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5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서양사학회 편,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 2011)를 거리고 삼았다. 이달엔 건강검진도 받았던 터라 '몸'이란 주제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주간경향(11. 11. 29) 훈육과 정치도구로서의 몸

몸이란 주제는 얼마 전부터 인문학에서 각광받는 주제이다. 서양사 쪽도 예외가 아니어서 ‘몸과 생명정치로 본 서양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몸으로 역사를 읽다>(푸른역사)는 한국서양사학회에서 개최한 ‘서양에서 몸과 생명의 정치’란 학술대회 발표문을 단행본으로 재편집한 책이다. 시기적으론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성과 낙태, 동성애, 성과학, 수용소와 사형제 등 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성과 10편을 묶었다. 학술논문집의 모양새이긴 하지만, 몸과 생명, 그리고 권력이 서로 엮어지는 서양사의 여러 문제적 장면들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몸의 역사’에서 바로 미셸 푸코란 이름이 떠올린다면 인문학의 동향과 지형에 눈이 밝은 독자다. 서양에서 몸이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에서 훈육과 생명정치의 초점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시리즈 등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제시한 철학자가 푸코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역사를 읽다’란 기획이 ‘미셸 푸코와 몸의 역사’란 논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푸코의 기획의 미완으로 머문 데 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푸코는 몸을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장 속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했지만 자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론화하거나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그가 펼쳐놓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에서 푸코식 몸의 담론을 변형하고 해체하고 더 발전시키는 일은 ‘푸코 이후의 푸코’들에게 남겨진 몫이 됐다. 두어 사례를 들어본다.  

‘중세 말 육체와 성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규율 메커니즘’이란 논문은 중세 기독교의 성윤리가 가져온 변화를 푸코적 시각에서 재구성한다. 서양에서 육체를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기독교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현상인데, 이러한 엄격한 성윤리를 체계화하여 성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음욕의 결과인 성기의 죄, 곧 성기의 반란 탓으로 돌리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성기의 원칙을 ‘리비도’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성기 반란설’과 ‘리비도론’이 서양의 고전고대와 기독교 시대를 가르는 핵심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에서 성윤리의 주요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 즉 ‘삽입 모델’로부터 자신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발기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은 성적 주체성의 핵심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로 전환됐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거의 무시됐던 수음이 성생활의 주요 문제로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미망인 형수와의 결혼을 의무화한 유대사회에서 오난의 죄는 정액을 형수가 아닌 바닥에 사정하여 형의 대를 단절케 한 죄였지만 기독교에서는 수음이 그러한 죄로 간주됐다. 그래서 자신의 성을 말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자 ‘주체의 자기 이해 형태’가 됐다.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고해성사에서 고백의 주체는 ‘자기와의 관계’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이승뿐 아니라 저승으로까지 연장됐다. 몸이 사회적‧문화적 배경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리 규정돼왔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다.   

‘나치 집단수용소와 생명정치’란 논문은 생명정치란 푸코의 개념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하여 정치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든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저작과 함께 검토한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아감벤은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는 영토와 질서(국가), 출생(민족)이란 세 요소로 규정되는 근대 민족국가 체제가 자신이 처한 항구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요구하게 된 장치이다. 아감벤은 나치의 집단수용소를 그런 장치의 전범으로 제시한다. 나치의 생명권력은 수감자들에게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언어적 소통능력을 박탈하고 그들을 단순한 생존상태, 곧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수용소는 보스니아의 오마르스카 강간수용소에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몸으로 읽는 역사’는 지금 현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걸 <몸으로 역사를 읽다>는 말해준다.  

11. 11. 2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원 2011-11-2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11-11-23 22:27   좋아요 0 | URL
^^

2011-11-23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11-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성의 역사는 오래전에 나온것 같은데 저 위의 책은 재간인가 보네요^^

로쟈 2011-11-24 22:12   좋아요 0 | URL
네, 표지만 바뀐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