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읽은 러시아 관련 외신들 대부분이 부정적이거나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가 자원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면모를 되찾아가는 이면에서 푸틴을 권력의 정점으로 한 구 KGB 파벌의 득세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관료-과두부유층 집단(올리가르히)의 전횡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의 말을 빌면,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절을 포함하여 현재까지도 여전히 '귀족사회'인 모양이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로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은 동시대 러시아의 여러 징후들 속에서도 감지된다. 모스크바의 오스토젠카 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새로운(?) '계급전쟁'(이미 '계급투쟁'이 아니다!)은 한갓 에피소드일까(우리의 '철거민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차이라면 러시아에서는 법적인 권리조차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외신을 요약하고 있는 국내기사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원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12. 20) 러시아 모스크바 원주민-신흥갑부 ‘계급전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인근 오스토젠카구에는 ‘공산당 선언’을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동상이 서 있다. 요즘 이 동상 주변으로 이곳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시당국이 부자들을 위해 재개발을 추진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원주민들이 이주 보따리를 싸야 할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5년전만 해도 공산주의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의 도심에서 원주민과 신흥 부자들 사이에 새로운 계급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서쪽지역 오스토젠카구 히코프로 3가에 사는 주민들은 지난 9월부터 엥겔스 동상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5월 시 당국이 부유층들을 위한 최고급 주거지역을 짓기 위해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당국이 모스크바 남쪽 외곽 부토보에 이주용 아파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 반발을 무마하지 못했다. 부토보가 모스크바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나 떨어진 데다 1930년대 말 스탈린 시절 1천만명의 유대인들과 한인들이 학살돼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오스토젠카는 모스크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주거지였다. 지금 이곳에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떼돈을 번 신흥 갑부들의 자금과 낡고 우중충한 건물을 대신해 최신식 건물을 들이겠다는 시 당국의 의지가 맞물려 수백만달러짜리 펜트하우스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오스토젠카 외에도 트베르스카야 등 도시 서쪽지역에는 ‘골든 마일’ 재개발 사업이 진행중이다.



신흥 갑부들을 위한 아파트는 철통 보안과 각종 편의시설을 자랑한다. 아파트값은 ㎡당 1만달러(평당 약 3천만원)가 넘어서는데도 없어서 못팔 정도다. 부동산업자인 게오르기 자구로프는 “돈과 권력이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역 부동산을 매입하고 있다”며 “신흥 부자들에게 1백만~2백만달러는 돈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부자들에게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재개발 붐은 러시아 부동산업자들에게 큰 돈벌이 기회가 되고 있다. 부동산 개발회사 RGI 인터내셔널은 이달초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지난 10월 RGI인터내셔널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오스토젠카에 사는 주민들은 당국과 개발업자들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고 있다.

최근 러시아 경제신문 코메르산트가 연방 반독점 감독원이 킬코프 페레록 3가 개발 사업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폭로했지만 개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시 관계자는 오스토젠카의 항의는 ‘지역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모스크바 소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가고 있으며 주민들과 개발업자·시 당국 사이에 갈등이 커지면서 각종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유명 성형외과 의사가 청부살인업자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19일 이같은 오스토젠카의 분위기를 안톤 체호프의 소설 ‘벚꽃동산’을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소설이 아니라 드라마이다. 원기사에도 '소설'이란 언급은 없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설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기자들이 점점 용감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신분제 파괴 이후 제정 러시아가 맞은 혼란한 사회상을 그렸다. 사회적 혼란을 겪는 오늘의 러시아에 부동산 문제가 계급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김정선 기자) *아래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구세주 성당과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는 오스토젠카 구역의 야경.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were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 Misha Japaridz/The Associated Press)

A class struggle on Moscow's Golden Mile

Locals fight a luxury housing project fueled by oil money

By Sophia Kishkovsky

MOSCOW: The statue of Friedrich Engels that graces one of central Moscow's most prestigious neighborhoods has not been of much use to any but pigeons in recent years. But Engels, co-author of "The Communist Manifesto," was a handy rallying point not long ago for some residents of that neighborhood, Ostozhenka, who were protesting its transformation into a hotbed of luxury housing thanks to an oil-fueled real estate boom.

"Leave Us Alone," read banners unfurled by the protesters in September. That cry is also the name of their movement, spurred by the latest luxury housing project, slated for the site of an apartment building in which some of them still live, at Khilkov Pereulok 3.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just as the district began to take off, overlook the area. Ostozhenka, once home to many artists and intellectuals, is now known in the parlance of real estate agents and their wealthy clients as the Golden Mile. Its winding lanes are now home to modern multimillion-dollar penthouses, Ferraris, gourmet restaurants and bizarre crimes: Last year a celebrity plastic surgeon was stabbed by roller skaters, and later died, in what appeared to be a contract killing.

The neighborhood's rise is only one of many morality tales of money, power and real estate now playing out across post-Soviet Russia. In recent months, incidents included an elderly Moscow couple who had been evicted from their home and were camping in the yard of their old apartment building, which was slated for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and villagers being pushed from their homes on the edge of Moscow to make way for high-rises.

In both cases, residents were infuriated by orders to move to apartments in Yuzhnoye Butovo, a district that is near a former Stalinist killing field and an hour from central Moscow by subway. They are still fighting the orders. The fight continues in Ostozhenka as well. "The Golden Mile is the most brilliant business project in post-Soviet Russia," Denis Litoshik said in November at one of the neighborhood's upscale coffee shops.

Litoshik, 27, has a personal stake in its transformation: He lived, until recently, at Khilkov Pereulok 3, and he is a leader of Leave Us Alone. As a journalist for the business newspaper Vedomosti, he is awed by what he says is a reported price tag on apartments going up next door to his former home: $33,000 a square meter, or $3,000 a square foot. "They're not selling drugs, but they're making much more money," he said of developers who have converged on Ostozhenka. But a few buildings, some ramshackle, some solidly middle class, hinder a complete makeover.

One of those is Khilkov Pereulok 3. Litoshik lived there with his wife and their baby until the city authorities issued a decree in May declaring the building subject to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even though the 19th-century building was overhauled in the 1960s and renovated again in the past few years.

Litoshik said he and other residents had been pressured by officials and developers to leave. Fearing that the building could be burned down, as sometimes happens across Russia when new construction has been slated, he moved away and began to fight. This month, the business daily Kommersant reported that the federal anti- monopoly watchdog had deemed the plans for Khilkov Pereulok 3 illegal, but that ruling could yet be challenged and may not halt the development. Sergei Tsoi, press secretary for the mayor, Yuri Luzhkov, was quoted by Kommersant earlier this year as calling the Ostozhenka protesters' actions "egoism."

Ostozhenka stood virtually untouched until the late 1990s, frozen in time by a Soviet decree that called for the construction of a vast Lenin-topped Palace of Soviets in place of the razed Christ the Savior Cathedral. It was never built, but the plan was never revoked; a swimming pool was instead built on the site. Ostozhenka figured in Mikhail Bulgakov's surrealist novel, "The Master and Margarita," which gave the Russian language its ultimate real estate catch phrase: "The housing problem has corrupted them."

Bulgakov depicted the early Soviet years, when aristocratic abodes were forcibly transformed into communal apartments for the masses, with shared bathrooms, kitchens and secrets. Now new money is squeezing out the remaining kommunalki, as the communal apartments were called.

Aleksandr Khosenkov, 56, lives in a friend's communal flat. "I live here, but all the streets have been renamed — I can't find the houses," he said. "It doesn't matter if a person has a Mercedes. Their soul should matter, not their car."

Georgy Dzagurov, general director of Penny Lane Realty, offers properties in Ostozhenka. "Practically anyone who is powerful has bought there," he said, adding that "$1 million or $2 million is nothing for them."

In October, Morgan Stanley announced its purchase of a stake in RGI International, owned by Boris Kuzinez, a developer whose ultramodern buildings are credited with transforming Ostozhenka into Billionaires' Row. RGI's Web site, posted in time for its London Stock Exchange initial public offering earlier this month, lists Khilkov 3 among its projects.

While describing his clients only as "mostly businessmen, bankers, in oil and metals," Kuzinez acknowledged an oligarch's need for the right milieu. "It's hard for oligarchs to live in a regular building," he said.

Maksim, a banker, though not an oligarch, declined to give his last name but agreed to show his sleek two-bedroom apartment in an a Kuzinez development. "There are guards everywhere," he said. "Filtered water, central air-conditioning, good parking. The main thing is it's homogenous. This is a plus."

Litoshik, wearied by battle, is accepting a buyout of $800,000 for his apartment, or more than $10,000 per square meter. A victory, he said, because in Russia a fair price is almost miraculous. A loss, he said, because "we never wanted to sell our apartment."

It is a story that has been familiar to generations of Russians, both before and after the Soviet era. "Khilkov 3 is 'The Cherry Orchard 2,'" Litoshik said, referring to Chekhov's play about — what else? — money, real estate and the squeezing out of one class by another.(06. 12. 18)

06. 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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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인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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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1 15:4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어느 땐가 읽은,
소설 읽는 것은 "일종의 시간낭비"라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에 세뇌되어
소설은 좀체 읽지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학생 때는 세계문학전집은 공부삼아 일견했었지요.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소설이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었답니다. 깊이있는 소설이지요.
당시에는 낑낑대며 어렵사리,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외국 소설은 두어 권 서가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
아니 에르노의 소설 두 권
강유원 선생의 소설에 관한 관점에 얼마간 공감합니다.


로쟈 2006-12-21 16:10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는 게 시간낭비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쇼펜하우어적인 인생론을 본따서 인생이란 것 자체가 시간낭비일 터에... 그게 아니라면, 이유를 갖다붙일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충분하지요(저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고 또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죠)...

비로그인 2006-12-21 17:2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의 반론을 기대해봅니다....
덧붙여 소펜하우어는 괴테의 소설에는 환장했던 사람이지요. ㅋㅋ

로쟈 2006-12-21 17:33   좋아요 0 | URL
반론이랄 게 없지요. 취향에 대한 자기고백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태백산맥>이 읽기 힘들다, 고로 <태백산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다, 이게 논리적인 결론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현상학>은 읽기/견뎌내기 힘든 책입니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시간낭비하지 말고 '유명학원' 혹은 부동산 '목'이나 알아보는 게 유익하고 실용적이겠죠...

sommer 2006-12-21 17:32   좋아요 0 | URL
취향을 곧장 위계로까지 비약시키는 것...진지함이 그 자신을 견디는 허약함이 아닌지 생각이 드네요. '상징계의 대진표'를 만들어 가면서...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2-21 18:01   좋아요 0 | URL
간혹 강유원 홈페이지 가서도 느꼈던 거지만, 소설 독자로서 강유원은 확실히 별로예요. 물론, 서평가나 강연자로서 강유원은 좋구요.ㅎ
아, 새로나온 책 페이지 수가 늘어난 건, 글자 크기와 행간의 간격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 건 한 페이지에 31줄 이번 건 21줄. 살까말까 하다가 번역 상의 미묘한 차이에 흥미를 느껴 사긴 했는데, 에, 독일어도 좀 알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토마스 2006-12-21 23:15   좋아요 0 | URL
강유원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들뢰즈는 왜 그토록 소설과 영화에 미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들뢰즈가 중시하는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예측 불허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그 점에서 보자면, 강유원씨는 생성의 사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위의 글로만 알 수 없는 단견이기는 합니다만 비트겐슈타인도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영화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니체와 들뢰즈처럼 다양한 문학(혹은 영화)을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는 철학자들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yoonta 2006-12-22 01:22   좋아요 0 | URL
강유원이라는 분의 그 솔직담백?한 성향을 처음에는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학자의 모습으로 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나친 자기 방어본능에 의한 독선에 가깝더군요. 로쟈님 말씀대로 소설에 대한 자기 취향일 뿐인 이야기를 소설에 대한 일반론으로 확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방식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한때 강유원홈피에 들락거리다가 사고쳐서 강제퇴출당한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생각해보니 그분의 성향이랄까 스타일에 대해서 쪼금이나마 이해할수있게 되더군뇨..-_-;;

로쟈 2006-12-22 17:43   좋아요 0 | URL
연랑님/ 그렇군요. 역시나 비밀은 행간에 숨어 있나 봅니다...
모모님/ 저 또한 소설/예술과 근친적인 철학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yoonta님/ '쓰라린' 기억이 있으시군요.^^

Runa 2006-12-22 22: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뒤늦게 사족 한마디 붙여 봅니다.^^
제 전공도 프랑스쪽이고 원래 문학철학에 관심있어 성향대로 전공도 찾아가는 법인가 싶다가도 시대적인 영향, 이런 게 또 개인을 넘어서는 거 같거든요.
전 지방에 있어 강유원씨랑 무관하지만, 그 연배의 선생들의 일반적인 경향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독일철학 전공잔 더욱 그렇지요(물론 아도르노나 벤야민 공부하는 분들은 다르겠죠).평소에도 인간적으론 좋아도 정서적 결이 다르다 느끼죠.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일화 하나,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거의 10년 전에 <시네마>1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책에 나온 영화들 외국에서 비됴 주문해 편집복사해서 보여주고 열성적으로 들뢰즈 영화철학에 입문하게 해 주셨죠. 근데 선생님, 영화 보는 시간 너무 아깝다고 맨날 FF로 보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 넘 지겹고 길다고 핵심 요약 정리 같은 거 없냐고 농담하시곤 했죠.^^
여러분껜 어떻게 들려도 문학과 영화, 이런 거 철학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셨죠. 근데 철학동네엔 이런 선생님이 그리 많진 않답니다. 논리성에 대한 일면적인 맹신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맹신을 요구했던 70, 80년대의 비합리적인 사회상도 한 몫 했겠죠. 선배 철학도들은 아마도 철학이 논리와 합리를 담보한단 자부심으로 그 어려운 책과 싸우며 어두운 시대를 비켜가거나 이겨갔을 겁니다. 그때 문학과 철학이 소통하긴 어려웠겠지요.
전 다른 세대라 예전엔 답답했지만 이젠 이해해봅니다. 그래서 소위 전통철학(플라톤, 칸트, 헤겔 등) 하는 분들이 이런 전통(?)의 자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강유원씨도 그런 분위기의 철학적 세례를 받은 세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뢰즈는 물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소개되고, 유행이니 뭐니 하지만 철학동네가 위기 속에서도 풍성해진다고 봅니다. 블랑쇼 같은 이들도 조명되고 로쟈님 같은 분도 있고(^^;), 이제 문학철학이 한 자리를 만들어 가리라 예상해 보는 거죠.

yoonta 2006-12-23 01:14   좋아요 0 | URL
저두 갠적으로 문학보다는 철학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만 강유원씨같은 냉철한? 철학자분들보다는 때로는 좌충우돌?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풍길줄 아는 사람들 (그게 꼭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에게서 더 많은 매력이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자신의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지한 농담"으로 보일때 조차도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붓는게 아니라 웃어넘길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소위 책많이 본다는 식자층에서는 그런 인간적 매력을 느낄수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과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할까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자기방어에만 치중하게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철학자 강유원' 같은 분들보다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들이 더 좋더라구요.. 비록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면 세상에 "남는게 별로 없는" 인생을 산다구 하더라두요..^^

로쟈 2006-12-23 11:50   좋아요 0 | URL
고해성사 무드네요.^^ 이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길이 겹치면서 갈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가보는 거라면 별문제겠죠. '그쪽은 아냐'라고 참견하는 대신에...

yoonta 2006-12-24 13:52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로쟈님 서재에 놀러와서 끄적이다보니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다 나온것 같네요. 남이야기하기전에 자기 자신이나 돌아봐야되는데..ㅋㅋ

기인 2007-01-04 21:23   좋아요 0 | URL
음; 쫌 뒤늦게 퍼갑니다. 경철수고 읽어볼까 해서 ^^; 땡스투도 합니다.
경철수고 강유원 선생 번역본을 살까, 아니면 역시 빨간책에 있는 발췌본으로 만족할까 고민중입니다...
에잇; 그냥 사야겠습니다 ㅜㅠ

로쟈 2007-01-04 21:29   좋아요 0 | URL
월급도 고려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블루비니 2007-10-26 14:39   좋아요 0 | URL
로자/ 무대뽀식 알라딘 도배질뒤의 잔상은 공허한 느낌나열과 애처로운 자기PR(돈이 있는,책 좀읽은, 비정규직 강사라는..)일뿐, 이런 '자기고백'은 속으로만 하고,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 훨씬 '공익'스럽지 않을까?

로쟈 2007-10-26 14:48   좋아요 0 | URL
'공익'근무하시나 보군요. 수고하시길...
 

국내 최대 규모의 르네 마그리트전이 열린다. 오늘(12.20)부터 내년 4월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얼마전부터 관련기사들을 읽어볼 수 있었는데, 전시회 개막일을 맞아 기사들이 정점을 이루고 있다. 두 가지 기사를 옮겨놓고 새삼 전시회의 의의를 환기해두고자 한다. 방학때는 시간을 낼 수 있지 않을까도 싶고.

경향신문(06. 12. 20) '르네 마그리트’전, 상식을 비트는 ‘이미지의 배반’

“우리는 우리 밖의 세상을 보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액자 속 그림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을 즐겨 그려 넣던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종종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시킨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파리가 된 새, 나무가 된 여인, 구두가 된 발, 낮과 밤 등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거리. 그의 그림에는 기이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분위기, 상식을 깨는 묘한 매력이 서려 있다.

시뮬라크르, 기호와 상징 등 현대미학의 여러 주제를 설명할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왔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벨기에 왕립미술관 및 르네 마그리트 재단과 공동으로 ‘르네 마그리트’전을 20일부터 내년 4월1일까지 연다. 초기부터 말기까지 마그리트의 작품세계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전시로 회화와 드로잉, 판화 등 120여점과 사진 및 영상자료 150여점 등 총 270여점이 선보인다. 작품 중 초기작인 ‘보이지 않는 선수’는 1백20억원을 호가하는 작품으로 벨기에인들이 국보처럼 여기는 작품이다.

작품들은 대부분 마그리트가 즐겨 그리던 캔버스 속의 캔버스 구도를 차용해 액자 형태의 파티션 위에 설치됐다. 전시실을 훑어보다 보면 대부분 작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도가 높고 한 주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비해 마그리트는 20, 30대 시절 묘사했던 소재와 주제를 끊임없이 변형하고 자기복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달리나 미로 등 여타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에 비해 논리정연한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의 오랜 목표이던 실물의 재현에서 벗어나려한 근대 화가들이 추상회화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정교하고 세밀한 구상회화를 그리되 실물의 재현이기를 거부했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를 써놓은 ‘이미지의 배반’ 같은 작품이 바로 마그리트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갖고 있는 통념, 상식을 끊임없이 분석해 이를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한 마그리트는 사실 화가라기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 실물과 언어, 이미지의 관계, 현실과 가상, 꿈과 무의식 등 현대미술의 주요 주제를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해 표현하곤 했다. 데페이즈망은 친숙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를 한 화면에 늘어놓거나 혹은 전혀 엉뚱한 맥락에 위치시켜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 또한 마그리트는 정교하게 그린 그림과는 전혀 호응하지 않는 텍스트를 화면 안에 써넣거나 제목을 달았다.

회화 사이사이에 설치된 작은 크기의 사진들은 마그리트의 독특한 상상력을 더욱 잘 보여준다. 주로 친지와 지인들을 마그리트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로, 오늘날 디카족들이 장난치듯 만들어낸 이미지와 비슷하다. 한 전시실에는 사진가 듀안 마이클이 찍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상 사진과 영화에 관심이 많던 마그리트가 훗날 소형 영사기로 직접 찍은 영화도 상영된다.(윤민용 기자)

동아일보(06. 12. 11)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뭔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낯익은 형상들을 결합한 그림인데도 이미지나 느낌은 낯설다. 그림과 관객의 역동적 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철학자 미셀 푸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닮음과 비슷함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세계와 우리 자신들이 전혀 새롭게 존재하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바로,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다. 그는 20세기 초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빛의 제국’ 연작 등으로 관습적으로 각인되어 온 사물의 존재 방식을 깨는 그림들을 제시했다. 철학적 사유의 화가로 통하는 그는 “그리기의 예술은 사유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 마그리트가 한국에 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함께 19일∼내년 4월 1일 ‘르네 마그리트’전을 마련한다. 마그리트 전시회가 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갤러리 현대의 도형태 대표는 “마그리트 작품들은 개인 소장품이 많아 모으기 어렵다”며 “마그리트 전시회는 전시 기획의 끝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빛의 제국’ ‘회귀’ ‘신뢰’를 비롯한 유화 대표작 70여 점과 드로잉 판화 등 120여 점. 작가의 사진이나 친필 서신도 함께 선보인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무의식 꿈 판타지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몰인간성에 기겁한 일단의 예술가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무의미를 추구한 다다이즘의 뒤를 이어서 초현실주의가 나타난 것. 마그리트는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추구해 온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달리, 사과 돌 새 벨 등 낯익은 대상을 엉뚱한 환경에 배치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으로 충격과 함께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물을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고립’, 이질적 사물을 결합하는 ‘사물의 잡종화’,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을 한 그림에 넣은 ‘패러독스’ 등이 그의 기법이었다.

전시작은 마그리트 작품 중 정말 수수께끼 같은 ‘보이지 않는 선수’, 날아가는 새와 알의 둥지를 대비한 ‘회귀’, 신사의 초상에 파이프를 갖다 둔 ‘신뢰’, 평야에 직육면체의 거대한 돌덩이 구조물을 그린 ‘대화의 기술’ 등이다. ‘고문당하는 여사제’ ‘신은 성자가 아니다’ ‘두려움의 동반자’ ‘곤충들의 삶’도 선보인다. 문제작 중 하나로 기존 언어와 그림문법에 대한 반성을 호소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29년)는 해외 다른 곳에서 전시되고 있어 오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언어(문자)로 진술되거나 형상을 통한 이성의 사고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으며 이 시도는 결국 신비와 환상과 미스터리를 자아냈다. 광고 디자이너로 일한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가상 현실을 다룬 영화 ‘매트릭스’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종래 언어 관습이나 형상을 부정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은 문자로 된 제목이라는 점이다.(허엽 기자)

06. 12. 20.

 

 

 

 

P.S. 마그리트의 세계에 관한 가장 요긴한 안내서는 아직까지는 수지 개블릭의 <르네 마그리트>(시공사, 2000)인 듯하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밖에 예경에서 나온 화집 정도가 내가 갖고 있는 마그리트의 전부인 듯하다. 이 '철학자' 마그리트를 다룬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민음사, 1995)는 현재 절판 중이다. 그밖에 <노성두-이주헌의 명화읽기>(한길아트, 2006)나 서지형의 <속마음을 들킨 예술가들>(시공사, 2006) 등에서 '마그리트 읽기'를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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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2-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립미술관이죠? 곧 방학이 시작되니 다녀와야겠군요.

로쟈 2006-12-2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죠.^^

비로그인 2006-12-2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적 관점에서 마그리트의 화법은 다소 유치하고 만화적이지요.
그가 그림에 담아내는 이야기는 독특합니다.


로쟈 2006-12-2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으로도 썼지만 '철학자 마그리트'에게 화법은 중요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이네파벨 2006-12-2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전시 소개...감사드립니다...
마그리트...저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전시회네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달리의 "기억의 고집"인가...(흐물흐물한 시계)를 보고 난 후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한동안 들이팠었죠...

마그리트는 흥미롭고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낸 화가이지만...딱 제 타입ㅇㄴ 아니지요...^^
너무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어서요...
머리..특히 좌뇌로요...

전 초현실주의 화가 중에서 단연 달리..그리고..에른스트의일부 그림...그리고...몇 점 안남겼지만(아니 기억에 남는거 정말 한두 점이지만) 키리코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머리(이성, 사유, 논리, 좌뇌적 사고)로 닿을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표현하기에...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다. '프리랜서' 강사에게 그런 날이 따로 지정돼 있는 건 아니고, 집에서 기말시험과 페이퍼 등의 채점을 하기로 그냥 혼자 정해놓은 날이다(거기에 집안일도 겹쳐 있고). 하지만, 모든 '근무'가 그렇듯이 '열심히' 하면 왠지 '손해'라는 느낌 때문에 적당히 (양심의) 눈치를 보면서 빈둥거리게 된다. '이걸 다 언제 한단 말인가!' 속으로 푸념하면서. 점심도 먹은 김에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잡담을 늘어놓기로 한다. 푸념보다는 잡담이 그래도 '생산적'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잡담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잡담들을 늘어놓은 책, 플라톤의 <향연>에서 서두에 나오는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에 관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관련 텍스트는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과 이세진 역의 조안 스파르판 <향연>(문학동네, 2006), 그리고 옥스포드 문고본 클래식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등이다. 조안 스파르의 '낙서본' <향연>이 출간된 김에 사놓기만 했던 책들을 뒤적이게 됐는데, 여러 텍스트들을 같이 읽다 보니까 대동소이한 줄거리 외에, 당연한 일이지만 미묘한 차이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은 그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관련대목은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여! 자네는 언제나 똑같네 그려. 왜냐하면 자네는 항상 자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쁘게 이야기하니 말일세. 자네는 소크라테스님 이외의 자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조건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려. 그런데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사실 자네는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소크라테스님을 제외한 자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말일세!

아폴로도로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 (박희병, 41쪽)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 외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네가 어쩌다 '투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는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입만 열면 너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구 화를 내는 버릇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소크라테스님에 대해서는 물론 예외지만.

아폴로도로스: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이세진, 15쪽)

박희영본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것이고 이세진본은 불역본을 옮긴 것이다. 해서 내용의 정확성을 따지자면 박희영본이 더 유리해야 정상이지만, 고전 그리스어라는 게 '악마의 언어'라 불릴 만큼 난해하고 또 중의적이어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이 과연 어느 만큼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가 들춰본 (원전을 옮긴!)두어 가지 영역본들도 국역본들만큼이나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번역에서의 차이'라는 원론적인 문제를 따져보려는 건 전혀 아니고, 여기서는 다만 '나약한 자라는 별명'과 '투덜이라는 별명'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할 따름이다. 참고로, 인터넷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벤자민 조웻(Benjamin Jowett)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Companion. I see, Apollodorus, that you are just the same-always speaking evil of yourself, and of others; and I do believe that you pity all mankind, with the exception of Socrates, yourself first of all, true in this to your old name, which, however deserved I know how you acquired, of Apollodorus the madman; for you are always raging against yourself and everybody but Socrates.

Apollodorus. Yes, friend, and the reason why I am said to be mad, and out of my wits, is just because I have these notions of myself and you; no other evidence is required.  

그러니까 조웻의 영역본에서는 '나약한 자'와 '투덜이' 대신에 '미치광이(madman)'가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으로 칭해진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도 조웻의 영역과 가장 유사하다('미치광이'란 표현의 러시아어 'becnovatyj'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이미지는 히틀러이다!).그렇다면, 아폴로도로스는 나약한 자이면서, 투덜이면서 미치광이인 것인가?(여기서 먼저 지적해두자면 박희병본에서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란 표현은 '나약한 자'라는 친구의 말을 다시 받는 것이기에 수정될 필요가 있다.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를 우리말에서 '나약한 자'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로빈 워터필드의(Robin Waterfield)의 옥스포드판 <향연>이다. 역자는 1952년생의 중견 학자인데(비록 원로급은 아니더라도), 옥스포드판의 <국가>를 영역하기도 했으므로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Companion. You never change, Apollodorus: you put yourself and others down all the time. I get the impression that you regard literally everyone, from yourself onwards, as unhappy - except Socrates. I've no idea how on earth you came to get your nickname 'the softy', since your conversational tone is invariably the one your're displaying now, of impatience with yourself and everyone else - except Socrates.

Apollodorus. So if I think this way about myself  and about you, then I must be raving mad - is that it , my friednd?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the softy'이다. 'softy'는 'soft person'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바보, 멍청이, 유약한 사람, 감상적인 사람' 등의 뜻으로 옮겨진다. 축어적으로 옮기자면, '물렁한 사람', '물렁이'가 되겠다. 워터필드가 붙인 주석을 보면, 원텍스트에서 이 단어는 원래 'the fanatic'(미치광이)란 뜻을 갖는데, 역자는 아폴로도로스에 관한 다른 기록을 염두에 두고 보다 자연스러운 그리스어 표현, 곧 영어로는 'the softy'라 옮겼다고 한다. 그 다른 기록이란  아폴로도로스가 당시에 악명높은 동성애자였으며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엄청나게 울었다는 증언 등을 말한다. 박희영본에서 '나약한 자' 또한 이 'the softy'와 맥이 닿아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세진본의 구어투에다 워터필드의 영역을 살짝 입혀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을 빼고는 너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해죽겠다는 식이지 뭐냐. 난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렁이'란 별명을 얻었는지 상상이 안된다. 넌 입만 열면 언제나 지금처럼 너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참지 못하겠다는 식이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님만 빼고.  

아폴로도로스: 그래서, 내가 이런 식으로 나 자신과 네놈들을 대하면 그게 내가 미치광이라는 뜻이라도 되는 거냐,  그런 거냐, 친구야?

조웻과 워터필드의 두 영역본의 차이는 이것이다. (1)조웻: 네 별명이 왜 '미치광이'인지 알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2)워터필드: 네 별명이 왜 '물렁이'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향연>의 이본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동사는 '알겠다'와 '모르겠다'를 왔다갔다한다. 문맥의 논리상 그렇다.

국역본의 경우, 박희영본은 워터필드 계열이다: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반면에 이세진본은 조웻 계열이다. "네가 어째서 '투덜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알 만하다."(한데, 조안 스파르는 '알 만하다' 대신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런 구도라면, 박희영본에서 친구의 말을 이어받는 아폴로도로스의 대사는 어색해 보인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라고 맞장구칠 때는 아니지 않은가? 그 다음 친구의 대사가 "아폴로도로스여, 그러한 문제를 놓고 우리가 지금 논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이므로 이 장면에서 아폴로도로스는 친구의 말에 (동의가 아닌) 시비를 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세진본에서도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할 때도 친구의 말에 대한 동의가 아닌 시비의 어조(뉘앙스)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런 게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냐?"라는 식. 즉, 워터필드처럼 반문으로 옮기거나, 조웻처럼 긍정문으로 옮길 경우에는 '반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로쟈,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져서 뭐하겠어, 아폴로도로스, 자꾸 딴소리 말고 내가 물어본 거나 대답해줘. 그래, 어떤 연설이었는데?" 우리는 <향연>의 문턱에서 어정댈 게 아니라 <향연> 속으로 빨리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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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은 굉장히 신경쓰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오늘도 긴장하며 읽었거든요.
'투덜이'에서 긴장이 확 풀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하네요.

로쟈 2006-12-1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 읽기는 고전(苦戰)이기도 하지요...

열매 2006-12-2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의 문학과지성사판 번역자는 '박희병'이 아니라 '박희영'입니다. 외대에서 그리스철학을 가르치는 원로학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로쟈 2006-12-2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옆에 책을 두고서도 다른 분과 헷갈렸네요.^^;

Poissondavril 2007-05-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다가 이제야 이 페이퍼를 봤네요. 정말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물렁'한 역자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꼭 반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로쟈 2007-05-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서가 또 나오는가 보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노르웨이 작가 순 뢰에스에 관한 기사들을 읽다가 떠올린 작가는 재작년에 러시아의 한 서점에서 사인행사를 가졌던 작가 '에를렌드 루'이다(지금도 사인회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기덕의 <빈집>을 다룬 모스크바 통신문 서두에 관련내용을 적어둔 바 있는데, 모스크바 통신을 비공개로 돌렸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불러내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2004년 12월초의 일기 한 대목이며, 뒷부분은 <빈집>에 대한 감상('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으로 이어졌었다. 아래 사진은 사인회 장소였던 '모스크바 서점'.

오후에 서점엘 다녀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집과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소설 등을 사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허탕이었다. 먼저 ‘류뱐카’역(이전에 KGB본부가 있었던 곳이다)에 있는 '비블리오 글로부스' 서점에 가서는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를 펭귄북으로 샀는데, 그 작품이 들어 있는 책으로 보아둔 러시아어본이 없었다. <셰익스피어 희극>이라는 다른 작품집들에는 <자에는 자로>가 빠져 있다(*셰익스피어 작품집은 나중에 구했다). 할 수 없이 발품을 좀 팔아서 '모스크바서점'까지 걸어갔다.

‘루뱐카’에서 이전 역인 ‘아흐트느이랴드’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린다. 그 정도 걸어가면 정면에 크레믈린이 보이고, 오른편에 볼쇼이극장이 나타난다(사진. 생각해 보니까 아직 한번도 볼쇼이 구경을 하지 않았다. 발레를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쩌면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하도를 건너가서 볼쇼이극장의 오른편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서는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서 계속 걸어갔다. 이전에 한번 가본 길이었다. 그렇게 한 블록을 더 걸어가서 길을 건너면 모스크바예술극장(=므하트)이 있는 거리이다. 거리의 끝무렵에 있는 체홉 동상을 지나면 트베르스카야 대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5분쯤 걸어가면 <모스크바 서점>이 있다(아마 이런 루트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듯하다).  

예정에 없이 들른 서점인데 우연찮게도 한 작가의 팬사인회가 진행중이었다. 작가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에를렌드 루(Erlend Loe). 최신작을 포함해서, 1969년생인 이 작가의 작품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고, 그의 두번째 작품(<나이브하게. 슈퍼>. ‘Super’가 작품에서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기에 그냥 그렇게 옮겨둔다) 같은 경우는 13개 국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과히 지명도를 알 만하다(*에를렌 루의 <나이브? 슈퍼!>(문학동네, 2009)로 번역됐다!).

러시아의 아즈부카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아예 문고본 클래식으로 출간하고 있는데(나도 오다가다 자주 보던 책이다), 나는 그 문고본들 중 두 권을 들고서(값이 다른 것들보다 싸서였는데, 권당 2,800원) 잠시 줄을 섰다가 ‘미래의 거장’에게서 사인을 받았다(지난번 뤽 베송 사인회만큼 붐비진 않아서 나는 5분 정도밖에 기다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는 책은 내 이름으로(For me), 그리고 그의 데뷔작인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는 ‘마님’의 이름으로(For my wife). *아래는 당시 사인회의 빌미가 되었던 책 <쿠르트 이야기>의 러시아어판 표지.



현대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들이 국내에 직접 소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루의 소설들이 언제 우리말로 번역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럽 다른 나라에 번역되는 걸로만 봐서는 그는 노르웨이의 가장 확실한 젊은 거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10-20년 후에 노벨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아주 오랜만에 노르웨이 작가에게 주어진다면). 그러면, 내가 받은 사인본들이 꽤나 값나가는 ‘유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런 건 일단 백일몽으로 접어두고, 머리를 빡빡 밀어서 뚝심 있는 신부님이나 선량한 조폭처럼 생긴 이 작가에 대해 약간 소개하면, 그는 노르웨이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이며 이미 여러 차례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에 입문하기 전에 그는 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이건 작가로서 예외적인 건 아니다), 연극무대에 선 적도 있고, 단편영화들과 뮤직비디오 등도 찍었으며 정신병원에서도 일했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서는 1993년, 그러니까 24살에 <여자들의 권력 속에서>로 ‘혜성같이’ 노르웨이 문단에 등장한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너무나 재미있으며 아주 능수능란하다”, “아주 강력하며 동시에 시대를 앞질러 간다. 이런 데뷔작은 노르웨이 문단에 오랫동안 없었다. 루는 모든 걸 뒤집어엎었다!” 등등으로 평했다. 그리고 낸 두번째 작품이 전유럽적인 베스트셀러가 됨과 동시에 그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는 2001년작이며, 주인공은 저널리스트이고 핀란드에 관한 얘기라고(그러니까 제목이 가리키는 나라는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노키아의 나라이면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다지 두꺼운 책들은 아니지만(각각 224, 288쪽) 내가 언제쯤 이 책들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를 읽는 일은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는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그게 역설적이지만, ‘책읽기의 괴로움’이다).

하여간에, 그래서 루의 책을 두 권 샀다. 그런데, 정작 지난번에 봐둔 <셰익스피어 희극>은 여기서도 다 나가고 없었고(또 들어올 거라고는 하지만), 오스트롭스키의 책도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분명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예상대로) 직원은 19세기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작품집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니콜라이’라고 말하니까 그때서야 그의 책으론 나와 있는 것이 없으며 ‘고서 코너’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혹시나 싶어 아래층 고서 코너에 내려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이 역시 절반은 예상한 바이지만(지난번 고리키의 사례를 통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가 오스트롭스키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를 말하며, 그의 작품은 아직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책이다(두 종의 번역서가 있었던가?). 하지만, 러시아에는 없다! 오스트롭스키만이 아니라 과거 수십 만부씩 찍어대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은 종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파제예프니 푸르마노프니 하는 작가들 말이다. 그나마 숄로호프 정도는 노벨상 수상 작가여서인지 간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그마저도 중고등학교의 필독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고요한 돈강>이 빠진다면, 러시아 학생들이 가장 지겨워할 문학작품은 <전쟁과 평화>가 될 것이다(이건 가정이다). 그런 식으로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서점에서도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다.

사실 나는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읽지 않았다(그는 보통 대학의 ‘20세기 러시아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몇 년 전 1920-30년대 러시아 문학장이란 걸 재구성하고자 기획하면서 그에게 한 꼭지를 할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기획이 엎어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에 작가의 몇 주년인가를 기념하는 기사들이 <문학신문>에 게재되면서 그를 다시금 기억하게 됐는데, 다음주 수업시간에 그 작품에서 발췌한 몇 페이지를 읽게 돼서 이 참에 책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러시아문학, 혹은 더 나아가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소설들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고리키의 <어머니>, 그리고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인조이다. 이들은 각각 당대에 가장 많이 읽혔던 작품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섯 번이나 읽었고, 그의 정치 팜플렛에다 아예 <무엇을 할 것인가>란 제목을 붙였다(참고로 체르니셰프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와 <강철>의 주인공 이름은 둘 다 ‘파벨’이다(물론 오스트롭스키가 우연히 갖다 붙인 이름은 아닐 것이다).

지난 80년대에 한국에서는 이들 작품들이 ‘과대’평가됐었다. 물론 거기엔 시대적 필연성이란 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요즘엔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건 작가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시대적 필연성인가? 과거에 나는 이 작품들의 과대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과소평가에 동의하는 것도 않는다. 역사 속에서 작가/작품엔 제 몫의 역할과 운명이 주어진다. 아니, 작가/작품은 그런 걸 짊어진다. 문제는 그런 역할/운명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지 열광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조금 다른 예로서,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대한 열광을 들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을 냉대했던 관객들이 갑작스레 ‘마니아’들로 둔갑한 것을 나는 신뢰할 수 없다. (러시아)미래파 선언문에서 인용하자면,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걷어붙이고 싶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에의 편승이 아니라 ‘반시대적 성찰’이다.

나는 사려던 책들 대신에 작년에 나온 니콜라이 1세(1825-1855)의 전기와 러시아시 각운사전을 사들고는 예의 피자전문점 스바로에 가서 이태리 피자와 맥주, 그리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헛걸음한 걸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끼니를 때우고 되돌아가던 길에 플라톤의 <대화>나 사들고 갈까 하고 다시 서점에 들렀지만, 책은 없었다. 가장 두껍고 가장 저렴했던 플라톤 선집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나중에 구했다). 이래저래 되는 일이 없는 날이다. 루의 사인본마저 받지 못했더라면(15분 정도만 늦게 갔어도 사인회는 끝났을 터였다), 오늘은 말 그대로 공친 날이 될 뻔했다.  

서점을 나서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계산대에 홍보용으로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제목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해변의 카프카>였다(*아래는 러시아어판 표지).



아마도 하루키의 모든 책이 러시아어로 번역되는 듯한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하루키는 (스시를 제외한다면) 일본 최고의 문화상품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한국 최고의 문화상품은 김기덕이다. 나는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어제 <빈집>을 같이 본 후배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러시아 인터넷의 김기덕 사이트는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고(그들은 전문가 수준의 비평들을 계속 올린다고 한다). 아래는 <빈집>의 러시아판 DVD 타이틀.

사실 후배가 엊저녁 8시에 상영하는 <빈집>을 보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열렬한 반응에 고무되어서였는데(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나는 이미 지난주에 <올드보이>보다 <빈집>을 보려고 했으므로 기꺼이 한번 더 동행하게 되었다(영화관에서 보는 김기덕은 <파란대문>에 이어서 두번째였다). 

영화관은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예술극장'이었고, 이번엔 <올드보이> 때와는 달리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이었다. 50석 규모였는데, 새로 만들어놓은 듯싶었다. 모든 시설이 새것이었기 때문에. 화면의 크기가 (당연히) 작다는 것 말고는 만족스러웠는데, 김기덕의 영화는 대형화면을 요구하는 스펙터클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굳이 흠이 될 것도 없었다. 8시가 되자 프랑스와 오종의 신작 예고편이 나오고 나서는 바로 “Happinet Pictures”란 로고가 떴다. 그리고 시작된 영화의 첫 장면은 골프 스윙 소리와 망이 출렁이는 모습. 영화는 더빙이 아니라 자막 처리돼 있는데, 사실 알다시피 <빈집>은 대사란 것 자체가 많지 않은 영화이다. 두 주인공에 국한하자면, 거의 ‘무성영화’이니까...

04. 12. 05./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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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2006-12-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아주 특이한 청춘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로쟈 2006-12-2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이한' 관점이시네요.^^

Sati 2009-08-0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로프스키를 찾을 수가 없으셨다는 말씀 들으니, 91년도에 '우데엔' 1층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가쪽 한 구석으로 몇차 공산당 전당대회 연설집 이런 류의 브로셔들이 산처럼 쌓여서 회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많이 이상했던 기억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