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에 먼지나 날릴 만한 3월초순에 '백년만의 폭설'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듯하다. 일기와 관계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로선, 크게 불편한 일도 없고. 대학가의 서점들이 주로 수업교재를 구하려는 학생들로 미어터지는 풍경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두툼한 경제학/경영학 책들과 몇 만원씩은 나갈 듯한 자연계 원서들이 수십 권씩 쌓여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젊어지는 듯하다. 분명 나에게 그런 날들은 '과거'이지만, 또 그런 날들은 해마다 '비인칭적으로' 반복된다! 왠지 그런 풍경들 속에 나도 (나를 잊고!) 끼여들었으면!...

하는 기분에, 서점에 자주 들러,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도 괜히 쓰다듬어 보고, 이미 봄호가 나오는 계간지들 서가에서 지난 겨울호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두어 주쯤 됐지만, 그러다 발견한 글 두 편. 하나는 <과학사상>(47호)에 실린 이진우의 "생명공학 시대의 '주체' 또는 '탈주체'"이고, 또 하나는 <당대비평>(24호)에 실린 윤평중의 지젝과의 대담, "사유와 실천의 유희는 가능한가>이다(*<윤평중 사회평론집>(생각의나무, 2004)에 재수록돼 있다). 후자의 부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지난 가을 방한시 계명대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유전공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란 강연문의 해제 형식인 이진우 교수의 글은 '유전공학에 관한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계몽'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미 그 강연문을 읽었던 독자에게라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내용이다. 필자가 미주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글은 그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 논의라기보다는 그의 사상을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젝 관련 문헌의 하나로 카운트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찾기 어렵다(참고로, 강연문의 번역은 홍준기씨가 맡았었는데, 책으로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지젝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만 알아보면 되겠다. 부지런한 분들은 책을 직접 참조하면 더 좋을 거 같고.전반부에서 슬로베니아와 지젝의 가정환경을 다룬 부분, 미국에 대한 견해 등은 생략하고, 바로 철학에 대한 것. 우선, 그에게서 라캉과 헤겔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라캉과 헤겔이 철학적 문제의식이 자신의 사유에 있어서 주요 화두라는 걸 인정하면서 "라캉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헤겔없는 정신분석학은 방향감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패러디적 문구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물론 이때 그가 주로 참조하는 라캉은 초기의 구조주의적 라캉이 아니라 후기의 라캉이다. 때문에, 그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포스트모던적 테제를 라캉과 결부시키는 데 완강하게 반대해왔다. "어쨌든 주체라는 행위자를 설명함에 있어 후기 라캉이 훨씬 적합한 이념적 틀을 제공하지요.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한 저의 집중적인 관심도 주체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 관념론이 주체 문제에 대한 가장 정교하고 역동적인 철학적 설명의 틀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그의 헤겔론은 곧 역간될 예정인(*이미 역간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 집약돼 있다(이 책에서, 헤겔은 들뢰즈 이상의 매력적인 철학자로 탈바꿈해 있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란 데뷔작의 대성공(!)에 놀라는 만큼이나 뒤이어 나온 이 책의 (흥행)'실패'에 의아해 하는데, 정작 자신이 보기에 더 중요하고 더 훌륭한 책은 이 후자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있다). 그가 새로이 2판을 내면서 100쪽이 넘는 서문을 다시 붙인 것도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역간되면, 지젝에 대한 오해나 비판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지젝이 그토록 강조하는 혹은 숭배하는 헤겔의 주저,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면서 유감스럽다(새로운 번역본이 시급히 나오기를 기대한다). 헌책방들을 뒤지면 한두 권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공포의 04학번 신입생들에게 대철학자 헤겔은 말 그대로 '공갈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헤겔학회가 열리고 가끔씩 헤겔 연구서가 나오는 건 넌센스가 아닐까? 그들의 헤겔은 독일에만/독일에나 있는 것인지? 딴은, 우리나라는 헤겔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인 것이니까 그다지 나쁠 게 없는 것인지도. 들뢰즈라면 이러한 헤겔의 공백을 반가워했을까?...

어쨌든 지젝이 생각하는 헤겔의 핵심, 혹은 변증법의 핵심: "변증법이 존재계 일반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되지 않고 주체의 역동적 자기형성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독해된다면 부정의 이념은 자연스럽게 주체가 내외부적으로 실험하는 부정의 부정으로 전화하지요. 즉 부정성은 주체의 자기 관계적 부정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주체의 형성이라는 이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과정 자체를 일반적 차이와 구별하기 위해 절대적 차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윤평중 교수는 "절대정신의 존재론을 설파한 헤겔과 자기 관계적 부정성을 강조한 헤겔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하지만, 지젝은 바로 그 점이 헤겔의 묘한 매력이 아니겠느냐고 받아넘긴다.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얘기와 함께 영화 얘기. 그 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다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대목인데). 지젝의 답변은 기가 차다: "제가 분석하거나 해부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건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한 장은 바로 로셀리니의 3부작에 바쳐져 있는데, 정작 그는 단 한편의 로셀리니도 보지 않았다니! 이걸 사기라고 해야 할지, 묘기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는 무엇보다도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즐겨 말하고 분석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1/3밖에 못 봤다고 하더라도 그 분량은 우리의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얘기. 그는 '제2의 자본론' 운운하며, <제국>을 서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서평은 사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며, 정작 책은 아주 실망스러웠다고. 이 실망은 그가 다시 쓴 서평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요점은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게 기대이하라는 것이다. 지젝은 말한다: "저는 지금 이 시점, 그리고 앞으로 전망 가능한 중장기적 지평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지적으로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좋아하는 지젝은 이런 말을 하는 지젝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한마디로 저는 선진 자본주의 교육제도의 수혜자이자 지식 특권계급으로서의 서구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라크 문제나 유고 사태를 거론하면서 이들 비서구인들에 대해 취하는 거들먹거림이나 위선에는 이제 신물이 납니다."(짝짝짝!)

그럼, 당신의 대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어떤 종류의 해답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문제를 풀 해답이 존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범위 안에서 꾸준히 할 뿐입니다. 우리네 일상의 무늬와 결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일성과 균열, 그리고 현대적 삶의 무한한 모순과 복합성을 웅변하는 사례들이 다양하게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따져 묻고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으로,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음악을 들을 때라고 답한다. 그는 생각을 할 때나 쉴 때나 항상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는데, 덧붙여 자신의 비밀을 문득 털어놓는다: "저는 언젠가는 대작 오페라 한편을 직접 써서, 뉴욕 무대 같은 데에서 직접 연출해 올리는 것을 궁극적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음악미학에 대한 질 높은 연구서, 예컨대 아도르노의 작업에 비견될 만한 책도 펴내고 싶습니다."



이 대담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로셀리니 영화 얘기와 함께 이 음악 얘기이다. 두 이야기는 지젝을 좀더 가깝게 느끼도록 해준다. 대담을 마친, 윤평중 교수의 감상도 흥미로운데, 그는 지젝의 경이로운 통찰력과 감수성, 그리고 에너지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불안정한 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그의 고질병인 '당뇨' 때문에 야기되는 불안한 제스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전형적인 조증(manie) 이 아닐까, 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당연히 그러한 조증에나 울증이 동반된다(니체이 경우처럼). 실상 지젝 자신이 라캉주의자들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그 자신이 비판적이지만). 그의 결론: "나는 지젝을 니체가 미래 위버멘쉬의 모델로 상정한 '예술가-철학자'의 상에 가장 근접한 인간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어떤 위버멘쉬, 혹은 또 다른 헤겔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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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13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오페라 같은데 어떤 작품인지 혹시 알려주실 수 있을지요?

로쟈 2008-06-01 22:50   좋아요 0 | URL
글쎄요, 오래 돼서... 짐작엔 <돈죠반니> 같습니다...
 

어젯밤에 비로소 <지젝과의 대담 >(Polity, 2004)을 다 읽었다(*지난 1월초에 쓴 글이다). 170쪽 정도의 얇은 분량이지만, 주로 출퇴근 시간에만 야금야금 읽느라고 8일쯤 걸린 듯하다. 그래도 새해 들어 완독한 첫번째 책이라 나로선 뜻이 없지 않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지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하며 또 필수적인 책이다.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는 지론이지만,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지름길은 그의 자전적인 기록이나 대담을 읽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나 대담은 지극히 평이하면서도 자기 사상의 핵심을 짚어주기 때문에 더없이 친절한 길잡이가 된다. 지젝의 이번 대담집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향락의 전이>에 부록으로 실린 “자가-인터뷰”와 함께 지젝 입문서로 적극 추천한다. 지젝의 지명도를 감안하면, 아마 책의 국역본이 의외로 빨리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시켜만 준다면 나라도 나서겠지만).   

이 책은 Polity출판사의 Conversations시리즈 중 다섯번째 책이다. 이보다 앞서거나 동시에 나온 책들은 각각 지그문트 바우만, 울리히 벡, 마뉴엘 카스텔(Manuel Castells), 앤소니 기든스와의 대담들이다. 폴란드의 석학 바우만의 책으론 <자유>(이후, 2002)와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 Globalization>(한길사, 2003)이 번역/소개돼 있고, 독일의 사회학자 벡의 책들은 대표작인 <위험사회>(새물결, 1997)을 비롯하여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 <지구화의 길>(거름, 2000),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새물결, 2000) 등 다수의 저작이 번역/출간돼 있다. 나에겐 좀 생소한 카스텔은 ‘카스텔 3부작’의 한권인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한울, 2003)란 책으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의 정보사회학자이다. 그리고 ‘제3의 길’의 주창자 기든스에 대해선 군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그의 저작은 거의 20권이 소개돼 있다).

이 시리즈의 근간으로 돼 있는 책들은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과 문화비평가 스튜워트 홀 등의 대담집인데, 연배로만 따지자면, 아마도 지젝이 가장 어린 축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49년생인 그로선 아직 젊은 나이이지만, 이미 동시대의 핵심사상가들(Key Thinkers) 반열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동시대의 사상가들 중에서 이 ‘괴물 엔터테이너’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감동적인 사상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재미있으면서 읽을 만한 철학자/사상가는 여럿 있다. 하지만, 동시에 찡한 감동까지 전달해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는 좀 오랫동안 지젝과 데리다 사이에 머무를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데리다와 지젝은 서먹한 관계가 아니다. 지젝의 고백에 따르면, 하이데거를 전공하던 그에게(그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결정적인 자극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데리다이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일개 하이데거 학자로만 남았을지 모릅니다. 내가 하이데거를 떠나도록 처음 자극을 준 사람이 바로 데리다였습니다.(I think that without Derrida I would probably have ended up as a Heideggerian. It was Derrida who provided this first impetus to move away from Heidegger.)”(29쪽) 그래서, 그는 데리다의 첫번째 메이저 저작인 <그라마톨로지>가 출간됐을 때, 하이데거가 직접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 무척 실망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저널 <문제들 Problemi>의 1967년 겨울호에 <그라마톨로지>의 2개 장에 대한 번역을 싣는데, 이것이 아마도 데리다 저작의 최초의 외국어 번역일 거라고도 말한다. 아무튼 지젝과 그의 그룹 동료들은 데리다에 이끌려 프랑스 현대사상에 심취하게 되고 라캉과도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초기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라캉으로 마침내 그들의 진로가 결정되는 것은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인데, 이를테면 지젝에게 있어서 라캉은 포스트-데리다였던 셈이다. 실제로 지젝은 자신의 입장/입지를 포스트-해체론(post-deconstruction)이라고 몇 차례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비유컨대, 그에게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데리다에게서 갖는 의미/자리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데리다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 건 물론 라캉,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크-알랭 밀레의 라캉이다.

슬로베니아에서 동료들과 함께 80년대 초반에 얼떨결에 ‘정신분석과 문화’라는 국제 콜로키움을 개최했는데, 거기에 초빙되어온 밀레가 자신이 있는 파리 8대학의 (해마다 한두 명씩 뽑았던) 외국인 조교직을 제안한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변변하게 취직도 못하고 있던 지젝의 인생역전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는 파리로 가게 되고 라캉의 사위 밀레에게서 라캉을 전수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밀레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면 밀레는 최고의 교사였다. “그래서 이 말은 꼭 공개적으로 해야겠는데, 내가 이해하는 라캉은 밀레의 라캉입니다. 밀레를 만나기 이전에 나는 라캉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해서 이 시절은 나에겐 엄청난 배움의 시간이었죠.”(So I must say this quite openly that my Lacan is Miller's Lacan. Prior to Miller I didn't really understand lacan, and this was for me a great time of education.)(34쪽)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도 그러한 배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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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04 17:26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포월 2004-03-0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습니다. ^^

로쟈 2004-03-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한 서점에 갔다가 원래 사려고 했던 손디의 <문학해석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들뢰즈 입문서 한권을 손에 들고 왔다.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그것이다. 콜브룩의 원저는 "Routledge critical thinkers"의 한권으로 나온 것으로, 가장 얇고, 가장 쉽고, 가장 편안한 입문서이다.

 

 

 



책은 미국의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두번이나 '디킨스'로 오기하는 등 약간의 교정 부실을 드러내지만, 번역의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역자는 폴 페이튼의 <들뢰즈와 정치이론>도 곧 역간할 모양인데,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지젝에 비해서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번역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데(사실은 짜증나는 점이다), 그건 역자가 'power'(불어의 puissance)를 계속 '역능'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권능'이란 단어보다도 더 역겨운 이 '역능'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은 일어이다. 순전히 스피노자에서 (영어로) power와 force를 구별하기 위해 얻어다 쓴 이 말이 잠시의 궁여지책은 될수 있을지언정 관용어로 굳어질 만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사실은 짜증스럽다). 스피노자에 관한, 번역된 이차문헌들을 내가 잘 읽지 않는 이유는 과장없이 순전히 이 '역능'이 말이 꼴사나와서이다.

이 신간의 경우에도 '역능'이란 단어를 그냥 '힘'으로 읽어도 독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스피노자 전문가는 '역량'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지만). 역자(들)의 무사안일한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역능'으로 옮기는 것이 '파워'로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번역에 대해서 타박을 했지만, 한가지 배운 것도 있다. 그건 들뢰즈에게서 impersonal을 '비인칭적'이라고 옮긴 것. 나는 지난번에 흔히 '비인격적'이라고 옮겨지는 이 용어를 '비인칭적'이란 말과 견주어 보다가 (자신이 없어서)'익명적'이라고 옮기고 말았는데, '비인칭적'이란 말이 더 적합하다는 걸 신간을 읽으며 깨달았다(물론 역자가 그렇게 옮기고 있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jouissance나 power의 경우도 그렇지만, 해당 용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여럿 있을 경우이다. impersonal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것은 세분야에 걸쳐 있다. '비인격적'(윤리학), '익명적'(사회학), '비인칭적'(언어학). 그런데, inhuman을 떠올리게 하는 '비인격적'이란 말은 여기서 가장 먼저 제외될 만하다(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의 역자도 '비인격적'이라고 옮기는데, '사례'로 옮겨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case를 전부 '경우'라고 옮길 걸로 봐서 역자의 우리말 감각엔 문제가 좀 있다). '익명적'과 '비인칭적' 중에서 내가 '비인칭적'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사유'와 종종 결합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즉 (인칭적 사유에 대하여) '비인칭적 사유'. 실제로, 들뢰즈는 언어학과 수학, 자연과학의 용어들을 즐겨 참조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impersonal의 역어로는 '비인칭적'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책은 술술 읽힌다. 들뢰즈의 현란한 용어들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집어들 만하다. 하루만 투자한다면, 어디에 가서라도 들뢰즈에 대해서 한두 마디 할 만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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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사람'에서는 지난해 정년은퇴한 백낙청 교수의 사진과 함께 창비에서 정년기념논총으로 나온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나는 책을 그제 서점에서 봤지만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책은 후학들의 글모음인데, 백교수의 소위 '주체적 영문학 연구'에 대한 권두논문인 윤지관 교수의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가 리뷰에는 잠깐 소개돼 있다. 요컨대, "영문학 연구는 민족문학 운동의 일환"이며, "민족의 구체적 현실, 특히 분단체제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영문학을 연구할 때 새로운 사유전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백 교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문학관은 민족문학을 지지하는 (영문학뿐만 아니라) 외국문학 연구자들에겐 '중핵'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문학 연구가 '분단체제하에서 일문학하기"보다 얼마만큼 더 실제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민족/민중의 현실'이 걸려 있으므로, 모더니즘이 배격되고 리얼리즘이 맹신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인데, 그 리얼리즘은 사실, 문학이 아니어도 고전이 아니어도 무방하며, 아니 오히려 굳이 문학이 아니고 고전이 아닐 때 더욱 생생한 것이지 않을까? 이것은 '위기' 이후에 톨스토이가 러시아민중을 위한 (문학을 넘어선) '문학행위'를 주장할 때 부딪쳤던 것과 마찬가지의 곤경, 곧 아포리아이다.

 

 

 

 



사실, 백교수는 러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도 아니고) <부활>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서양 명작의 주체적 이해를 위하여'란 식의 부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톨스토이라 하더라도, '문학주의'에 속하는(그래서 톨스토이가 부정하게 되는) <안나 카레니나>는 '주체적'으로 다루기가 힘들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영문학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문학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는지. 로렌스 전공자이지만, 아직도 로렌스 문학의 '주체적 읽기'는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는지(개별 논문은 있지만, 아직 단행본을 내지는 않았다).

사실 '주체적 영문학 연구'라는 것은 그간에 어떤 이념형으로서 잘 기능해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실행가능한 일은 아니다. 먼저, 제도적으로. 과연 영미에서 '주체적 영문학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 민족과 민중을 위한 영문학 연구로 말이다. 하다못해 영미의 노동자/민중이나 피억압 유색인종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영문학 작품들을 읽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논문'을 과연 얼마나 실감나게 쓸 수 있을까? 탈식민주의가 있지 않느냐고?

고작 탈식민주의와 백교수의 문학론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백교수가 영문학의 작품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는 탈식민주의적 독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문학 작품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수용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백교수가 말하는 주체적 독법"이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영문학 연구의 끝 아니가? 더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 뭐가 또 있을까? 이러한 탁월한 안목과 성취가 세계 영문학계에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시야 탓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으로서의 '독법'은 있지만 '읽기'는 빈곤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작품의 성과는 수용하면서 그 한계는 극복하는 지혜로운 읽기, 그리하여 한 작품을 종결짓는 읽기가 어떻게 현전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작품은 '지혜'가 개입하기 위한, 그리고 '지혜'에 의해서 지양되어야 할 어떤 매개로서, 올라간 후에 버려져야 할 사다리로서, 소위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한 읽기의 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만큼이나 강렬한 열망과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바,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문학론이 이론으로서 질긴 생명력은 유지하며 모든 담론 위의 담론으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치 '정의'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념이기에 그러하다.

같은 리뷰에서 "백낙청의 사유의 또다른 특징은 평론가 임규찬씨의 말대로 초기에 만들어놓은 이론적 틀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보기드문 경우에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진단되는데, 당위성의 자리에 놓여 있는 이론이 백전불패일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기에 변증법적 지양과 자기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보완될 뿐이고, 업그레이드될 뿐이다. 그래서, 1960년대말의 '시민문학론'에서 70년대의 민족문학론, 그리고 90년대의 근대극복론까지 "그의 생각의 근본틀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거까지 굳이 나쁘다고 비판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보기에 따라선 아주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한 당위로서의 ‘주체적 영문학’이나 ‘민족문학론’이 결국엔 ‘말하기에 좋은 것(good to talk)’ 정도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갖는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가장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한동안 논란거리가 됐지만, 창비는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창비 편집위원들이 조선일보와 자연스레 인터뷰도 하고, 조선일보에선 간접 책광고도 해주고 하는 식이다.

이번 논문집 발간을 주도한 영문과 교수들이 주축이 된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윤지관 교수가 지난번에 번역평가사업 발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이로 인해서 내부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윤교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한국사회에서의 세상사(the way things go)이다. 그래서, 대학교수들의 ‘진보적 문학이론’과 ‘문학행위’란 건, 내가 보기에, 대학 혹은 학문이라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오버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준만이 맨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의미에서라도 강단 좌파를 신뢰하는 데에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그건 일종의 '모험'이다).

흔히 386세대로 80년대 후반 대학가 시위를 주도했던 많은 ‘친구들’(동창들이 다 친구라면) 가운데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번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 줄서 있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만, 이 액티브한 ‘녀석들’은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지혜론’을 주창하는 백낙청 교수에 따르면(그걸 정리한 고명섭 기자에 따르면) “지혜야말로 지식과 과학이 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열어줄 수 있으며, 문학과 예술은 그 최고의 수준에 이를 경우, 심미적 쾌락이나 개인적 만족을 넘어 그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준다. 그 진리 체험이 현실변혁과 내적으로 연결돼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전망’은 꿈도 못 꾸면서 여전히 지식과 과학이나, 그리고 철학이나 넘겨다보는 나로선 그러한 ‘진리의 세계’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는 ‘상식주의자’이다). 다만, 나도 가끔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곤 하는데, 행위와 행동과 제스처가 다르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은 그런 지혜의 하나이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에서 제공하는 목차에 따르면, 책에서는 D. H. '로렌스'를 '로런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미 창비에선 로렌스의 <목사의 딸들>까지 백낙청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바 있는데, 웬 난데없는 '로런스'인가? 로렌스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의 결실이 '로런스'인가? 혹은 로렌스에 대한 현실변혁의 결과가 '로런스'인가? 인터넷서점에서 잘못 타이핑한 게 아니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쓸데없는 데 시간낭비들을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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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3-04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근래 읽은 글 중 가장 유쾌한 글입니다.

로쟈 2004-03-0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어보니 유쾌하군요...
 

 

 

 

 

최근에 나온 교양과학서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이다.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서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이름이 말해주는 바대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이 책은 무려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500쪽 가량된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 더 많이 번역소개될 필요가 있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책이 번역중이라는 소식을 접한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요컨대, 오역의 범주에 들어갈 소지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며 유감스러워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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