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건져야 할 책이 좀 많다. 두 주쯤 돈이 굳는가 싶더니 다시 새나갈 판이다. 일단 철학 분야의 책으로 악셀 호네트의 <정의의 타자>(나남, 2009)를 골라둔다. 부제가 '실천철학 논문집'이라고 돼 있고, 국내 소개된 책으로는 <인정투쟁>(동녘, 1996)과 <물화>(나남, 2006)에 이어 세번째이다. 분량으론 제일 묵직하고. 리뷰를 길잡이 삼아 관심있는 주제의 논문을 한두 편은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08. 03. 14) 인정욕구에 눈감는 정의는 폭력을 낳을 뿐

<정의의 타자>는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60·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가 자신의 ‘인정 이론’을 ‘정의’의 문제와 관련지어 숙고한 책이다. 주로 1990년대에 쓴 논문들이 묶였다.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적통을 이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하버마스의 직계이긴 하지만 프랑스 철학과 긴밀하게 대화함으로써 이 학파의 비판이론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미셸 푸코의 ‘투쟁 이론’을 하버마스의 ‘소통 이론’과 결합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 사유 영역을 확보했다. 그의 대표작은 1992년에 출간한 <인정 투쟁>인데, 이 책에서 그는 인정 개념을 사회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들였다. <정의의 타자>는 <인정 투쟁>에서 펼친 논의를 좀더 확장해 인정과 정의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다.  

인정 문제를 철학의 영역 한가운데로 불러들인 사람은 게오르크 헤겔이다. <정신현상학>을 쓰기 전 예나대학 재임 시기의 청년 헤겔은 인정 투쟁을 전체 사회의 도덕적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해석했다. 청년 헤겔의 논의에 기대어 호네트는 <인정 투쟁>에서 인정의 사회적 함의를 탐구했다. 그가 보기에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개인들이 긍정적인 자기 의식을 얻게 되는 심리적 조건이다. 그의 인정 투쟁 테제의 핵심은 사회적 투쟁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 인정 상태를 목표로 한다는 명제에 있다. 

<정의의 타자>는 <인정 투쟁>의 이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의 고민은 사회적 정의가 원리상 개인들의 삶의 특수한 국면들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의의 원칙은 불편부당성을 핵심으로 한다. 모든 사람을 동질성을 공유한 보편적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고유한 차이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다. 여기서 개인적 특수성은 정의 원칙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 곧 ‘정의의 타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정의의 타자를 어떻게 하면 윤리적 차원에서 포용하고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호네트의 관심이다. 

정의의 원칙을 보완하는 대안적 원칙으로 호네트가 제시하는 것이 ‘배려의 원칙’이다. 개인의 특수한 처지를 배려하는 것은 불편부당성이라는 정의의 원칙에 비추어보면 위반 행위가 된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이 무차별적으로 관철될 경우 여성·이주자·장애인·동성애자 같은 범주의 존재들은 배제와 억압의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상황이다. 정의의 그런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특수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배려의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호네트는 정의와 배려를 넘어 제3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정의 원칙이다.  

이때 호네트가 핵심 개념으로 삼는 것이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이다. 다시 말해, 호네트는 정의로운 행위나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의 좋은 삶,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면서 ‘인정’을 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개인은 사랑받고 인격을 존중받고 능력대로 대우받는 정서적·사회적 인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의식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실현할 힘을 얻는다. 인정의 경험이야말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 긍정의 필수 조건인 셈이다. 인정이 이렇게 ‘좋은 삶’의 조건이라면, 인정을 개인들 사이의 의무로 규정하는 윤리적 원칙이 성립하게 되며, 개인의 성공적 삶을 떠받치는 사회적 인정 질서도 상정해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인정의 원칙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에 상응하는 정의의 원칙을 배제하지도 않고 또 개인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는 배려의 원칙도 배제하지 않는다.

호네트는 인정 원칙이 사회적 관계 또는 개인적 관계에서 특히 모욕이나 무시와 같은 정서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모욕이나 무시를 당하는 것은 인정에 대한 욕구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경험인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는 개인적인 경우를 넘어서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호네트는 독일에서 나타난 ‘신나치 운동’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 안에 인정 욕구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개인적·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좌절을 겪은 청소년들이 그들의 자존감을 충족시켜주는 신나치 운동에서 출구를 찾는 것은 “사회적 무시의 경험이 정치적으로 어디를 향해 치달을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인정의 연결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사회적 저항과 반항을 낳을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네트는 인정을 사회적 원칙으로 세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무시당한 사람들과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폭력적 저항문화 속에서 발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민주적 공론장 안에서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도덕문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관건이라고 호네트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9. 03. 14.  

P.S. 그러고보니 '인정'의 짝개념은 '무시'다. 호네트의 저작 목록에 <무시>가 들어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 이 책도 소개되면 구색이 맞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주 출간도서 가운데 흘려보냈던 책의 하나는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09)이다. 제목만 보고 진지하게 들여다 보지 않았는데, 나름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관련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기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도 언급되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 가장 주목할 영화 중의 하나이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이기도 하고).   

»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정점을 이룬 뒤 계속 하락을 거듭했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월트에게는 이 상황을 개탄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겨레21(09. 03. 13)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미국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르렁거릴 일만 남은 노인이다. 필요할 때만 전화 거는 자식들은 정이 뚝뚝 떨어지고, 거주하는 주택단지를 아시아인들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나눌 이웃도 사라져간다. 그런 그를 찾아오는 것은 ‘애송이 신부’뿐. 생전의 아내가 개종을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월트에게 남은 것은 포드 공장에 다닐 때의 상징인 자동차 ‘그랜 토리노’와 50년 동안 모은 공구들이다. 집 앞 베란다에 앉아서 한정 없이 맥주를 들이켜는 그의 표정에는 ‘개탄’이 가득하다.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외치던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마저 ‘이게 아니다’란 생각이 든 것일까. 그 좋던 시절은 다 가버린 것일까. 2000년 로버트 D.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펴냄·정승현 옮김)에서 증명하려 한 것이 바로 ‘공동체주의자’ 미국인들의 ‘내리막 내러티브’다.  

볼링 인구 10% 증가, 리그 볼링은 40% 감소

책은 1995년 퍼트넘의 같은 제목(‘Bowling Alone: America’s Declining Social Capital’) 논문에서 출발했다. 이 논문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제목은 ‘혼자 볼링하는 사람이 늘어났음’을 명제로 내세운다. 이 ‘단언’은 통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체육 활동의 경향이 전국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볼링 인구만은 늘어났다. 1996년 어느 날은 9100만 명이 볼링을 쳤는데, 이 수는 1998년 국회의원 선거 투표자보다 25% 많다고 한다. 그런데 1980~93년에 볼링 인구는 10% 성장했지만(인구 성장까지 감안하더라도 높은 수치) 서로 어울려 치는 리그 볼링은 40% 이상 줄어들었다.  

스포츠뿐일까. 미국의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절정을 이룬 뒤 끊임없는 하락세를 보였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네트워크’ ‘공동체’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가족과 친족을 합친 확대가족, 교회의 주일학교, 통근열차에서 포커를 치는 회원들, 시민단체, 인터넷 채팅 그룹, 직업 관련 인물들과의 네트워크 등을 모두 포괄한다. ‘공동체주의’는 19세기 초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감탄하며 제시한 ‘미국의 정신’이다. 토크빌은 미국인이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이웃을 배려하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시민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게 형성된 작은 사회로 물러나고 대규모 사회는 스스로 알아서 돌보도록 즐겁게 맡겨버린다.” 호혜정신으로 발동하는 ‘개인주의’가 사회와 조화롭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1960년대’라는 좋은 시절은 베트남 반전운동과 흑인·여성 인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저자는 투표율, 단체 백과사전, 자선사업 기부, 회의 참석자, 친구와 친척의 방문,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인구 수, 직장에서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자료 등을 동원해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세밀하게 증명한다. 통계 자료를 분석해 엄밀하게 결론을 끌어내는 ‘정론 직필’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터넷과 전자우편, 전화 등의 새로운 미디어도 사회적 자본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경우는 이렇다. 빌 게이츠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사회적 자본의 추락은 시작됐으며 이후 인터넷이 새로운 사회적 자본의 반등을 만들어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월터는 이웃에 사는 아시아 몽족에게서 미국에서 사라진 호혜와 배려의 정신을 발견한다.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아시아 인종도 구별 못하는 월터에게 이 몽족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가 된다. 그는 이 사회적 자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영웅적 행동을 한다.

경제사회적 분석은 가볍게 다뤄

<나 홀로 볼링>에서도 비슷한 예를 하나 든다. 64살의 전 병원 직원 존 램버트와 33살의 회계사 앤디 보쉬마는 볼링 리그를 통해서만 서로를 아는 사람이다. 램버트는 신장 이식수술 대기자 명단에 3년째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였는데 보쉬마는 이 딱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다. 두 사람은 직업과 나이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보쉬마는 백인, 램버트는 흑인이었다. 퍼트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작은 방식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미국인들은 서로서로 다시 연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간단명료한 주장이다.”

‘작은 방식’은 저자의 중요한 전략이지만, 옮긴이의 말에서 전하는 대로 <나 홀로 볼링>은 경제사회적인 분석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경제적 요인에 대해 “장기 불황 때 (사회적 자본이) 잠깐 감소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처리하고 만다.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본주의나 시장 이데올로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의 ‘실사구시’ 입장에서는 통계 자료가 마땅치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공동체 형성’이 정치사회와 맺는 관계가 그렇게 간단치 않음은 한국 사례로도 입증될 수 있겠다. 지난해 촛불집회와 인터넷·전화를 통한 조직화를 퍼트넘은 어떻게 해석할까.(구둘래 기자) 

09. 03. 12.


댓글(4) 먼댓글(2)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3-13 19:18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2. 대성의 생각
    from robmind's me2DAY 2009-03-21 03:09 
    [알라딘서재]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읽어보자
 
 
2009-03-13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3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3-14 09:00   좋아요 0 | URL
<그랜 토리노> 봐야될 영화군요.

로쟈 2009-03-14 23:36   좋아요 0 | URL
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네요...
 

<SPACE(공간)>(2009년 3월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을 다루고 있다(작년 12월에 쓴 글이지만 다소 늦게 게재되었다).

  

SPACE(09년 3월호) 움베르토 에코 추(醜)의 역사를 상대해주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세계적인 기호학자이고 철학자이지만 본래의 전공분야는 중세 철학과 문학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중세의 미와 예술>은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26살 때 쓴 중세미학 연구서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이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27개국에서 번역된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만 하더라도 그가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건 40년도 더 전인 1960년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수십 년간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가 <미의 역사> 저자로 나선 것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들 정도다.    

<미의 역사>에 이어서 출간된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에코는 유사한 책의 출판을 요청받고 ‘추의 역사’를 바로 떠올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그런 주제를 다룬 책으로는 거의 최초라고 하니 조금 놀랍기까지 하다. <미의 역사>에서 에코는 ‘미’의 관념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돼 왔는지 추적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다르게 규정되고 표상되었다. 에코는 그러한 변화의 양상과 차이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추의 역사를 상대해주겠다는 것.  

미학에서 ‘미’와 ‘추’가 짝이 되는 개념인 만큼 <추의 역사>가 <미의 역사>의 짝이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데, 이 추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얼핏 미의 역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정의내린 추의 관념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말이다. 에코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추가 미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를 흉내 내자면, 모든 아름다움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추함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이 제각각의 다양성이 양적인 차원을 넘어서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라는 두 가지 역사의 질적인 차이를 낳는다.    

에코의 말을 직접 빌자면, 미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 오늘날 곧바로 패션쇼 무대에 설 수는 없지만, 미는 대체로 비례와 균형 같은 몇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즉 세기의 미녀로 꼽히던 은막의 스타 브리지트 바르도와 그레타 가르보의 코는 분명 크기와 모양새가 서로 달랐지만 일정한 길이를 넘지는 않았다. 반면에 추한 코는 피노키오의 코에서부터 넓적코, 매부리코, 비뚤어진 코, 콧구멍이 셋인 코, 종기가 많이 난 코, 술주정뱅이의 붉은 코 등 아주 다양하다. 따라서 <추의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갖가지 추의 이미지는 미의 이미지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러니 추는 미와 비대칭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윤리학에서 악의 개념을, 법학에서 불법의 개념을, 종교학에서 원죄의 개념을 다룰 수 있듯이 미학에서 추를 ‘부정적 미’로서 다루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 로젠크란츠는 1853년에 출간한 대표작 <추의 미학>(나남, 2008)에서 추를 ‘미의 지옥’이라 규정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가 사례로서 실제로 분석하고 있는 형식의 결여와 불균형, 부조화, 외관 손상, 변형, 불쾌함의 다양한 형상들은 너무도 방대해서 단순히 미의 반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에코의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추에 대한 규범적 정의와 기술은 불가능하다. 다만 가능한 것은 고대 세계의 추에서부터 중세와 바로크, 근대 세계와 아방가르드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불가능성을 낳는 다양한 추의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추의 역사’가 아니라 차라리 ‘추의 분류학’에 가깝다(번역의 대본이 된  영어본은 <추에 대하여On ugliness>란 제목을 갖고 있다).  

에코 자신이 이미 서문에서 미적 관념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 같은 일을 추에 관해서는 할 수 없었다고 시인한 만큼, 명태 두름 꿰듯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추의 역사’를 책에서 읽을 수는 없다. 아쉽지만 이것은 저자 에코의 한계가 아니라 추의 특수성이다. 그럼에도 추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정도는 추에 대한 원형적인 관념으로서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한 가지는 고대 그리스의 관념인데, 그들은 미를 일종의 ‘완벽함’으로 정의해 미와 추는 상대적이었다. 예컨대, 제법 단련된 복근이라도 ‘보다 더 완벽한’ 복근과 비교되면 추로 간주되는 식이다. 반면에 우주 전체를 신의 작품으로 간주한 그리스도교에서는 추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신학적 형이상학에서 추는 다만 예전에 좋았던 것이 손상되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소위 ‘범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라고 보는 것일까.  

09. 03. 11.


댓글(8) 먼댓글(1)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좌빨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from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2009-03-13 09:32 
    수령의 릴레이를 받고 보니 릴레이란 시스템이 블로거간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일종의 윤활유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트랙백은 왠지 댓글만큼 글을 쓰게 하는 어포던스가 약하다. 댓글은 해당 글과 같은 시야에서 볼 수 있지만, 트랙백은 링크를 타야만 볼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는 뭔지 알수는 없다. 여하튼 블로거들을 연결해 주는 시스템으로서의 트랙백이 가지는 어포던스는 게시판이 가지는 토론문화를 능가할 만한 어포던스가 아니다. 누군..
 
 
[해이] 2009-03-11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가격이 문제죠... 흙.... ㅠㅠ

로쟈 2009-03-11 23:57   좋아요 0 | URL
저도 청탁을 받고서야 구입한 책입니다.^^;

Kitty 2009-03-12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가격 ㅠㅠ) 꼼꼼히 읽지는 못하고 후루룩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미의 역사보다도 더 흥미롭더군요.
다만 읽고 나서도 뭔가 아른아른 잡히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로쟈님의 리뷰를 보니 머리속에서 확 정리가 되는 느낌이에요. ^^

로쟈 2009-03-12 08:06   좋아요 0 | URL
리뷰의 일이 정리하는 것이니까요.^^

마노아 2009-03-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덜어낼 것이 없는 리뷰군요!

로쟈 2009-03-12 08:06   좋아요 0 | URL
덜어낼 수 있는 분량도 아닌데요.^^;

콩세알 2009-03-1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와 추의 역사'라는 제목을 읽고 순각적으로 'The history of Pendulums'을 떠올렸습니다. ^^ 아마도 에코의 소설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듯..^^;;

로쟈 2009-03-13 23:26   좋아요 0 | URL
ㅎㅎ 듣고 보니 그렇네요.^^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
뉴레프트리뷰 랑시에르 논문 정오표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에서 제기한 오역 문제에 대해 역자인 balmas님이 정오표를 작성해 올려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화되었다. 이번 '오역 논란' 사례에서 역자가 보여준 태도가 '올바른 번역 문화의 확립'에 좋은 선례가 되리라는 것이 기자의 판단이다. 대놓고 불편함을 토로하여 '악역'을 맡긴 했는데,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보람이 없지는 않다. <뉴레프트리뷰>에 국한하더라도 앞으로 나올 2권부터는 보다 주의 깊게 교정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알라딘 블로그에서 시작됐다. 지난달 20일 로쟈는 자신의 블로그에 얼마 전 출간된 『뉴레프트리뷰(페리 앤더슨 외 지음, 진태원 외 옮김, 도서출판 길)』의 번역을 문제 삼고 나섰다. 로쟈가 문제 삼은 논문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인데,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번역한 논문이었다.  

진태원 연구교수는 ‘FTA반대Balmas’라는 알라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데리다, 알튀세르의 책도 번역한 연구자로 유명하다. 특히 평소 이런저런 지면을 통해 프랑스어 철학서의 오역에 대한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해, 번역비평에 대해서는 일군의 독자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편집위원으로까지 있는 책에 번역한 논문이 형편없는 오역 투성이었다는 점을 로쟈가 하나하나 짚어낸 것이다.

로쟈는 'configuration'의 역어로 역자가 채택하고 있는 ‘공형상화’라는 단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지적에서부터 물꼬를 틀었다. 문맥상 그림 장식의 ‘주제’를 의미하는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것도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라는 지적이다. 말라르메에 대한 구절에서 ‘unfolding of a fan’은 ‘선풍기의 회전’이 아니라, ‘부채 펼치기’라는 언급도 잇달았다. 

베테랑의 실수였나
여기까지 보면 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도의 번역인데, 뭐 그리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로쟈는 이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면서 본격적으로 공격의 활시위를 당긴다. 우선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but rather because’라는 구절에 대해 역자가 엉뚱하게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A 때문이 아니라, B 때문이다”로 오역했음을 지적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가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진 연구교수의 오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로쟈의 전언이다.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라는 문장을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로 황당하게 번역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 ‘no more than’을 ‘단지, 고작’이 아니라 ‘더 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했다는 지적이다. 이 경우 랑시에르가 강조한 고도의 역설, 곧 ‘예술은 단지 예술일 때 사라진다’를 동어반복으로 격하한 격이 된다.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인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을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번역한 것도 엉뚱하긴 마찬가지라고 일침을 놓았다(물론 로쟈의 제안인 ‘이론적 설명’도 논란의 소지는 있다. 그래서인지 진태원 연구교수는 로쟈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을 “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고 정반대로 옮긴 부분은 “미스테리하다”고까지 말했다. 그 밖에 많은 오역을 지적하면서 로쟈는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진태원 연구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어 논문인데다가 랑시에르의 글이 간명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번역을 한 게 이런 불상사를 초래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독자들과 책의 다른 역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또 오역을 지적한 로쟈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예술이 더는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를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로 정정하는 등 문제된 부분 중 8개의 문장에 대해서 정오표를 올렸다.

진 연구교수의 발 빠른 대응에는 두 사람이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도 대중과 소통에 민감하다는 점에 일차적으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 ‘미스테리’등의 다소 과격한 용어를 써가며 신랄하게 전개된 오역 지적에 거의 실시간으로 수긍을 한 점은, 진 연구교수의 전향적인 자세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문제된 부분 가운데 8개 문장 바로잡아
대부분의 역자들이 체면이나 혹은 개인적 원한 또는 책에 대한 대중적인 평 등을 우려해 쉬쉬하며 오리발을 내미는 상황에서 솔직한 사과와 정정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설령 정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정판을 낼 때, 은근슬쩍 정정돼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 연구교수의 태도는 올바른 번역 문화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점이 많다. 

한편 출판사 측은 오역 지적이 있고난 뒤인 3쇄부터는 오역된 부분을 수정할 것이며, 3쇄까지 가지 않는다면, 뉴레프트리뷰 2권을 낼 때, 별도로 1권의 오역에 대해서 사과와 정정을 할 것이라 밝혔다. 체면차리기에 바쁜 우리 풍토에 새로운 번역 문화 정착의 사례로 기대해봄직하다.(오주훈 기자) 

09. 03. 10. 

P.S. 기자도 지적했다시피 '초등학생’ ‘미스테리’등의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역자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미스테리'는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긴 하다. '악의적' 표현은 아니다). 사실 내가 겨냥한 건,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 서두에 적었듯이, 번역 자체보다는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질타하는 출간의 변이었다. 번역상의 실수들이야 조용히 짚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협량한 지적 풍토" 운운은 너무 고압적이면서 오만하게 여겨졌다. 일부 신랄한 표현은 그에 대한 나대로의 '불편함'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자가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한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번역 문제. 역자는 정오표에서 "교환방식에 대한 합리화'라고 옮겼는데, 누구라도 일감으론 그렇게 옮겼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rationalization'을 '합리화'로 옮겼다가 '이론적 설명'이 조금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론적 설명'은 내가 궁리해낸 말이 아니라 영한사전에 등재된 설명어다(나는 매번 사전을 찾아본다).  

전체 문장은 이렇다.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 내가 보기에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과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는 둘다 'The critique of culture(문화비평)'의 (동격)보어다. 즉, 'rationalization'은 여기서 'epistemological face'와 대등한 말이다. 내가 좀더 과감했다면, 'rationalization'을 '인식론적 설명'으로 옮겼을 것이다. 물론 '합리화'라고 옮기는 게 무난하다. 하지만 '합리화'라는 우리말이 갖는 약간의 부정적 뉘앙스(가령 '잘못된 견해나 행동 따위를 그럴 듯한 이유를 대어 정당화하는 일'도 '합리화'이다) 때문에 좀 주저하다가 '이론적 설명'으로 대체한 것인데, 이것이 '논란의 소지'까지 되는지는 의문이다...


댓글(4) 먼댓글(2)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서울비의 생각
    from seoulrain's me2DAY 2009-03-11 08:48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2. 오늘의 오역계 잡동사니
    from 잠보니스틱스 2009-10-23 00:10 
    ★영화 역사상 가장 오역된 제목은 (대밋님)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오역이다? (즈망푸님) ★'가을의 전설'이 오역인가? (전쟁과 평화님) ★Traduttore, traditore - Legends of the Fall (ουτις님) ★[질문] 이 영화의 제목도 혹시 오역인가요? (anakin님) ★영화 역사상 가장 왜곡된 대사 (Zannah님) ★"내가 니 애비다."와 "내가- 네 아버지다." 의 차이 (슈르님) ★한국 스...
 
 
paul 2009-03-1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일까요, 오역 문제에 대한 의미있는 목소리들은 번역 작업에 있어서 또다른 검열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창작에 임한 작가가 그렇듯이 번역자도 지나치게 오역의 혐의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죠. 이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전에 말씀하셨던 '책임'이나 '자유'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사안이겠죠.^^
번역서를 즐겨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오역 지적의 '책임'있는 목소리에 대해 번역자들도 '책임'이 걸린 번역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로쟈 2009-03-11 23:29   좋아요 0 | URL
오역을 없앨 수는 없죠. 불가피한 면도 있구요. 다만, 불필요한 오역을 줄일 수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각자가 '책임'을 다하면요...

2009-03-11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1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휴일 끝물에 건진 책은 로레타 나폴레오니의 <적과의 동침>(웅진윙스, 2009)이다. 부제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잉태한 악당 경제학, 그 실체를 파헤치다'. '악당 경제학'이 주제라면, '파헤치다'는 저자의 방법론이 되겠다. 서점에서 잠깐 봤을 때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았는데(두껍기도 하고), 저자의 전작이 테러의 경제를 다룬 <모던 지하드>(시대의창, 2004)란 걸 알게 되니까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모던 지하드>는 생소한 책인데, 내게 생소한 책의 8할은 2004년에 나온 것들이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겸 저널리스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란 생각도 들고.     

세계일보(09. 03. 07) 세계 구해 낼 ‘경제적 종족주의’

“우리는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악당과 손잡았고 그들의 논리에 따라 살고 있다. 지구상에 노예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착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첨예한 대립, 모기지론으로 멋진 집을 사고 펀드로 금세 메울 수 있을 거란 세계인의 망상, 저지방 식품이 날씬한 몸매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 은행과 신용카드가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 콩고 아이들의 피가 어린 반지로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커플들…. 이렇게 아이로니컬한 모든 상황은 우리가 ‘악당’과 ‘동침’하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영화 제목 같은 ‘적과의 동침’은 세계경제를 흔드는 ‘악당’의 존재를 이렇게 폭로하며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국제 돈세탁과 테러자금에 관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언론인인 저자가 말하는 악당은 세계를 풍요하게 하는 경제활동의 이면에 숨은 부정적인 그림자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기업화되는 성매매, 중국의 짝퉁산업, 아프리카 노동력을 착취하는 다국적기업 등으로 모두 ‘악당 경제학’을 만들어내는 공범들이다.

문제는 대안. 저자는 현재의 경제 모순과 끝없는 불황의 해결책으로 두 차례 석유파동과 200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를 넘어 세계 금융 강자로 부상한 ‘이슬람 금융’을 제시한다. 이슬람 금융은 돈을 생산적인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투기를 금하고 있어서 자산을 약탈해 현금을 부풀리는 헤지펀드, 사모펀드, 파생금융상품 등을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아가 ‘악당 경제학’이 범람하는 세계를 구해낼 대안으로 ‘경제적 종족주의’를 제안한다. 경제적 종족주의는 이슬람 금융처럼 국가나 종족 또는 종교적 연대를 통한 긍정적 결속력으로 세계경제가 가진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대안 없이 우왕좌왕하는 전무후무한 세계 경제 위기를 맞아 귀 기울여지는 신선한 제안이다.(조정진 기자)     

경향신문(04. 06. 19) 모던 지하드; 테러, 그 보이지 않는 경제

‘테러’만큼 논란을 일으키는 용어는 많지 않다. 정의도 천차만별이고 테러행위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다. 유럽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인종, 종교, 정치적 성격 등을 배제한 채 경제적 관점에서 테러를 분석하고 있다.

현대적 테러는 냉전이 출발선이다. 1980년대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좌파혁명이 일어나자 이웃국가인 엘살바도르에 경제지원을 한다. 소련은 이에 맞서 쿠바와 니카라과를 통해 엘살바도르의 공산게릴라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런 식의 테러지원은 인도차이나, 중동, 동유럽 등 곳곳에서 일어났다. 테러단체들은 국가형태로까지 발전했다. 중동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하마스가 있고 중남미에는 각국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마다 게릴라 단체가 있다.

저자는 테러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돈줄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미국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어떻게 테러를 부추기는지도 자세히 들추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금융세력이 막대한 경제력으로 알바니아와 인도네시아를 이슬람으로 포섭했다고 주장하는 등 서구인들이 흔히 가지는 편견까지도 드러내놓고 있다.(박성휴기자) 

09. 03. 08. 

 

P.S. 참고로, '악당 경제학(rogue economics)'처럼 'rogue'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책은 여러 권이다. 주로 '국가'나 '정권'을 수식하는 말로 쓰이는데, '불량국가' '깡패국가' '불량정권' 등이 그 예다. 데리다의 정치철학 에세이 <불량배들>도 영어의 'rogue'를 불어로 옮긴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itty 2009-03-09 02:55   좋아요 0 | URL
와 첫번째 책 재미있어 보이네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 감사합니다.

로쟈 2009-03-10 00:03   좋아요 0 | URL
제목이 좀 자극적이죠.^^

Joule 2009-03-09 05:14   좋아요 0 | URL
로쟈 님 어법으로 말하자면 로쟈 님이 저를 가난하게 만들고, 로쟈 님이 또 저를 부자로 만들어요.

로쟈 2009-03-10 00:02   좋아요 0 | URL
병 주고 약 주는 건가요?^^;

2009-03-1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0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