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국내 수용 의미를 짚어보는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675). 랑시에르에 대해서라면 이미 '충분히'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한번 더 옮겨오는 것은 먼저 필자가 곧 출간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의 역자이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이런 기사들이 이미 나온 두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이다(책을 다 읽을 만한 독자가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랑시에르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세번째' 책부터 손에 들기를 권한다.  

교수신문(08. 03. 10)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

작년에 우리는 랑시에르가 조만간 국내에 상륙할 것이라는 공습경보를 들었다. 올해 들어 이미 두 권의 책(『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이 출간됐고, 근간목록에 올라있는 책들만 해도 여럿이다. 하지만 앞서 번역된 책들에서 그의 사상을 맛보기 어렵다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랑시에르의 저작들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감성의 분할』 부록을 참조할 수 있고, 그를 ‘불화’의 철학자, ‘평등’의 철학자로 잘 소개한 글들 역시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이정표를 굳이 더 세우기 위해 국내에 번역된 두 책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 ‘감성론’, ‘민주주의’ 등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로 하자. 랑시에르의 철학을 ‘감성의 정치’라는 기획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의 책들을 읽는 한 가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감성의 분할』의 원제는 ‘Le partage du sensible : esthtique et politique’이다. 이미 앞에서 적었듯이 우리는 그것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 감성론/감각학과 정치’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랑시에르가 말하는 ‘partage’는 사회 안/바깥의 개인들에게 각자의 몫과 자리를 나누어 주는 동시에, 그 몫과 자리에 따라 사회에 참여하도록/배제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두 뜻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은 ‘나눔’이다. 또한 랑시에르는 이러한 나눔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감각하는 방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등이 ‘le sensible’이다. 이 단어는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는 감성보다는 문자 그대로 감각적인 것-감각되는 것과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

정치,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재편성
감각되는 것/감각할 수 있는 것을 나눈다니 무슨 말인가.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1권의 표현에 주목한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불쾌의 감각에 바탕을 둔 소리(phon)가 공적인 공간에서 하나의 말(logos)로 ‘들리지 않게’ 함으로써, 소리와 말,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눴다. 이러한 나눔에 따라 사적 공간에 유폐됐던 노예, 여성, 노동자들은 동물과 다름없는 소리만을 가질 뿐, 의미 있는 무언가를 논할 수 있는 말을 갖지 않은 존재로 지각돼왔던 것이다.

그의 대안은 명쾌하다. 자신의 말이 말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 자신의 활동이 오로지 사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던 자들-랑시에르가 ‘몫-없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바로 이 나눔의 방식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이나 활동이 말로 그리고 공통적인 것으로 셈해지고 나눠지는 세계를 연출해야 한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두 나눔의 방식이 충돌하는 바, 이를 랑시에르는 불일치(dissensus), 係爭(litige)이라고 이름 짓는다. 한 마디로 정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과 그에 대한 재편성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esthtique’은 단순히 미학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게다가 랑시에르는 ‘esthtique’을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론이나 예술론, 혹은 감수성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는 그 단어의 기원인 ‘aisthsis’―어떤 대상, 행위, 표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 감각적인 것을 겪는 방식―에 주목하는 동시에, 칸트가 말하는 감성적(미감적) 판단에서 그 단어를 끌어온다. 따라서 그것은 ‘감성(적)’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 요컨대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esthtique’은 ‘감성(적)’, ‘감성론/감각학’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랑시에르는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감성적 판단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주목한다. 감성적 경험의 주체는 어떤 목적에 대한 앎이나 욕구 충족을 향하지 않고, ‘무관심’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새로운 감성적 경험에 기초해 감각적 확실성의 범주로 간주되는 것들을 다시 짜는 것이야말로 ‘감성적 혁명’인 것이다.



19세기 노동자 운동 문서 속에서 10년 보내
랑시에르가 68년 이후 알튀세르의 이론주의와 결별하고 10여 년간 먼지 쌓인 19세기 노동자 운동 관련 문서고에서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 감성적 혁명이다. 구두수선공이 자신에게 권리상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신(뮤즈)에게 호소하며 시를 써내려가고, 소목장이가 철학을 하거나, 자유를 셈하는 대항 경제론을 만들어내는 등등.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자리와 기능에 무관심한 채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노동자들의 경험이다. 19세기 노동자 운동의 독특함은 인민의 삶을 위와 같이 감성화하려는 노력, 자신이 부르주아 못지않게 가진 감성적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경험 속에 있는 것이다. 감성화는 일상적인 지각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지각 방식의 틀 혹은 나눔 자체를 재편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성적 혁명이란 노동자들을 공동체의 상징적 공간 안에(혹은 바깥에) 자리를 배정하고, 그들을 생산과 재생산의 ‘사적인’ 영역에 놓는 전통적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집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지배적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해야 한다. 반대로 19세기 초중반 노동자들은 밤에 더 많은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의 물꼬를 텄다. 밤에 안자고, 쓰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이자 이름인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시작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또한 밤을 새로이 전유함으로써, 시간의 짜임을 바꾼 것이다. 다른 예도 있다. 19세기 중반 노동자들은 사장들 역시 작업장 안에 들어올 때 모자를 벗으라고 요구했다. 이는 단순히 사장의 예절과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을 사적 공간이 아니라 공적 공간으로 다시 나누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해방은 시간과 공간의 나눔―칸트가 선험적 감성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감성의 정치다. 다시 말해 랑시에르에게 정치와 감성론(감각적인 것의 나눔, 재편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정치는 처음부터 감성적이다.

사회(학)적인 범주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감성적 경험은 탈정체화, 탈계급화라 불러 마땅하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는 마르크스가 정의한 ‘계급의 소멸로서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를 급진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빈자라고 부르지 않으며,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빈자, 프롤레타리아는 중요하지 않은 자들, 셈해지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프롤레타리아는 본디 proles(자식, 아이)에서 파생된 단어로, 아이를 낳는 한에서만 로마에 봉사할 몫을 갖는 계층, 다시 말해 아이들을 통해서만 국가에 셈해지는 계층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이 형상을 고대 그리스의 데모스를 다시 규정함으로써 발견한다. 그리고 데모스(인민)의 권력/역량이야말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실 그것의 적대자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이 정당성도 없이 쪽수로 밀어붙이고, 제비뽑기로 자리와 직무를 분배하는 정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이 역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이름도 자격도 없는 ‘아무나’가 공통의 장소에 침입해 (통치의 관점에서) 난장을 피우며 자신들의 평등을 보여주는 삶의 방식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늘 우연적이다. 반대로 이 통제할 수 없는 과잉과 초과로 가득찬 ‘민주주의적 삶’을 자본의 논리와 다름없는 무제한적인 사적 욕망의 추구로 돌리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바로 그 데모스를 정치판에서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자들의 과제였다.

랑시에르는 오늘날의 모든 사회, 경제적 혼란을 민주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선다. 정치의 시대는 끝났고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만 중요하다거나, 반대로 사적인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곧 국가적인 사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치’를 다시 발명해야 한다고 랑시에르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간 국내에서 프랑스 철학자들을 수입하는 방식은 다소 비슷했다. 가장 먼저 수입되는 것은 그들의 정치철학이며, 그것이 얼마나 현실 정치를 설명하는데 쓸모가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알다시피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랑스 철학은 말만 많고 알맹이는 없으며, 기껏해야 자본주의의 첨단에 있는 향락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고심해 만들어내는 것들, 특히 랑시에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10년 넘게 노동자들의 말과 글을 추적했다.

속된 표현으로 ‘날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타국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날로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랑시에르는 끊임없이 이론 체계만을 구축하는 존재론에 반대해 왔다. 오히려 그 때문에 아름다운 체계에 혹하는 이들에게 그의 철학은 간단하며 싱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80년 5월이나 87년 6월은 386 정치인들의 변신 및 종언과 더불어 헐값에 넘겨야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쓰고 반복해야할 사건이다.

이 땅의 무수한 아무개들의 웅성거림이 학자들-안다고 가정하는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목소리를 준다면서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본인의 학문분과의 경계에서 벗어나 보는 것. 이 어려운 과제야말로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가 아닐까.(양창렬/ 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 자크 랑시에르는 누구인가

알튀세르 사단의 일원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로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함께 21세기 프랑스 철학계에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다. 1940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태어난 그는 이십대 중반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1965)의 공저자로 정식 데뷔했지만, 오히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알튀세르와의 결별이 기점이다. 68혁명의 과정에서 스승을 떠난 후 당대의 거목 알튀세르를 향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낸 것이 관심을 불러일으킨 배경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교훈』(1974)에서 알튀세르가 확고부동한 지적 지배의 위치를 보존하는 것만이 주된 관심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스승과의 결별, 곧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의 단절 이후 랑시에르는 어떠한 주체도 배제되지 않는 평등과 정치의 원리를 탐색해 온다. 이 말은 곧 이전의 철학들이 빈자, 시민, 프롤레타리아 등의 개념들로 정치의 영역에서 일부를 배제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깨달음에서 그는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밤』(1981)에서부터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와 정치철학적 원리를 도출하기 위한 지적 여정을 걸어오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유들은 비교적 뒤늦게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역시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프랑스에서 동시대에 주목받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국내에 소개(『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경제학 비판』, 윤소영 옮김, 1991)된 데에 비해 한동안 홀대받았던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인 상륙을 진행 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백승대 옮김, 인간사랑)와 『감성의 분할』(오윤성 옮김, b)이 이미 나와 있고,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양창렬 옮김)와 『불화』(진태원 옮김)가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책들은 ‘배제하지 않는 정치적 원리’를 찾아가는 랑시에르의 핵심적 작업들이다.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저자이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물꼬를 텄던 학자인 무페가 그러했던 것처럼 랑시에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고 모든 주체들이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리를 탐색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는 그 현실태로서 대의제가 아닌 추첨제를 민주주의의 원리로 지지하고 있다.

한편,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 속에서 랑시에르의 국내 소개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번역본을 둘러싼 비판이 거세다. 주된 논지는 ‘현실의 민주주의를 향한 증오’와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라는 랑시에르의 구분과 맥락을 혼동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번역본에서 랑시에르의 사상을 맛볼 수 없다’고 비판했고,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조짐이다. 어쨌든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정치’는 국내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기대 속에서 조금씩 베일을 벗어내고 있다. ‘철학하기’를 강조한 랑시에르의 사유와 실천들이 국내에 어떤 모양으로 녹아들지 주목된다.(김혜진기자)  

08. 03. 10.

P.S. 번역 비판이 '법적 분쟁'으로까지 비화된다면 코미디일 테지만 이런 진통이 '좋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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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3-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그늘 한가운데에서 운을 맞추면서/리라처럼 나는 나의 심장에 한발을 들어올려서/ 구멍 난 내 구두의 구두끈을 당겼다! 왠지 랭보(나의 방랑(환상)중)가 생각나서 옯기네요 ^^:

로쟈 2008-03-11 23:28   좋아요 0 | URL
'방랑'과 '랑시에르'가 운을 맞추는 건가요?^^

람혼 2008-03-1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이 기대가 되는군요.

로쟈 2008-03-11 23:29   좋아요 0 | URL
네, 이미 나온 두 권보다는 읽을 만한 번역본이 나올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8-03-1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적 없이 드나드는 걸 늘 송구해 합니다. 댓가를 지불해야할 것 같은 조바심이 종종 일어나지요.^^ 묵직하고 흔감해지는 포스트들에 나처럼 소리없이 감사해하는 사람들 아마 많을 겁니다. 로쟈님의 조용한 열정에 기대어 눈 먼 길이 덜 두렵곤 합니다. 그리고 근래 일어난 심기 불편한 일들로 로쟈님의 조용한 열정이 다치지나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깊이 응원 합니다.

로쟈 2008-03-12 17:56   좋아요 0 | URL
가끔씩 댓글을 남겨주시는 바람에 그만 내빼려던 걸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