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장정일의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소개 페이퍼를 올리면서 인터뷰기사 한 꼭지를 옮겨놓았었는데, 내친 김에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 또한 옮겨놓는다. 대충 읽어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장정일만큼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나도 책에 대해 아는 체를 많이 하다보니 간혹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평소에 나는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자책하며 사는 편이다(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정하는 게 사실은 더 많지만). 마일리지도 쌓인 김에 이번에 <장정일의 공부>와 함께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는데(책은 이미 학교로 배달되었지만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분량상 <공부>를 제외하면 내가 빨리 완독할 수 있을 책은 <언어학과 정치>(역락, 2006) 정도이겠다.

 

 

 

 

거기에 현재 읽고 있거나 대출해놓은 책들이 10여권. 강의준비나 필요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또 두서없이 그만큼이다. 지난 주말부터 가방에 들어가 있는 책은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고, 집에 와서 잠시 펼쳐본  책이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 그리고 엊그제부터 행방을 찾고 있는 책이 비릴리오의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다(나는 국역본과 함께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영역본도 구했다).

 

 

 

 

전업작가라면 나름대로 책읽기에 질서를 부여해서 '로쟈의 공부'라도 내놓을 준비는 돼 있지만 장정일만큼 쌓아놓은 공덕이 없기에(내가 읽은 '장정일' 가운데 베스트 네 권이다. 나는 그의 <삼국지> 등을 읽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니 울적하다.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죠." 더불어 아무리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도 이젠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막막하다.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하건대, "저, 독서광 아닙니다!"

북데일리(06. 11. 20)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 2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소설가 장정일(45)이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학교 측은 “교육부 학력 규정상 장 씨를 전임교수로 임용할 수 없어 초빙교수로 채용했지만, 임기를 마치면 발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물 비시에 휩싸여 구속되기도 했던 ‘화제의 작가’ 장정일. “나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라고 스물한 살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그는 시인도 됐고, 소설가도 됐고 교수까지 됐다. 모두 ‘책’ 덕분이다. 밤낮으로 읽은 책 이야기. 그가 쓴 6권의 <독서일기>는 독서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전설적인’ 책이다. 책 전문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로 발탁 되었을 때 그의 어눌한 말솜씨에 불만을 갖던 사람들도 “그럴 만하다”며 독서력만큼은 인정했다.

학교에 ‘덜’ 다닌 대신 ‘더 많이’ 읽은 장정일. 그가 <장정일의 공부>(이하 '공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라는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읽은 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뾰족한 일침까지 던졌다. 관심분야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책에 미쳐있는 그를 간곡한 설득 끝에 ‘어렵게’ 만났다. 정면의 시선을 던지지 못하는 그의 수줍음 사이로 마흔 다섯 해의 기나긴 책의 역사가 사라졌다 피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 시인, 소설가로 살다가 직장인이 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백수로 있는 것만 못 하죠. 작가는 24시간 365일이 자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학생들을 위해 내 삶을 쪼개야 하니까 작가가 낫지요”

- 그 좋은 자유를 포기한 것이나 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서울 살이를 시작한 것이나 자신에게는 큰 변화일 텐데요. 대구와 서울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서울은 재입성이에요. 90년도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사 왔다가 96년도에 다시 대구로 내려갔죠. 그리고 10년 만에 올라 온 거에요. 대구와 서울을 굳이 비교하자면 도시와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은거’ 에 비할 수 있는 지방생활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인터넷, 신문. 아무것도 없는 ‘은거’가 불가능한 시대죠. 저는 젊은 작가들을 만나면 꼭 서울살이를 해보라고 해요.

사실, 대구에 가도 서울 생활하고 비슷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대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보는 게 경험상 낫다는 거죠. 젊은 작가라면 특히, 대도시 생활을 겪어 봐야 해요. 촌으로 가겠다는 젊은 작가들한테는 나이 50, 60되서 가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대도시에서 생활해 보라고 말해요. 대도시 문명과 호흡하면서 글감과 문젯거리 같은 것들을 만나봐야 해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외국 생활도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누구든 문명에 노출 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은거의 장점도 살리지 못할 바에야 중소도시 보다는 대도시에서 살아 보는 게 경험상 좋다는 거죠”

“지금은 민주주의 아닌, 과두제”

- <독서일기>와 <공부>의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책’입니다. 책읽기라는 것은 마흔 다섯이 된 지금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독서일기>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공부>는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책과 사이사이에 난 길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실, 책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해요. 만약 길이 있다면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이겠죠. 길은 스스로 만드는 거에요. 텍스트를 가지고 콘텍스트 속에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겁니다. <독서일기>는 책이 먼저 독후감이 뒤에 있는 책이지만 <공부>는 반대로 관심 있는 테마를 정한 후 관련된 책을 읽은 것 입니다. 책이 먼저가 아니라 뒤에 선택 된 거죠.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책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저는 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시민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공부’하면 지긋지긋하다고 하는데 너무 입시위주의 공부를 해서 그런 거고, 공부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좋은 친구입니다. <공부>는 나이 마흔 다섯 된 제가 공부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책이에요”

- '책 읽기를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말씀에서 ‘길’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텍스트로 옮겨 가는 길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같습니다. '비행기의 1등석에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3등석 밖에 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국경의 벽은 높다'며 현 사회를 ‘과두제’에 빗대는 등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도 쏟아 내셨는데요.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과두제에 들어갔죠. 미국도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과두제란 특권층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죠. 프랑스 혁명 이후 세금 내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잖아요. 지금이야 형식적으로 1인1표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거비용을 많이 낸 사람이 당선확률이 높고, 돈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들이 법을 만듭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속게 되죠. 정치권력, 자본주의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 만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단돈 몇 천원만 사기 당해도 속았다고 분해하면서 책을 안 읽는 다는 건 문제죠. 엠마뉘엘 토드, 촘스키 모두 ‘책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했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보다 철저히 기업과 정치를 감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소수종파의 문제 아니다”

-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을 믿고 있는지요. 본문에 보면 '학력이 중학교 졸업밖에 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당시에 치러지던 고등학교의 군사훈련(교련)을 피하고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만 명의 신도를 감옥에 보내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해온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유일하다'고 밝히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이비로 지탄 받아온 것. 대체복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혜시비라고 지적한 개신교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18세에 신앙을 버렸어요.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양심적 병역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느 종교든 간에 살생, 살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나라 종교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이는 한국 종교의 현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나는 양심에 의해 살인은 못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양심적 병역대체를 하게 해다오’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게 당연 한 건데. 우리나라 종교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소수종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 겁니다. 또 불합리 한 건 종교 안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대나 살인문제에 대해 평신도가 고민을 하면 감옥에 가고 성직자는 면죄가 된다는 거에요. 성직자라면 평신도를 위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고민에서 벗어나 있어요. 성직자라고 면죄 되어서는 안 되죠”

- 40년간 문학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향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동문 오에겐자부로에 대한 열등감을 표출한 것은 아닌지’라는 반문을 던지셨습니다.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인문, 교양 분야의 책들로 포진되어 있는 <공부>를 보면 스스로도 문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문학작품을 안 읽었다고 합니다. 다카시는 21세기 교양의 총체는 자연과학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은 늘 사회 현실과 조우했지만 어느 날 그게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일본 문학이 언젠가부터 자아나 내면도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문학을 안 읽는다고 해요. <문학의 종언>에서 하는 얘기가 그런 겁니다. 작가들이 점점 사회와 괴리 될 때 문학도 독자와, 사회와 끊어진다는 거죠.

문학이 살아나려면 내면에서 벗어나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옛날 시인, 소설가들에게 사회는 “여기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말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아요. 그건 작가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도 한국사회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죠. 이렇게 사회에서는 멀어지고 내면 도피나 자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니까 ‘미래파’라는 시가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도 내면 도피에서 벗어나서 사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종종, 작가들은 ‘야반도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야반도주’는 내면 도피 문학을 말합니다. 작가는 사회에 빚이 많습니다. 그러니, 빚지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책은 반드시 도서관에서 읽은 후 구입”

-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빌려 읽는다 해도 워낙 오래 된 책탐이니 모은 분량이 엄청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 읽습니다. 책은 꼭 도서관에서 읽어보고 사요. 신간은 도서관에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3달 정도 늦게 사게 되지만 그래도 읽어 보고 삽니다. 이런 구매법을 권해주고 싶습니다. 도서관, 출판계 모두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소장권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5년 전에 중학교 때부터 모았던 책을 헌책방에 모두 내다 버렸거든요. ‘나는 왜 이렇게 살까’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건 아마 모든 수집광, 마니아들이 한번쯤 겪는 관문일 거예요. 다 내다 버리고 ‘재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전에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한 선배가 라면 사라고 돈 3만원을 줬어요. 그런 선배를 참 좋아 하는데 “지금 무슨 글 써?”라고 묻는 선배보다 “너 요새 먹고는 사나? 돈은 있나?”라고 묻는 선배가 정말 좋은 선배에요. 글이야 다 알아서 쓰니까. 아무튼 그 선배가 준 돈 3만원으로 쌀을 안사고 교보문고 가서 책을 사버렸죠. 그러면서 자책했어요. “나 정말 왜 이러고 살까” 결혼기념일에 아내 선물 사줄 돈으로 책 사버리고. 그러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귀한 책도 많았고 도서관이 안 부러울 만큼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싫어서 다 갖다 버렸어요. 결국 재생의 길을 걷지 못한 거죠. 지금 다시 사 모으고 있으니까“

- 아직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저는 아직 그 수준이 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책 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특별한 버릇 같은 것이 있나요. 접는다거나 줄을 친다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거나....

“그런 시기가 마니아들에게는 꼭 한 번씩 온다니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웃음) 시기야 다 다르겠죠. 책은 사면 커버부터 버려요. 책 읽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책은 이방 저 방에 두고 오가며 읽어요. 한 가지 테마를 정해 놓고 10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 편입니다. 그래야 시너지가 생기거든요. 관심 있는 싶은 주제는 그렇게 접근해요. 접거나 줄치지는 않아요. 읽으면서 파악하려고 노력해야지 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면 거기에 묶이죠. 두 번, 세 번 다시 읽더라도 그건 좋은 독서법이 아니에요”

- 독서광들이 정말 어려워하는 질문이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질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책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그 답을 뽑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카프카에요. 젊은 시절 무척 좋아했죠.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을 권해주고 싶고....또....아! KBS 박성래 기자가 쓴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제가 한겨레21에 그 책 서평을 쓰면서 “이 책을 읽거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아는 것은 독도를 얻는 것과 똑 같다”고 했어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합니다. 그가 쓴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 소설 집필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바탕으로 2003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다루는 이야기를 쓸 예정입니다”

- 시인으로 데뷔해 교수의 자리에 오기까지 글쟁이로, 독서광으로 20년을 보내셨습니다. 꿈을 이룬 지난 시간 동안 행복했나요.

저는 독서광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무 안 읽으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뿐이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달에 10권 읽는 건 기본 아닌가요. 저는 조금 더 읽었을 뿐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읽었다면 제가 독서광이 될 이유가 없었겠죠. 행복요? 음....행복했죠. 지금도 행복하고. 정규교육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했어요. 명문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땄다면 세상을 뀄다는 자신감에 아마 책을 안 읽었을 거예요. 조금 배웠기에 많이 읽어야 했고, 덕분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했습니다”(김민영 기자)

06. 11. 20.

P.S. 결론은 이렇다. "기본을 갖추자!"

P.S.2. 생각이 난 김에 장정일의 시 '삼중당문고'도 다시 읽어보록 한다. '정규교육'을 못 받은 그에게 삼중당문고는 그의 '학교'였고 '교사'였으며 또한 '친구'였으리라.

삼중당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왔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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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11-21 03:57   좋아요 0 | URL
로쟈님,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라... 가장 현실적인 답이네요.
전 '다 읽으면 폐인 되기 때문' 을 생각했었는데...

기인 2006-11-21 07:0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라주미힌 2006-11-21 09:05   좋아요 0 | URL
대단하고 흥미롭네요.
요즘 레오스트라우스 읽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11-21 10:05   좋아요 0 | URL
장정일씨가 언젠가 말했지요.
"동사무소에 취직하여 퇴근후 맘편히 책만 읽으며 살고싶다"
책을 많이 좋아하는 분인가 합니다.


로쟈 2006-11-21 11:45   좋아요 0 | URL
가을산님/ 아마 굶기 이전에 쫓겨날 거 같습니다.^^
기인님/ 출근하셔야죠!
라주미힌님/ 레오스트라우스의 책은 저도 소개만 하고 들춰보진 않았는데 읽어볼 마음이 드네요.
hansa님/ 요즘은 9급도 쉽지 않다지요...

뽀르르 2008-08-15 14:40   좋아요 0 | URL
장정일씨 검색하다 읽어보고 글 남깁니다.
집에도 빛 바랜 누런색의 삼중당문고가 몇몇 보이네요.
단어 단어 한자로 쓰여진게 많아서 편히 읽을수는 없지만
작은 크기는 정말 매력적이네요. 그리고 의외로 세로 인쇄 읽기가 부담스럽지 않네요.

거의 매일 저공비행에 들어와 독서 지침으로 참고 하고 있습니다.
 

자크 라캉의 셋째딸이라는 '시빌 라캉'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한 아버지: 수수께끼>(Un pere: puzzle)가 그것이다. 책은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 1994년 갈리마르출파사에서 나왔다(이후에 스페인어와 독어로도 번역됐다). 하지만 이 책에 관한 리뷰는 최근에 읽었다. 다음카페 '비평고원'에 김남시님이 올려놓은 리뷰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욕망 : Sibylle Lacan <한 아버지>'(06. 11. 19)를 옮겨놓는다(필자가 참조한 책은 독역본이다). 김남시님은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현재는 독일 유학중이다. 리뷰에서 '쟈크 라깡'이란 표기는 '자크 라캉'으로 통일했으며 원어는 우리말로 음역하고 일부 문단을 조정했다. 그리고 각주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없었다.” 시빌 라캉(Sibylle Lacan)의 회고록 <한 아버지 : 퍼즐>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한 그녀의 안쓰러운 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부재로 인해 그녀 생애 전체를 규정했던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쟈크 라깡이다.

시빌 라캉은 쟈크 라깡이 첫 번째 부인 마리-루이즈 블롱댕(Marie-Louise Blondin)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쟈크 라깡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후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첫째 딸 카롤린(Caroline)과 둘째 아들 티보(Thibaut)에 이어 1940년, 이 회고록을 쓰게 되는 세 번째 딸 시빌을 낳는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 후 라깡은 블롱댕과 이혼한다. 그녀의 말처럼, 아버지를 의식하게 될 나이의 그녀에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부재했던 것이다. 

시빌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신의 회고록 앞에, 특이하게도 ‘일러두기(Hinweise)’ 라는 제목을 단 ‘서문’을 붙였다. 거기서 그녀는 ‘이 책은 소설도, 소설 형식을 띤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엔 어떤 픽션도 없다. 독자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책 부피를 늘리기 위한 어떤 꾸며진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들을, 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자크 라캉이라는 인간자체에 대한 것도, 정신 분석학자로서의 쟈크 라깡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건 나의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썼다.

실지로 그녀가 이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자크 라캉의 모습은 온전히 그의 ’버려진‘ 딸, 시빌의 관점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은 자크 라캉에게 버림받은 후 광고 삽화가와 부띠끄 점원을 전전하며 어렵게 세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생부이지만 법적인 타자였던 라캉에 대한 그녀의 양가적 감정, 나아가 그가 두번째 부인 실비아 바티이유(Sylvia Bataille; 조르주 바타이유의 아내였다)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Judith Bataille) - 그녀는 이후 라깡의 제자였던 자크-알렝 밀레르(Jacque Alain Miller)와 결혼해 주디스 밀레르(Judith Miller)라는 이름을 갖는다 - 에 대한 그녀의 깊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 유명한 정신분석 이론가는,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낳은 부인에게 또 아이를 낳기를 요구하다 그를 거부한 부인과 이혼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전 부인과 자식들이 사는 거리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버젓이, 그것도 약속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여자와 동침하는 파렴치한으로, 나아가 이혼한 부인과 자식들에게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비만 제공했던 인색한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관계를, 그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혹은 읽어낼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 혹은 부정하려는 그녀의 집요하고도 애처로운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인간적 연민과 스노비즘적 경멸 사이를 오가게 한다. 부재하는, 유명한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그녀의 권리 주장은 그녀의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라캉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혼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르자는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아버지 라캉에 집착하고 있던 그녀에게, “Who‘s who” (유명인 인명사전)에 실린 'Jacque Lacan'의 소개 글은 충격적이었다. 거기엔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겐 한 명의 딸, 'Judith Bataille'만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아래 사진이 '주디스 라캉' 혹은 '주디스 밀레르').

자신에겐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현존하는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는 배다른 동갑내기, 라캉이 자신의 진료실에 커다란 그녀 사진을 붙여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던 유디트(*주디스?)의 첫 만남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만 한 일이다. “유디트와의 첫 만남은 내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완벽했고, 나는 너무도 조야하고 서툴렀다. 그녀는 완벽히 사교적이고 재치 있었고 나는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데 반해 나는 어린애 같았다...나는 완전히 내팽겨지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언어만 공부했던데 반해 그녀는 철학을 공부하기까지 했다. 아, 얼마나 자주 그녀가 소르본 앞에서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내 앞을 스쳐지나 갔던가.”

그런데, ‘자신에겐 부재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유디트에 대한 그녀의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자기 언니이자, 라캉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카롤린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리하여 라캉을 4년이나 더 ‘아버지’로 가지고 있었던 카롤린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녀는 모든 능력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숙하고 모든 여성스러움을 갖추고, 길고 탄탄한,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선 보기 드문 금발머리였으며 르노아르 그림의 주인공처럼 화사했다. (그에 반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작았고 버릇없는 소년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냥 귀엽기만 했다), 특별히 재능이 많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학생시절 내내 1등이었고, Concours General 상을 받고, 우수한 대학 성적을 거두었다. 난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를 위해 무척 애써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는 육화된 여신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나와 오빠)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그녀에 의하면 이 카롤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라캉은 그녀에게 두 번째로 - 첫 번째는 메를르 퐁티가 죽었을때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아버지 (라깡)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카롤린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둘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딸들의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공적인 여성성을 아버지가 부재했던 자신의 볼품없고 초라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꺼림칙한 연민의 감정은, 자크 라캉의 자식이기를, 태어날 때부터 부재하던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전취하려는 시빌의 파라노이드적(*편집증적) 집요함 앞에선 엽기적 섬뜩함으로까지 발전한다. 라캉이 죽은 후 그의 묘지를 방문한 그녀는, 함께 방문했던 남자 친구를 묘지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다. “나는 아무 목격자도 없이, 내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내 남자 친구의 모욕받고 기분상한 반응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하자.) 그건 사적이고도 내밀한 만남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버지의 차가운 묘석에 손을 얹고는 마음 속으로부터 이야기한다.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

한편 또 한 명의 라깡의 딸, 철학자 주디스 밀레르 역시 아버지 라캉과 관련된 책을 출판했다. 1991년 Le Seuil 출판사에서 나온 <라캉 앨범. 내 아버지의 얼굴>이 그것이다.

06. 11. 19.


 

 

 

 

P.S. 알다시피 자크 라캉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이다. 그리고 슈나이더맨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인간사랑, 1997)도 참고할 만한 책이다. '생초보'라면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0)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흥미롭지만, '아버지'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최적의 문헌은 '아버지의 이름(the Names-of-the-Father)'을 주제로 한 라캉의 세미나이다. 자크-알렝 밀레르가 편집한 이 세미나가 작년에 쇠이유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곧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됐다. 영어본은 저널 'Lacanian Ink'(27호)에 들어 있는데, 그 일부 발췌내용은 아래와 같다.

The figure of the father is not a concept born in psychoanalysis, but rather a figure inherited by psychoanalysis. If the plural is an allusion to the end of this cursed tradition, it is because it is introduced in a logic of the Name-of-the-Father in which the latter appears as a function that can be sustained by diverse statements, which, from then on, play the role of said name.

Thus the Name-of-the-Father, as one of these elements, should not be the ultimate instance nor the ultimate response. It remains to be given a status and distinguished as element and as function. But, what function? If we refer to what Lacan denominated the paternal metaphor, it is the function of metaphorizing the desire of the mother, of barring it. In this sense, the Name-of-the-Father is, par excellence, an operator of metaphorization, to such an extent that, as element, it already is in itself the metaphor of the father, of the presence of the father. Let us write it this way:

The Name-of-the-Father can not only operate in the absence of the father (this is why Lacan criticizes the theories that relegate psychosis to the lack of the father), but it can also make him absent. If it is a matter of the father spoken through the mother, as a theme of the discourse, it is well to stress that it is an empty reference there, that he is made absent by the verb. And for that reason, without myth, one can affirm that it is a matter of the dead father as the subject of the signifier, which is writ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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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0 06:47   좋아요 0 | URL
마지막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가 의미심장하네요.

로쟈 2006-11-20 08:19   좋아요 0 | URL
모든 딸들의 코멘트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6-11-20 11:12   좋아요 0 | URL
라캉.. 저는 어렵습니다.
유디트의 사진, 전형적 프랑스 엘리트계층 여인의 풍모입니다.
시빌이 열등감을 느낄법도 합니다.


2006-11-2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20 22:59   좋아요 0 | URL
**님/ 블로그를 갖고 있지 않구요, 가보니까 (출처를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옮겨놓았더군요. 네티켓이 없는 분입니다...

2006-11-20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깽돌이 2006-11-21 02:12   좋아요 0 | URL
자녀는 하나여야 안전한가?! ^^

로쟈 2006-11-21 08:38   좋아요 0 | URL
상팔자는 무자식이죠...

테렌티우스 2006-12-01 1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팬입니다...^^

중간 이름의 우리말 표기는 쥐디트 라캉, 쥐디트 밀레르가 맞습니다. 국어 연구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보시면 됩니다...

http://korean.go.kr/06_new/rule/rule05.jsp


로쟈 2006-12-01 10:54   좋아요 0 | URL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어연구원의 표기를 다 따르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게 맞는 거 같네요...
 

거창한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몇 문단을 읽었던 '패리스 힐튼과 카트린 밀레'란 페이퍼의 자투리이다. 거기서 내가 인용한 마지막 문단은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 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이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하다."(106쪽)였다. 이 자투리는 그 마지막 문장에 붙은 각주5)에 관한 것이다. 이 각주가 거창하게 요악하자면, '디지털화와 형이상학의 정점'에 대한 것이다. 먼저 그 내용을 옮겨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 전통의 최고 지점을 형성하다. 아도르노는 어디에선가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동하려는 시도, 파르메니데스가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의 변형이라고 언급했다(심지어 마르크스조차 이 선상에 있다. 그의 '계급의식'에 대한 생각은,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모범적으로 전개한 것처럼 정확하게 사회적 존재에 직접 개입하는 사고에 대한 게 아닌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이버공간에서의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비트에서 그것으로(from the bit to it)' 넘어가려는, 즉 디지털한 형식적 구조 질서에서 존재의 두려움을 형성하려는 점에서 이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106쪽)

먼저, 첫문장은 부정확하다. 영어본과 대조해볼 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이 아니라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라고 옮겨져야 한다('Despite this radical rupture...'). 다시 옮기면,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적 전통의 정점(the culminating point)을 지시한다." 어떤 전통 말인가? '사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려는 전통'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변주이다. 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행해가려는 시도이다(신에 대한 사유 -> 신의 존재 입증).

 

 

 

 

그리고 이것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서 최초로 정식화되었다(가령, "Thinking and the thought that it is are the same; for you will not find thought apart from what is, in relation to which it is uttered." "For thought and being are the same." 등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언명들.) 그리고, 마르크스-루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서 '계급의식'이란 '사회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사유'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론: "Consequently, is not cyberspace digital ideology  - in its attempt to pass 'from the bit to the It', to generate the very density of being from the digital formal-structural order - the last stage of this development?"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에 대응하는 영어본의 문장인데, '비트에서 그것으로'가 'from the bit to the It'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발전'이 가리키는 것은 서구 형이상학의 발전사이다. 그러니까 소위 '디지털 이데올로기'가 서구 형이상학의 마지막 발전단계가 아닌가?, 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그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 '사유에서 존재로' 이행해가려고 했던 것처럼 디지털화는 '비트에서 존재로' 넘어가려고 한다('being Digital'에서 'digital Being'으로?). 즉, 디지털적인 형식적-구조적 질서로부터 '존재의 두터움'(=존재감)을 창출해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사례 중의 하나는 <매트릭스>의 원조격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가 아닐까?..

0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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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화의 궁극은 디지털임이 간파되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화..
저의 생각입니다. 로쟈님.

로쟈 2006-11-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동일성' 테제 정도가 되겠네요...
 

최근 젊은 작가들의 '근황'에 대해서 점검하고 있는 글을 옮겨온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김중혁 등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상상력과 질펀한 입담을 '작두 탄 구라의 향연'으로 정리하고 있는 글인데, '작두 탄 구라'란 표현보다 내게 직접적인 것은 '총알 탄 구라'이다(그래서 제목은 '총알 탄 소설가들'로 단다). 필자는 '에세이스트' 정여울씨이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의 저자인데, 문화평론가 혹은 문학평론가가 어울림직한 직함이지만 그걸 통칭해서 저널에서는 '에세이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젊은 작가들의 '입담'에 애정을 주어봄 직하다. 그게 한국문학의 장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1. 17)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이기호·박민규·박형서가 보여주는 한국소설 유머의 심상찮은 변화…질펀한 입담의 약장수, 고독의 복화술,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을 즐겨라

요즘 <개그야>의 ‘사모님’을 보며 한국 코미디의 경이로운 진화를 실감한다. ‘사모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무대장치의 과감한 생략이다. 의자 하나 달랑 놓고 모든 무대장치를 제거하니, 그 텅 빈 암흑의 공간은 시청자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운전해’, ‘어서’라는 짧은 대사는 그때마다 다른 뉘앙스로 변주되며,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사모님의 권태와 고독, 그녀의 못 말리는 백치미를 구현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코너는 더욱 놀랍다.


△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에 유머의 경제성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이런 한국 소설 유머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왼쪽부터)는 그 대표적 소설가이다.(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장욱,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코너를 보면 인간의 표정 안에 숨겨진 소우주, 그 코믹성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언어도 무대장치도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삼총사의 표정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세 사람은 가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를 연주해내는 기막힌 내공을 보여준다. 이렇듯 무대 위의 개그는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스탠딩 코미디가 굳이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이런 표현의 경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소설의 유머도 드디어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애들은 가라? 꼰대들은 저리 가!

이기호식 유머의 키워드는 친밀성이다. 그의 유머는 흔히 구어체적 현장성에서 발원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꾼과 청자의 온기’로 극복하곤 한다. 그의 문체는 강한 구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나마 묵독의 폐쇄성을 지우며, 동네 남녀노소를 잔뜩 모아놓고 질펀한 입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과장된 몸짓과 신명난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기호식 유머의 에너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의도와 목적과 진심을 매번 배반하는 시트콤적 상황의 무한 연쇄들. 이기호의 인물들은 우연의 퍼레이드에 온몸을 맡긴 채 기꺼이 ‘하느님의 코미디 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호는 작품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유난히 강조한다. 옛날옛적 입담 좋은 약장수들은 온갖 구라를 읊조리며 ‘애들은 저리 가!’라고 외쳤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약장수 이기호는 ‘꼰대들은 저리 가!’ 혹은 ‘애들만 이리 와!’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기서 꼰대와 애들을 가르는 기준은 ‘상상력’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바쁜 일상에 저당 잡힌 어른들은 주눅들기 쉽다. 그러나 그 상상력의 울타리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 이기호식 유머의 ‘친밀성’이 자리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좀처럼 걷지 않던 후미진 샛길을 문득 걸어보고, 평소에는 서먹한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훌쩍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의 코마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민규 소설의 독자는 가끔 자신의 ‘조로’를 의심하게 된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대책 없는 유아적 순수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너무 닳고 닳은 어른들’이 되어버린다. 읽을 때는 키득키득 웃지만 읽고 나면 문득 자신의 길들여진 일상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박민규식 유머의 빛깔이다. <핑퐁>의 왕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 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의 유머는 동화적 무구함과 아릿한 슬픔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이 유아적 순수에는 왕따 아닌 모든 인간들을 향한 서늘한 저주가 묻어 있다. 핼리혜성이 지구에 와서 충돌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그곳에 드나들며 왕따 소년은 교실에서만 ‘다수결로 묵인되는 왕따’가 자행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이 중차대한 인류의 운명을 왕따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식 유머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유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가 내팽개친, 인류가 ‘깜빡’한 존재들의 필연적 복수혈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유머는 정서와 문체 사이, 욕망과 표현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탄생한다. 그의 작품 표면에 드러난 유머가 빙산의 1%라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99%의 빙산, 그 거대한 스케일의 고독과 슬픔의 복화술을 읽어낸다. 그의 유머는 일단 독자를 웃겨놓은 다음 그 웃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성찰적 유머다. 상큼한 유머 뒤에 드리운 짙은 비애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없이 이지적인 블랙유머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유머는 박형서식 유머일 것이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박형서식 유머의 코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엄격한 먹물적 수사학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도 능란하게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화자는 선행연구에 대한 분노를 무시무시한 공격적 수사학으로 과격하게 표현하는가 하면(“그는 가금류의 뇌를 가진 비평가이며 문장은 흑사병 수준이라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리카르도 호킨스의 <못된 유전자>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 이 작가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

수많은 탁상공론에 맞서는 더 많은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통과될 수 없는 ‘논문’이지만 더없이 이지적인 블랙 유머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소설’이다.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가 “요새 좀 바쁘긴 하지만” 써낸 이 장대한 스케일의 논문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범람한다. ‘닭알’을 ‘불알’과 동격에 놓은 다음,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수십 번 등장하는 달걀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듯 천연덕스레 자신의 ‘독창적’ 학설을 읊어대는 능청이 배꼽을 잡는다(*'논문'으로서 이 작품의 결함을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각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에 '춢판사'가 모두 빠져 있다. 즉, 논문의 기본적인 작성요령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은 독창적이며 훌륭하다. 가금류의 뇌를 가진 기득권 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독창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잡설·요설·독설들이 논문의 테마를 요리하는 데 너무나 ‘논리적으로’ 복무한 나머지, 독자들은 깜빡, 혹은 기꺼이, 이 ‘논문’에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가고프다. 이 논문의 핵심 가설은 옥희가 6살이 아니라 가임기의 “처녀애”이며 아저씨와 옥희의 성교로 인해 질투에 눈먼 어머니가 아저씨를 내쫓는다는 것. 결국 외할머니-어머니-옥희는 “음란삼각편대”이며 옥희의 집은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란다. 박형서는 우리가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습속과 제도와 상식들을 한낱 유희의 장난감으로 만듦으로써, 사소함과 중요함이 서로 전복된 ‘픽션 언리미티드’의 세계를 창조한다.

모든 진정성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 진실은 몽둥이와 발길질과 전기고문으로 조작되는 세계, 존재나 고통이나 사랑 따위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박형서적 그로테스크 유머가 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악동적 기괴함이 가득한 문체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싸가지와 재수가 동시에 외출한’, 잘난 척하는 말투를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의 주인공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지적인 악마성과 <사탄의 인형> 주인공 처키의 악동적·요괴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캐릭터들이다.

박형서 유머의 핵심은 갈 데까지 간다는 것, 한없이 막 나간다는 것이다. 끝간 데 없는 기괴한 허구의 파노라마가 박형서식 유머를 수놓는다. 그의 소설은 인과성의 제어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이다. 게다가 그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머를 구사한다. 자신의 두뇌 속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거의 MRI 촬영의 해상도로 보여주는 뻔뻔함이 그의 매력이다.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최근의 단편소설 중에는 김중혁의 <유리방패>가 새로운 유머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중혁은 읽는 이를 공격적 웃음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의 천진함 앞에 독자를 뼛속 깊이 무장해제시킨다. 그의 유머는 공격성도 방어성도 없으며, 이 질긴 생의 링 밖으로 잠시 뛰쳐나와 마음의 모든 매듭을 잠시나마 풀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소주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비움’의 유머다.

그러나 위의 작가들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자체이지 유머코드는 아니다.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하는 것뿐이다.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 자체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자체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정여울 에세이스트) 

06. 11. 19.

P.S.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원제는 <벌거벗은 총(Naked Gun)>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천진함' 같은 것을 읽는다(그것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들려주는 발랄한 이야기들은 때로 <개그야>나 <개그콘서트>의 뺨을 치며 우리의 배꼽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쏜 '총알들'이 현실의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해서, 이 천진한 악동들의 반항과 일탈이 미더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반복하자면,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아니,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의 '총알 탄 소설가들'은 구두끈을 더 바짝 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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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11-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야의 '사모님'은 정말 기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마지막 글이 참 많이 와 닿는군요.^^

로쟈 2006-11-2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데, 하도 입소문이 돌아서 '사모님'은 두어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도 살기 힘들더군요.^^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내 언론에도 칼럼을 연재하곤 했던 이연숙 교수의 주저가 지난달에 출간됐었다(저자의 이름은 사카이 나오키의 <국민주의의 포에시스>(창비, 2003)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진작에 보관함에는 넣어놓았었지만 근대 일본에서의 '국어 이데올로기'를 파헤치고 있는 저작의 성격상 (관심이 가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읽겠는가 싶어서 구입은 차일피일 미뤄두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본격적인 리뷰서평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길잡이 삼아 읽어보고자 한다.  

 

 

 

 

그 전에 책에 대한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폭력적인 근대 일본의 '국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지적하며 1996년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작. '국어' 개념의 성립과 전개를 축으로 하여,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새롭게 밝히고자 했다. 한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쓴 책으로,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동일한 '일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러한 담론은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서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국어라는 사상'이다."

문제는 이 '국어라는 사상'이 일본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잖겠는가라는 점. 이 문제적인 대목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해줄 수 있는 책이 또한 기다려진다. 아래의 서평은 정선태 교수의 것인데, 이미 코모리 요이치의 <일본어의 근대>(소명출판, 2003) 등을 번역하고 근대어와 근대문학에 관련된 다수의 논저들을 발표한 바 있기에 최적의 서평자라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6. 11. 18) ‘국어’는 ‘제국주의’이념·수단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표준어를 사용하는(또는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아니겠는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양이 없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 ‘표준 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애쓰는 ‘촌놈’들의 무의식 속에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완강하게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누가 왜 정하는가. 왜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보이고,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열하게 보이는가. 우리가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하는 ‘국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흔히 한국의 ‘국어’에는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국어’의 보존과 순화야말로 민족 정신을 지키는 보루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국어’라는 표현은 그 자체는 ‘정치적 개념’이면서도 실은 그 정치성을 은폐하고 언어를 자명화하며 자연화하는 작용을 띠고 있다”는 도전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국어라는 사상’은 일본에서 ‘국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되는지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동원하여 증명한다. 일본 근대 언어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와 그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保科孝一)를 두 주인공으로 하여 일본의 ‘국어학’과 ‘국어 정책’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국어’라는 말이 사실은 ‘대일본제국’의 욕망을 현실로 옮기는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는 “언어는 이것을 쓰는 인민에게 있어서는 흡사 그 혈액이 육체상의 동포를 나타냄과 같이 정신상의 동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을 일본 국어에 비유해서 말하면 일본어는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라 할 수 있다”는 우에다의 선언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이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야말로 일본의 ‘국체(國體)’를 유지하는 근간이며 일본인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에다 이전에는 ‘국어’라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어’라는 이념과 제도는 일본이 근대 국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안해 낸 하나의 작품이자 픽션이었다.

물론 일본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의 ‘국어’에 국민 통합의 이념을 새겨넣었고, 이를 통해 국민의 ‘평준화’와 ‘동질화’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겼다. 우에다와 그의 제자 호시나가 하나의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예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야콥 그림(Jacob Grimm)은 “독일이 진정한 통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도, 경제에도, 종교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독일어라는 언어가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했다. 독일이란 무엇보다도 ‘언어 민족(Sprachnation)’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 의식의 형성을 위해 창안된 ‘국어’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내부를 통일하고 급기야 외부(=식민지)로 향한다. ‘언어와 민족의 정신적 유기적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이라는 신화를 작성한 근대 국민국가 일본은 자신의 ‘국어’를 무기로 하여 제국 건설에 나선다. 근대 국민국가는 필연적으로 제국을 욕망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어’는 ‘제국의 국어’를 욕망한다. ‘대일본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함에 따라 일본의 ‘국어’는 ‘대동아공영권어’를 지향한다. 자연스러운 이치다!

우에다는 ‘국어’에 의한 ‘국민’의 동질화·획일화가 근대 국가의 존립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어’의 대외 진출을 위해서는 표준어 제정과 표기법의 통일 등 ‘국어 개혁’이 불가피했다. ‘대일본제국’은 ‘새로운 영토’, 곧 조선과 대만을 비롯한 식민지에 ‘국어’를 전파하기 위해 부심한다. 국어 정책을 학문적으로 총괄한 사람이 바로 우에다 가즈토시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였다.

반대가 없진 않았지만 호시나 고이치가 주도한 ‘국어 정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 없이 관통한다. 즉, 조선에서도 ‘대일본제국’의 ‘국어’는 유감없이 그 힘을 발휘하여 ‘내지인’은 ‘국어를 상용하는 자’, ‘조선인’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법적으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조선의 독자적인 민족성은 완전히 부정되기에 이른다. 제국을 욕망하는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어’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국어라는 사상’을 읽으면서 주시경을 비롯하여 한국의 ‘국어학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국의 ‘국어’가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국어’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이념의 실체는 어떠한지, 우리는 진지하고도 성실하게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정선태|국민대 교수·국문학)

06. 11. 18.

P.S 서평의 마지막 문장,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대해선 관행에 비추어 좀 회의적이다. 과연 '파고'가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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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8 14:47   좋아요 0 | URL
'개념'에 대한 담론은 주관적 요소가 강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