와 있고,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양창렬 옮김)와 『불화』(진태원 옮김)가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책들은 ‘배제하지 않는 정치적 원리’를 찾아가는 랑시에르의 핵심적 작업들이다.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저자이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물꼬를 텄던 학자인 무페가 그러했던 것처럼 랑시에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고 모든 주체들이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리를 탐색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는 그 현실태로서 대의제가 아닌 추첨제를 민주주의의 원리로 지지하고 있다.

한편,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 속에서 랑시에르의 국내 소개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번역본을 둘러싼 비판이 거세다. 주된 논지는 ‘현실의 민주주의를 향한 증오’와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라는 랑시에르의 구분과 맥락을 혼동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번역본에서 랑시에르의 사상을 맛볼 수 없다’고 비판했고,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조짐이다. 어쨌든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정치’는 국내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기대 속에서 조금씩 베일을 벗어내고 있다. ‘철학하기’를 강조한 랑시에르의 사유와 실천들이 국내에 어떤 모양으로 녹아들지 주목된다.(김혜진기자)  

08. 03. 10.

P.S. 번역 비판이 '법적 분쟁'으로까지 비화된다면 코미디일 테지만 이런 진통이 '좋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경 2008-03-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그늘 한가운데에서 운을 맞추면서/리라처럼 나는 나의 심장에 한발을 들어올려서/ 구멍 난 내 구두의 구두끈을 당겼다! 왠지 랭보(나의 방랑(환상)중)가 생각나서 옯기네요 ^^:

로쟈 2008-03-11 23:28   좋아요 0 | URL
'방랑'과 '랑시에르'가 운을 맞추는 건가요?^^

람혼 2008-03-1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이 기대가 되는군요.

로쟈 2008-03-11 23:29   좋아요 0 | URL
네, 이미 나온 두 권보다는 읽을 만한 번역본이 나올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8-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적 없이 드나드는 걸 늘 송구해 합니다. 댓가를 지불해야할 것 같은 조바심이 종종 일어나지요.^^ 묵직하고 흔감해지는 포스트들에 나처럼 소리없이 감사해하는 사람들 아마 많을 겁니다. 로쟈님의 조용한 열정에 기대어 눈 먼 길이 덜 두렵곤 합니다. 그리고 근래 일어난 심기 불편한 일들로 로쟈님의 조용한 열정이 다치지나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깊이 응원 합니다.

로쟈 2008-03-12 17:56   좋아요 0 | URL
가끔씩 댓글을 남겨주시는 바람에 그만 내빼려던 걸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박석무 원장과 한국문학번역원의 윤지관 원장이 번역의 의미와 두 번역원의 과제 등에 대해서 나눈 대담을 스크랩해놓는다. 눈길이 가는 건 '번역에 대한 처우와 번역가 양성' 쪽이다. 우리 고전과 문학 번역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겨레(08. 03. 10) "우리고전 세계에 알리려면 두 번역원 협력해야죠”

한국고전번역원이 지난해 12월 공식 출범했다. 박석무 초대 원장이 부임해서 그동안 민족문화추진회 이름으로 해 왔던 고전 국역 사업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한편, 고전의 대중화·생활화를 위한 방안 마련에도 애쓰고 있다. 한편 지난 2001년에 문을 연 한국문학번역원은 문학작품의 번역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의 해외 소개에 주력하고 있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과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이 지난 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나 두 번역원의 현안과 상호 협력 방안, 번역을 둘러싼 사회적 여건 및 개선 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 번역의 의미와 고전의 세계화

박석무(이하 박): 먼저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얘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사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전쟁과 독재의 회오리 속에서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다 보니 삶의 질을 논할 수 있는 바탕은 매우 취약했다. 70년대 이후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비로소 문화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같은 맥락인데, 2001년에 한국문학번역원이 설립된 것이라든가, 그에 앞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국역 사업을 펼친 것은 역시 삶의 질과 문화를 찾는 국민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윤지관(이하 윤): 박 선생님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좀 더 보충하고 싶다. 문화의 측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일방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처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쌍방향적 소통의 중요성이 좀 더 부각되게 되었다. 양쪽 다 넓은 의미의 번역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40년 전부터 민족문화의 현대화 작업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 한국문학번역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이 긴밀히 협조해야 할 분야가 바로 우리 고전의 세계화 작업이다. 사실 현재의 고전 번역 수준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고전 번역은 시, 문,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이 두루 결합된 종합학문에 가깝다. 그만큼 까다로운 것이다. 다산 같은 걸출한 학자가 거의 외국에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은 그런 어려움 때문이겠지만,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다산을 비롯한 소중한 우리 고전의 해외 소개를 위해서는 한국문학번역원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윤: 한국문학번역원은 문학번역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기관이지만, 고전번역에 대한 지원 역시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지금은 인문·사회 분야만이 아니라 한국어로 된 모든 텍스트의 해외 번역 및 소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문 고전을 제대로 한국어로 옮겨 놓은 게 드물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한국고전번역원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본다. 2003년에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고전 번역 권장도서 100권의 목록을 작성, 발표한 적이 있는데 사실 목록 작성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맡는 식의 분업이 필요한 일이었다.

■ 번역에 대한 처우와 번역가 양성

박: 번역이 어려운 것은 양쪽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 능통해서는 훌륭한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번역을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 내 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내가 번역한 다산 책들을 참조해서 쓴 논문들이 숱하게 나왔다. 그것으로 박사 되고 교수 되는 이들은 많아도 내 번역은 학문적 업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내가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학진에서는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인정하도록 제도를 만들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도 성균관대나 고려대 등과 협력관계를 맺어서 번역을 연구업적에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윤: 저 역시 영문학자이면서 번역도 하는 처지에서 박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제대로 된 번역을 하나 하는 데 웬만한 논문 몇 편 쓰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번역이 기초학문이라면 논문은 일종의 실용학문이라 할 수 있다. 번역의 바탕이 있어야 논문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각 전공 분야의 학자 중에서 유능한 번역 인력이 나올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돼 있는 형편이다.

박: 번역이 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질 높은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게 전제조건이다. 그러기 위해 시급한 것이 번역자 양성이다. 나는 한국고전번역원장 일을 맡으면서 어떤 사업보다 번역자 양성과 교육에 치중하자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몇 권의 번역서를 내는 것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번역 역량을 갖춘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전국의 한학자들을 수배해서 그들이 젊은 세대를 직접 교육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윤: 저 역시 처음 한국문학번역원 일을 맡았을 때, 임기 동안 당장 드러나는 성과가 없더라도 번역가 양성을 위한 토대는 마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국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외국인 번역자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영어에 10명 이내, 불어와 독일어도 각각 다섯 명을 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9월 가칭 번역아카데미라는 번역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얼마 전에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 번역 평가와 국가적 번역 관리 시스템

윤: 역량 있는 번역가 양성과 함께 필요한 것이 기존 번역에 대한 평가 작업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영미소설번역평가 사업을 시행한 적이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맡고 나서도 평가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우선 영어로 번역된 소설 50종과 주요 시 작품들에 대한 평가를 하기로 했다. 소설에 대한 결과는 이미 나와서 곧 공표할 예정이고, 시 부문의 결과도 올해 말까지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박: 한국고전번역원 역시 번역 평가는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예산도 필요하고 평가 전문가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큰 일이다. 올해 안에 평가 시스템을 구축해서 실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윤: 한국문학번역원은 우리 문학과 문화의 해외 번역 소개에 관한 유일한 정책기구로 구실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번역에 대해서야 어느 정도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는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국립극장과 관광공사, 영화진흥위원회 등과 업무협약을 맺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번역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박: 그 때문에 유관 기관끼리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만 해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학술진흥재단 등과 사업 중복 여부와 용어 통일 문제 등을 논의할 협의체가 필요한 실정이다. 더 나아가 북한과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과 협조관계를 맺을 필요도 있다. 특히 북한과는 양쪽의 번역 역량을 결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기회가 닿으면 북한 사회과학원을 방문해서 쌍방의 고전 번역 성과물을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도를 논의하려 한다.

윤: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에서도 북한과 협력할 일은 많다고 본다. 북한은 특히 과거 소련 및 동구권 국가 출신 번역자들을 양성해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지금도 그쪽의 유능한 한국문학 번역자들은 북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정리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은 전남대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3, 14대 국회의원과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성균관대 석좌 초빙교수로 있다. 번역서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산문선> <역주 흠흠신서>(공역) 등이 있고, 저서로 <다산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1, 2>가 있다.

■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로 있다. 번역서로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 <오만과 편견>(공역) <이성과 감성> 등이 있고, 저서로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과 평론집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리얼리즘의 옹호> 등이 있다.

08. 03.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제임스 크라크라프트의 <표트르 대제>(살림, 2008)도 출간된 김에 표트르 대제와 그가 건설한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 읽기 리스트를 꼽아본다. 크라크라프트는 '표트르 혁명'이란 표현을 썼는데, 러시아사에서 그러한 총체적 혁명은 '스탈린 혁명'에서 한번 더 반복된다. 해서 표트르와 스탈린은 러시아사의 '아버지'이자 '주인 기표'이다(동시에 러시아 이해의 키워드이다). 절대권력과 국가주의가 이들을 묶어준다. 자신의 집무실에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다는 푸틴의 '전제적 민주주의'도 그러한 국가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두 사람과 비교하자면 '연성 권력'이라고 해야겠지만...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강대국의 조건 - 러시아- 대국굴기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제작진 엮음 / 안그라픽스 / 2007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8년 03월 09일에 저장
절판
중국 CC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EBS에서 방영됐었다. 자료화면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들을 만한 인터뷰들이 몇 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되는 근대 러시아사를 훑어준다.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지음, 이주엽 옮김 / 살림 / 2008년 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3월 09일에 저장

저자의 <러시아 문화 속에서 표트르 대제가 일으킨 혁명> 3부작을 압축한 책. '문화 혁명'에 큰 비중을 둔다. 표트르 대제 시대의 권위자인 저자는 일리노이대학에서 '표트르 대제 시기 러시아' 강의를 담당했다...
나타샤 댄스- 러시아 문화사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5년 6월
43,000원 → 38,700원(10%할인) / 마일리지 2,150원(5% 적립)
2008년 03월 09일에 저장
품절
젊은 러시아사 연구자의 뛰어난 러시아 문화사 이야기.
Natasha's Dance: A Cultural History of Russia (Paperback)
Figes, Orlando / Picador USA / 2003년 10월
69,330원 → 56,850원(18%할인) / 마일리지 2,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3월 09일에 저장

<나타냐 댄스>의 원저. 국역본의 절반 가격이군...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매주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새로 나온 책들의 리뷰를 훑어보는 일이 습관처럼 돼 버렸지만 이번주 '산책'은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다. 묵직한 책들이 눈에 띄지 않고 관심도서도 별로 없어서이다(게다가 몇 권은 주중에 다루었기에 덧붙일 말도 없고). 그러는 와중에 겸사겸사 저자 한 사람과 안면을 터두기로 한다. 고고학자 C.W.쎄람. 이미 여러 권의 책이 국내에 소개돼 있는 대중적인 고고학 저술가이다('세람'이라고도 표기돼 왔다). 이번에 나온 책은 'C.W.쎄람의 사진으로 보는 고고학 역사 이야기'를 부제로 달고 있는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다. 일종의 고고학사이며 사실은 'A Picture History of Archaeology'가 원제이므로 국역본의 경우 제목과 부제가 뒤바뀌었다고 해야겠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둔다.

문화일보(08. 03. 07) 옛 문명에 대한 상상과 도전 고고학 300여년사를 말한다

1485년 4월 로마 아피아가도에서 인부들이 우연히 석관을 발견하자, 석관 속 시신이 완벽하게 보존된 미모의 아가씨였던 덕분인지 단 하루 만에 2만여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과거의 로마에 쏠리는 세인의 관심은 고고학으로 이어졌다. 고대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고, 새롭게 드러난 현장과 자료를 토대로 사라졌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를 되살려내는 본격 고고학은 18세기 초에 출발했다. 서기 79년 8월20일 베수비오화산 폭발로 매몰됐던 폼페이에서 나폴리 토목기사 알쿠비에레의 지휘로 1748년 첫 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고고학은 문헌 조사, 현장 발굴 등 과학 분석이 행해질 뿐 아니라 역사가, 탐험가, 지리학자, 여행가 등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해온 학문. 고고학이 태동한 18세기 초부터 21세기인 현대에도 낭만적인 모험에 대한 꿈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진행형 학문이다. 지금도 소설, 미술, 공연 등을 통해 끊임없이 부활하는 이집트문명 등 고대문화는 해석과 재구성을 통해 오늘과 이어지고 있다.



국내서 번역 출간된‘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원제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을 통해 고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운 저자는 독일의 신문기자이자 출판인. 트로이, 이집트, 멕시코 등 고대문명 현장의 사람과 일화를 중심으로 1957년에 펴낸 이 책은 최근 50여년간의 발굴사가 빠진 50년 전 저서지만 고고학 300여년사와의 매혹적인 만남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어려서부터 트로이 발굴을 꿈꾸었고 오십 나이에 모험가적 기질의 두 번째 아내를 맞았던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 그는 1870년부터 1873년 100~150명의 인부를 동원해 호메로스의 글 등에서 그 존재가 전해져온 트로이의 발굴을 감행했다. 아내의 머리에 씌운 트로이의 황금장신구에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신화 속 헬레나의 흔적을 짚어냈던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출신으로 독학파 발굴 전문가였다. 이집트가 세계 고고학계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1789년 나폴레옹 원정 때였다.

옛 멕시코 건축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독일 남작 훔볼트에 의해 18세기 후반 시작됐다. 1799년 프랑스공병대가 나일강변 로제타에서 발견한 현무암조각인 로제타석이 담고 있는 고대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을 해독한 이는 프랑스의 학자 샹폴리옹이다.

발굴 초기의 현장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간접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며, 문명의 발상지에서 펼쳐지던 각종 발굴 사례는 이국 문화 유물의 파괴와 약탈과도 맞물리며 이질적인 문화의 만남을 증언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모험’ 등을 통해 익숙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서는 고고학의 주인공들이 구체적인 일화를 통해 되살아난다.(신세미기자)

08. 03. 08.

P.S. 개인적으론 한번도 고고학에 매혹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린시절 흥미를 느낀 쪽은 고고학이 아니라 천문학이었기에. 그런 탓으로 소장하고 있는 고고학 관련서는 아마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물론 <지식의 고고학>이나 <폭력의 고고학> 같은 책들까지 포함한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혹 '변심'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구입하고픈 책은 쎄람의 책들과 함께 <현대 고고학의 이해>(사회평론, 2006)와 <과거 읽기 - 최근의 고고학 해석방법들>(학연문화사, 2007) 등이다. 고고학 전공 교재로 사용되고 있을 법한 책들이다.

국내서라면 이선복 교수의 <고고학 이야기>(뿌리와이파리, 2005)와 한국 고고학회에서 펴낸 <한국 고고학 강의>(사회평론, 2007)가 입문서이자 교양 교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 고고학의 이해>와 <한국 고고학 강의>는 작년 이맘때 쓴 '고구려와 러시아 고고학'(http://blog.aladin.co.kr/mramor/1078355)에서 한번 꼽아본 책들이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경 2008-03-10 22:47   좋아요 0 | URL
학교 소모임 중 공부할 <한국고고학강의>보다 전에 사 둔 <지식의 고고학>을 얼른 읽고 싶네요. 해야 할건 해놓고 읽어야 하지만;;;

로쟈 2008-03-11 23:30   좋아요 0 | URL
설마 '현장'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읽거나 하시진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