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에 '올해의 책'을 몇 권 추천한 걸 빌미로 삼아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한번 더 적었다. 이미 책을 읽은 독자들에겐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일간지 칼럼인지라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더 많을 거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경향신문(11. 11. 25) [문화와 세상] ‘나꼼수’의 소통을 배우자
출판계는 보통 전년 12월부터 올 11월까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개인적으론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가카헌정방송’ ‘나는 꼼수다’를 빼놓고 2011년을 생각할 수 없다면, 출판쪽도 마찬가지다. <닥치고 정치>를 제쳐놓고 올해의 책을 고르는 건 허전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허다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사실 <닥치고 정치>만큼 대놓고 ‘핵심’을 찔러준 책은 드물었다.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이었어. 힘으로 눌렀지. 그런데 이명박은 금융사기단이야. 돈으로 누른다”고 누가 그토록 간명하게 일러주었단 말인가.
<닥치고 정치>는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아 성실하게 불법을 자행해왔고 자행하고 있는 걸로 ‘추정’되는 권력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속 깊은 비판과 제안도 포함하고 있다.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라는 전제하에 김어준이 진보정치권에 던지는 충고의 핵심은 ‘느낌’과 ‘마음’의 중요성이다.
그의 육성은 이렇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정당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정치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을 얻는 건데, 마음은 대단히 제한된 자원이라고.” 이 ‘제한된 자원’을 움직이는 게 대중정치인 만큼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정서적 직관이다.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해서 정치적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례로 김어준은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광을 든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적 응원 열기를 비판하면서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위험한 민족주의와 파시즘적 징후까지 읽어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던 여성들까지 열광했던 건 화면에 등장한 축구선수들이 너무 섹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유럽에서 젊은 여자들이 축구선수를 좋아하는 게 돈 많고 몸 좋고 섹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월드컵 열기가 이후에 K리그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월드컵 대표팀이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 만큼 국민들도 이제는 K리그 경기장을 찾아서 지속적으로 응원해주는 게 ‘도리’라는 식의 ‘죄의식 마케팅’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다. 김어준은 오히려 경기장에 중계 카메라 대수를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죄의식 마케팅이나 윤리적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더이상 진보정치의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올바른 이념을 설파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의 보수성을 탈피하지 않으면 메시지의 진보성은 휘발되고 만다. 그만큼 메시지의 전달형식은 내용 이상으로 중요하다.
미디어학자들의 주장대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면 진보정치의 과제는 메시지를 더 급진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달수단을 급진화하는 데 있다. ‘나는 꼼수다’가 사용하는 팟캐스트 방식의 소통은 그러한 급진화의 유력한 사례라 할 만하다.
김어준은 정치를 한마디로 ‘연애’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이기에 그렇다. 여기서도 핵심은 마음이 제한된 자원이라는 데 있다. 혹 진보정당의 답보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진보정당이 구사하는 언어는 이미 자기들이 설득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알아먹는 언어”라는 게 문제라고 김어준은 꼬집는다. 신자유주의와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시장통 아줌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할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진보정치는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FTA의 무효화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11. 11. 24.
P.S. 참고로, 오전에 급하게 꼽아본 올해의 책은 <닥치고 정치> 외에 공자를 재발견하게 해준 리링의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2011),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사전'으로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등이다. 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도 내게는 '올해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