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는 학기말이고 어제는 한동안 (주로 마음만) 바쁘게 했던 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구실 책상정리를 한참 하고 나서 몇 자 적는다. 세월은 바쁘게도 지나가지만, 일없이도 지나간다. 한 학기 동안 해놓은 일들을 떠올려보니까 게을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게으름에 대한 핑계는 적지 않으므로 법정에라도 선다면 나 자신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지만, 그래도 게으른 건 게으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나는 게을렀고, 그 게으름은 '절대적 게으름'이다. 시간은 그 게으름을 통과해 가며, 그에 대한 우리의 후일담은 <벚꽃동산>의 마지막 대사처럼 "아, 산 것 같지 않구나..."이다. 최근에 개봉한 한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태풍태양'처럼 살고 싶지만, 그저 편안하고 아무일없는 오후를 선택한다(<태풍태양>은 흥행에 참패했다고). 그리고는 말한다. "아, 좀 게으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이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 게르돈, 게르델레스, 겐트, 게겔, 게체, 게르셀, 게르그송, 게코, 겔레즈, 게리다, 게젝...

 

 

 

 

첫번째 책은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에서는 '게르트르'로 통하는 사르트르에 관한 책이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이 20세기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최대 지식인의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이고, 곧 그의 생일(6월 21일)이다. 그러니, 그걸 기념해서라도 그의 책을 한두 권 읽어둘 만한데,  변광배의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살림)이 추천할 만하다. 일단 게으른 자들은 <존재와 무>(1943) 번역본(삼성출판사, 1991)의 방대한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사르트르는 원서 722쪽의 이 책을 2년만에 썼다) 30분 이상 집중해서 읽어내기도 힘들다. 하니, 다이제스트가 필요한 것이고,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의 신간으로 나온 <존재와 무>는 그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그냥 술술 읽힌다).

저자는 이미 작년에 <장 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살림, 2004)라는 책으로 한번 워밍업을 해본 지라 사르트르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한 듯싶다. 사르트르와 <존재와 무>에 관한 주변적인 얘기를 소개하고 <존재와 무>의 주요 개념들을 해설하고 있는 방식으로 책은 전개되는데, 입문서로서 깔끔하다. 이번 여름호 <문학과사회>에도 '우리에게 사르트르는 누구인가'란 특집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에 부쳐'란 부제를 달고 실려 있는데, 윤정임, 변광배, 서동욱 제씨의 글이 실려 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사르트르 전공자도 세대 교체가 됐구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몇년 전에 나온 <사르트르와 20세기>(문학과지성사, 1999)에서는 내 기억에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명환, 박이문, 김현, 박정자 등의 책/글을 통해서 사르트르를 눈에 익힌 나로선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광배 버전의 <존재와 무>에는 부록으로 관련서(참고문헌)들이 나열돼 있는데, 더 읽어야 할 한국어 책의 목록에 박이문의 책들이 빠져 있는 건 유감이다. 오래 전 책들이지만, <인식과 실존>(문학과지성사, 1982)나 <삶에의 태도>(문학과지성사, 1988) 등의 책에는 사르트르에 관한 중요한 글들이 수록돼 있으며 내 경험상 사르트르 입문격으로 아주 유용하다. 이미 제목에도 비치지만 사르트르에게서 중요한 것은 삶과 세계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삶에의 태도'이다. 그 자신이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건 아니지만, 자서전 <사물의 언어>(민음사, 1989)에 서술돼 있는 박이문의 삶은 사르트르적 정신에 투철하다(그가 인생의 책으로 꼽고 있는 것이 사르트르의 <구토>이다). 연초에 나온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는 그런 대로 그의 사르트르적인 삶의 태도를 잘 간추리고 있다. '지성의 궤적'을 다룬 1부의 첫머리에 오는 것이 '사르트르와의 만남'이 아닌가(작년 가을 데리다의 사망 이후 발표되었던 나의 스승 데리다'란 글도 실려 있다). 해서 한국에서의 사르트르를 말하면서, 박이문 선생을 빼놓은 것은 실례에 가깝다.

사르트르에 관한 전기로는 안니 코헨 솔랄의 3권짜리 <사르트르>(창, 1993)이 아직까지 가장 충실한 소개서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학론에 대해서는 정명환 선생이 옮긴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 필독서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팜플렛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문예출판사, 1999)를 참조하는 것이 필수적.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읽어야 한다. 조금 전문적인 차원에서 분석철학적 관점에서의 사르트르 읽기는 아서 단토의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가 있으며, 그 책의 역자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문학과지성사, 1979)도 참조할 수 있다(학부 2학년생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와 무>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2004, 개정판), 그리고 두 개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고 있다. 언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좀 읽어주는 일이 남아 있는 셈. 

 

 

 

 

두번째 책은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권태>(열림원). 1960년작이니까 무려 45년만에 소개되는 책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그의 책이 <표범 같은 여자>(문학사상사, 1997)이니까 국내에서 모라비아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인데, 이번 작품도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세드릭 칸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이 국내에 개봉되면서 원작이 겸사겸사 소개되는 감이 있다(책의 표지로 영화의 스틸사진이 사용됐다). 소개에 따르면, "모라비아는 성과 돈을 주제로, 파시즘 체제와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 특히 무관심, 야망, 경멸, 순응주의, 권태 등의 심리를 밀도있게 그려낸 바 있다." 이전에 세계문학 전집 등에 실려 있던 모라비아도 나는 읽지 않았었지만(나는 모라비아가 부르주아의 '나른한 권태'를 다루는 작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나의 편견에 그런 소설들을 읽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이번엔 제대로 책이 나온 듯하므로 한번 읽어봄 직하겠다(더불어 부르주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나른하고 피로하다).

 

 

 

 

 

<권태>의 역자 이현경씨는 에코의 <바우돌리노>(열린책들, 2002)와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민음사) 등의 칼비노 선집을 옮긴 전문가이다.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라비아와 칼비노는 빠지지 않을 터이므로, 번역 작가/작품의 비중으로만 판단하자면 이현경씨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가장 중요한 번역자이다.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녀)는 '모라비아'이고 '칼비노'이다. 번역은 해볼 만한 일이다.

 

 

 

 

모라비아의 소설과 함께 지난주에 나온 신작소설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문학사상사)과 박민규의 <카스테라>(문학동네)도 있지만, 한권을 읽어야만 한다면, 모라비아를 읽는 수밖에. 한국일보의 서평을 보니까, 하루키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사회나 가족과 떨어지고자 하는 '디테치먼트(detachment)적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커미트먼트(commitment)'적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한다. 선입견이긴 하지만, 그건 내가 그동안 단 한편의 하루키 소설도 읽지 않은 이유도 된다(그런 걸 이제서야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디테치먼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혼자였다" 같은 시구에 나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건 그냥 기분이거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번도 '디테치'되지 않는다. 삶으로부터, 그리고 이 세계로부터. 자기 방에 혼자 처박혀 있다고 혼자인 걸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신작의 줄거리는 이렇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기 싫은 19세 소녀 마리는 심야의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나게 된다. 마리는 그의 소개로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손님에게 맞아 쓰러진 중국인 매춘부의 말을 통역해 주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알파빌에서 일하는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곡식.벌레 이름으로 불리는 종업원 등 기묘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줄거리대로라면 그의 '커미트먼트'는 아직 공동체 범주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국가(=폭력)과의 조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니까. 경제학의 차원에서라면, '(화폐에 의한)교환'이 아닌 '증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가라타니 고진 같은 똑똑한 비평가를 둔 나라에서 아직도 '상상적인' 소설들이 나온다는 건 의외이다(하루키 애독자들의 반론을 기다려본다).

역시나 한국일보 서평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첫 소설집 <카스테라>에는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 버린 걸" 등의 문장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세상과 불화한 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데(기자는 '불화하다'란 말을 거리낌없이 쓰는데, 그런 '한국어'의 이물감은 '조까라, 마이싱이다'란 비속어를 소설에서 만나는 이물감에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과 '나'를 그렇게 이격시켜버린 세계관 자체이다.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그것은 낭만주의적 세계관이며,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관이다(사실주의에서라면 '나'는 '세계'로부터 분리불가능하다). '국제사회'가 냉장고 속의 '카스테라'로 변신할 수 있는 건 그런 세계관이 전제되기에 가능하다. 그의 소설들이 아주 유쾌하다고 하지만, 그 유쾌함의 이면은 유치함이다.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해서 유치함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덧붙임: 중앙일보 서평을 보니까, 작가는 6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그런 것이 소위 글쓰기의 '진정성'인바(그의 진정성은 글쓰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에 있다), 그의 글쓰기가 그 자체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박민규에게 소설쓰기란 그 나름의 '지구를 지켜라', 혹은 '어머니를 지켜라'인 것이다. '무규칙 이종 작가'란 닉네임을 한때 달고 다니기도 했었는데, 그는 말 그대로 '이종 격투기' 작가이다. 기존의 모든 문학적 규칙에 도전하는 것은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다). '생계'를 위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문학은 유쾌/유치하지만, 그건 이유 있는 유쾌/유치함이다. 그의 소설집이 많이 팔려나가길 바란다(관객 없는 이종 격투기만큼 슬픈 것도 드물 테니까)...  

 

 

 

 

세번째 책은 탈신민주의 이론가 스피박에 대한 소개서로 스티믄 모튼의 <스피박 넘기>(앨피).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세번째 권으로 나온 책이다(이미 나온 1, 2권은 지젝과 사이드). 원서는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그때 교보에서 책을 처음 보고 나는 덥석 집어들었었다. 내게 스피박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이전에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영역자로 각인돼 있는데(내가 더 관심있는 쪽도 그쪽이다), 알고 보니 스피박은 데리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예일 마피아'의 거두 폴 드 만의 제자이다. 제3세계(인도) 출신으로서 그녀가 한 일은 데리다와 폴 드 만의 해체주의를 정치적/경제적 컨텍스트로 확장시킨 것(거기서 '서발턴'이란 주체/주제와 만나게 된다). 신간은 그러한 스피박의 프로젝트에 대한 요긴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스피박의 주저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는 이미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스피박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와 함께 더 소개되어야 할 책은 (우선적으론) <탈식민주의 이성 비판>과 대담집 정도가 아닐까 싶다. 스피박에 대한 또다른 입문서로서는 그녀를 사이드, 호미 바바 등 다른 탈식민주의 이론가들과 함께 다루고 있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이다. <스피박 넘기>의 참고문헌('스피박의 모든 것')에는 원서의 서지만이 들어가 있고 이 국역본은 누락돼 있다(그래도 '스피박의 모든 것'?).    

 

 

 

 

네번째 책은 중국사학자 레이 황(황런위)의 <중국의 출로>(책과함께). 레이 황의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독특한 역사관과 서술에 흥미를 느낄 법한데, 내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책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된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1997)를 나는 당시 신생출판사에서 얻어 읽었는데(그 출판사에서는 러시아 현대 소설의 번역출간도 검토했었다. 엎어졌지만), 직접 책을 번역한 출판사 사장의 말로는 미국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들어가 있으며 "역사서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라고. 명불허전이라고 중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에게도 책은 아주 재미있게 읽혔다. '매크로 히스토리'(Macro History)라고 하는, 역자의  독특한 사관(史觀)도 매력적이었고. 이후엔 당연히 레이 황의 모든 책이다(중국사학자로 조나단 스펜스를 나는 레이 황과 같은 급으로 친다).

레이 황은 지난 2000년에 타계했다고 하므로, 이번에 나온 책은 그의 유작쯤 되는 듯싶다. '레이 황의 중국사 특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말년의 그의 강연문과 기고문들을 모든 책인 듯싶다. 이왕 레이 황의 모든 책이라고 했으니까 번역된 책들을 나열해 본다. 가장 먼저 출간됐던 건 <거시중국사>(까치, 1997), 이 책을 다시 옮긴 것이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이다(나는 '거시중국사'란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와 같은 책을 다시 옮긴 <1587 만력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2004) - 이건 작년에 내가 없는 새 나온 책이다, 아무일도 없진 않았던 것!  -를 들 수 있겠다. 2001년에는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산)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푸른역사)가 차례로 나왔다. 후자는 레이황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려나간 책이다. 해서, 원서로 치자면 5권 7종이 현재 나와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 역사서로 분류되는 존 리드(1887-1920)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전에 <세계를 뒤흔든 10일>(두레, 1986)로 번역되었던 책이다(참고로, 러시아사의 '레이황'과 '조너선 스펜스'는 아직 없다.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는 호스킹과 파이프스 정도가 근접하지만, 유려함과 유장함에서 그들을 따르지 못한다). 이전에도 이 책에 대해선 언급한바 있는데, 이번에 절판된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되어 반갑다.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존 리드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쓴 르포 문학. <카탈로니아 찬가>, <중국의 붉은 별>과 함께 르포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존 리드에 대해서는 워렌 비티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레즈>(1981, 194분)를 참조할 수 있다. 다이언 키튼이 리드의 유부녀-연인으로 등장하며 영화는 혁명보다는 이들간의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여간에 그는 여성운동가 루이스 브라이언(다언 키튼)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러 떠나게 되며 돌아온 이후에도 공산주의 운동에 열성을 올리지만, 모스크바에서 티푸스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  

"존 리드가 혁명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그 주변 도시들, 혁명의 두 번째 격전지던 모스크바까지 곳곳을 누비며 쓴 이 책에는 레닌.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참호의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비참한 처지의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레닌이 직접 서문까지 써준 이 책은 말 그대로 러시아 혁명의 가장 생생한 현장기록이다.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의 증언: "외국인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곳의 과거와 현재를 더 선명하고 진실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내가 태어난 러시아에 대해 그런 귀중한 깨달음의 시간을 선사해 준 책이 바로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독재가 왜곡하고 정권 유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용한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을 나는 바로 이 책에서 배웠다."(그러고 보면, 박노자는 신레닌주의자이다.) 

해서, 그런 걸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태풍태양'의 삶에 대한 갈증을 이 책에서 조금쯤을 달래볼 수 있지 않을까?(그나저나 요즘 '태양태풍'의 삶은 혁명이 아닌 인라인 스케이팅에서나 가능한 걸까?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바뀌지 않는 레퍼토리 속에서 운동도 이론도 얼마나 게을러진 것인지.) 그리고 이왕이면,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2004)도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함께 나란히 꽂아둘 일이다. 그러고서 숙고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두 혁명에 대해서.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혁명의 피냄새에 대해서. 그리고 도래할 (불)가능한 혁명에 대해서...

05.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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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6-11 20:43   좋아요 0 | URL
1등 놓쳤군요.
그래도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칸트와 오리 너구리 손에 넣었어요.
이번에도 좋은 책 정보 감사드려요. 요즘 이런 책 정보가 제 낙입니다.^^

로쟈 2005-06-11 20:49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저도 찔끔찔끔 읽고 있습니다. 독일어본 번역이면서 굳이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 번역이더군요...

마냐 2005-06-12 00:24   좋아요 0 | URL
인라인 타는 젊은 것들을 훔쳐보지 않고도....갈증을 달래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새겨두죠.

killjoy 2005-06-12 03:15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 대한 코멘트 와 닿았습니다.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제목이었던가요. 얼마 전 문학동네에 실린 고진의 글에도 하루키에 대한 언급이 있던데요. 내수용이자 무역용 상품이라는 취지의 짤막한 단언이었습니다. 저로서는, 하루키와 스노우캣이 바로 디테치먼트의 환상을 상품화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로쟈님이 스노우캣을 아실런지. ^^;

로쟈 2005-06-13 08:52   좋아요 0 | URL
마냐님/ <태풍태양>은 특별히 끌리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망했다'고 하니까 안타깝더군요.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뒷북이나 쳐야겠습니다. killjoy님/ 스노우캣이라구요? 무슨 캐릭터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네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killjoy 2005-06-13 17:24   좋아요 0 | URL
캐릭터 이름 맞아요!

rebis 2005-06-14 11:48   좋아요 0 | URL
음... 세상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고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전세계 하루키 팬들에 대한
실례가 될 것 같네요..
하루키는 단편을 먼저 읽으셔야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marxbook 2005-06-14 12:54   좋아요 0 | URL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읽었는데요.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이런 생각은 레닌주의가 아니고 스탈린주의인 것 같습니다.
레닌은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 계급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맑스의 주장을 옹호하며, 나로드니키의 대리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열흘>에서도 레닌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호소해 고참 볼셰비키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릴케 현상 2005-06-14 14:54   좋아요 0 | URL
스탈린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요 제 수준(이란?)에서 읽을 만한 스탈린에 관한 좋은 책이 있을까요?

로쟈 2005-06-15 11:24   좋아요 0 | URL
yujung52님/ 저는 하루키를 읽지 않았지만, 하루키를 많이 읽은 사람들의 의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고진 같은 비평가에 기대자면, 하루키는 훌륭한 '문화상품'입니다. 문학은 좀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태훈님/ 글쎄요... 레닌에 대한 이해도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제나 이를 수밖에 없는) 혁명의 타이밍에 대해서 판단하는 '주체'도 '민중'이고 '노동자 계급'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스탈린주의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주체의 자리에 한번도 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탈린은 언제나 역사의 대행자를 자처했지, 주체를 자임하지 않았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저도 별반 읽은 게 없지만 스탈린에 대한 책 자체가 드물지 않나요?(아이작 도이처의 절판된 전기가 다시 나온다면 모를까.) 러시아 서점에 즐비하게 꽂혀 있던 스탈린과 그의 시대에 관한 역사서들이 생각나는데, 러시아에서 '스탈린 문제'는 우리의 '박정희 문제'와 아주 유사합니다. '독재'와 '근대화'가 키워드이죠(급수로 치자면, 2천만은 숙청한 스탈린이 그래도 한 수 위이지만).

2005-06-16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6-16 17:47   좋아요 0 | URL
<스탈린이즘>(문학예술사), <스탈린 혁명>(신서원) 등이 참고할 만한 책인데, 현재는 모두 절판된 책들입니다. 스탈린 문화와 관련해서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문예마당)이 가장 참신한 책입니다. 한데, 국역본은 좀 부실한 번역이어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릴케 현상 2005-06-17 10:43   좋아요 0 | URL
^^감솨합니다

yoonta 2005-07-05 04:49   좋아요 0 | URL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부분.....전 다중주의자도 민중주의자도 아닙니다만..레닌주의의 교훈자체를 문제삼는 반레닌주의자들에게 레닌주의의 교훈을 되새기라는 듯하는 대목이라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문구네요...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않을까?"
혁명의 주체는 선험적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 범주?
혁명의 주체를 전위에 의해 구성될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벌써 레닌주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고요..님의 전제에서라면 당연히 구성적 범주일수밖에 없는 혁명의 주체로는 누구에 의해 그것이 구성되어지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죠..-_-
그러나 혁명의 주체가 어떻게 (전위에 의해) 구성되어지는가라고 묻는 방식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자체가 구성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방식이라면 결론은 전혀 다를수 있겠죠.. 혁명의 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의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혁명의 주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선험적인 것)이 아니고..때문에 그것은 우리같은 전위가 어떻게 만들어나가는가하는 것(구성적인 것)이 문제야 하는 방식은.. 저처럼 레닌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이자 오만으로 밖에는 안보이는 군요...

로쟈 2005-07-05 12:10   좋아요 0 | URL
예상과 다르게 저는 레닌주의자가 아닙니다만(레닌주의자가 이런 '좀스런' 서재질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그런 '입장'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궁금한 건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과 오만을 비판하는 반레닌주의자(?)의 포지션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비밀이 아니라면...

yoonta 2005-07-05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레닌주의자가 아닌데 많고 많은 "입장"들 중에서 하필이면 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글을 쓰신게 제가 님을 레닌주의자로 오독을 하게 만든 일차적 원인아닌가요? 그렇게(윗 댓글처럼) 말씀하신다면 저도 반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언급했을 뿐이므로 반레닌주의자들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대답할수없음(혹은 알수없음)이라고 해야 공평하겠군요..그것이 비밀이아니라면...

로쟈 2005-07-05 14:40   좋아요 0 | URL
어떤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요?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란 yoonta님의 표현이 '언급'에 해당하는 거라면 저도 더 질문드리지 않겠습니다...

yoonta 2005-07-05 16:14   좋아요 0 | URL
물론 어떤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요..하지만 로쟈님도 레닌주의자는 아닐지라도 레닌주의적인 입장을 언급하시는 '경향성'과 '선택성'은 있는 것 같은데..아니라면 할말 없구요..-_-
저도 '반레닌주의자'인지 아니면 어떤 '주의자'는 아닌 '반주의자주의'인지는 때로는 분명하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내용에 대해 입장과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무슨무슨주의자라고 불리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는 때로는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런 점에서 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저의 시각에는 로쟈님이 어떤 주의자로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기분나빠 하시지는 마시길바랍니다..^^

로쟈 2005-07-05 16:37   좋아요 0 | URL
또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저는 레닌주의자이길 거부하는 게 아니라 레닌주의자에 미달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감당할 만한 위인이 못 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