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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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구라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읽고 있는데 그게 좀 설익고 아직은 미흡해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현재까지도 문학계에서 '민족'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백낙청 선생은 현재 온유한 입장으로 선회하셨다 하지만, 저는 선생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현재의 문단권력구조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테지만) 그의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문단의 '민족'주의가 고착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저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몇 번 발을 걸친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작가회의>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7-02-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도 작가시란 말씀?!..

나비80 2007-02-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언저리에서 쭈뼛대는 수준입니다.^^

짱꿀라 2007-02-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선생님 팬인데,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늘 도움만 받아서 감사해요.

기인 2007-02-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머리가 하얀 사진은 처음 보는데, 그래도 만년 청년이신 황선생님.

비로그인 2007-02-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신 말씀... 퍼갑니다!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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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프라하 다녀와서, 무엇보다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우울했는데, 다시 기운을 차려야 겠지요. 어쨌든 다시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

로쟈 2007-02-0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예 노문과로 오심은?^^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는 속절 없이 무너져 중심을 이탈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학원가로 투항해 누구보다 매몰차게 돈을 버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렇다는군요.
그나저나 로쟈님의 영업은 언제 끝날른지...^^

로쟈 2007-02-0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영업은 '책선전' 말씀이신가요?^^ 저도 주변에 돈버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떼돈을 버는 사람들은 한 다리 건너가야 되구요. 해서 '혁명가=기업가'란 등식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로쟈님의 인식 범위에서 말씀하신 '책선전'을 조금 재미있게 표현한 겁니다.
저도 로쟈님의 다단계에 얼른 편입되어야 할 텐데요. 아직 턱없이 부족한 역량때문에....
또 기인님은 아무래도 저와 전공이 비슷하신 것 같아서 노문과로 스카우트 해가려는 댓글에 장난삼아 드린 말씀입니다.^^
제가 위에 단 글이 속삭인 꼴로 되어 있네요. 잘못 클릭 했는 모양입니다.^^

yoonta 2007-02-0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박노자씨는 멘셰비키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적 포지션에 더욱 가까울겁니다..^^ 님 생각은 좀 다르신것 같은데 저는 박노자씨의 위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네요.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박노자씨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근데 그 레닌의 "속사정"은 무엇인가요? 지젝의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0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 yoonta님도 (짐작대로) '깨끗한 손'을 주장하시는군요(마치 카뮈처럼). 그렇다면, 테러리즘을 제거한 아나키즘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혹은 '아나키즘은 휴머니즘이다!'

yoonta 2007-02-0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즘적? 아나키즘이 아닌 아나키즘은 전 당연히 거부합니다..^^ 아나키즘이던 코뮤니즘이던 뭔 이즘이던간에 "인명을 경시"하는 모든 이즘은 거부하는 입장이라..^^ 그건 단순히 "손을 더럽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로쟈 2007-02-0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경우 인명에 대한 존중은 동물에 대한 존중도 함축하게 되나요? 혹은 더 나아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도? 에코-아나키즘? 혹은 묵가의 겸애설?..

2007-02-06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Ee 2007-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로쟈 2007-02-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푸하 2007-02-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기인 2007-02-0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eEe 2007-02-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기인 2007-02-0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yoonta 2007-02-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로쟈 2007-02-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yoonta 2007-02-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푸하 2007-02-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로쟈 2007-02-0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yoonta 2007-0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eEe 2007-02-0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기인 2007-02-0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eEe 2007-02-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yoonta 2007-02-0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eEe 2007-02-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로쟈 2007-02-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기인 2007-02-0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yoonta 2007-02-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eEe 2007-02-0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yoonta 2007-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eEe 2007-02-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인 2007-02-1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인 2007-02-1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기인 2007-02-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걸어다니는 뉴스메이커' 도올 김용옥 선생이 EBS 방송을 통해서 '요한복음 강해'에 나선다. 관련소식은 지난주에 접한 바 있는데, 오마이뉴스에 인터뷰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주재일 기자가 인터뷰를 정리했다. 기사를 읽어보니 이번 강의는 공짜 강의가 아니라 유료강의라고 한다. 흠...

오마이뉴스(07. 02. 02) 김용옥 "나를 마귀로 보는 기독교인... 이번에 다를 것"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쉽게 풀어주었다. 19세기 이후 기독교를 주체적이면서 전폭적으로 수용한 우리나라의 처지에서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일이라며, 죽어서 천당 가려고 믿는 천박한 기독교가 아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기독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강해 작업은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특히 김 교수는 기독교를 거침없이 비판했던 것을 이번 강연에서는 자제하고 차분하게 설득하며 기독교인들과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예수를 믿고, 보수 기독교인이 신앙하는 인격유일신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소통을 위해 위장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통에 가까운 신앙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예수와 유일인격신에 대한 믿음'은 보수 기독교인의 이해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기자설명회의 짧은 시간에 이러한 차이를 모두 설명하지 못했다. 그의 강연과 책을 읽으며 차근차근 확인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다음은 김용옥 교수가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건가.
"최근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논술과 철학을 강의한 적 있다. 이번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는 지성인이 내 강의를 들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관심이 많다."

-고전을 강의하면서 우리 시대의 이슈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 화제를 모았다. 이번 강의에서도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룰 생각인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추해보자. 이렇게 종교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족이 세계 어디에 있는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를, 조선시대는 유교를, 19세기 말부터는 기독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우리 민족의 특수성으로 봐야 한다.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기독교는 외국 선교사가 던져준 종교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이제 남북통일의 문제와 함께 종교 화합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할 시점에 왔다. 인구까지 줄어드는 마당에 기독교가 팽창할 시기는 지났다. 기독교 입장에서도 새로운 틀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 내 강의가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이미 대선 정국에 들어섰기에 교수님의 발언에 더욱 민감할 것 같다.
"좋은 대통령이 뽑히면 좋겠다. 노무현 대통령에 관해서는 최근 4개월 간 정보를 모은 게 없어서 잘 모른다. 노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 시대를 잘못 이끈 대통령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인기가 없을 뿐이지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5년 동안 긍정적인 성과를 잘 살펴 이어가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노무현 정권 5년을 너무 각박하게 평가하지 말자. 우리 사회는 진보했고 민주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크게 불행한 시기는 아니었다. 우리 시대를 폄하하지 말자."

-기독교의 사회책임이나 한기총 등 기독교인들의 정치 활동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를 수용한 배경에는 억압 받았던 우리 민족의 고통과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의 역사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감동을 주었다. 처절한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는 굉장한 힘을 주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KSCF,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기독교 단체가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했다. 지금 이런 물줄기가 다 사그라지고 보수화되는 시대로 갔다. 보수화되는 게 상당히 염려스럽다.

종교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점들이 많다. 기독교는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느 한편에 서면 곤란하다. 정치와 종교가 결부되면 급속히 망하는 첩경이다. 로마와 결탁한 교회 권력도 망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라고….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교회 자멸하는 길이다. 기독교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두고, 신앙 공동체의 본래적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종교는 문명통합적이어야 한다. 어떤 종교든지 민족을 분열해서는 안 된다."



-강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요한복음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1장이 가장 난해하다. 1장을 지나면 그다음부터는 쉽다. 1장에서 만들어진 인식론적 틀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10강을 녹화했는데 1장에서도 10절까지 나갔다. 요한복음 전체를 하려면 최소한 100강 규모는 되어야 한다.

강의 초반에는 철학적인 설명이 많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20강 이후에는 영어 강독 형식으로 진행된다. 철학적인 설명을 충분히 해야 하는 이유는, 헬라 철학을 특히 로고스 사상이라는 배경을 설명하지 않으면 요한복음 해설이 안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희랍 세계, 특히 희랍의 지식인들을 향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학계는 요한복음을 구약과의 관계에서만 해설하려는 경향이 짙지만, 요한복음은 희랍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게 좋다. 강의 형식은 고전 강독이다. 구닥다리 영어가 아니라 현대적 영어를 구사할 것이다. 한 단어에 담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해설도 내 평생 배운 것을 녹여서 충분히 할 생각이다."

-인터넷에 댓글이 올라오면 반응할 생각인가.
"지식의 전수는 쌍방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일이 대응할 생각 없다. 내 일 하기도 바쁜데, 창조적인 일을 해야지. 그런 것은 취사선택하는 게 민주 사회의 정도다. 사람들이 민주를 자기들의 요구만 들어달라는 식으로 오해한다. 지식의 세계는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내 지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강요가 아니다. 나는 독자들하고 채팅하는 그런 지저분한 짓을 절대 안 한다. 평생 그렇게 생각해 왔다. 집에 컴퓨터도 없고, 자판을 두드려본 적도 없다. 난 컴맹이다. 너무 불편해서 배워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말 인터넷 문명이 대단하다. 내가 30년 동안 모아야 할 책을 며칠 만에 샀다. 아마존은 남의 서재에 꽂힌 책도 가져다주더라."

-과거 논어 강의를 끝마치면서 다시 대중 강의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일은 하사관이 해야지 장교가 할 일은 아니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대중 강좌를 하다보면 불필요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다. 공짜로 강의가 뜨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홈페이지에 들아와야 내 강의를 볼 수 있다. 그 정도 열심을 내 들을 정도면 소위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또 관객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강의하니 청중에게 쏟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 에너지를 강의에 집중하니 한 번에 다섯 강좌를 연속으로 녹화해도 끄떡없고 재미있더라. 과거 텔레비전 강의는 지나가면 끝이었지만, 이제는 내 작품으로 남으니까 나도 보람을 느낀다.

나는 인류의 3대 지혜서로 노자의 도덕경, 인도 문명의 금강경, 중동의 요한복음을 꼽으면서 이 문헌들을 강의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당시는 막연했지만 그 계획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수한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한복음을 강해하는 것은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안 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불트만이나 다드의 주석 못지않은 작품을 내놓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 강의와 책이 결코 경박한 작품은 아니다."

-과거 교수님은 불트만 신학을 토대로 성서를 해석했다. 현대 신학은 불트만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한국 기독교는 불트만을 이해한 적 없다. 불트만의 책을 제대로 번역하지도 못했다. 허혁 선생이 불트만을 깊게 연구했는데 기독교 내부에서 배척받다가 외롭게 돌아가셨다. 불트만은 한국에 비신화화 신학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정통신학자다. 신앙 형태도 지극히 보수적이다. 불트만은 성서의 신화적 표현 때문에 기독교가 진리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신화는 신화로 해석해야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트만을 넘어선다. 불트만 이후에 나온 각종 고대 문헌들을 섭렵했고, 불트만 이후의 현대 신학에 대해서도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불트만이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적 문서로 이해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접근은 정통신학에 가깝다. 철저하게 성서가 말하려는 본래 의도, 예수의 말씀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해한다. 정통신학에 가까울수록 더 자유로워야 한다."

-교수님은 기독교의 내세적인 특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렇지만 초월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묵시록과 종말론은 다르다. 묵시록은 미래의 한 시점에 어떤 특별한 계시가 있다는 기대다. 종말론은 시간의 끝이라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종말론적 긴박성은 오늘 여기 나의 문제다.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상황을 벗어나서 말하는 종말론은 없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종말론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 최후의 심판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요한복음은 초월적 측면과 묵시론적 측면을 깊이 있게 종합하려고 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나 복음서 기자들이 하나님이 누구라는 걸 말한 적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규정할 수 없는 세계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분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절대 규정할 수 없는 분, 그렇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시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기독교 사상도 깊이 들어가면 동양 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인격신이라는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유일인격신이라는 정체를 깔아뭉개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찍힌다. 나는 유일신 사상에 기독교의 강력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일신에 대한 해석을 잘해야 한다."

-기독교인을 배려하는 측면이 많다.
"내가 그토록 비판했는데 안 되니까. 이젠 북돋아서 함께 가자는 입장이다. 나도 늙었다. 죽기 전에 반론이 아니라 정론을 내놓고 싶다. 내 인생의 모드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 EBS에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감사한다."

-이번 강연이 기독교계에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파문이 일면 좋겠다.(웃음) 그렇지만 나는 성서 입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를 마귀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지만, 이번 강의를 두고 그렇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같은 집단이 무조건 까지 말고 협조해서 기독교를 잘 알려야 할텐데…."



-한때 기독교인이었고 신학도 전공했는데.
"나는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다. 예장 목회자들 가운데 훌륭한 분치고 우리 집 안 거쳐간 분들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부모님은 목사님들을 대접했다. 우리 집 가까이에 씨알농장이 있어 함석헌 선생의 설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고 한 때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1년 후 신학대학을 떠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럼 신앙을 버린 것인가.
"신앙을 버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럼 누가 기독교인가.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예수를 믿는가)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

-예수의 심상이 어떤 건가.
"짧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예를 들면, 성경에 오병이어 사건이 나온다. 예수 주변으로 5000명이 모인 것이다. 그것도 배고픈 사람들이다. 예수는 진지하게 사태를 파악한다. 우리에게 뭐가 있는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도시락으로 싸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것을 들고 축수(두 손을 모아 빎)한 다음 나누어 먹었다. 뭐 음식이 계속 불어났다는 둥,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둥 하는 말이 없다. 그저 나눠 먹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그렇다."

-신학대를 떠난 뒤 신앙의 진보가 있었나.
"지금도 방황하고 있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방황하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다. 성경에는 내가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분란을 주러 왔다고도 말한다.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방황하라는 것은 세속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세도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가 민족을 이끌 수 있었던 힘은 방황에서 왔다. 예수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고,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사막에서 방황하는 시절을 거쳤다. 부자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자기 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40년의 세월 동안 신앙적으로 크게 자랐다고 자부한다. 나의 체험이 한국 기독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퇴보했다고 아쉬워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한 성서에 명백한 오자가 엄청나게 많다. 내가 다 써놓았다. 성경의 축자무오류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타임즈에서 1년에 몇 번 없는 오자가 나도 엄청난 일로 처리하는데, 수천만 명이 보고 엄청나게 많이 판매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오자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문학자로서 보기에 관주성경에 나오는 한문이 틀린 게 많다. 말하면 지적해줄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할 사람 말고 기독교 명전들을 번역할 인물을 키워야 한다. 그런 작업은 출판 논리로는 불가능하다. 교회들이 재정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책을 번역 안 하고 건물만 지으려 한다. 건물은 절대적으로 비게 되어 있다. 그렇게 크게 지어서 100년을 버틸 수 있겠나. 유럽 교회를 봐라. 21세기 기독교는 내실을 기해야 한다. 지금 규모로도 충분하다. 배타만 하지 말고 여유롭게 포섭하면서 어른 노릇해라. 기독교가 가장 강력한 종교 아닌가. 다락방 같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 공동체가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는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를 보기 어렵다. 반성해야 한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교회는 억압받던 일제강점기에 감동의 여파로 만들어진 조직력에 의존해 여태 기생하고 있다. 이런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조직력에 의존해 교회를 유지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가 감동적이어야 한다. 목사가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배운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지 않고는 절대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 몇몇 구절을 암기해서 일상에 버무려 구라를 친다. 학문적으로 깊게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위대한 기독교가 솟아날 것이다. 요한복음 주제는 생명, 빛, 진리, 자유, 영생이다. 한국교회에 끊임없는 성령의 감화와 은혜가 솟아나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뿌리 가운데 명동촌에서 형성된 전통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강원룡 목사님을 생전에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를 만나 명동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너무 늦게 명동에 대한 이야기를 알았다.(문익환 목사의 사모인 박용길 장로님이 살아계신다) 그런가. 꼭 한번 만나러 가고 싶다."

-여전히 기독교계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교수님을 평가한다.
"나의 강의는 신도들에게 엄청 감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를 깽판 놓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나에게 집회를 맡기는데, 왜 기독교만 마귀 취급하는가. 기독교를 통해서 위대한 물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기독교가 제대로 끌고 가야 한다."

-현대 신학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자유주의신학의 오류는 아기 목욕물을 버리라고 했는데 아이까지 버린 일이다. 나는 그들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다.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지만, 기독교의 장점을 평범하게 만들어선 안된다는 생각한다. 기독교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다른 종교와 깊게 대화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신학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상황에 천착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보수 종단의 반감을 샀고, 오히려 보수 쪽을 도와주는 꼴이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소중한 노력이지만, 이론적 기초가 없었다. 한국 신학의 과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어떻게 한국에서 새로운 신학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후속 작업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강연이 끝나면 대형 교회를 돌아가며 방문해보고 싶다. 한국교회가 어느 수준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다양한 층의 기독교인을 만나는 건 어떤가.
"좋다. 청년들과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불러 달라."

-교수님의 강의와 관련된 후속 논의가 진행되면 참여할 의사가 있는가.
"언제든지 좋다. 격조만 지켜달라."

07.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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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05 15:29   좋아요 0 | URL
저도 일전에 들었을 때 도올 선생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란 이야길 듣고 사뭇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주목되겠는걸요.

짱꿀라 2007-02-06 13:05   좋아요 0 | URL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과연 강의를 잘 해낼 수 있을지. 한국신학대학교에서 4년을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해서 신학에 대한 방대한 학문을 전부 알 수는 없는 것인데...... 특히 김용욱 선생께서 가지고 계신 자유주의 시각으로 성경자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아마도 보수교단쪽에서 말이 나오지않을까 심히 걱정도 해봅니다.

로쟈 2007-02-06 14:32   좋아요 0 | URL
소이부답님/ 도올의 집안 이력은 꽤 일찍부터 본인이 늘어놓고 있는 얘긴 걸요...
santa님/ 괜한 걱정이 아닐까요?^^ 고전에 대한 해석의 권리는 독점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르다면 다른 의견을 개진하면 되는 거겠죠. 저는 오히려 적극적인 반론이 제기되어 이 참에 기독교계가 공부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깽돌이 2007-02-06 18:15   좋아요 0 | URL
저도 한 때 이분 팬인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남의 이론을 자기 아이디어로 내놓는 경우가 잦은 것 같습니다.그냥 재미있는 강사로 생각합니다^^

열매 2007-02-07 01:17   좋아요 0 | URL
김용옥은 한국신학대학에서 4년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학위는 너무 현란해서^^ 자세하게 어디서 얼마나 공부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학위에 대해 워낙 많은 말을 쏟아내서 역추리해 볼 수는 있습니다. 주요지는 집안이 다 서울대였는데, 혼자 공부못해 서울대 말석도 안되는 고려대 생물학과에 갔다가 몸이 아파 자퇴했다.뜻한바 있어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다. 일년 채 못되어 고려대 철학과에 다시 들어갔다. 이후 外留 아닌 外遊를 했다 합니다. 무슨 강의를 할 것이고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 수 없으나, 저는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어로 읽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가 '이제 중요한 것은 회화가 아니라, 작문이다'라고 말하는 데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로쟈 2007-02-07 01:21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서도 "그렇지만 1년 후 신학대학을 떠나 철학을 공부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이 가장 강조하는 건, 읽기, 독해력입니다. 최고 수준의 학술서나 철학서를 읽어낼 수 있는. 회화야 1,000단어로도 하는 것이기에...

biosculp 2007-02-07 15:43   좋아요 0 | URL
강의 신청했고 3강까지 들었습니다. 재미있네요. 그리고 미끼상품으로 강의 등록하면 교재를 그냥 주네요. 더불어 요한복음 영어로 외기 도전도 할려고 하는데 작심3일이 될런지.

로쟈 2007-02-07 16:34   좋아요 0 | URL
비싼가요?^^

biosculp 2007-02-07 18:25   좋아요 0 | URL
3만5천원입니다. 기독교에는 문외한인데 교양강의로도 좋은것 같습니다.

로쟈 2007-02-07 21:45   좋아요 0 | URL
퀼리티 대비로 하면 '저렴한' 강의이긴 하네요. 교재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한데...

yoonta 2007-02-07 22:02   좋아요 0 | URL
회화잘하는게 독해잘하는 것보다 더 어렵죠..1000단어로 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도올선생은 아예 회화는 포기하고 영어잘한다는 소리하려면 독해력을 길러야한다는 취지로 영어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더군요. 제가보기에는 변명으로밖에 안보이더군요. ㅋ

로쟈 2007-02-07 22:09   좋아요 0 | URL
"회화잘하는게 독해잘하는 것보다 더 어렵죠"가 일반론은 아닌 듯한데요. 그건 한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회화'가 특별한 '화술'은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요...

yoonta 2007-02-07 22:16   좋아요 0 | URL
여기서 제가 말하는 회화능력은 머더텅에 준하는 수준입니다..^^ 어렸을때 영어권국가에서 자라나지 않는한 그것을 후천적으로 학습해 내는 사람은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

로쟈 2007-02-07 22:39   좋아요 0 | URL
'머더텅'의 회화능력을 가진 친구들 여럿 봤지만(어렸을 때 영어권 국가에서 자리기도 했고) '독해력'은 형편없던데요. 제가 말씀드린 독해력이란 물론 고급 이론서의 독해력입니다만...

yoonta 2007-02-07 22:44   좋아요 0 | URL
두개를 다 잘 하기는 원래 힘든건가 봅니다. 박노자씨 같은 경우도 고급 한국어독해능력은 있는 것같은데 회화는 아직 어눌하기 짝이 없더군요.

비로그인 2007-02-09 02:03   좋아요 0 | URL
박노자씨가 한국어 못한다고 느껴본적은 없는데요 ^^ 오히려 너무 잘하는 것 같던데 ㅋ 발음을 가지고 평가하시는 거 같은데. 음 그렇게되면 반기문 총장님도 참 ... ㅋ
그렇다면 한국어 잘하기로는 로버트 할리를 따라갈 자가 없지예~ ㅋ

yoonta 2007-02-09 02:43   좋아요 0 | URL
회화능력으로는 발음과 속도 그리고 대답하는 센스와 어휘선택 등이 고려되어야겠죠. 회화에서는 발음도 상당히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외국인이라더요. 그런점에서 박노자, 김용옥, 반기문 미달이고요. 할리씨도 경상도사투리때문에 괜찮은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좋다고만 할수없는 발음이죠. 그리고 어휘선택이 너무 협소한것같더군요. 제가 이처럼 잘한다..는 기준이 높기때문에 "그런 사람 거의 없다"고 한겁니다.^^

로쟈 2007-02-09 09:08   좋아요 0 | URL
그런 기준이라면, 부시의 영어회화능력도 '미달' 아닌가요?..

yoonta 2007-02-09 11:38   좋아요 0 | URL
한 미국인 친구가 그러더군요. 부시는 돌대가리라고,, "회화능력의 미달" 때문에. ㅋ
 

소피 칼? 왠지 들어본 듯도 한 이름이지만, 프랑스의 이 '저명한' 사진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접했는지는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지난주에 그녀의 책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는 서평기사를 읽고 서점에서 두 권의 실물을 확인했을 따름. <뉴욕이야기>는 폴 오스터와의 공저인데, 소개를 읽어 보니 사연이 없지 않다. 오스터는 "자신의 소설 <거대한 괴물>에서 프랑스의 사진작가 소피 칼의 삶과 작품을 모델로 한 '마리아 터너'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 속 허구의 인물로 등장한 것에 매력을 느낀 소피 칼은 자신의 방식대로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폴 오스터의 소설과 놀이를 즐기기로 한다. 이 작업은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이중 게임>이라는 전집으로 소개되었는데, <뉴욕 이야기>는 그중에서 마지막 7권에 해당한다"고 한다. 과문한 건 내가 오스터를 별로 읽지 않은 때문인가 보다. 그래도 일단은 어떤 책인가 확인해두도록 한다. 

문화일보(07. 02. 02) 타인 시선 통해 나를 까발리다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진실일까. 프랑스의 저명한 사진작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소피 칼의 ‘진실된 이야기’를 읽으면 책 제목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친다. TV 인기 프로그램명이긴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타이틀이 적당해 보인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진실된 이야기’는 소피 칼의 자전적 사진과 글로 구성돼 있다. 그녀는 책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한장 한장에 담겨 있는 사연들을 옆 페이지에 적어 놓았다. 아홉 살 때부터 마흔아홉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추억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보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비롯해 가족과 친구, 결혼생활과 이혼에 얽힌 ‘진실된’ 이야기는 너무나 내밀한 것들이어서 오히려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목욕 가운’이라는 제목 아래 적혀 있는 글(왼쪽 페이지엔 하얀 목욕 가운이 벽에 걸려 있다)을 보자.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가 내 방 문을 열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의 것과 같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흰색 타월로 된 긴 가운이었다. 그는 나의 첫 연인이 되었다. 내 앞에서 성기를 보이지 말라는 부탁을 그는 일 년 내내 들어주었다. 등은 괜찮았다.…나를 떠나면서, 그는 내게 그 가운을 남겨 놓았다.’

Sophie Calle, Autobiographical Stories (The Nude Model

‘면도칼날’에선 자신의 누드 데생을 보여주면서 ‘나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정오 사이에 나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매일 한 남자가 맨 앞줄 왼쪽 끝자리에 앉아 세 시간 동안 나를 데생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정오가 되면 그는 호주머니에서 면도칼날 하나를 꺼내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세심하게 찢었다.… 이러한 광경은 열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열세 번째 날 나는 일하러 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전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내면 한 구석을 날카롭게 드러내 보인다.



그녀는 왜 이처럼 자신을 까발릴까. 그녀가 사진과 글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심은진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소피 칼에게는 자신의 몸, 자신의 삶 전체가 허구를 만들어내는 작품의 대상이 된다.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행위, 고의로 연출해내는 그 행위가 바로 자신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자신의 삶과 육체를 타인의 시선에 드러내는 작업은 그녀에게 자기 존재를 주체에서 객체로 만들어,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게 한다.’ 자신을 객체화해 낯설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같은 허구의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소피 칼의 속셈이라는 말이다.

사진과 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다. 사진이 현장성과 확실성을 담보한다면, 글은 한 컷의 평범한 사진이 들려줄 수 없는 내용을 풀어헤친다. 당초 프랑스에서 책에 담긴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관람객들은 여느 사진 전시회와 달리 한 작품마다 눈길을 돌려가며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고 한다. 사진 옆에 붙어 있는 글을 읽고, 다시 사진을 보면 작품이 전혀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Sophie Calle, Autobiographical Stories (The Amnesia)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진실된 이야기’에 수록된 사진 작품 중 네 컷의 사진에서 신체 특정 부위가 박스처리돼 있다. 번역자의 부탁을 받은 소피 칼이 한국의 19세 미만 독자를 위해 직접 작업했다고 한다. 아직도 작품에 손대야 하는 한국의 ‘특수 사정’은 언제 ‘일반적 상황’으로 바뀔까.

또다른 책 ‘뉴욕 이야기’는 그야말로 실험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세계적인 작가 폴 오스터가 소피 칼에게 ‘뉴욕에서 아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적은 시나리오를 보낸다. 그가 권하는 네 가지 방법은 ▲미소 짓기 ▲대화하기 ▲걸인과 노숙자에게 배려하기 ▲한 장소를 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가꾸기 등이다. 소피 칼은 그의 조언대로 일상을 꾸려 나간다. 매일 거리로 나가 낯선 이들에게 미소와 말을 건네고, 샌드위치와 담배를 권한다. 또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하나 선택, 꽃과 각종 물건들로 아름답게 가꾸고 관리한다. 이같은 작업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도시에서 타인과 자신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키는 것, 타인의 존재로 자신을 채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기자)

07.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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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06 01:08   좋아요 0 | URL
꽤나 기대하고 산 책인데, 뭐랄까, 존 버거와 잔 모로의 작업같은 책일까? 하면서요. 저런 평이라면 대단하군요. 책에서는 '그녀의 요청에 의해' 폴 오스터가 저 네가지.를 보내 준 걸로 되어 있어요. 저도 폴 오스터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꽤나 심심하게 착한 이야기들.이고, 그걸 따라하는 소피 칼은 ... 차마 댓글에 못 적겠군요 ^^
근데, 정말, 소피 칼이 '저명한' 사진작가인가요??
게으르고, 관심 없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책날개에 있는 정도의 약력이면, 얼마든지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하긴, 폴 오스터가 찾아서 소설에 인용할 정도면 유명하긴 한건가? 여튼,'뉴욕이야기'는 진짜- 별로였어요. '실험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하기에는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없는.. 사소한 범법.과 거슬림.이라고나 할까.요

로쟈 2007-02-06 08:24   좋아요 0 | URL
사진집들이 대개 심심하긴 한데, 하이드님 리뷰로 봐서는 매력이 없는 책인가 보네요...

2007-02-06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14:28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엉뚱한 걸 퍼왔었군요.^^; 인용문에 소피 칼의 책을 읽고 있다고 돼 있어서 그녀의 책에 나오는 사진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사진으로 교체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한 독서모임의 강사를 맡게 됐다. 예전에 언질이 있었던 내용인데, 오전에 시간과 장소가 확정됐다는 메일을 받고서 대학강의처럼, 아니 그보다 '빡세게' 16주 강의안을 만들어 오후에 보냈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카테고리로 해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읽기가 두루 포함돼 있는 그 강의안의 한 꼭지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단편문학과 그 유산'에 대한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둔 건 미국작가 레이몬드 카버(1938-1988)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1949- )이다.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라고 말한 작가가 레이몬드 카버이고, (하루키의 독자들은 잘 알 테지만) 그 카버를 또 직접 번역하고 해설을 쓰기도 한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렇게 해서 세 '단편작가'는 굴비처럼 엮인다.

 

 

 

 

레이몬드 카버의 책은 이전에 <숏컷>(집사재, 1996)을 사두었지만 아마도 박스에 들어 있을 듯하고, 이번에 새로 읽어보려고 하는 단편집들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집사재, 1996)와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집사재, 1996)이다. 이 작품집들은 문학동네에서 레이몬드 카버 선집이 기획되면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5)과 <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 2004)로 다시 출간됐다(역자는 다르다). 두 권 정도 더 출간되는 것으로 아는데, 나머지 작품들도 조만간 출간되는지 모르겠다.

 

 

 

 

풍문으로 듣는 하루키 문학에 대해서 나는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내게도 안면이 있는 문학평론가들이 적극 추천하던 게 그의 단편들이었다.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여러 단편집들 가운데 일차적으론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문학사상사, 1992)을 골랐다. 흥미가 생기면 더 읽어볼 것이다.

체호프 단편의 계보를 굳이 러시아 밖에서 찾는 건 러시아쪽 작가/작품들이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문학적 선배로 하드 보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어네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단편들이 있다면, 체호프의 문학적 후배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에 이삭 바벨(1894-1940, 사진)이 있다(바벨의 단편들은 예전에 <기병대> 등이 소련동구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소개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 새로운 번역본이 어쩌면 올해 출간될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와 동시대 작가로 러시아 문학에선 체호프의 '문학적 적자'로 평가받는 작가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1941-1990)이다. 1971년 망명해서 1990년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도블라토프는 생전에 체호프가 자신이 닮고 싶은 유일한 작가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작품집도 아마 1-2년내로 출간될 수 있을 것이다. 체호프 단편문학의 계승과 변주는 그때 가서 좀더 충실하게 조망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에 관해서 검색하다 보니까 그의 한 단편집에 번역/소개돼 있는 '글쓰기에 대하여'가 눈에 띈다. 이때 '글쓰기'는 총칭어가 아닌 '단편소설 쓰기' 정도로 한정하여 읽는 게 내용에 적합해 보이는데(소위 단편과 (장편)소설은 종류가 전혀 다르다는 걸 이 글에서도 시사받을 수 있다), 아무려나 유익하고 흥미롭다. 레이몬드 카버 입문에 가름할 수 있을 듯해서 다시 옮겨놓고 몇 가지 이미지를 덧붙여둔다.



1960년대 중반, 나는 긴 대화체의 소설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상당히 힘겹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한 번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바람에, 더 이상 소설을 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얽힌 사연이 약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지겨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내가 시나 단편 소설에 집착하게 된 이유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치고 빠지는 식의, 혹은 머뭇거림 없이 뛰쳐나가는 식의 방법만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무렵, 그러니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원대한 야심을 잃어버린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작가가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야심과 약간의 행운이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 지나치게 큰 야심과 지나치게 더러운 운세는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작가들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확하고 참신한 시선, 또한 그러한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하게 맥을 짚어내는 것 등은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가프가 본 세상(The World According to Garp)>은 존 어빙이 본 신비로운 세상에 다름 아니다. 그 밖에도 플래너리 오코너, 윌리엄 포크너,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이 바라본 또 다른 세상도 있다. 치버, 업다이크, 싱어, 스탠리 엘킨, 앤 비티, 신디아 오지크, 도널드 바셀미, 메리 로빈슨, 윌리엄 키트레지, 배리 한나, 워슐라 K. 르귄 등도 모두 특유의 독자적인 세상을 만들어 낸 작가들이다. 위대한 작가, 심지어는 아주 좋은 작가들도 모두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창출해 낸다.

이것은 스타일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스타일 하나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쓰는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서명이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세계일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주는 기준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재능이 작가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법을 가진 작가, 또한 그러한 방법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삭 디네슨(Isak dinesen)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나는 조그만 카드에 그 말을 적어서 내 책상 옆 벽에 붙여 놓을 생각이다. 지금도 벽에는 그런 카드들이 몇 장 붙어 있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 한 작가가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적어도 길은 제대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작가 제프리 울프(Geoffrey Wolff)가 문학도들을 향해 ‘값싼 트릭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엿들은 적이 있다. 그 말 역시 카드에 적어서 붙여야 한다. 나 같으면 ‘값싼’이라는 단어 하나는 빼 버릴 생각이다. 그저 ‘트릭은 안된다’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그만이다. 트릭이란 결국에는 지겨운 것일 수 밖에 없다. 집중 시간이 짧은 것과도 관련이 되겠지만, 나는 원래 지겨운 것은 좀처럼 참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극도로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 또는 시시한 농담 같은 글은 나를 금방 잠들게 만든다. 작가에게는 트릭이나 교묘한 잔머리가 필요 없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 - 일출도 좋고 낡은 구두 한 짝도 좋다 - 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몇 달 전 존 바스(John Barth)는 ‘뉴욕 타임즈 북 리뷰’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소설 창작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 대부분이 ‘형식의 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의 작가들이 이른바 ‘구멍가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걱정은 실험 정신이 자유주의와 함께 그 기세를 잃어 가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나는 소설 창작에 있어 ‘형식의 혁신’이라는 우울한 논의를 접할 때마다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글쓰기에 있어 ‘실험’이 경박함과 가소로움, 혹은 모방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욱 고약한 것은, 실험이란 미명 아래 독자를 잔혹하게 짓밟고 소외시키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런 글은 세상 소식을 전혀 전해 주지 못하며, 혹은 모래 언덕 몇 개와 도마뱀 몇 마리는 있으되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사막 풍경의 묘사에 그치고 만다. 그런 곳은 인간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살고 있지 않는, 그저 극소수의 과학 전문가들에게나 흥미있는 장소일 뿐이다.

소설의 진정한 실험이란 원초적이고, 힘든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 예를 들면 바셀미의 방식 - 을 다른 작가가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의 바셀미가 있을 뿐, 만약 다른 작가가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바셀미 특유의 감수성이나 무대 장치를 도용하려 했다가는 혼란과 재앙,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기만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참된 실험이란 파운드가 주장한 것처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자 스스로의 힘으로 작가들이 멀쩡한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고 자기네 세계에서 우리네 세계로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기를 바랄 것이다(*이 문장은 비문인데 확인해봐야겠다).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 - 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 - 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공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나는 실험이란 기치를 내걸건 혹은 애꿎은 리얼리즘을 내걸건 간에,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되는 대로 써내려가는 식의 글쓰기는 무척 싫어한다. 아이작 바벨 (Issac Babel)의 뛰어난 단편 ‘모파상의 친구’에서(*'이삭 바벨'이라고 읽어줘야 한다), 화자는 소설 쓰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것 역시 카드에 적어 붙일 만한 말이다.

에반 코넬(Evan Connell)은 자신이 쓴 단편을 쭉 읽어 내려가며 쉼표를 하나하나 지웠다가, 다시 한 번 읽으며 쉼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살려 놓는 과정을 거치면 단편 하나가 완성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하건 그런 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자신이 해놓은 일에 대한 그 정도의 관심은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어차피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단어들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구두점 하나라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제자리에 가 박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만약 단어들이 작가 자신의 억제되지 않는 감정으로 뒤죽박죽이 된다면, 혹은 기타 다른 이유 때문에 정확하지 못하거나 명확하지 못하게 된다면, 독자의 눈은 바로 그 단어 위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독자 자신의 미적 감각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러한 종류의 불운한 글을 ‘허약한 설명서’라고 표현했다.

나에게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혹은 편집자나 마누라의 성화 때문에 서둘러 책을 써야 한다고 털어놓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말하자면 그것들이 아주 뛰어난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인 셈이다.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좀더 좋아졌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 사실은 안하지만 - 말문이 막힌다. 어차피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작가가 자신의 모든 힘을 모조리 내어, 쓸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그 힘들었던 노동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말을 한 내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쉽고도 정직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터이다. 그러기가 싫으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글을 쓰고, 일단 쓴 다음에는 어떠한 정당화나 핑계도 내세워서는 안된다. 어떠한 불평도,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다.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단편 소설 쓰기’라는 소박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에서, 글쓰기란 발견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단편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착한 시골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다.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 자기도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목발을 짚은 철학 박사가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두 여인에 대한 묘사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둘 가운데 한 여인에게 목발을 짚은 딸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중간에 나는 성경책 판매원을 끼워 넣었는데, 나에게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가 목발을 훔치는 장면의 10줄 위를 쓸 때만 해도, 나는 그가 목발을 훔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제서야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전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거기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을 쓸 때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결점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놓은 글을 읽고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비록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첫 문장밖에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지만, 꽤 괜찮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던 적이 있다. 그 며칠 전부터 내 머리 속에는 첫 문장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레이몬드 카버 전집 제 2권 ‘숏컷’에 수록된 ‘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봐’의 첫문장이다; 옮긴이) 나는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것을 쓸 시간만 낼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시작되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원래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 종일 - 12시간, 심지어 15시간도 좋다 - 시간을 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어느 날 아침 책상에 앉아 그 첫 문장을 썼다. 그러고 나니 금새 또 다른 문장이 그 뒤에 달라붙었다. 나는 시를 쓸 때처럼 그 작품을 썼다. 한 줄 쓰고, 또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을 써나가는 것이다. 머지 않아 나는 단편 하나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이 내 작품,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실상 단편쓰기란 곧 시쓰기이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형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프리체트(V.S.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 - 또 운을 들먹인다 - 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 데 투자하는 것이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07.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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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0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독서모임 사람들 부럽군요. 대학에서 하는건가요? 훔...

로쟈 2007-02-0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강료가 '비싸니까' 그렇게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락방 2007-02-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이 강의는 들어보고 싶은데요. ㅜㅜ

기인 2007-02-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저도 얼른 강의해보고 싶어요 ㅎ :)

로쟈 2007-0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제가 분위기만 띄워놓았네요...
기인님/ 프라하 여행기는 너무 싱겁던데요.^^ 강의야 뭐 나이 차면 하게 되는 거죠. 또 나이 차면 그만 두고...

moonnight 2007-02-0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막 들어보고파집니다. 굉장히 알차리란 믿음이 생기네요. 학생들이 부러워요.

로쟈 2007-02-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획은 제가 언제나 '알차게' 세웁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니구요, 아마 제가 제일 나이가 어릴 겁니다.^^;

나비80 2007-02-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빡센 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피곤한 일일텐데.
고생스러우시겠습니다^^

로쟈 2007-02-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주로 '계획'만 빡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