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의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배달된 중국음식을 먹은 다음에 신문들 뒤적이는데 문득 한 책광고가 눈에 띄었다. 피터 앳킨스(1940- )의 <갈릴레오의 손가락>(이레, 2006). 내 딴에는 주야로 불침번을 선다고는 하지만 수시로 졸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들통났다. 이 '과학책'도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모양인데, 리뷰를 뒤져보니 일간지들 가운데서는 중앙일보 정도만 비중있게 다루었다. 해서, 리뷰들만 믿다가는 이런 식으로 간혹 구멍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리처드 도킨스의 추천사가 나를 혹하게 한다: "아직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없었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피터 앳킨스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그는 강력하면서도 신비로운 영어로 심원한 과학의 시를 창조하여 우리를 눈뜨게 해준다. 앳킨스의 문장들은 우리를 영감으로 가득 채우고, 완성시키며, 풍요롭게 만들어, 완전하게 살아 있도록 이끈다." 그러니까 문장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책인 것이다. 마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철학자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듯이 말이다.

해서 도킨스 덕분에 앳킨스란 이름도 기억하게 됐다. 한데 다시 뒤져보니 그의 <원소의 왕국>(사이언스북스, 2005)은 나도 갖고 있는 책이 아닌가(물론 이전에 두산동아판으로 나온 책이 소장도서이다). 그 책을 유심히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문장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책은 아니었다 보다. 딱딱한 '물리화학' 교재들도 그의 저작들이니 그럴 만은 하겠다(그밖에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 2002)에도 그의 글이 포함돼 있다). 앳킨스라면 넌덜머리를 낼 독자들도 상당수 있지 않을까? 그럼, 문제는 오히려 어떻게 하다가 <갈릴레오의 손가락> 같은 '명문장'을 쓰게 되었는가, 이겠다.

책의 부제는 '과학의 10가지 위대한 착상들'이다. "현대 과학이 도달한 빛나는 성과와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한 10가지 위대한 착상을 선정하고,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과학사적 의의, 착상의 근본 아이디어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설명을 통해,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를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소개돼 있다. 방점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라는 데 놓여져야 하겠다.

요컨대 그가 꼽고 있는 열 가지 착상, 곧 "1. 진화는 자연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2. DNA에 담긴 암호가 유전된다 3. 에너지는 보존된다 4.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5.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6. 대칭하는 것은 아름답다 7. 파동과 입자는 같은 것이다 8. 우주는 팽창한다 9. 시공간은 물질에 의해 휘어진다 10. 산술적 추론에는 한계가 있다." 자체를 다룬 책들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으니까. 문제는 그 착상들의 '위대성'을 어떻게 설명해내느냐, 혹은 연주해내느냐인 것. 

짐작엔 고등학생들의 교양서로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하튼 내 관심은 그런 쪽이고 600쪽이 넘는 분량도 마음에 든다(2003년에 나온 원저는 392쪽 분량이다). 아, 교양과학서들만 읽어도 삼백 예순 날들이 날도 아니겠다. 더 위대한 착상들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직 뭐가 더 남아있을까?..

07.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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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0 20:07   좋아요 0 | URL
정말 삼백예순날이 날도 아니겠죠. 책의 두께와 스트레스는 비례하는듯. 저로선.

에바 2007-01-20 23:13   좋아요 0 | URL
얼마전부터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를 읽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꼭 완독하고 싶은데...그리고 오늘 '비평고원'에서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조만간 번역/출간된다는 '댓글'을 봤는데 좋은 번역서가 나왔으면 합니다. 근데 출판사가 어딘지 혹시 아시나요??

로쟈 2007-01-20 23:57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그냥 꽂아둡니다.^^
에바님/ 어딘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알겠지요.^^

알케 2007-11-26 22:36   좋아요 0 | URL
소생은 어제서야 한겨레에 실린 정재승의 칼럼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쟈님도 저 같은 두꺼운 하드카바 북 페티쉬인가 보군요 ^^;;

로쟈 2007-11-26 22:48   좋아요 0 | URL
얄팍한 책은 왠지 믿음이 덜 가서요.^^; 앳킨스의 책은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테레사 2008-07-28 10:06   좋아요 0 | URL
와우,,저도 한겨레 정재승 교수의 추천을 읽고 샀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책이더군요. 하지만 한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좋은 책을 알아본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