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에 승승장구하고 있는 작가 정이현의 첫번째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06)가 출간됐다. 공지영에 견줄 만한 여성 베스트셀러 작가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문단에 단비가 되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문학에서 단편과 달리 장편소설은 본래 대중적인 장르로 치지만) '대중소설'로 방향을 튼 작가에게 대중의 호응이 없다면 그야말로 '황량한 도시' 아닐까? 한겨레의 리뷰와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자료로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28) 서른한 살, 달콤할까?

-젊은 작가 정이현(34)씨의 첫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작품을 책으로 묶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직장 생활 7년차인 서른한 살 미혼녀 ‘오은수.’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사람들은 뭘 할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으로 소설은 문을 연다. 그 날은 은수의 옛 애인 ‘고릴라’가 결혼을 하는 날.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로 출근을 했건만, 결혼식 시각인 정오가 되어도 왠지 아무렇지도 않다. “옛 애인의 결혼식 날 울지 않다니.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12쪽)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인공 은수는 백팔십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43쪽)

-‘진짜 어른’과 ‘자발적 미성년’ 사이에 은수는 서 있는 셈인데, 약간 늦은 듯한 결혼 적령기에 아직 미혼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불안정한 처지를 제대로 반영한 결과이겠다(*최근 한국문학/문화의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이 '자발적 미성년'들의 형상이다). 소설은 은수의 남자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여자친구 유희와 재인의, 역시 남자를 둘러싼 고민과 선택이 부주제로 제시되고, 은수의 직장생활과 부모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곁들여진다.

-옛 애인의 결혼으로 꿀꿀해져 있는 은수에게 난데없는 ‘남자 복’이 터진다.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동석하게 된 연하남 ‘태오’를 만나 곧바로 ‘원나잇 스탠드’에 들어가고, 게다가 스테디한 관계로 발전한다. 직장 상사가 소개해 준 연상의 범생이 ‘김영수’가 또 다른 선택지로 제시되는가 하면, 순수한(?) 이성 친구로 지내고 있는 백수 ‘유준’이 프러포즈 비슷한 것을 해 온다. 이게 웬 남란?

“윤태오, 남유준, 김영수. 객관식 선다형 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나는 세 개의 이름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마음 가는 것과는 별개로, 이 세 개의 보기들에는 각각 잉여와 결핍이 담겨 있다. 나는 몇 번째 답안에 동그라미를 치게 될까. 그것은 정답일까, 오답일까.”(115쪽)

-독자 쪽의 호기심을 잔뜩 부추겨 놓고서 주인공/작가는 짐짓 딴청을 피운다.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세상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인간 오은수가 내린 중차대한 결정이다.”(116쪽) 그래야 할 것이다. 소설은 이제 겨우 사분의일 정도의 진행을 보였을 뿐, 앞으로 나아갈 길이 한참 남아 있으니.

-대학을 중도 작파하고 영화판을 기웃거리고 있는 태오. 귀엽고 저돌적이긴 하지만, ‘누나’가 보기에는 너무 철이 없다. “짠! 자기 몰랐죠? 오늘 우리 이십 일 기념일”(127쪽)이라며 빨간 장미 두 송이를 내미는 태오에 대한 은수의 답은 이러하다: “자기도 이제 스물다섯 살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156쪽)

-그렇다면 영수는? “개량 옥수수 낱알처럼 가지런한 사람”(77쪽)이긴 하지만, 도무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관능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관능을 자극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기쁘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던 남자들하고만 거듭하여 만나온 결과, 현재 나의 모습은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126쪽)고 믿는 은수에게 영수의 안정적인 경제력은 무시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은수는 순수와 낭만을 파먹고 사는 철없는 계집애가 아니라 ‘계산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이 '계산하는 인간'이 쿨걸들의 정체이다).

-이 두 남자에 비해 유준의 소설 속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만년 백수로 지낼 듯하던 그가 어느 날 문득 잘나가는 학원 강사로 변신해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다는 설정이 뒷얘기처럼 곁들여질 뿐.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라는, 태오를 향한 질책은 사실 은수 자신을 향한 것이었던 것. 감정의 기복과 곡절을 거친 끝에 두 사람이 헤어지는 귀결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영수의 경우는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 남의 이름을 빌려 써야 했던 그의 ‘어두운’ 과거가 이 소설에서 필연적 맥락을 지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결말은 어찌 보면 다시 그 자리.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따름.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440쪽)

-소설은 끝났어도 은수의 고민과 갈등, 방황은 곱다시 시작이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완벽한 설계와 구성을 지닌 ‘작품’에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이런 점은 신문 일일연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정이현씨의 문장은 매우 능란하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빼어나고, 감각적이며 재기 발랄한 비유들도 일품이다. 가령 이런 것들: “오래 망설이다 마침내 내 손을 떠난 문자메시지는 후라보노 껌처럼, 마블링 잘된 꽃등심처럼, 얄밉게 구는 친구처럼, 그에게 장렬히 ‘씹힌’ 것이다.”(253쪽), “매일을 일요일처럼 보내는 사람에게, 일요일은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키면 함께 따라오는 군만두처럼 느껴진다.”(317쪽)

-“문득 이것이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62쪽)는 구절도 만날 수 있거니와, 이 소설은 일종의 풍속사로서도 유용할 정도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선배 작가인 최인호씨의 경우를 상기해 보고자 한다. 최씨 역시 채 서른이 안 된 젊은 나이에 <별들의 고향>이라는 신문 연재소설로써 일약 인기 작가로 도약했다.

 

 

 

 

-그러나 그가 대중의 환호를 만끽하는 정확히 그만큼, 문학 전문가들은 등을 돌렸다. 그에게 애정을 지니고 있던 평론가들이 고언을 건네자 작가는 오히려 더 엇나갔다. 말하자면 작가는 문학사적 평가 대신 당대 독자 대중의 호응을 택했다(*문학사에 남은 건 '깊고 푸른 밤'이나 '타인의 방' 같은 그의 단편들이다). 정이현씨 역시 지금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달콤한 나의 도시>는 이 재능있는 작가가 선배 작가의 선택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최재봉 기자)

조선일보(06. 07. 29) “쿨 걸들이 말하는 쌉싸름한 도시의 사랑”

-“서른한 살…사랑이 또 올 거 같니?” 성숙한 여인이 되느니 영원히 ‘자발적 미성년’으로 남겠다는 서른한 살 여자 오은수와 그의 친구들이 돌아왔다. 조선일보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가 정이현(34)의 연재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디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문학과 영화 양쪽에서 모두 평론가로 활동 중인 강유정(31)이 작가를 만나 쿨한 대담을 가졌다. 강유정은 2005년 조선일보 등 3개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으로 ‘3관왕’의 위업을 쌓은 평론계의 샛별이다.

▲강유정=일본 소설이 한국의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등장 인물이 쿨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달콤한 나의 도시’는 흡사 일본 소설 같다고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달라요. 이 소설에서 쿨한 것은 등장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요.

▲정이현=그래요. 우리 엄마가 저에게 “차가운 것”이라고 해요. 엄마가 아프면 “병원에 가보세요”라고만 하는 저는 원래 ‘쿨걸’(cool girl)로 태어났어요. 소설 주인공 오은수에 대해 쓰면서도 ‘걔’를 핍박하기 보다는 ‘걔’가 노는대로 내버려두었어요. 진정한 우정이란 친구와 어떤 접점이 있더라도, 때로는 내버려두는 것이에요. 내버려두는 것이 쿨한 것이에요.

▲강=책을 내면서 신문 연재와 달라진 부분이 많은가요?

▲정=큰 틀의 변화는 없어요. 연재 당시 분량이 200자 원고지 1200장이었지만, 책으로 만들기 위해 고치니까 1600장으로 늘어났어요. 중간에 뺀 부분도 있고, 새로 쓴 부분이 있습니다. 주로 디테일이 부족했던 점을 보완했습니다.

▲강=요즘 30대 여성들이 읽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읽을 게 없다 보니 일본 소설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20~30대를 주독자층으로 염두에 두었나요?

▲정=제가 3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는데, 더 늦기 전에 지금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공기(空氣)를 포착하고 싶었어요. 지금 여기에 대한 내 또래 여성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거죠(*물론 이 또래의 공간은 도시이다. 모두가 타인들인 대도시에 사는 30대 초반 오피스걸의 공기). 그런데 연재를 하다 보니 정작 어른들의 반응이 좋아 의외였습니다.

▲강=이 소설에 나오는 두 남자 ‘영수’와 ‘태오’는 서로 상반된 인물입니다. ‘태오’는 모든 여자의 기억 속에 있는 ‘옛날 남자 친구’ 같아요.

▲정=헤어진 남자들에 대한 기억은 쓰라린 것이 아닌가요.

▲강=아니, 헤어지기 바로 직전까지의 스위트한 부분에 대한 기억 말이죠.

▲정=아~하

▲강=‘달콤한 나의 도시’는 도시에서 나고 쭉 자란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성장한 저는 도시의 매연 냄새가 반가울 때가 있어요. 대학생 때 농촌에 답사를 다녀와서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여기가 고향이다’란 반가움이 앞섰어요.

▲정=저는 늘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떠나봤자 다른 도시로 가게 됩니다. 도시라는 곳은 돈을 벌고 써야 돌아가는 곳인데, 도시 아이들에게는 어릴 때 지하 상가의 전자 오락실도 소중한 추억 거리예요. 그리고 도시 아이들에게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던 것과 같은 공통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소통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그렇다면 이 작품의 의의는 도시생태학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강=정이현 소설에서 결혼과 가족은 늘 키워드예요. 왜 동시대 한국을 말하면서 결혼과 가족이 중요한 것인가요?

▲정=제가 집안에서 장녀지만, 결혼한 남동생이 어른 대접을 받고 미혼인 저는 늘 한 발자국 물러서 있어야 해요. ‘누구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가치인 양 하는데, 저는 거기에 소설가로서 물음표를 던지고 싶어요.

▲강=정이현 소설은 기존의 편협한 페미니즘 소설과 많이 달라요. 등장 인물 김영수가 그렇듯이 남자도 이 세상에서 속고 당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정=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말하는 것이 싫어요. 소설은 궁극적으로 약자의 이야기예요. 멀쩡한 중산층 인물 중에도 불쌍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나 불쌍하죠(*물론 이러한 연민이 궁극적으론 자기연민 이상으로 확장되지 않는 것 또한 쿨걸들의 조건이겠다).

▲강=가독성이 높으면 대중성이 농후하다고들 하는데, 소설을 쓸 때 가독성을 염두에 둔 전략이 있나요?

▲정=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대중성과 통속성은 달라요. 제 소설은 로맨스 소설과 TV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런 장르적 관습을 비틀어서 전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소설이 좀 가벼워지면 안 되나요? 소설은 원래 잡스러운 장르인데, 평론가들이 소설을 너무 고급스러운 장르로 만드는 거 아니에요?평론가들이 전부 ‘범생’들이라서 그런가….(*소설은 원래 잡스러운 장르이며 소설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고귀한 소설들은 드물며 작가들 또한 그러하다.)

06.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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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7-30 14:57   좋아요 0 | URL
'서른 언저리'만이 문제인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작가 조경란이 얼마전 발표한 소설은 '마흔에 대한 추측'인가 그랬는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나이'죠. 작가들도 거기서 못 벗어나고...

로쟈 2006-08-02 15:29   좋아요 0 | URL
고비를 좀 넘기시면 좀 무심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로쟈 2006-08-02 18:03   좋아요 0 | URL
남녀간에 체감 나이는 좀 다른 듯합니다. 여자들은 대개 30세에 좀 민감한 듯하고. 제 경우엔 스무 살이 '충격적인' 나이였습니다. 이젠 핑계댈 게 없구나란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