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06. 06. 23)의 북리뷰들을 읽다가 비교적 크게 다루어진 미셀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모티브북, 2006)에 대한 임종업 기자의 '책소개'를 옮겨온다. 리뷰는 역자와 마찬가지로 리뷰어 또한 '그리스도교도'라서 이 '불경스러운' 책을 소개하기 마뜩찮다는 식의 소심한 엄살로 시작한다(부분적으로 발췌한다). 리뷰의 타이틀은 '세상 구원할 자, 무신론자!'인데, 이 페이퍼의 제목은 그걸 풀어서 쓴 것이다. 

-신문방송에 금기가 있다. 종교, 또는 종교집단의 실태, 문제점 또는 비리는 알아도 침묵한다. 떼거지로 몰려와 개판을 치거나, 소리지르고 뒤엎으며 야단법석을 떨기 때문이다. <무신학의 탄생>은 금기에 도전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종교는 언론보다도 힘이 세다!).

-지은이는 프랑스의 도발적인 고교 철학교사. 번역자는 그리스도교도다.(...) 나는 이 책의 서평 또는 소개기사를 쓰고 싶지 않다. 나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고 한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데,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내세를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하는 내용의 책을 어찌 소개하는가.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나에게 이 책을 떠넘긴 <18.0°> 책·지성팀 한 아무개 팀장이 지옥에 동행할 것이 분명해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또 출판담당 기자라는 밥벌이로서의 일이거니 정상참작이 되지 않겠는가.

 

 

 

 

-자! 철학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한 나무에 얼씬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여자는 일을 저질렀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됐다. 창세기는 여성과 육신을 증오하고, 원죄에 시달리며 회개하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속죄의 길을 찾으며 운명에 순종해야 하는 신앙을 낳았다. 인간은 저능아처럼 살다가 죽으라는 운명이었을까. 지혜를 택한 하와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사탄은 노예상태의 세상에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끌어와 형체가 없는 이데아의 도시를 조작해냈다. 하늘과 땅을 나누어 낙원을 꿈꾸고 땅을 업신여겼다. 내세의 희망,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겠다는 염원은 ‘지금 여기’에서의 절망을 낳았다. 그리고 말구유에 넋을 놓고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낳았다. 근데 예수 이야기는 날조다(*이 '날조'에 관한 책들도 드물진 않다). 이 땅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없다. 관련 고문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이념적 조작물이다! 1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해방을 얘기하는 예언자, 구세주, 복음의 예고자로 넘쳤다.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한 행동과 굳은 의지만으로 시작한 투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즉 당시의 시대적 히스테리가 결집된 응축물이다.

 

 

 

 

-예수를 창조한 인물은 마가. 예수를 본 적도 없는 마가는 당시 분위기에 사로잡혀 거짓을 꾸며냈다. 옛 선조의 글쓰기 수법을 모방해 프로파간다의 수법을 쓰고 기만책도 서슴지 않았다. 신약의 몇몇 구절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가르침·격언>을 비교해 보라. 예컨대 플라톤도 한창 때인데도 처녀막을 유지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수태고지는 아폴로 신이 몸소 행차해서 담당했다. 플라톤 역시 죽은 뒤의 삶,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믿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인간세계에 돌아온 예수에 앞서 피타고라스도 그랬다. 다만 사흘과 207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경’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관련됐다. 하여 곳곳에 모순과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이 포함돼 있다. 로마제국을 대신하는 빌라도 총독이 과연 ‘작은 동네 깡패’와 대화를 했을까. 게다가 라틴말 총독과 아람말 예수가 통역도 없이. 십자가 형도 의심스럽다. 유대의 왕을 자처했을 뿐 로마권력에 도전한 적이 없는 예수를 매달 이유가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통상 십자가형 죄수의 시신은 그대로 두어 날짐승, 네발짐승 밥이 되게 했고 잔해는 공동묘혈에 던져졌다. 한마디로 복음서의 화자들은 한 사내의 과거보다 종교의 미래를 말한 것이다.

-바울, 그는 예수를 독점하여 제멋대로 옷을 입히고 갖가지 사상을 덧씌웠다. 달을 못 채우고 난 조산아, 왜소한데다 대머리인 바울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신경쇠약 환자로서 성기능 장애를 가진 자로 추정된다(*저자가 아주 화끈한 성격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증오는 세상을 향한 증오로 바꿔갔다. 세상사람들에게 독신의 삶, 순결, 금욕을 강요한 것은 그 탓이다. 예수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가난과 불행도 하늘의 뜻이라며 노예적인 순종을 가르쳤다. 교회는 탄생한 순간부터 당연히 폭군과 독재자의 편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회주의자 콘스탄티누스의 변절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소수에서 박해하는 다수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교황청은 세속의 권력과 결탁히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찌와의 협력, 종교재판, 노예매매, 인디안 학살…. 르완다 성직자들의 후투족 씨말리기. 사랑하는 이웃외에는 모두 무생물이다. 가나안을 유대인에게 주기 위해 야훼는 총력전을 펼쳤다.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고, 모기와 등에를 군인으로 삼고, 역병과 궤양과 피부병을풀었다. 야훼의 가슴에는 전쟁의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성직자들, 그들은 하느님의 말을 대신 한다며 뻔뻔하게 하느님의 몫을 요구한다. 세금도 없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피장파장. 지은이는 말한다. 신에 대한 거짓신화는 깨뜨려져야 한다. 유일신 교도들이 뒤죽박죽 헝클어놓은 이 세상을 구원할 자는 무신론자다! 때가 오면 육신은 더이상 더러운 것이 아니며, 쾌락추구는 죄 짓는 일이 아니며, 지적 판단은 오만이 아닐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상대방이 적이 아니라 상호 주체성을 완성해갈 동반자가 될 것이다. 또 낙원도 하늘나라에 있는 허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뤄낼 수 있는 이상향이 될 것이다, 라고.

-부조리한 세상에 정의로운 신이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렇게 용감하고 신랄한 책 못 쓴다. 책은 신문보다 무모하다(*'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정확하게 유신론자들의 구호이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는다!' 책이 신문보다 무모한 것은 한편으론 신앙이 학적 문제, 곧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즉 '알면 안 믿는다!'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면서 구원론의 문제, 즉 '믿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라는 걸 간과한 탓이다. 인간은 빗자루라도 믿는 존재이다! 최근에 신자수가 감소했다고 개신교단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한 걸 보면 신앙은 사회학적 문제이기도 하고).

06.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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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6-23 13:17   좋아요 0 | URL
와, 대단한데요. 오강남씨보다 과격하네요.

연우주 2006-06-23 13:23   좋아요 0 | URL
제가 달 댓글은 아니지만, 가을산님, 오강남씨는 그리 과격하지 않은데요. 그 책<예수는 없다-이 역시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예수는 없다"구요.>의 제목만 과격했을 뿐, 내용은 무척이나 원론적이잖아요.^^

로쟈 2006-06-23 13:25   좋아요 0 | URL
대신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산 2006-06-23 14:22   좋아요 0 | URL
역시 쓰면서부터 우려했던 대답이 달렸군요.... ^^a
 

 

 

 

 

온라인 저널인 '자율평론' 제16호(06. 04. 19)에서 하승우씨의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오해와 차이'를 옮겨온다(필자는 폴 애브리치의 <아나키스트의 초상>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맑스 새롭게 읽기'라는 기획하에 진행된 강연원고로 보이는데(맑스의 '정치문제에 대한 무관심' 읽기이다), 아나키즘과 관련하여 러시아 인민주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해서이다(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 지식인으로는 노엄 촘스키와 머레이 북친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참에 나도 한번 읽어보고. 참고로, 인용문 전체에 대해서 따로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의 군말에 대해서만 (*)를 표시했다. 모든 강조와 이미지는 나의 것이다.  

1. 들어가며
오늘 같이 얘기할 텍스트는 아마도 이번 강좌 중에서 가장 짧은 글이자 가장 분명한 입장을 가진 글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짧고 분명한 글이기에 우리는 이 글의 맥락을 짚어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 글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아나키즘을 분명하게 소개하고 난 뒤에 비판하지 않고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분명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고 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아나키즘에 대한 우리의 오해부터 먼저 해소시킬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2. 하나의 아나키즘? n개의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하나의 단일한 이론적 내용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인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베르크만의 사상은 조금씩 그 결을 달리 했습니다. 더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론적인 노력보다 실천적인 투쟁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하나의 이론적인 흐름을 구성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대충 4가지 정도의 유파로 아나키스트들을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①아나키스트-꼬뮨니스트: 국가만이 아니라 사적인 소유권을, 조직을 거부하고 꼬뮨을 통한 대안사회 건설에 역점을 둠(대표적인 사상가로 표트르 크로포트킨)

②아나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을 통한 집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음(대표적인 사상가로 미하일 바쿠닌)

③아나키스트-개인주의자: 꼬뮨과 노동조합 모두를 의심하며 자율적인 개인의 직접행동을 주장(대표적인 사상가로 막스 슈티르너)

④ 소박한(just plain) 아나키스트: 자신에게 어떤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이길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대다수의 익명의 아나키스트들)

맑스가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판하고 있는 프루동은 ‘역설의 사상가’(a man of paradox)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나는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지 않겠다”, “나는 분파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체계적인 이론보다 신문을 만들고 정세를 비판하는 언론인, 평론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평론을 쓰면서 비아냥과 역설을 적절히 구사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의 말만 가지고 프루동을 읽을 경우 오해의 소지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엥겔스가 “권위에 관하여”에서 비판했던 바쿠닌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입니다. 바쿠닌은 “어떤 이론이나 이미 만들어진 체계, 이미 씌어진 책이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나는 어떠한 체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참된 탐구자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계급들에서 혁명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론보다 본능적인 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의 혁명을 주장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던 바쿠닌 역시 역설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모두 러시아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귀족이었으나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했던 농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그 모범이 되었던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짜르의 전제정치는 많은 반란을 자극했고, 스텐카 라친(*'라진'이다)과 에멜리안 푸카체프(*'푸가초프'이다. 영어식 표기는 'Pugachev'인데, 모음 'e'는 여기서 'yo'로 소리난다)의 반란이 대표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푸가초프에 대한 최초의 역사서를 쓴 사람은 시인 푸슈킨이었다). 이런 농민반란은 현실에 대한 저항과 증오를 자극했고, 나로드니끼라 불리던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짜르에 대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귀족층을 중심으로 했던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테러를 비롯 짜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용하는 과격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사상과도 연관되는데, 이들은 러시아 인민이 로마법적인 재산관념, 즉 사유재산의 절대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았고 평화로운 농민공동체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국가는 적이었고 모든 권력은 악이고 죄라는 생각이 인민주의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러시아 특유의 기독교 전통도 이런 경향을 강화시켰습니다. 두호보르 종파처럼 “신의 자식들에게는 짜르나 통치권력, 그밖의 어떤 인간의 법률도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종파도 있었습니다(*이 두호보르 종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캐나다로의 이주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쓴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이다. 실상 작가 톨스토이의 사상 자체가 아나키즘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레오(*Leo는 Lev의 영어식 표기이다) 톨스토이처럼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인민주의를 실현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박한 영혼을 지닌 러시아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적인 동력이라고 봤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인민에 대한 이런 신뢰를 이어받았고 대중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고 봤습니다(*이때의 '인민'은 물론 '농민'이다.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리 맑스-레닌은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인민주의의 전통은 러시아 급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인민에게 깊은 신뢰를 품었다는 점에서 동일했지만 그 신뢰를 드러내는 방식, 즉 혁명을 추구하는 방식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톨스토이처럼 평화적인 방식을 추구했던 사람도 있고 트가체프처럼 짜르의 암살과 폭력만이 러시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1881년 3월에는 인민주의자들이 실제로 짜르 알렉산드르 2세(*사진)를 암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테러를 혁명의 방법으로 선택했던 이런 급진주의자들에는 인민주의자, 맑스주의자, 아나키스트,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전통에는 네차예프라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인물과의 관계 때문에 바쿠닌은 <인터내셔널>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흥미롭게도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에 따르면 레닌은 이 인물이야말로 조직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칭송했다는군요).


 

 

 

 

4.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사실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차이점은 목표보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아나키즘을 어떤 하나의 이념으로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에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살피려 합니다).

첫째, 아나키스트들은 맑스주의가 강조하는 전위조직이나 계급독재를 거부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이 스스로 ‘직접행동’(direct action)할 때에만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히 아나키스트들은 “노동해방은 노동자의 힘으로”, “농민해방은 농민의 힘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지요. 서로간의 연대는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실천적으로 운동을 이끌어갈 사람들은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어야 하고 그 현실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일반 대중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특정한 계급이 전체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거나 의사결정과정이 중앙으로 집중된 조직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단순히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삶의 영역 전반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혁명, 즉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특정한 발전법칙(역사적 유물론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라 실현된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마련될 수 없다고 봤고 새로운 사회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인 활력을 통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이 과학적인 합리성과 의식보다 대중의 본능과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쿠닌은 대중이 지닌 반란의 본능과 파괴적인 충동에 희망을 걸었고, 크로포트킨은 서로 돕고 보살피는 본능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아나키즘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에 바탕을 뒀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때문에 지식인-아나키스트는 지식인-맑시스트와는 사뭇 다른 '애매한' 포지션을 갖는다).

셋째, 러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아나키즘 이론은 노동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습니다(프루동 역시 프랑스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죠). 물론 아나키스트들도 산업혁명이나 과학기술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봤지만 대규모 공장체제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잘 감지하지 못했고 농민공동체가 가진 본능적인 측면에 주목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나키즘은 러시아의 전통사상 내지는 자생적 사상이며, 러시아 맑스주의는 (수입된) 서구의 사상이다. 오늘날 이것은 '농민의 사상' 대 '노동자의 사상'으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한 사회를 중앙화된 권력으로 통합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회전체적인 이론틀이나 이론적인 청사진을 개발하지 않았습니다(*아래 그림은 프루동과 바쿠닌).

4. 맑스는 왜?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맑스는 프루동과 프루동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정당을 구성하지도 않고 파업을 반대하는 입장은 맑스의 말처럼 “어리석거나 천진난만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맥락을 조금 더 세밀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맑스는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를 “통찰력이 뛰어난 책”이라며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했고, 그 뒤 <신성가족>에서도 프루동이 “위대한 과학적 진보이자 정치경제학을 혁명화하여 비로소 참된 정치경제학을 가능케 한 진보”를 이루었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44년에는 파리에서 프루동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던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 프루동의 동참을 요청했는데, 프루동은 그 취지에 동의했지만 “우리가 운동에서 앞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편협성을 드러내는 지도자가 되지는 맙시다. 새로운 종교의 사도인 척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했고 “문제제기를 결코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지 맙시다”라고 전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프루동은 혁명적인 행동을 개시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습니다.

프루동은 “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성 바르돌로뮤의 밤[대학살]을 거행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보다 소유를 천천히 불태우는 쪽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이후 프루동과 맑스의 관계는 깨지고 <철학의 빈곤>으로 맑스는 프루동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죠.

프루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프루동은 선거참여를 비판했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그 당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프루동이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라는 점이죠.

사실 프루동이 정치참여를 비판한 것은 이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1848년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보통선거권을 도입하자, 보통선거권이 가지는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보통선거권은 반(反)혁명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르 레프레젱탕 뒤 페플>이라는 자신의 신문에서 프루동은 “공화국은 모든 의지가 자유롭고 국민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통치형태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들이 사회를 거스르지 않고 사회를 위해 움직이는 게 필수적인데, 그것은 보통선거권으로 가능하지 않다. 보통선거권은 공화국의 이기주의이다. 이 체제가 오래 유지될수록 경제혁명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고 그럴수록 우리는 왕정과 독재,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다. 선거권이 더 늘어나고 합리화되고 자유로워지는 한 이 모든 건 더 분명해진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프루동은 1848년 선거에 출마했고 의원으로 당선됩니다. 그러나 프루동은 1848년 6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카베냑의 군대가, 노동자들의 군대가 자신의 형제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의회에서 다른 의원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프루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정치적인 수단에, 더구나 선거라는 수단에 맡기는 것이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이건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를 구원해야만 한다. 하층 부르주아지를 배고픔으로부터, 중간층 부르주아지를 파멸로부터, 상층 부르주아지를 그 악마같은 이기주의로부터 구원해야만 한다. 6월 23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의 문제와 동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참 역설적인 문체이죠. 언론인으로서 프루동은 이런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런 활동으로 프루동은 의원직을 제명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선거를 통해 예견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의 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뒤 프루동은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보통선거권을 이용했을 때, 프루동은 선거와 정당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수단일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투표거부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프루동은 정부의 책략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인민이 정부당국과 인민의 본질적인 갈등을 가장 잘 부각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며 투표거부주의자들(abstentionists)과 함께 했습니다.

이 운동은 적어도 두 가짐 점, 즉 정치행태에서 지배적인 요소이던 편의주의(expediency)를 거부하고(필자주: 어떤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근본적인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그 순간만을 적당히 넘기려 하는 주의. 근대정치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보편적인 정치적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민주주의의 신화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특히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프루동은 계급갈등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프루동은 부르주아지에게 그들이 과거에 혁명적인 세력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부르주아와 노동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노동자 모두를 해방시킬 혁명을,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을 촉진시키려 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프루동의 부정적인 생각은 노동조합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조합이기주의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루동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조합이 독단으로 여겨지기에 잠재적으로 자유에 해롭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조합은 유용하다고 봤습니다. “노동자들의 조합은…그들이 달성한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인가가 아니라 사회공화국을 옹호하고 세우는 그들의 조용한 추세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야 한다.…노동자들의 노동의 중요성은 조합의 사소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지난번 혁명이 건드리지 않고 남겨둔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는 데 있다. 그런 뒤에 정치적인 거짓말을 극복했을 때…노동자 집단들은 자신들의 타고난 상속물인 대부분의 산업을 접수해야 한다.”

또한 프루동은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맑스가 인용하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프루동은 “정치적 능력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집단의 일원으로 의식하게 하고, 이 의식의 결과로 이념을 확정하며, 그 이념의 실현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을 결합한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실제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시작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프루동은 노동계급의 이념을 상호의존의 이념으로 봤습니다. 프루동에게는 상호의존이라는 이념만이 (농민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와 분리시켰고 노동계급에게 진보적인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가 발달하면서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사회의 경제생활에 정의를 도입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反상호주의적 정신이 실행을 막아왔던 평등주의 기반 위에 사회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상호주의는 인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할 연방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연방 공화국에서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일련의 대표들이 인민의 일반의지를 실행하는 조절위원회들에 결합하는 ‘자연스런 집단들’에 의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자유의 건전한 성장에 해롭다고 여겼던 내전의 폭력 없이도 전체 공동체가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사회의 분할구조를 인식하고 사실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프루동은 이 투쟁의 유동성에서 상호주의의 균형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루동은 계급투쟁을 공식화해서 영원한 분할을 만들지 모를 어떠한 방법도 피하려고 노력했다. 파업에 대한 비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얘기하자면 프루동의 인민은행 계획에 대한 비판은 주로 화폐와 소유를 잘못 이해했다는 점으로 얘기됩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프루동이 추구했던 것을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프루동이 폐지하고자 한 것은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의 축적이었습니다. 노동거래소를 통한 노동권의 유통은 단지 화폐를 노동권으로 교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권이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5. 엥겔스는 왜?
엥겔스는 “권위에 관하여”에서 바쿠닌을 겨냥해 비판을 가합니다. 그런데 바쿠닌은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쿠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고? 그건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장화에 관한 한 나는 장화 만드는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 집, 운하, 철도에 대해선 건축가나 엔지니어와 협의한다.…그러나 장화 만드는 사람이든 건축가든 내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온당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말을 듣는다.…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나의 이성, 나의 자유, 그리고 내 과업의 성공에 치명적일 것이다. 그런 믿음은 나를 즉각 어리석은 노예,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의지와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엥겔스는 바쿠닌을 비판했을까요? “권위에 관하여”가 씌어진 1872년과 1873년 사이의 시기는 <인터내셔널>을 놓고 맑스, 엥겔스와 바쿠닌간의 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다 결국 1872년 9월 헤이그 대회 때 바쿠닌이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된 시기입니다.

 

 

 

 

맑스주의자들은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부에 분파를 만들고 조직을 장악하려 한 악당이라고 주장합니다. 소련공산당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펴낸 <맑스 전기>는 바쿠닌이 “무력하고 억압받는 인민 대중들과 농부들 및 쁘띠부르조아들의 회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에 분파를 만들고 테러와 관련된 비밀조직을 운영했기 때문에 제명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필자주: 그리고 바쿠닌이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은 러시아 짜르의 오크라나라는 비밀경찰제도를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유럽의 혁명가들과 달리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망명 이후에도 끊임없는 체포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레닌도 마찬가지였죠 *오크라나? '오흐라나okhrana'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아나키스트 작가인 조지 우드콕은 맑스와 바쿠닌의 대립을 개인적인 대립이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자와 반권위주의적 자유인의 대립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우드콕은 <인터내셔널>의 다수를 차지했던 조합주의자와 상호주의자들이 바쿠닌을 지지한 반면 맑스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인터내셔널>을 지배했다고 비판합니다. 둘 중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글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아나키스트의 분류에 따르면, 개인주의자나 소박한 아나키스트들은 분명 정치적인 권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나코-생디칼리스트나 아나코-꼬뮨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우크라이나에서 농민꼬뮨을 건설하려 했던 마흐노(N. Makhno, 1889-1934)의 연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흐노는 마을에서 백군과 지주들을 몰아낸 뒤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 우리는 지주들과 그들의 마름들을 따랐지만,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여러분끼리 땅을 분배하십시오. 그리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동등한 관계에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 때 국제의용군으로 자원했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얘기는 권위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의용군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 받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고, 똑같은 옷을 입었고, 완전한 평등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하였다.…물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명령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실제로는 그런 방법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다.…나는 명령을 따르게 하거나, 위험한 일의 자원자를 얻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에 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1995)에서도 잘 표사된다.)



아나키즘은 이를 위해 먼저 거대화된 권력을 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권력은 크게 뭉칠수록 통제에서 벗어나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개인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반세계화운동과 아나키즘을 연관짓는 숀 쉬한(Sean M. Sheehan)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나키즘은 스스로 없애려고 하는 권위주의의 씨앗을 내포한 관료제를 낳지 않으면서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의사결정 구조를 개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흔히 반세계화 운동으로 불리는 흐름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인 친지역화(pro-localization)는 탈중앙화한 공동체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공동체들은 엘리트나 관료집단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스위스의 <쥐라연합>을 통해 이런 구상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사회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이론으로부터 이상적인 공화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현존하는 사회악을 인식시키고 토론과 집회를 통해 지금보다 나은 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사고하도록 유도했다. 국제대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모든 노동조합의 연구주제로 추천했다. 그러면 한 해 동안 유럽의 모든 지부에서 직업과 지방의 특성에 맞게 토론되었다. 지부의 결론은 지역대회에 제출되었고 그것은 좀더 정리된 형태로 다음 국제대회에 제출되었다.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구조는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철저히 아래로부터 수렴되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엥겔스의 비판, “권위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나쁜 원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치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좋은 원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권위와 자치는 서로 다른 사회 발전 양상에 따라 그 범위가 서로 다른 상대적인 것들이다.”라는 비판이 조금 어긋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6. 오해를 넘어서 차이로
아나키스트들과 맑스주의자들은 분명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로 묶었던 것은 사회주의였고, 적기와 흑기가 함께 휘날렸던 적은 아주 많았습니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적대자는 맑스주의 자체라기보다 그 지류인 볼셰비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중네트워크에 모인 분들도 볼셰비키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레닌을 제거한 맑스주의? 지젝식의 비유를 빌자면, '니코틴 없는 담배'나 '카페인 없는 커피'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이제 과제는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그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계속 낯선 이방인으로 배제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때로는 그 상대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벗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맑스주의나 아나키즘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누가 더 올바른가라는 점보다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만들어나갈 단초를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의 고민을 허투루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고민은 아직 가지 않은 길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06.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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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3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3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6-06-2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율평론에서 퍼오셨군요..^^ 요즘은 국내자율주의그룹내에서 아나키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군요..제가 전에 이런 글을 그곳 게시판에 올린적이 있었죠.



저는 자율주의를 아나키즘의 부분집합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율주의에서 주장하는 국가와 전위당의 비판..그리고 자율적 민중 혹은"다중"에 의한 자유로운 네트워크들 간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건설 등의 비젼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그것과 괘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루동..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의 전통에서는 맑스의 사상과 전략은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돼어온 반면, 자율주의는 맑스를 사상의 구심점으로 삼는다는 데에 아나키즘과 자율주의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저처럼 맑스의 주장들 예컨대 혁명에 있어서의 당의 역할과 혁명 이후의 이행기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던 사실들 그리고 그것이 바쿠닌과 같은 무정부주의그룹에 의해..제1인터네셔널내부에서 처음부터 비판받아왔다는 사실에서 아나키즘과 맑시즘과의 주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율주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시즘을 그들 사상의 주요한 부분으로 보는 이유를 이해하기 힙듭니다..국가와 당에 대한 비판..그리고 다중의 자율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조류는 맑시즘의 전통이 아닌 아나키즘의 전통에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가 그의 사상을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도..맑시즘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즘에 가깝다고 보고..푸코 역시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네그리가 "요강"을 분석하여..맑시즘 내에서 자율적인 노동자의 힘의 필요성을 읽어내기는 했지만..과연 그것이 맑시즘의 주요한 주장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가 분절적으로 존재했던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준비작업의 한 과정에서 "자본론"에 쓰여지기에는 이질적이었던 요소들을 미출판물이었던 자본론의 준비작업으로서의 "요강"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기술했던 흔적을 네그리가 적극적으로 해석해 것이었을 뿐이라고 봅니다. 과정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결론에 있어서 맑스는 당에 의한 권력장악과 국가의 "점진적" 파괴를 주장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주의가 굳이 자신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르지 않고..다른 무엇으로 불리어지기를 원하는 것은..아나키즘에 대한 전통적 맑시즘 레닌이즘 내의 편향된 시각을 자율주의 내에서도 가지고 있기때문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억측일까요?



이처럼 아나키즘과 맑시즘은 정치를 바라보는 부분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광의의 사회개혁프로그램에서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사실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프로젝트를 먼저 제시한 사람들도 맑스혹은 맑시스트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이죠. 생시몽이나 푸리에등과 같은...때문에 자율주의내부에서 맑시즘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다는..그 이론적인 높은 완성도 때문인것 같긴 한데..맑시즘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사실 충분히 가능하죠. 윗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아나키즘이 이론적 작업에 그다지 천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실천과정에서는 부차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고 로쟈님도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으신가봐요? 이런글도 인용하시고?

로쟈 2006-06-2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온 이유는 서두에 밝힌 대로입니다. 러시아 아나키즘의 지분을 좀 '광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잠깐 언급했지만, 지식분자들의 맑시즘에 대한 선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맑스-레닌주의만큼 혁명의 '전위'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즘도 드물며, 그때의 '전위' 역할을 무지렁이 농사꾼들이 하기는 어렵죠. 농민들이야 <자본론>을 읽을 필요도 여유도 능력도 안되고요...

yoonta 2006-06-2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렁이 농사꾼이 없이는 혁명도 불가능하죠..^^ (급진적) 혁명에는 책만 들여다보는 전위만 필요한게 아니라 현장에서 총칼들고 피흘리는 행동대원?들도 필요하기 때문이죠..러시아내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혁명과정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이루어냈죠. 마흐노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레닌은 반혁명에 의해 쫓겨났을지도 모른다는..근데 그들은 혁명후 볼키에 의해 반혁명주의자로 역으로 몰려 다 숙청당하고 말죠..-_- 역사의 비극이라는..그런 꼴 당하지 말라고 맑스주의자들이 공부좀 하라고 그렇게 구박했던 것일까요? -_-

로쟈 2006-06-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도 중요하지만 공부 문제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강유원의 <공산당 선언 강의>와 파이프스의 <공산주의>를 거푸 읽어봤는데, 전자에는 후자의 교훈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아 당혹스럽더군요(<선언>을 잘 '읽는' 게 공부일까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는 전혀 무관한(따라서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다른 사회주의'를 말하거나 꿈꾸는 이들을 저는 다시 보게 됩니다. '다른 세상', '새로운 인간'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총칼들고 피흘리는 혁명대원들')에 대해 무관심한 '공부'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섬뜩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화상대로는 유익하나 신뢰할 만한 족속들은 아니죠...

yoonta 2006-06-2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뢰할 만한 족속들이 아니라는 코멘트에 공감..^^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원래 자기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맑스와 바쿠닌등과의 대립에도 그런 경향들이 있었던 것 같고요.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아나키즘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에 바탕을 뒀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때문에 지식인-아나키스트는 지식인-맑시스트와는 사뭇 다른 '애매한' 포지션을 갖는다)."

이부분에서처럼 아나키스트들이 이론보다는 인간들의 본능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본점은 그들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로쟈님도 그런 말을 하셨던것 같군요..이론이나 지식보다는 감정이다라는..그것에 호소하지 못하는 것이 좌파의 문제점이다라는 취지의 댓글 말이죠....

burningham 2007-04-0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페이퍼네요 담아갑니다..

그루 2008-01-3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동을 검색하다 여기까지 왔네요^^
멀리서지만, 로쟈님의 글 늘 잘 보고 있답니다.
페이퍼를 담아가려고 댓글은 처음 남겨보네요..^^
감사히 데려갑니다..^^

그루 2008-01-3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글 자체를 담아가는 건 원래 알라딘에서 안 되는 것인가요?
출처와 댓글만 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네요.. 이궁,
스크랩은 어찌 하는 것인지..아무리 봐도 메뉴가 안 나오네요^^;
헤매고 있습니당.. ^^;;

로쟈 2008-02-03 12:12   좋아요 0 | URL
제목 왼쪽의 별표시가 있습니다. 그걸 찜하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찾으셨겠지만.^^
 

학교에 나가는 대신에 집에 있을 때 가장 불편한 건 신문을 사보는 일이다. 가는 길에 전철역 가판을 편하게 이용하는 대신에 일부러 짬을 내어 동네 편의점을 기웃거려야 하는데 대개는 좀 늦을라치면 찾는 신문이 없는 게 다반사이다. 나는 대개 한국일보를 보는데(8할은 고종석 탓이다. 나는 금요일에만 한겨레를 찾는다) 오후 늦게 편의점에 가보니 중앙일보와 경제신문만이 남아 있다.

공치고 돌아와서 온라인으로 기사 몇 개를 읽는다. 그 중 작가 김종광씨의 신작 소설집을 미리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최윤필 기자이고, 타이틀은 "김종광씨 소설집 '낙서문학사'"이다. 이 밋밋한 제목의 부제가 "21세기 문학은 낙서라고?… 상업화한 기존 장르 신랄한 조롱"이어서 이 페이퍼의 제목이 '21세기 문학은 낙서라고?'가 됐다. 이로써 21세기 한국문학은 두 징후적인 지표를 갖게 되었다. 김연수의 '유령작가'와 김종광의 '낙서문학'. 

한국일보(06. 06. 21)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 다섯 장르가 문학을 주름잡던 20세기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21세기.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문학이 필요했던 겁니다….” 곧 ‘낙서문학’이다.

-사뭇 저릿한, 하지만 어딘지 찜찜한 이 ‘썰’(說)은, 평론가 ‘김성연’이, 낙서문학의 창시자이자 대가인 ‘유사풀’의 문학사적 업적을, 유사풀 평전을 준비중인 어떤 작가에게 하는 말이다, 김종광씨의 소설집 <낙서문학사>(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 ‘낙서문학사 창시자편’ 속에서.

 

 

 

 

-이번 책은 <모내기 블루스>, <경찰서여, 안녕> 등의 작품으로 쫀득쫀득한 이야기의 맛과 구수한 입담을 선뵌, 등단 9년차 김종광 씨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그는 이야기에 충실한 작가다. 충청도 사투리에 얹어, 여유작작한 의뭉과 해학, 날렵한 냉소로 버무려내는 특유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재미있다.

-표제작은 ‘낙서문학사 발흥자편’이라는 작품과 연작 형식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광부의 아들’이며 ‘작부의 새끼’이며, 의붓어미와 배다른 형제를 둔” 유사풀. 어려서부터 시 소설을 썼고, 일찍 신춘문예로 등단하지만, 25살에 요절한 문재(文才).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학을 ‘낙서문학’이라고, 온 작품과 온 생애를 걸고 고독하게 고집한다. 그의 ‘문학’은 죽어서야 빛을 본다. 두 작품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채록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그의 생모, 계모, 유년 친구, 중ㆍ고교시절 친구, 그의 여자들, 출판인, 평론가….

-하지만 전언을 통해 ‘유사풀’이라는 동시대 실존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자신들의 기억과 입장, 처지, 그와 공유한 특별한 경험 등에 연루된 다양한,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말들을 전한다. “나는 문학이라는 게 영 사기판 같았거든요. 그의 낙서문학 때문이죠.”(유사풀의 동거녀)

-작품집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 연작이 문학의 ‘미적 모델’이 만들어지고 소통되고 관리ㆍ조작되는 과정의 분열적 모습을 드러냈다면, 다른 여러 작품들은, 지배적 가치기준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아니, 지니기 힘든 현실에서) 가치 판단을 동반하는 말들(혹은 소음들)이 일구는 사회적 관계들을, 다양한 맛의 이야기들을 통해 조망한다.(비평가 최성실씨) 그의 소설이 이야기의 재미에 매몰되지 않고, 그 너머 문학 속에 굳건히 선 자리도 바로 그 언저리일 것이다. 책은 이번 주말쯤 나올 예정이다(*기자는 어떻게 읽은 것인가?).

 

 

 

 

06.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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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6-06-22 17:51   좋아요 0 | URL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 깊이 공감합니다. 문학의 자리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06-06-23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한국 '근대문학'도 종쳤다는 얘기를 고진의 말을 빌어서 한 적이 있는데, 현장의 육성을 들으니까 더 실감이 납니다. 물론 '다른 문학'은 여전히 가능하며 계속 번성해나갈 수도 있지만, 얼마간의 허전함은 지울 수 없을 듯합니다...

로쟈 2006-06-23 00:23   좋아요 0 | URL
제가 궁금한 건 책의 형태였습니다. 가제본 상태로 배달되는 건가 해서요. 그게 아니면, "책은 이번 주말쯤 나올 예정이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2006-06-2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3 11:26   좋아요 0 | URL
**님/ 한겨레에 실린 좀더 자세한 리뷰를 읽어보니까 2030년 한국문단을 배경으로 한 '미래소설'이더군요. 정공법을 취하지 않은 건 다소 불만이지만, 그랬다면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하지 못했겠지요...
 

곁다리 텍스트에 관해 미뤄놓은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해치우기로 한다. 점심을 먹은 포만감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잡담을 늘어놓는 대신에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날은 약간 후덥지근하고 아파트 단지를 대낮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좀 우스운 꼴이 아닐까 싶어서 나는 '좋은 걸' 포기한다. 그래도 이번 토픽은 괜찮군. 문학의 성감대라..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런 몽상을 바로 깨게 되어 미안하지만, 내가 읽은 건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 2006)에 실린 한 대담이다. 책은 이 원로 비평가에게 바쳐진 문집 형태인데, 편집을 맡은 비평가 정과리의 서문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게 상식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유종호 비평이야말로, 정보의 팽창과 역사의 붕괴 그리고 이론의 폭발이라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규정하는 힘인 존재에게 규정당하는 의식이 개입해 존재의 운동에 정지와 성찰과 교정을 촉박하는 역류의 힘으로 작용하는 희귀한 덕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이의 비평을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읽히게 하는 원천은 이 덕목에 있을 것이다."(8쪽)

비록 문법적으로 비문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유종호 비평의 가장 큰 덕목은 이런 '난삽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인용문은 유종호 비평의 미덕을 정확하게 반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평이한 언어와 상식에 맞는 감각에 근거하여 깊이와 기품을 겸비한 작품 읽기와 해석을 제시해왔던 것. 책은 바로 그런 그의 면모를 동료/후배 비평가들과 문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집약해놓고 있다(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은 평론가 유종호와 시인 신경림 사이의 깊은 사적인 인연이었다).

 

 

 

 

한데, 이 '깊이 읽기'에 대한 리뷰는 이 페이퍼의 목적이 아니다(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제목과 관련된 대목은 이런 것이다. 평론가 이남호와의 대담에서 민음사에서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첫권으로 하여 간행하기 시작한 '오늘의 시인총서'에 관한 질문을 받자 유종호는 이렇게 응대한다. 

"그건 김현 씨가 발간 취지문을 쓰고 김현 씨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기획물이에요. 오늘의 시인총서 뒤 표지의 '기획의 변'을 내가 써다고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쓴 게 아니에요.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건 김현 씨의 아이디어에요."(20쪽)

이 '기획의 변'이 고 김현(1942-1990)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얘기지만, "거기에 보면 '문학의 성감대'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나는 '성감대'라는 말을 안 썼어요."라는 지적은 유종호다운 취향과 감식안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흥미를 끈다(그러니까 김현 비평과 유종호 비평의 차이는 이 '성감대'에 있다. 두 비평가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상대적인 무관심에 따라 각기 다른, 정반대의 이론적 포지션에 배치된다. 시읽기에 관해서라면 각기 일가를 이룬 비평가들인지라 이러한 차이는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한 단어의 쓰임새만으로도 텍스트의 의미를 길어올리고 꿰어내는 것이 유종호 비평의 특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기획의 변' 혹은 '오늘의 시인총서를 내면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텍스트 바깥(뒷표지)에 박혀 있는 이 '곁다리텍스트'는 이런 내용으로 돼 있다(이 기획의 변은 김현의 나이 32살에 씌어진 것이겠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어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시는 '문학의 성감대'이며(포에티카는 에로티카이다. 그러니 시를 읽으면서 '찌릿찌릿'하지 않다면 당신은 불감증일 가능성이 높다), 한 개인의 창조물로서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한 여자/남자의 성감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여자/남자의 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가 걸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제하에 기획자 김현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표출을 예리하게 감득/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짱 도루묵이다. 이건 생각보다 파격적인 발상이고 발언이다(고전적 인문주의자로서 유종호라면 보다 겸손한 의의와 역할을 시에 할당했을 것이다).

그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가 새로이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시들이 씌어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꺼이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건 철지난 질문인가?..

06. 06. 22.

P.S. '오늘의 시인총서' 1, 2권인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내가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급조한 시들로 자작시집을 만들어 판매한 수익으로 제일 먼저 산 시집들이다(나는 시를 읽고 시를 쓴 게 아니라 시를 쓰고 시를 읽었다). 그날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가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비평가 김현이 아닌 불문학 교수 김현을 나는 1989년 한 강의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어 동사 활용형을 말하는 목소리이다(!)... 아래는 목포 자연사박물관 뒤뜰에 있는 김현 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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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화에 대한 한 학기 강의 끝에 지난 월요일 기말시험을 봤는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트로츠키'가 누구인지에 대한 단답형 문제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다소간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강사나 학생이나 서로가 한 학기 동안 무얼했는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요즘 학생들이 학점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말도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언제나 그랬지만, 대학생들의 상당수는 날라리 대학생이다. 아마도 그들은 방학때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하여간에 내 몫의 반성을 하는 의미에서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들을 좀더 강화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게 '계몽'적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전혀 아니며, 다만 언젠가 빛이 들 만한 '쥐구멍' 정도는 만들어놓고자 하는 것. 그런 취지에서,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레디앙'에 들렀다가 하영식의 칼럼 '아테네에서 온 편지' 중 '러시아 혁명은 근대화 운동이다(?)'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밀리언하우스, 2005), <굿바이 바그다드>(홍익출판사, 2004) 등의 저서를 이미 갖고 있지만 내겐 생소하다. <여행>은 "80년대,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저자가 당국의 추적을 피해 해외 도피길에 올라 세상을 방랑할 때의 기록"으로서 "프랑스, 영국, 멕시코를 방랑하던 저자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과 폴란드의 외딴 마을 크렘프나에서 보낸 1년간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는데, 러시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담고 있어서 기회가 되면 들춰볼 생각이다.

레디앙(06. 03. 28) 지난해 가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했을 때 한 러시아 노인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한 국가"라는 말이었다. 그 노인의 말처럼 과거의 그 위대했던 러시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해는 1905년 1차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러시아의 대학가 어디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혁명의 진원지이기도 했던 페테르부르그 대학을 찾아 그 대학의 역사학과 석좌교수를 만나 러시아 혁명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위한 운동"이었다. 공산주의체제의 산증인이기도 했던 노교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곧 말문이 막혀버렸다. 러시아에서조차도 지난 혁명의 역사는 이렇게 철저히 부정되고 있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노동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공산주의 사회는 이렇게 몰락해버렸다(*이게 대략 러시아의 현실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론이 실험이었다면 그 실험은 실패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그동안 많은 이론가들이 나름대로 원인을 진단해왔다. 트로츠키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느니, 레닌의 네프(NEP, 신경제정책)를 지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느니 하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의 정책노선이나 중국의 문화혁명이 지나치게 반인텔리적인 정책이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을 하는 이도 있다. 아니면 아예 후진농업국가였던 러시아나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너무 단순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꼴통이라 왕따 당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특히 공산주의 시절 공산당간부로서 부귀영화를 잔뜩 누렸던 가짜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인민복을 벗어 던지고 너무도 쉽게 돈 많은 자본가로 둔갑해버렸다. 이렇게 현실사회주의는 철저히 몰락해버렸다.

-어쨌든 인간의 사고가 빚어낸 최고의 이론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현실에 제대로 적용됐는지의 여부는 제쳐두고서라도 최소한 시도만이라도 해본 것은 사실이다. 어설프나마 그 수준에서 흉내라도 내봤다는 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필자의 감상은 다소 불철저하다. 그러니 칼럼의 말미에서 피상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공산당 간부들이야 다른 세상이 오면 자본가로 둔갑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짐은 고스란히 민중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던 중 모스크바에 살면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티나라는 러시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러시아 공산주의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했다. "어릴 때 언제나 사탕과 초콜릿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으나 전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티나의 회상은 마치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렸다. 국영상점에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구비해놓았지 어린이들을 위한 것들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러시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망한 현재의 상황을 티나는 더 선호한다고 했지만 그 이유란 별 게 아니었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이유였다. 티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만약에 공산당 간부들이 자기주머니 채우는 일에 열중하기보다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만드는 일에 더 신경 썼더라면 세계 공산주의 체제는 여전히 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비록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망하고 대부분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시리아로 대표되는 중동의 몇 개 나라들과 아프리카의 몇 개 국가들과 쿠바와 북한이다. 이들 국가들은 반미를 중심정책으로 두면서 일인 장기독재가 유지되고 있다. 시리아는 아버지 아사드 대통령이 죽은 뒤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았고 북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이 정권을 물려받았다는 점이 너무 유사하다.

-물론 미국의 부시일가도 아버지와 아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점이 유사하지만 빠르면 4년, 늦어도 8년이 지나면 물러나게 돼있다는 점이 이들 국가와는 조금 다르다. 패밀리 장기독재의 문제는 둘째로 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지난해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수도 다마스커스시에 사는 시리아인들과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한 적 있었다. 이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특히 대통령의 이름인 ‘아사드’는 성스러운 이름인양 꺼내기조차 두려워했다. 그의 이름이 나의 입 밖으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천벌이라도 내릴 것 같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북한도 시리아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전국민들이 공포에 떨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는 명분으로 유지되고 있다(*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필자가 특별한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권유지를 위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인간에 대한 착취이다. 배만 채우면서 목숨만 유지한다고 인간이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에게 밥은 없어서는 아니 될 요소지만 자유도 밥만큼이나 중요하다. 자유는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공기와 같은 요소이다. 


 
-어쨌든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사회주의 세상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끌어올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나간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초콜릿과 사탕이 없는 선언만 풍성한 사회였다.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고 생산과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반드시 와야 한다. 인류의 고귀한 이상을 이대로 망한 세상과 함께 떠내려 보낼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최소한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두서없는 마무리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이다'라는 건 '사회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실용주의'의 구호 아닌가? 현실 사회주의는 망했지만, (러시아도 그렇고) 우리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은 별로 없는 듯하다.

06. 60. 22.

P.S. 이 칼럼을 옮겨온 이유는 필자의 이상사회론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포스트-소비에트를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역사와 생활에 대한 감각을 일러주는 두 발언을 칼럼이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위한 운동"이라거나 "(자본주의에서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발언 말이다. 그러한 인식/감각에 근거하여 러시아 혁명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게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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