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올해의 책'을 몇 권 추천한 걸 빌미로 삼아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한번 더 적었다. 이미 책을 읽은 독자들에겐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일간지 칼럼인지라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더 많을 거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경향신문(11. 11. 25) [문화와 세상] ‘나꼼수’의 소통을 배우자

출판계는 보통 전년 12월부터 올 11월까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개인적으론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가카헌정방송’ ‘나는 꼼수다’를 빼놓고 2011년을 생각할 수 없다면, 출판쪽도 마찬가지다. <닥치고 정치>를 제쳐놓고 올해의 책을 고르는 건 허전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허다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사실 <닥치고 정치>만큼 대놓고 ‘핵심’을 찔러준 책은 드물었다.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이었어. 힘으로 눌렀지. 그런데 이명박은 금융사기단이야. 돈으로 누른다”고 누가 그토록 간명하게 일러주었단 말인가.

<닥치고 정치>는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아 성실하게 불법을 자행해왔고 자행하고 있는 걸로 ‘추정’되는 권력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속 깊은 비판과 제안도 포함하고 있다.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라는 전제하에 김어준이 진보정치권에 던지는 충고의 핵심은 ‘느낌’과 ‘마음’의 중요성이다.

그의 육성은 이렇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정당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정치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을 얻는 건데, 마음은 대단히 제한된 자원이라고.” 이 ‘제한된 자원’을 움직이는 게 대중정치인 만큼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정서적 직관이다.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해서 정치적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로 김어준은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광을 든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적 응원 열기를 비판하면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위험한 민족주의와 파시즘적 징후까지 읽어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열광했던 건 화면에 등장한 축구선수들이 너무 섹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유럽에서 젊은 여자들이 축구선수를 좋아하는 게 돈 많고 몸 좋고 섹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월드컵 열기가 이후에 K리그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월드컵 대표팀이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 만큼 국민들도 이제는 K리그 경기장을 찾아서 지속적으로 응원해주는 게 ‘도리’라는 식의 ‘죄의식 마케팅’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다. 김어준은 오히려 경기장에 중계 카메라 대수를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죄의식 마케팅이나 윤리적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더이상 진보정치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올바른 이념을 설파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의 보수성을 탈피하지 않으면 메시지의 진보성은 휘발되고 만다. 그만큼 메시지의 전달형식은 내용 이상으로 중요하다.  

미디어학자들의 주장대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면 진보정치의 과제는 메시지를 더 급진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달수단을 급진화하는 데 있다. ‘나는 꼼수다’가 사용하는 팟캐스트 방식의 소통은 그러한 급진화의 유력한 사례라 할 만하다.

김어준은 정치를 한마디로 ‘연애’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기에 그렇다. 여기서도 핵심은 마음이 제한된 자원이라는 데 있다. 혹 진보정당의 답보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진보정당이 구사하는 언어는 이미 자기들이 설득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알아먹는 언어”라는 게 문제라고 김어준은 꼬집는다. 신자유주의와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시장통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진보정치는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FTA의 무효화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11. 11. 24.  

P.S. 참고로, 오전에 급하게 꼽아본 올해의 책은 <닥치고 정치> 외에 공자를 재발견하게 해준 리링의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2011),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사전'으로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등이다. 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도 내게는 '올해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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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1-11-25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나꼼수의 미덕은 진보담론을 대중화시킨데 있을 뿐만아니라 대중들의 급진적 잠재성을 추동해내었다는데 있죠. 이때문에 파시즘이나 포퓰리즘이 아닌가라는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지젝이 이야기했듯이 이처럼 대중의 집단적 욕망에 영합/부합하는 정치야 말로 '살아있는 정치'인 거죠. 이에 대한 진중권이나 이택광같은 중립성이나 논리를 내세우는 자유주의자 혹은 강단좌파들의 포지션은 대중을 한수아래로 보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자유주의/좌파에 불과하죠. 설령 그들의 논리가 김어준보다 수준높을 순 있어도 대중들의 마음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사는데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


김어준은 이러한 기존 진보파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음은 물론 그와 동시에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었다고 봐야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진보파내부에는 김어준에 대한 긍정적 평가못지 않게 부정적 평가의 기류도 만만치 않은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김어준의 문제점들도 짚어볼순 있겠지만(가령 황박케이스같은 경우)적어도 나꼼수에 있어서 만큼은 보고 배울점이 더 많아보이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1-11-27 09:5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십니다.^^ 소위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는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더군요.^^;

낭만인생 2011-11-2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홉스는 가진자의 손을 들어 주었죠. 지식인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오직 국민의 뜻을 따라야죠....

로쟈 2011-11-27 09: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인텔리겐치아)이란 말의 정의 자체는 못 가진 자의 편입니다.^^

jeandemian 2011-11-2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자유주의와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시장통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것인가..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인상적인 구절들입니다. 자기가 가진게 당연해선 안되는거..정말 멋지고 양심적인 말 같습니다만..

로쟈 2011-11-27 09:57   좋아요 0 | URL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는 마이클 샌델도 하는 얘기입니다.^^

테레사 2011-11-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번 공감합니다. 저는 솔직히 우리 동시대인들이 김어준 같은 사람을 가진 것 자체가 운이 아직은 우리 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언어만으로는 아무리 그게 진실된다 하여도 대중을 추동할 수 없다는 것이죠....
 

칼럼 주제를 고민하다가 낮에 읽은 글은 <창작과비평>(겨울호)에 실린 황승현의 '달동네 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이다.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인데, '달동네 우파'란 말이 원래 쓰이던 말인지 필자의 신조어언지 모르겠다. 여하튼 '한예슬 사건'에 대한 유익한 해석을 담고 있다. 칼럼에서 소개하려고 했으나 이미 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기에 대신 옮겨놓는다. '이중화법'이란 말은 요즘 유행에 맞게 '꼼수화법'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경향신문(11. 11. 16) “우파의 강남좌파 비판 이중화법 달동네 서민들 좌파화 저지 속셈”

“박봉에 시달리는 스태프도 가만히 있는데 거액의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이 촬영 거부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150호 발간을 맞아 창비와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제정한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자 황승현씨(35·사진)는 최근 한예슬씨의 촬영 거부 사태에서 무수히 쏟아진 이런 식의 화법을 거부한다. 그는 수상작으로 선정된 ‘달동네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 한예슬 우화를 솔개와 백조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스태프를 그렇게 걱정한다면 촬영 현장이나 제작 관행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만, 그들은 한예슬과 스태프를 대비시켜 둘 사이의 대립구도를 만들려고 할 뿐 제작 관행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황씨는 방송사와 제작사 등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러한 논리가 “열악한 처우의 스태프도 침묵하니까 돈 많이 받는 한예슬 너도 침묵하라는 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모두를 침묵시키기 위한 고도의 이중화법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중화법이란 이렇듯 사안의 본질을 감추고자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치환해 교묘히 둘러대는 수법을 일컫는 말이다. 이를 통해 “자본과 그 응원단들은 자본의 편임을 들키지 않고 실질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관철한다”는 것이다. 한예슬씨를 비판하면서 “국민과의 약속을 어겼다” “직장인에게 박탈감을 줬다”는 논리를 드는 것도 이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도덕성을 무기로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황씨는 한예슬 사태라는 표층의 작은 사건을 도구로 한국 사회의 담론 생산 구조를 깊숙이 파헤친다. 비정규직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과정도 유사하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은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처우 향상만 꾀한다”는 식의 비판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 노조에 대한 비난을 극대화시키는 소품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무상급식은 부자에게 급식을 하는 돈을 가난한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반대는 “가난한 아이들이 부자들의 세금으로 공짜밥을 먹는다는 절절한 고마움을 느끼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권리로서 복지를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황씨는 이러한 이중화법의 최종 목표가 ‘반미주의자이면서 자기 자식은 미국에 유학 보낸다’고 비판하는 우파의 논리에 숨어있다고 본다. 이 논리는 곧 ‘강남좌파’라는 단어로 함축된다. 이 말은 ‘강남좌파’의 대척점에 있는 ‘달동네우파’를 노린 것이다. “좌파는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겉으로만 서민을 걱정하는 위선자들이며 서민들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파라는 주장을 ‘강남좌파’라는 레토릭에 집약했다”는 것이다. “달동네 서민이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대신 좌파를 증오하게 만들어 좌파화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살뜰한 배려”라는 것이다.

황씨는 “언행일치를 한다며 자식을 미국 근처에도 보내지 않는 반미주의자라면 그들은 뼛속 깊이 반미라며 이들을 공격할 것”이라며 “이들이 좌파를 비난하는 경우를 빼고 유학을 가지 못한 가난한 서민을 걱정하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는 결론부에서 “이중화법은 파업을 직접 비난하지 않으면서 파업을 좌절시키는 수완이자 가난한 자를 걱정하면서 가난한 자의 복지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키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은 이번주에 나올 ‘창착과비평’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다. 황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2007년에는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돼 한동안 일간지 등에 영화평론 등을 써왔다.(황경상 기자) 

1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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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5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서양사학회 편,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 2011)를 거리고 삼았다. 이달엔 건강검진도 받았던 터라 '몸'이란 주제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간경향(11. 11. 29) 훈육과 정치도구로서의 몸

몸이란 주제는 얼마 전부터 인문학에서 각광받는 주제이다. 서양사 쪽도 예외가 아니어서 ‘몸과 생명정치로 본 서양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개최한 ‘서양에서 몸과 생명의 정치’란 학술대회 발표문을 단행본으로 재편집한 책이다. 시기적으론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성과 낙태, 동성애, 성과학, 수용소와 사형제 등 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성과 10편을 묶었다. 학술논문집의 모양새이긴 하지만, 몸과 생명, 그리고 권력이 서로 엮어지는 서양사의 여러 문제적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몸의 역사’에서 바로 미셸 푸코란 이름이 떠올린다면 인문학의 동향과 지형에 눈이 밝은 독자다. 서양에서 몸이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에서 훈육과 생명정치의 초점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시리즈 등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제시한 철학자가 푸코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역사를 읽다’란 기획이 ‘미셸 푸코와 몸의 역사’란 논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푸코의 기획의 미완으로 머문 데 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푸코는 몸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 속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했지만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가 펼쳐놓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에서 푸코식 몸의 담론을 변형하고 해체하고 더 발전시키는 일은 ‘푸코 이후의 푸코’들에게 남겨진 몫이 됐다. 두어 사례를 들어본다.  

‘중세 말 육체와 성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규율 메커니즘’이란 논문은 중세 기독교의 성윤리가 가져온 변화를 푸코적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서양에서 육체를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기독교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인데, 이러한 엄격한 성윤리를 체계화하여 성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음욕의 결과인 성기의 죄, 곧 성기의 반란 탓으로 돌리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성기의 원칙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성기 반란설’과 ‘리비도론’이 서양의 고전고대와 기독교 시대를 가르는 핵심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에서 성윤리의 주요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 즉 ‘삽입 모델’로부터 자신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발기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은 성적 주체성의 핵심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로 전환됐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의 무시됐던 수음이 성생활의 주요 문제로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미망인 형수와의 결혼을 의무화한 유대사회에서 오난의 죄는 정액을 형수가 아닌 바닥에 사정하여 형의 대를 단절케 한 죄였지만 기독교에서는 수음이 그러한 죄로 간주됐다. 그래서 자신의 성을 말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자 ‘주체의 자기 이해 형태’가 됐다.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고해성사에서 고백의 주체는 ‘자기와의 관계’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이승뿐 아니라 저승으로까지 연장됐다. 몸이 사회적‧문화적 배경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리 규정돼왔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다.   

‘나치 집단수용소와 생명정치’란 논문은 생명정치란 푸코의 개념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여 정치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든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저작과 함께 검토한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는 영토와 질서(국가), 출생(민족)이란 세 요소로 규정되는 근대 민족국가 체제가 자신이 처한 항구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요구하게 된 장치이다. 아감벤은 나치의 집단수용소를 그런 장치의 전범으로 제시한다. 나치의 생명권력은 수감자들에게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적 소통능력을 박탈하고 그들을 단순한 생존상태, 곧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수용소는 보스니아의 오마르스카 강간수용소에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몸으로 읽는 역사’는 지금 현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걸 <몸으로 역사를 읽다>는 말해준다.  

1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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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2011-11-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11-11-23 22:27   좋아요 0 | URL
^^

2011-11-2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11-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성의 역사는 오래전에 나온것 같은데 저 위의 책은 재간인가 보네요^^

로쟈 2011-11-24 22:12   좋아요 0 | URL
네, 표지만 바뀐 듯해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꼽은 올해 출판계의 키워드는 '위로와 공감'이라 한다. 상반기 최대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가 대표하는 것이 바로 '위로와 공감'이며, '안철수 열풍'도 이러한 맥락에 놓인다고 분석한다. 개인적으론 상반기에 처음 개시돼 하반기를 강타한 '나꼼수 열풍'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약간 수정하자면 올해의 키워드는 '위로와 꼼수'가 아닐까. 베스트셀러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의 임팩트를 고려하더라도 그게 더 공정할 듯싶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미FTA 정국과 관련해서도 '정답'을 말해놓았다...

한겨레(11. 11. 21) 김어준 “우린 종자가 달라…MB정권이 접해보지 못한 잡놈이다”

“대중이 안철수에 열광하는 건 안철수가 자신의 가치를, 말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과 선택으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주장이 아니라 물증을 목격한 것이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열풍의 주역인 김어준(42) <딴지일보> 총수는 21일 <한겨레>와 한 단독 인터뷰에서 각종 여론조사 결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양자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돌풍의 배경을 이렇게 풀이했다. 



그는 지난 5월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씨와 나눈 대담을 묶어 출판한 <닥치고 정치>(10월5일 출간)에서도 안 원장에 대해 “만약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이 정치 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만 하면 기존 정치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나꼼수 열풍 이후 쇄도하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안철수·나꼼수 열풍 배경과 보수언론의 역공,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진보정치에 대한 생각을소상히 밝혔다.

보수언론이 나꼼수를 괴담의 진원지라고 지목하고 있고 경찰이 수사까지 나서고 있는 데 대해서는 “보수는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느라 발달한 원시감정인 혐오감을, 상대에 대한 윤리적 단죄의 근거로 삼아버린다”고 풀이하고 “한마디로 쫄았다고 할 수 있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런 방식으론 우릴 잡을 수 없다. 우린 여태 그들이 상대해왔던 사람들과 종자가 다르다. 잡놈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가 우릴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나꼼수 출범 초기에 이미 “기존의 메시지 유통 구조를 깨는 새로운 진보의 유통프레임으로 나꼼수를 구상했다. 대박난다”고 성공을 점친 데 대해서도 “이럴 줄 알았다. 가카(이명박 대통령) 덕이다”라며 특유의 어법으로 받아넘겼다.

또 나꼼수가 대중들에게 “쫄지 말라”고 선동한다는 시각에 대해서도 “나는 꼼수다’는 특정 주장이 아니라 어떤 주장도 가능하다는 태도 자체를 선동하는 게 근본 목적”이라고 되받았다. 이런 도저한 자신감은 나꼼수 팀 멤버를 “잡놈”이라고 표현한 본인의 기질에서 비롯되겠지만, 나꼼수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도와도 무관하지 않는 듯하다.

전문 리서치 기관인 마크로밀코리아가 11월 1~2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체 서울시민 29.7%가 나꼼수를 청취했다. 나꼼수 열기는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져 지난 19일 대전에서 열린 나꼼수팀의 무료 공개콘서트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2만여명(나꼼수 쪽 집계, 경찰 추산은 5천명)이 운집했으며, 공연 뒤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낸 입장료가 1억원 가량 모였다. 심지어 박근혜 한나라당 지지모임인 박근혜를 사모하는 모임(박사모)쪽은 나꼼수를 패러디한 ‘너는 꼼수다’라는 인터넷 방송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정치 대담집 <닥치고 정치>는 지난달 5월 출간 이후 한달 보름만에 26만권 판매됐다고 <푸른숲> 출판사가 밝혔다. 현재도 하루 5천~7천권씩 나가며 애플 설립자 스티브잡스의 전기 <스티브잡스>와 판매순위 1~2위를 다투고 있다. 지난달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참여 경선에 김어준이 등장하자 갑자기 “김어준”을 연호하던 객석의 반응은 이미 ‘김어준 현상’을 예고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대중들의 관심에 대해 “귀찮다”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와의 인터뷰는 폭주하는 나꼼수 콘서트와 각종 강연 때문에 서면으로 이뤄졌으며, 일부 전화로 보충했다.(김도형 선임기자) 



■ 나꼼수 열풍 

- ‘나꼼수’ 열풍 이후 김 총수에 대중들의 관심은 여느 아이돌 스타 못지 않게 뜨겁다. 한 스포츠신문이 ‘인정옥 작가와 열애’를 보도하기도 하고, 지난 10월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야권 서울시장 후보선출을 위한 국민참여 경선 행사장에서는 ‘김어준’을 연호하기도 했다. 본인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홍대선 딴지일보 부국장은 한 주간지 기고문에서 본인은 “귀찮아”라고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는데...파트너인 인정옥 작가의 반응은, 혹시 주의사항은 없었는가?

“함께 귀찮아한다.”

- 나꼼수 열풍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느냐고 보느냐? 각종 조사를 보면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두 가지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첫째, 내가 화났다는 사실과 나만 화가 난 게 아니란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의 광범위한 공유 정도를 각자 인지하도록 보조한 것. 둘째, 그래서 결국 서울시장 보선을 나의 선거로 만드는 과정을 보조한 것.”

- 나꼼수는 광고없이 제작되고 있다.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앞으로도 광고없는 나꼼수는 계속되는가? 그 이유는?…

“티셔츠 판매와 토크 콘서트 수익 그리고 서적 판매 수익의 일부. 상업광고는 받지 않는다. 광고의 영향을 받고 싶지도 않고 그 광고주를 걱정하고 싶지도 않다. 필요한 시점까지 스스로 버틸 것이며 역할이 끝나면 사라질 것이다.”

- 조동중 보수신문들이 최근 나꼼수를 괴담의 진원지로 규정하고 포문을 열어 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첫째, 법적 태클의 사전 분위기 조성용. 둘째, 보수층의 청취자군 유입 차단. 키워드를 괴담으로 택한 건 정신과적 차원에서도 매우 전형적인 보수의 반응이다. 보수는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느라 발달한 원시 감정인 혐오감을, 상대에 대한 윤리적 단죄의 근거로 삼아 버린다. 공포의 대상을 무섭다고 하지 않고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쫄았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가카의 팔들은 멤버 4인을 도덕적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낄 거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론 우릴 잡을 수 없다. 우린 여태 그들이 상대해 왔던 사람들과 종자가 다르다. 잡놈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디까지 각오가 되어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는 우릴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 나꼼수를 듣다보면 기존 저널리즘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기능을 한다는 측면에서 대중들의 공감대를 자아내는 측면도 있지만, 풍자와 유머, 조롱이 지나쳐서 도를 넘어선다는 비판도 있다. 나꼼수를 새로운 유형의 ‘정치 예능프로그램’쯤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비판을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매회 600만 다운로드가 넘는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하고 일종의 저널리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에 따른 책임도 큰 것이 아닌가?

“이런 방송을 이런 환경에서 이런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만으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제 몫의 책임은 하고 있다. 그로 인한 리스크 역시 누가 대신 져주지 않는다. 각자 자기 몫이나 잘 하자.”

- 개인적으론 특히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사건과 관련해서 진보언론의 보도태도를 “비겁하다”고 비판하면서 이것은 권력의 꼼수이니까 “쫄지마라”고 대중들에게 선동했다는 느낌도 든다

“모든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선동이다. 일기조차 자기 선동이다. 하지만 그 선동의 성공 여부는 데시벨이 아니라 맥락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선동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맥락이 왜 수용 됐는가를 따지는 것이 옳다. 그리고 선동에 관해서라면, ‘나는 꼼수다’는 특정 주장이 아니라 어떤 주장도 가능하다는 태도 자체를 선동하는 게 근본 목적이다.”

- 인터뷰 대담집 <닥치고 정치>를 보면 지승호씨와 인터뷰 시점(5월)에서 “대박난다”고 큰소리를 쳤다. 기존의 메시지 유통 구조를 깨는, 새로운 진보의 유통 프레임으로서 ‘나꼼수’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런 구상과 예측은 보기 좋게 들어맞은 것 같다. 아닌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프레임이 구축된 것인가?

“이리 될 줄 알았다. 가카 덕이다. 생각보다는 빨랐다. 절반 정도 왔다.”

- 나는 꼼수다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

“가카의 세계관을 표현할 단어로 그 이상 적확한 단어가 없어서.”

- 나꼼수의 작명은 <나는 가수다>의 패러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김 총수가 대중들과 밀접하게 친해진 데는 ‘나가수’와 관련한 발언을 라디오 방송 중에 하고 이를 각종 인터넷 매체들이 받아서 쓰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대중들과의 만남의 접점을 미리 의식한 것인가?

“그러고자 했다.”  



■ 안철수와 문재인

- <닥치고 정치>를 보면 안철수 현상도 이미 예측했더라. “만약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이 정치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만 하면 기존 정치권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날 거야”라고. 김 총수의 예측은 정확하게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5월에 이미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었나?

“난 무당도, 예언가도 아니다. 그러니까 예측을 한 게 아니라 그저 당대의 결핍을 읽었을 뿐이다. 그 결핍의 크기가 그로 인한 현상의 크기를 결정한 것이다.”

- <닥치고 정치>에서는 당신이 왜 문재인인가를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현재 안철수를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왜 안철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가? 문재인이 야권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가?

“대중이 안철수에 열광하는 건 안철수가 자신의 가치를, 말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과 선택으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주장이 아니라 물증을 목격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문재인이 적합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문재인과 안철수에 관해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문재인과 안철수는 개인적인 득실 따위와 무관하게,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것이 가능한,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이라는 점밖에 없다.”

-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면 박근혜 대항마로는 최적의 상대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거품이 일시에 꺼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찮다.

“거품이라 보는 이들은 둘 중 하나다. 거품이길 바라거나, 거품일까 두렵거나. 그런 견해가 만만찮은지 아닌지 관심 없다.”

■ 진보정치 관련

- <닥치고 정치>를 보면 진보정치의 한계는 대중적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지적에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반엠비(MB) 전선 구축이라는 당위에 매몰되어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가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사퇴 안한 데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등 진보신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그런 관점에서 당신은 진보주의자인지 묻고 싶다

“노회찬 후보는 완주할 당연한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 자체를 탓한 게 아니다. 그 완주로 인한 정치적 득실의 셈법이,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했다는 걸 지적한 거다. 진보정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게 아니라 냉정한 거다. 가장 잔인하게 평가했던 정당은 오히려 국민참여당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에 대한 평가와 나의 정치적 정체성 간엔 아무 상관관계도 없다.”

- 황우석 사태나 축구에 대한 태도 등을 보면 당신은 과도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특히 ‘황빠’라는 시각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우린 단일 민족이 아니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로 가르쳐야 한다고, 오랜 전부터 주장해왔다. 황우석의 국익도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날 민족주의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비장한 입장을 접할 때마다 솔직히 귀엽다. 황우석에 대한 입장은 <닥치고 정치>에서 밝힌 바, 그대로다.”

(그는 <닥치고 정치>에서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긴다”라고 황 박사 비판이 가혹했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 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을 먹고 갈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 노빠로 불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한-미 FTA를 개시한 것도 노무현 전 대통이었고, 그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과 집값 폭동으로 양극화의 고통이 가중됐는데

“난 자연인 노무현의 팬이다. 그만한 남자, 못 봤다. 여전히 슬프고 그립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 신자유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양상의 양극화를 야기할 것이며 어떤 속도로 진행될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은 대다수가 그랬다. 그 심각성을 인지한 집권 중반 이후엔, 정책수단도 국정장악력도 이미 제한적이었다.”

“노무현의 FTA는 신자유주의를 불가항력의 세계적 트랜드로 인정하고 그에 적극 대처하고자 했던 의지의 산물이다. 선의만으로 양해될 수 없는, 결과로 책임지는 정치의 영역에선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적 통상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선, 이명박의 FTA와 그 세부 조항의 본질은 같다.”

“다른 점은 두 가지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통해 이미 명백하게 확인된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그로 인한 세계사적 성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항의 FTA를 추진하고자 하는 의도 그 자체. 다른 환경은, 너무나도 당연히, 다른 정책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를 싸워 지켜야 할 가치라고까지 말한다. 이익이 곧 가치인 그들에겐 당연하다. 문제는 그 이익의 대상이 1%라는 점. 그들의 의도는 그렇게 사사롭기만 하다.”  



■ 김어준의 정체성

- <한겨레> ESC 칼럼이나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인터뷰 특강을 묶은 <내가 걸은 만큼 내 인생이다>를 보면 김 총수는 누구보다 연애심리를 잘 아는 ‘연애박사’ 같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마초 대왕’이라는 별명도 가능할 것 같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그런 평가에 대해 신나지도 억울하지도 않다. 나 자신에 대해 시큰둥하다. 난 내가 중요하지 않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할 뿐이다.”

- 김 총수는 다른 사람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와 화법으로 대중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타고 난 것인가, 후천적 노력의 산물인가?

“운이다.”

- 자신을 본인 스스로 한마디로 규정하면 어떤 말이 적당할까? 홍대선씨는 ‘돌도끼를 든 데카르트’라고 표현했는데….

“그냥 타고난 결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불완전한 한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현재의 김 총수를 있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나 책, 사건 등이 있다면?

“그런 건 없다. 그저 살아오며 해왔던 선택들이 하나하나 누적되어 지금의 내가 됐다.”

- 한국의 청춘들은 힘든 삶은 살고 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청춘만 힘들지 않다.”

- 김 총수는 그동안 촌철살인의 논평을 통해 청춘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특히 10·26 재보선 과정에서 나꼼수를 통해 보여준 역할은 지대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전까지 좀 떨어져서 정치논평가 평론가 역할을 했다면, 이번엔 정치판의 플레이어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평가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김 총수의 얼굴이 정치인으로 바뀌고 있는 장면은 아닐까 관측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기회가 있다면 정치를 직접 해볼 생각은 없는가.

“전혀 없다.”  

1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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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11-22 09:08   좋아요 0 | URL
"청춘만 힘들지 않다.”(sic!)

로쟈 2011-11-24 09:14   좋아요 0 | URL
쫄지않는 게 시크한 시대에요.^^
 

신자유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파국적 재앙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데이비드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오고 있는 GPE(지구정치경제) 시리즈의 첫 두 권도 맥락을 같이하는 책들이다.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와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이 그 두 권이다.

  

경향신문(11. 11. 19) 신자유주의 붕괴, 자본과 타협보다는 저항을

“우리의 가난은 그들의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겐 이득이다.”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신자유주의 30년의 팡파르가 끝난 지금, 99%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400년 전의 연극 대사와 극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낼리(58)에 따르자면, 2008~2009년의 위기를 촉발한 악성 은행 채무는 “주권국가의 채무로 형태가 바뀌어” 사람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채무의 증가를 막고자 “긴축시대를 선포”했다. “연금, 교육예산, 사회복지, 공공 부문의 임금과 일자리를 대폭 삭감”하면서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그 압박은 99%의 몫이다. “세계적 은행들이 받은 구제금융 비용을 노동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지불”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쓰던 2010년에 벌어진 몇몇 사례를 거론한다. “라트비아는 교사의 3분의 1을 해고했고, 아일랜드는 공무원 연금을 22% 축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90만 빈곤아동의 건강보험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지켜내기”다. 자본주의 엘리트들의 부와 권력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부 개입을 배제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삼았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역사상 가장 많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당혹감으로 위세가 약간 꺾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 지출의 대폭적 삭감”이라는 “가혹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논리를 바꿨다.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경기후퇴를 견뎌내려는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음흉한 속내가 숨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것은 부자들에게 매우 이롭다”면서 “지출삭감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부자에게로 엄청난 부를 이전하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99%의 비참한 삶을 담보로 “통계상 회복”이 겉으로나마 이뤄진다. 그것은 당연히 “대대적 해고와 임금 삭감, 사회 서비스의 대폭 축소를 통해 노동대중이 대가를 치른 결과”다.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걸어온 길을 책의 두번째 장에서 잠시 일람한다. 그는 1948년부터 1973년까지를 “유럽·일본·북미 등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주체들의 경기가 급상승하면서, 서구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량을 3배로 키운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이윤율 하락과 과잉축적이라는, 친숙한 패턴에 따른 호황의 둔화”와 필연적으로 직면했다. 이어진 “위기의 10년”을 거치며 “자본주의를 지켜내려는”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것을 “자본에 의한 노동의 패배, 새로운 불평등의 도래”라고 규정한다. 각국 정부는 “노동 유연화”를 부추기면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과 노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대량 해고와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구사하는 음흉한 전략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 대처 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이었던 앨런 버드는 “실업 상승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고용 불안정은 “규율과 처벌에 의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에 따라 1980년대 초 북미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파업은 차례로 분쇄됐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의 노조 조직률도 어처구니없이 하락”했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가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자본주의의 지리적 재편”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요약된다. 약자의 입장에 선 국가의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삶으로 내몰렸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었던 칠레”의 국민소득에서 노동자 소득이 차지하는 몫이 “1970년대에는 47%였지만 1989년에는 19%로 급락했다”고 예시한다. “유사한 사태는 에콰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도 발생”했다. 캐나다·미국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혜택을 봤다는 멕시코에서는 “NAFTA가 체결된 지 15년 만에 인구의 80%가 빈곤 상태에 빠졌고, 상위 0.3%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했다.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간 주범이 금융 부문이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1973년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였지만, 2007년에는 무려 41%를 차지했다”면서 “급증하는 부채의 부담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백인과 유색인종 간 차별과 분리에 근거한 종전까지의 대출관행으로는 이윤 창출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은행들은 “보다 약탈적인 편입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빈곤층 유색인종들은 과거에 받지 못했던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감수”해야 했다.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금융 수탈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는 와중에,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더욱 강탈적인 착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노동자 계급의 점진적인 소득 감소”를 꼽으면서 “인종차별을 받는 노동자 집단이 가장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은 막강했다. IMF 관리들이 구조조정 대상국의 재무장관에게 들이미는 전형적 조항들은 “혹독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것, 사회복지 서비스를 대폭 줄일 것, 수천명의 교사·간호사·사회복지사를 해고할 것, 생필품에 대한 정부 지원을 철폐할 것, 금융 부문을 해외시장에 개방할 것, 최저임금을 인하하고 연금을 축소하며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것”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겪은 나라들은 “100여개 국”이다. 그 결과는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고용은 더 불안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공공 자산을 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고, 해외 은행들이 금융을 통제하게 됐다. 지역과 세계 엘리트들은 그 나라 바깥으로 재산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으며, 경제성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교육과 보건 의료 수준은 급격히 추락했고 유아사망률은 증가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작금의 파탄이 “단순한 주기적 불황이나 체제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슬럼프”는 “만성화한 전 지구적 경기침체”를 뜻한다. 그것은 ‘더블딥’과도 다르다. “(서로 연관된) 다차원적인 위기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졌다가 국가 부채 위기가 터지고, 사회복지가 후퇴하고 실업률이 솟구치는 등 여러 종류 위기들이 장기간에 걸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중환자실에서 보여주는 위태로운 증세들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가 앞으로의 변화와 관련해 주시하는 것은 “소위 서발턴(subaltern)이라 불리는 하위계급의 움직임”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이주민,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우리 앞에는 세가지 길이 있다. “(하위계급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는 데 협조”한다면 “신-신자유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자본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공유지와 틈새시장, 사유화할 수 있는 공공 부문 등 “착취의 소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위 주체들이 파시즘적 자본주의에 포섭된다면 “앞으로도 50~100년간 착취 구조가 건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되, 국가가 공공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모델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국가는 부채더미에 오르고 사적 자본이 막강해진” 현재의 상황에서 “공공 부문은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먼저인가 이윤이 먼저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 앞에서 “둘 다 추구하겠다는 절충은 모순”일 뿐이며 “이분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저자가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6장 ‘거대한 저항의 물결’에서 드러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반기를 든 전 세계의 대항운동에 주목한다.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주,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멕시코 오아하카 주에서 일어났던 대중봉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맹(SYRIZA)과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남미의 신좌파 운동, 점점 급진화 경향을 보이는 미국 각지의 노동운동도 상세히 거론한다. 그 모든 대항운동의 공통점은 “노동자 대중의 직접적 이해에 기반을 둔, 급진적이고 조직화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중과 노동자의 공동체가 통제하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주의를 고민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계승자다.

그는 바야흐로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대항운동들을 “급진적 참여 민주주의”로 명명하면서 “새로운 진보 좌파 운동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좌파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좌파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과의 절충이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과 노동자의 직접 참여를 통해 정치와 경제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번역자들이 캐나다에 있는 저자의 집에서 나눈 대담을 수록했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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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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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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