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띈 글을 옮겨놓는다. '한겨레 필진'인 박노자 교수의 '만감: 일기' 한 꼭지이며 '박노자 글방'에 올려져 있다. 제목은 좀 길어서 축약해놓았다.

박노자 글방(07. 10. 19) 제정 러시아 ㅡ 대한제국을 식민화할 구체적인 계획은 있었는가?

오늘 모스크바에 있는 한 선배로부터 새해 선물 (?)로 러시아의 한국학 원로 보리스 박 선생의 역작, (<러시아와 조선>, 증보판, 모스크보, 2004)를 즐겁게 받았습니다(*'모스크보'는 '모스크바'의 오타이겠다? 한데, 제목을 굳이 <러시아와 한국> 대신에 <러시아와 조선>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대한제국'만 하더라도 '조선'은 아니지 않나? ). 1970년대에 나온 제1판이야 저희들의 교과서이었지만 증보판을 거의 처음으로 봤어요(*520쪽의 두툼한 책이다. 2004년이면 나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인데,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Россия и Корея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을 풀려고 했어요. 요즘 한국 보수의 일각에서는, "러시아도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 했으니 일본이 러일 전쟁을 발발시켜 한반도 점령한 것이 일종의 자위권 행사"니 "일본에게 먹힌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 대신에 러시아에게 먹혔으면 결국 공산화됐을 것"이니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의도" 관련의 발언들이 많고, 대체로 일본과 동격으로 보려 하더랍니다.

여기에서 일단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제가 러시아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제정 러시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추호의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나라 제국주의부터 공격하라"는 레닌적인 "혁명적 반제주의" 입장에 있고, 지금도 이라크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체첸의 독립 운동도 동시에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만 제정 러시아는 정말로 대한제국의 식민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는가요?

물론 제정러시아는 대한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침략적 외세이었음은 두말 할 것은 없지요. 그 전에도 별나별 짓거리를 다 했었지만 1900년에 이범진 공사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범진이 원래 친러적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망국을 좌시할 수 없는 애국자이었지요) 압록강 근방에서의 벌목 이권을 억지로 따내고, 1903년부터 용암포에 군인들을 침투시켜 사실상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을 침범한 것은, 역시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지요. 그리고 1903년에 일본과 만한교환을 논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39선 이북에서 중립 지대를 설치해 일본 군대를 주둔하지 말 것"을 조건을 달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수긍하려 했었지요.

결국 일본은 이 조건을 거부해 전쟁으로 갔었지만 만의 하나에 이토 히로부미 의견대로 러시아와 타협했다면 아마도 39선 이북에서의 러시아의 경제적 침투부터 만만치 않았을 걸요. 이외에는 알렉세에브 총독과 같은 그 당시 러시아의 고관대작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반도까지의 유라시아의 문명화의 사업"을 운운하면서 결국 러시아가 이기기만 한다면 한반도도 마땅히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야 할 것임을 시사했었지요.

그런데,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 요구와 그 지역에의 경제적 침투 계획 (한반도 분단의 아주 거친 청사진이라 할까요?), 마산포와 목포에서의 부동산 사들이기 (해군 기지 때문에), 그리고 모호한 "러시아 영향권에의 한반도 편입" 이야기는 사실이었지만 여태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신뢰한다면 "한반도 식민화"의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러시아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898년에 주한 러시아 공사의 함경도 병합 관련 의견서, 1899년3월18일의 알렉산드르 미카일로비치 대공의 한반도 이북 지역 "경제적 장악" 관련 의견서 정도는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계획서"의 전부입니다. 물론 연구자들의 의도적인 은폐나 문서 보관의 부실성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 1900-1904년간의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정책 흐름으로 봤을 때에 아마도 대일 승리시에도 계속 이용익, 이범진과 같은 친러파 대리인들을 내세워 고종에게 따낼 것 따내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영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는 식민화는 물론 한반도의 보호국화마저도 제정 러시아로서는 이득에 비해 손실이 너무 많이 가는 무리수이었을 걸요.

물론 러시아가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영국 등의 유럽의 매이저들에 비해 형편없이 약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국제적인 약탈 행위를 벌였을 때에 러시아가 영-불-독에 비해 양심적인 적은 없었지만 일단 산업적 기반과 재정이 약한데다 파리 시장에서 늘 돈을 꾸어 적자를 메꾸는 주제에 눈치 볼 게 하도 많았지요. 그래서 "일본에 안먹혔으면 러시아에 먹혔으리라"와 같은 일부 수구주의자의 주장에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좋은 게 없었지만 일단 패권 국가 영국과 신흥 패권 국가 후보생 미국의 친구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었기에 러시아의 승산이 어차피 적었으며, 러시아가 이긴다 해도 영국 등의 압력이 계속돼 아마도 계속 고종의 정권을 이용하여 간접적 영향력 행사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인 식민화 계획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방점은 '아직'에 있는 것인가?)

07. 01. 19.

Корея в огне войны

P.S. 내친 김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터넷서점 오존(www.ozon.ru)에서 '한국(корея)'을 검색해봤다. 음반과 DVD까지 다 포함해서 74종의 목록이 뜬다(엉뚱한 책들이 껴 있기 때문에 진짜 관련서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다). 최근에 나온 책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흥미를 느낀 건 '20세기의 역사' 시리즈의 하나인 <전쟁의 포화 속의 한국>(2005)이다. 544쪽의 두툼한 책이고 발행부수는 1,000부. 제목 그대로 1950-53년까지의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 3인이 모두 러시아학자들이다. 그간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소개도 포함돼 있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책이다. 한데, 오존에는 품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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