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으레 조금 들뜬 기분과 감상적인 우울증에 얼마간 젖어 지내야 마땅해 보이지만 최근 몇년 동안 그랬던 기억이 없다(물론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이긴 하지만). 마지막날까지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그간의 게으름 탓이더라도, 조금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잠시라도 우울증 모드를 좀 만들어보고자 리스트라도 뽑아둔다(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주제가 http://www.youtube.com/watch?v=N2fGWQKbX68 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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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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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어둠-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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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우울증 환자는 나약한가
베르나르 그랑제 지음, 임희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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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해부
로버트 버턴 지음, 이창국 옮김 / 태학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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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사람 2007-12-29 23:49   좋아요 0 | URL
'보이는 어둠'과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읽고 그 덕인지 관계서적을 더 구입하려했던 생각이 사라지고 우울증이 나아버렸다는~~ 믿고나 말고나^^

로쟈 2007-12-30 00:01   좋아요 0 | URL
네, 효과 만점이라는 평들이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7-12-29 23:52   좋아요 0 | URL
정말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리스트네요.ㅋㅋㅋㅋ

로쟈 2007-12-30 00:01   좋아요 0 | URL
보통은 '꿀꿀하다'고들 하지요...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학술출판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 네댓 가지 경향을 짚어보고 있는데, 2007년만의 도드라진 트렌드라고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학술적으로 중요한 업적에 속하면서도 '2007년의 책'이라고 할 만한 건 드물지 않나 싶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기사는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24) 2007년 학술출판 트렌드 회고

학술출판이 학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학술출판과 학술 동향이 조응하는 모습은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비교적 온전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떤 학술 도서가 각별히 주목을 끌거나 논쟁을 촉발시키는 경우는 전체 학술 도서나 분야에서 극히 일부다.

바꿔 말하면 주목이나 논쟁 촉발과 상관없이 어떤 학술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들도 적지 않다(이 글은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거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졌거나, 논쟁과 상관있는 도서 위주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 또는 독서 범위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여러 한계들을 염두에 두고, 올 한 해(2006년 12월 이후 출간) 학술출판에서 주목할 만한 동향이나 개별 저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근대성과 민족주의 등의 주제를 천착하는 책이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휴머니스트)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박선미 츠쿠바대 전임강사의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 정여울이 번역한 토론토대 앙드레 슈미드의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등이 주목 받았고, 장문석 한양대 연구교수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지식의 풍경)와 이용일이 옮긴 한스 울리히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 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서 『동아시아 영화의 근대성과 탈식민성』(이현하 외, 연세대학교출판부), 김려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1901-1945년의 한국영화사를 되짚다』(삼인), 김병희 서원대 교수(광고홍보학과), 신인섭 한림대 객원교수(언론정보학부)의 『한국 근대 광고 걸작선 100: 1876-1945』(커뮤니케이션북스) 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제로서의 매체와 방법으로서의 매체를 포괄하는 문화와 매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일종의 ‘문화적 전환’이 이 주제에서도 두드러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둘째, 현재 우리 사회, 경제, 정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성격의 책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을 모색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박상훈·박찬표·최장집, 후마니타스)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특히 정당 정치 문제, 현실 민주주의의 과제 문제 등에서 정확한 쟁점을 제기해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길), 당대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민주화는 실패한 기획인가, 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웅진지식하우스) 등이 이 주제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주제에 관한 논쟁이나 연구는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른바 ‘87년 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새로운 체제 모델에 대한 모색이, 새 정권 출범과 함께 현실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맞물려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이념적 지형도의 재편과도 상관있기 때문에, 특히 2008년 한 해에 관련 학계가 더욱 바빠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 동아시아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다. 물론 동아시아를 주제 범위로 잡는다고 해도 책마다 색깔은 가지각색이다. 예컨대 강상규의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논형)이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연구 프로젝트 성과물인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근대전환기 동아시아의 자기인식과 대외인식』(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의 『동아시아의 역사분쟁』(솔) 같은 책도 있으며, 일본 이와나미(岩波)에서 나온 『아시아 신세기』 8권을 번역한 책(한울)도 있다.

지금까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의 상당 부분은 동아시아 공동체, 즉 일종의 지역적 실체 구성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사회과학적 담론이거나(시민운동 연계 차원에서부터 정부의 정책적 고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 구축이라는(‘역사 전쟁’으로도 일컬어지는 갈등 요인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문화 담론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실체성과 정체성 구축을 지향하는 목적 지향적 담론이었다.

그러나 목적이라는 큰 숲에 가려진 세부적인 나무들이 그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과)의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문학동네)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지향하기에 앞서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 걸친 동아시아의 계보학이 치밀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고전 번역서다. 이제이북스에서 펴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전 번역서들, 학진 학술명저번역총서로 한길사에서 펴낸 김창성 번역의 키케로 『국가론』, 성염 번역의 키케로 『법률론』,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사마광 『자치통감』(삼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아이네이스』와 『일리아스』(숲) 개역판, 김난주가 번역하고 김유천이 감수한 『겐지 이야기』(한길사), 김필수 외 3인이 옮긴 『관자』(소나무) 등이 올 한해 주목할 만한 고전 번역서였다.

마지막으로, 학술 번역에서는 두 책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길 출판사에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게오르그 짐멜 선집이다. 지금까지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근대세계관의 역사』,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등이 나온 이 선집 시리즈는, 우리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문화적 전환’의 흐름에서 하나의 자양분으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여성이 번역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루만의 후기 저작들이 단편적,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됐지만 그의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담은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루만 연구 및 그에 바탕을 둔 이론적 모색을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학 이외 분야에서 루만의 이론을 원용하거나 참고로 삼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에서나 학문적 성찰의 초점이 일종의 확장된 ‘나’에 대한 체계적이고 반성적인 성찰에 있었다 하겠지만, 2007년을 돌이켜 보면 그러한 성찰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의 근대성, 우리의 민족주의, 우리의 오늘날 현실,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등이 학문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가 결코 고립돼 닫혀 있는 ‘우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학술서이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지만, 이옥순 외 6인이 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 책은, 세계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 온 학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전문성을 폭넓은 대중과 유효적절하게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해에서 다시 ‘우리’에 대한 성찰로 한 단계 高揚해 되돌아오는, 학문적 성찰의 되먹임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2008년에는 바로 그런 성찰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변명하자면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도서 동향에 관해서, 필자의 무지와 게으름 탓에 사실상 생략하고 말았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12. 29.

P.S. 얼핏 어림에도 기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건 강명관 교수의 저작들이다. 올해 한꺼번에 네 권의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동료 학자들의 경탄과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최근에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이 시사IN 선정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1),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소명출판, 2007)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의 학술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의 학자'로 기억해둘 만하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2. 24) [48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조선후기 문학에서 자생적인 근대문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연암이 그것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기존의 문학사를 부정하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돌파해야할 시점입니다.”

강명관 (48)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에서 철저하게 20세기적 기준인 ‘민족’과 ‘근대’로 수렴하는 한국문학사의 구성논리를 해체한다. 그가 씨름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 문학의 큰 봉우리로 꼽히는 박지원, 이덕무, 이옥, 이용휴 등의 비평론과 창작론들이다. 자생적 근대문학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돼온 이들의 문학이론들이 실은 양명학적 사유, 구체적으로 명대 중국 공안파 사유의 자장 안에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편다.

강 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일종의 모험”이라고 실토했을 정도로 그것은 도발적인 작업이었다. 책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 개성의 강조 등 근대성의 코드로 해독돼온 이들 조선후기 문학가들의 사유가 실상 ‘우리 바깥’의 것을 토대로 구축돼왔음을 입증한다. 즉 우리가 떠받드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사유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을 내세우는 의고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17세기초 등장한 명대의 문예이론가들인 원종도, 원굉도, 원중도 등 공안파의 사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론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연암의 문학사상과 공안파의 사상과의 유사성에 주목한 이론은 있었지만 그는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연암비평이 공안파의 논리를 절취하고 있음은 비밀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책과 함께 펴낸 <농암잡지평석>,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안쪽과 바깥쪽> 역시 이 같은 궁리의 결과물들이다.

그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품게 된 것은 1992년께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홍신유와 이언진의 문집에서 공안파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조선후기 문인들의 창작과 비평이 대부분 공안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관련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책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강 교수의 책이 발표된 후 학계에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지만, 그의 작업들은 결과적으로 국문학사에까지 완고하게 영향을 끼쳐왔던 내재적 근대화론이 빚어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강 교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서구 부르주아적 근대를 더 이상 우리 근대의 모델로 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근대성의 단초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돼왔던 조선후기의 소설들이 사실은 중세적 논리를 보급하는 매체로 쓰였음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도발’은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다.(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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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836). 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아벨 강스의 인용문 번역과 관련하여 '로쟈'도 언급돼 있기에 눈길을 끈다.

컬처뉴스(07. 12. 28)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하나이다. 벤야민의 비평 대상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그래서 벤야민은 그에게 “주요 비평 분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만한 몇 안 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내 생각으로는 좀 거슬러 올라가면 롤랑 바르트, 보다 최근에는 움베르토 에코, 근래에는 슬라보예 지젝 정도가 이 정도 ‘급수’에 근접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벤야민은 “저주 받은 작가” 군(群)에 속해 있었다.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지난 2005년까지 국내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벤야민의 책으로는 차봉희 교수가 편역한 『현대사회의 예술』(문학과지성사/1980), 이태동 교수가 옮긴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1987),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1992), 그리고 박설호 교수가 옮긴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1992)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02년부터 벤야민을 괴롭히던 저주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2002년 이래로 적어도 5권의 벤야민 관련서가 국역되더니 2005년부터는 벤야민 자신이 직접 쓴 『모스크바 일기』(1926), 『일방통행로』(1928), 『파사젠베르크』(1927~40)가 국역됐고, 급기야는 『해시시에 관하여』(1927~34) 일부까지 소개됐다.

총 10권으로 출간이 예고된 ‘발터 벤야민 선집’은 이렇게 서서히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 벤야민의 사유 전체를 일괄할 수 있도록 해줄 ‘사건’에 해당하는 기획물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이 선집의 완간과 더불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벤야민의 초기 주저 『독일 비애극의 원천』(1928)까지 우리에게 도착한다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한국어’로 얘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 사후 약 70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빠’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비평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했듯이, 우리는 독자로서의 우리 역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독자로서의 역할? 그건 어느 사상가를 범접하지 못할 스타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호칭은 ‘형’이나 ‘누나’가 아니라 ‘오빠’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벤야민에게 말을 걸기 위한 첫 번째 수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 그 이상의 수다는 다른 독자들에게 맡기고 그럼 이제부터 내 역할을 수행해 보도록 하겠다. 벤야민 선집 1차분에 수록된 수십 편의 논문과 아포리즘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들춰본 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논문은 벤야민의 논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선집에는 이 논문의 제2판(1936년)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총 세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동안 국내에는 제3판만이 소개됐다. 이 세 판본의 구구절절한 역사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를 참조하라).

그러나 특히 내가 이 논문을 먼저 들춰본 이유는 몇몇 지인들과 인터넷 카페/블로그에서 이 논문의 국내 번역본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골자는 기존 번역본들의 군데군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논문이 재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때 당시 문제가 됐던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이 또한 여기에서 반복하기에는 구구절절 기나긴 얘기이니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를 참조하거나 다음카페 ‘비평고원’ 혹은 ‘발터 벤야민과 현대’의 관련 포스트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지인들과의 수다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된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1939) 두 번째 단락에서 벤야민이 인용한 프랑스 영화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 1889~1981)의 말이었다. 그 구절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맨 앞의 문장을 한국어본과 일본어본 옮긴이들과는 달리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러시아어본 옮긴이들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로 옮겼다는 것. “영화화될 것”과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두 표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될 수밖에.

벤야민의 원문은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인데, 이 구절은 인용이어서 그런지 세 가지 판본이 모두 똑같다. 당시에는 독일어 동사 “werden filmen”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원문의 표현인 “feront du cinéma”에도 “영화를 찍을 것이다”와 “영화배우로 활동할 것이다”(즉, “영화화될 것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던 관계로,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 대 영어본-이탈리아어본-러시아본 옮긴이들의 기이한 대결 구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기존의 한국어본-일본어본과 똑같이 옮긴 새로운 판본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강스의 텍스트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요컨대 우리는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만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확인했을 뿐, 벤야민이 말줄임표로 생략한 강스 텍스트의 ‘전후 맥락’은 전혀 읽지 않았던 셈이었다. 그래서 마침 프랑스에 유학 중인 지인에게 부탁해 벤야민이 인용한 강스의 텍스트,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1927) 원문 전체를 받아봤고,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됐다. 먼저 벤야민의 강스 인용문 전후 맥락을 모두 옮기면 이렇다(굵게 칠한 부분은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으로서, 지면관계상 원문은 생략한다. 역시 관심 있는 분들은 내 개인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virilio73).

영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 인간은 운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빛을 가지고 시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오페라] 가수를 보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 기쁘도다. 「발퀴레의 기행(騎行)」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를 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국은 같으면서도 더 광대해질 것이니까. 예술적 가치들의 엄청나고 격렬한 전복, 그 어떤 것보다 더 커다란 꿈들의 급작스럽고, 화려한 개화. … 진실로 이미지의 시대가 왔노라! 모든 전설들, 모든 신화와 모든 이야기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및 종교 자체들, 역사의 모든 위대한 형상들, 수 천 년 이래 대중들의 상상의 객관적 반영들, 이 모든 것들은 빛나는[빛을 통해 영화화되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들은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쇄도할 것이다. 모든 꿈 같은 삶과 모든 삶의 꿈이 [필름의] 감지띠 위로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아니 어쩌면 더 『오뒷세이아』를 그 감지띠에 인쇄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위고식의 농담만은 아니다.
 
이렇게 텍스트 전체를 보면 확실히 강스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으로서는 영화에 출연한다거나 영화화되기보다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어울릴 뿐만 아니라 각자의 “왕국”을 키울 가능성도 더 높을 테니. 게다가 서구 예술의 시조격인 호메로스마저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찍을 태세인데 말이다!

아마도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은 두 번째 인용 부분에서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 등이 영화화될 것이니 인용문 내의 대구(對句)를 살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역시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도 아니면(혹은 바로 이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전문가로서의 지식이 자충수가 된 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최초 판본이라고 할 만한 제1판(1935년)에서 벤야민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인용 부분 앞에 “이러한 현상은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역사영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제2판과 제3판에서 삭제된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은 (비록 인용문 상에서이긴 하나) 확실히 뒤이어 언급되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등도 클레오파트라, 벤허,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처럼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모든 판본에서 강스의 말을 인용한 뒤에 이렇게도 말한다. “물론 그[강스]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궁금증. 왜 벤야민은 자신이 염두에 둔 “그런 뜻”이 아닌 강스의 말을 (스스로 밝히면서까지) 굳이 인용했을까? 그건 단순한 수사였을까, 아니면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매혹적인 표현이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벤야민의 고의적인 해석? 

여기에서 나의 결론, 혹은/그리고 가설 하나. 혹시 벤야민은 이 시기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인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을 만큼? 아마도 벤야민은 자살 시도(1932년) 뒤의 침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얻은 말라리아(1934년)에서 완치되지 않았던 것을 수도 있으리라. 그도 아니면 메모를 잘못해놨을 수도 있다(벤야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메모광이었으며, 그의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 역시 일종의 메모모음집이다). 요컨대 벤야민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그 때문으로라도 ‘오빠’라고 불려야 할 만한?

(마지막으로) 아마도 언젠가는 벤야민 선집 2권의 부록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관련 노트들」에서 누락된 또 다른 노트들이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다. 『파사젠베르크』의 원고뭉치가 벤야민 사후 40여 년이 흐른 1981년 7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햇빛을 보게 됐듯이 말이다. 일단은 베를린예술아카데미가 2007년부터 매년 두 권씩 총 20권으로 발간할 계획을 밝힌 새로운 벤야민 전집을 기다려볼 일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29.

P.S. 참고로, 본문과 관련있는 페이퍼는 '벤야민을 좋아하세요?'(http://blog.aladin.co.kr/mramor/706506)와 '벤야민과 아벨 강스'(http://blog.aladin.co.kr/mramor/125758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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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벨 강스는 이렇게 말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4 18:08 
    서점 두 곳에 들러 이주의 관심도서 두 권을 사들고 왔다. 둘다 이론서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윤영 교수가 엮은 <사유 속의영화>(문학과지성사, 2011)은 영화이론 선집이고, 호미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는 '네이션'에 관한 탈식민주의적 성찰들을 묶은 것이다.두 책을 모두 갖다놓은 서점이 없어서 한권씩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알라딘에는 <국민과 서사>가 아직도 입고돼 있지 않다).그중 <사유 속의 영화&g
 
 
 
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http://www.kpec.or.kr/)에서 매달 발표하는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이달에는 며칠 일찍 발표되었다(연말이어서인가 보다). 그걸 빌미로 나도 따라서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1월부터는 분야별로 한권씩 고르는 걸 따라해보기로 한다(10개 분야이다). 어느새 2008년 '1월의 읽을 만한 책'이다!

1. 문학

 

 

 

 

지난 11월의 읽은 만한 책으로 골랐던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2007)가 뒤늦게 올라왔다. 추천자인 작가 신경숙씨는 "어린 시절의 폭력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그 상처가 주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채식주의자>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미세한 지형도"라고 평해놓았다. 사실 나도 사놓고 아직 읽어보진 못했기에 1월에는 읽어봐도 좋겠다. 그래도 나대로 고르자면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창비, 2007)을 꼽아본다.

몇 편 읽지 않았으면서도 평소 공선옥의 소설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에 나온 소설집은 평도 좋고 또 '명랑' 모드인지라 연초에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알라딘의 소개는 이렇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는 공선옥 소설의 개성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그가 <멋진 한세상>(2002) 이후 5년 만에 신작 단편집을 펴냈다. 낯익지만 일관된 주제의식을 견지하며 냉엄한 현실을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공선옥 소설의 활력은 여전히 놀랍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추천한 역사 분야의 책은 김호웅 등이 쓴 <김학철 평전>(실천문학사, 2007)이다. 나도 출간시 리뷰들를 읽으면서 찡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 그대로 격정의 시대를 산 '최후의 분대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겠다. "의열단으로 시작해 중국 홍군(紅軍)의 우군(友軍)이었던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한쪽 다리를 잃고 8·15광복 후 출옥한다. 월북 후에는 김일성 신격화에 회의를 느끼다 중국으로 망명하지만 모택동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이유로 10년간이나 투옥"되고 했던 삶이다.

거기에 보태 내가 고른 책은 독일의 철학자 바이츠제커의 <역사 속의 인간>(에코리브르, 2007)이다. 소개에 따르면,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사유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현대 인간의 삶에서 제기하는 실천적 과제들에 대한 대답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 바이츠제커는 사유방법론으로 인간의 역사를 고리로 하여 이어진 두 개의 반원으로 형성된 하나의 ‘원환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단언한다." 바이츠제커의 책으론 <과학의 한계>(민음사, 1996) 이후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듯하다(에른스트 울리히 폰 바이츠제커가 아니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다).

3. 철학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가 추천한 철학 분야의 책은 이영남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푸른역사, 2007)이다. 추천의 이유는 "독창적인 역사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 더불어 "저자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역사 전문가라는 것이 이채롭다"고 했다(출판사도 '푸른역사'다. 내가 갖는 불만은 이 출판사의 책들이 페이지당 여백을 너무 많이 준다는 것이다).

푸코를 읽는 김에 내가 고른 책은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7)이다. '들뢰즈와 함께 보는 현대 영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 파트리샤 피스터르스의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철학과현실사, 2007)도 이번에 출간되었기에 같이 읽어볼 만하다(콜브룩의 책을 조금 읽으면서 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가 철학'이라는 심증을 더 굳히게 되었다). 물론 일반독자가 가볍게 읽을 만한 책들은 아니지만 들뢰즈를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책이란 점은 인정할 수 있다(<들뢰즈 이해하기>의 경우 일부 오역과 편집상의 실수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정치 분야 추천도서는 뜻밖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프랑스 작가 10인이 쓴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푸른나무, 2007)이다. 추천사는 이렇다: "11월 20일이 어떤 날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날은 국제연합(UN)이 정한 '아동권리의 날'이다. 아동도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1년이면 거의 1천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 등으로 목숨을 잃고 가난 때문에 1억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2억 명 이상이 노동을 한다. <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는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10명의 프랑스 최고 작가들이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을 위해 건강할 권리, 가족을 가질 권리, 먹을 권리, 보호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 어린이들의 핵심적인 10가지 권리를 짧은 소설형식으로 그려서 헌정한 탁월한 교양서이다." 듣고 보니 의미있어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비슷한 취지에서 내가 고른 책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부자나라, 가난한 시민>(궁리, 2007)이다. 제목 그대로 '돈 많은 가난한 나라'(일본)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책이다. '선진화 담론'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도 좀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출판사측의 소개를 인용하면, "지금 한국은 ‘돈 많은 못 사는 나라’이며, 분명히 ‘기형국가’이다. 개발과 투기 문제, 저열한 사회자본 문제, 위험한 연금개악 문제, 그리고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노동운동 문제에 대한 데루오카 이츠코 교수의 설명은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할 것이다." 역자인 홍성태 교수의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 2007)와 함께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서울대 경제학과)가 추천하는 경제분야의 책은 윤수영의 <세속 경제학>(삼양미디어, 2007)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가 쓴 경제학 입문서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듯한데, 추천의 변 또한 뜨겁다: "세계의 중심 맨해튼을 24달러에 팔기로 선택한 인디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이자의 당·부당성,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일자리와 임금, 황금제국의 부활, 유럽의 투기와 버블,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세계적인 시사주간지와 경제·경영 잡지, 세계유명 경제지와 일간지, 투자와 투기의 쌍쌍파티, 부자가 되는 꿈 등 무궁무진한 주제로 꽉 차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책으로부터 떼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를 통하지 않고도 현실 경제의 모습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내가 고른 책은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2007)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를 참조하면, "산업혁명으로 최성기를 구가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요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애덤 스미스에서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진 자본주의 정통 경제학의 전제조건들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용주와 노동자를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정의와 애정”이라고 주장한다." 러스킨의 책으론 건축론 <베네치아의 돌>(예경, 2006)이 소개된 바 있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고려대 사회학과)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이다. 몇 주전에 리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김교수에 따르면 "한류 열풍 속에 확산 중인 혐한증이나 탈식민화 시대의 반일운동 등에 관한 근본적 이유를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인력이동에 따른 고용경쟁이나 실업위협에서 찾는다. 경제의 세계화로 사회적 유동성이나 위험성이 증대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과거의 고도성장형 내셔날리즘이 개인형 내셔날리즘로 대체되어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청년실업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회문제가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 항의사건 등에서 식별할 수 있는 “명랑한 애국심”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걸 '불안한 내셔널리즘'이라고 이름붙인다. 일본의 76년생 젊은 학자의 패기만만한 주장을 담고 있는 책.

사실 '사회'분야란 카테고리는 좀 막연해서 나로선 책을 고르기가 애매한데(정치 분야와 중복되고 하고), 그냥 구해놓고 아직 읽지 않은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공화국>(후마니타스, 2007)이나 <도시의 창, 고급호텔>(후마니타스, 2007)을 뒤적거려보기로 했다. 관련 페이퍼는 '아파트공화국의 고급호텔'(http://blog.aladin.co.kr/mramor/1636910) 참조.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 도서는 외르크 치들라우의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뜨인돌, 2007)이다. 소개글에 따르면 "과학저널리스트인 외르크 치틀라우가 다윈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 자연선택 등에‘위배되는’ 실제 사례들을 동물의 세계에서 뽑아내 진화론이 과연 생물계에 통용될 수 있는 진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고, 추천사에 따르면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인 셈이다. 생물학 교과서에 진리처럼 서술된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 개념을 비웃는 책이 있다. 바로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다. 이 책에서는 진화하면서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에 의구심을 보이며 한없이 열등한 모습으로도 잘 살고 있는 개체들을 소개한다." 나로선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드는데, '강자'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 싶어서이다(장자가 말하는 '무용의 용'도 있고).

차라리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책은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까치글방, 2005), <생명 - 40억년의 비밀>(까치글방, 2007)이 소개된 바 있는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이다(포티의 책들은 이한음씨가 번역을 전담하고 있다).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 생물 수업시간에만 들어보던 삼엽충.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에 대한 아마도 가장 자세한 책이지 않을까 싶다.

8. 예술

 

 

 

 

김춘미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김경의 <이야기가 있는 종이 박물관>(김영사, 2007)이다. 사진작가 김중만과의 합작인데, 소개에 따르면 "종이 물건에 담긴 우리 삶의 다양한 표정을 읽어내려 한 책"으로 "종이에 스며든 옛사람의 소박한 삶. 적게는 100년에서 많게는 300년을 훌쩍 넘은 오래되고 진귀한 종이 소품과 세간을 모았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이에 관한 박물학적 지식의 산물임과 동시에, 한국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인류학적 접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로선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대신에 나라면 아무 주저없이 최근에 나온 러시아 미술/예술 관련서들을 집어들 것이다. 이병훈의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민음인, 2007)가 그 책들이다. 관련 페이퍼로는 '러시아 예술로의 초대'(http://blog.aladin.co.kr/mramor/1790172)를 참조하시길.

9. 교양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이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한스 귄터 가센 등이 쓴 <인간, 아담을 창조하다>(프로네시스, 2007)이다. 주목하지 못했던 책인데, 부제가 '생명 복제 시대에 돌아보는 인간 만들기의 역사'이다. 바로 떠오르는 책은 알렉산더 키슬러의 <복제인간, 망상기계들의 유토피아>(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호프만의 괴기소설 <모래 사나이>에서 시작해 데이비드 오스본의 <머리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간 만들기의 꿈을 추적한다"는 전자와 짝을 지어 읽을 만하다. 그러는 참에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온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도 다시 읽어볼 수 있겠다. 이젠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10. 아동->전기

 

 

 

 

두 분의 아동도서연구가/아동문학가가 추천한 아동도서는 <예쁜 우리말사전>(파란자전거, 2007)이다. 나로선 과문하기 짝이 없는 분야인지라 그냥 좋은 책인가 보다고 기록해놓은 따름이다.

약간 변칙이긴 하지만, 아이도 자는 김에 '아동' 분야를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책을 고른다. 찰리 채플린의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그리고 자서전은 아니지만 수전 손택의 유고평론집으로 마지막 에세이들과 강연들을 모은 <문학은 자유다>(시울, 2007)가 탐나는 책들이며 새해에 읽어볼 만한 책들이다.  

 

 

 

 

이상 10개 분야의 책들 외에 가외로 고른 책은 '1월의 고전' <한비자>이다. 물론 예전에 나온 번역본들이 없지 않지만 최근에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출간되어 바람을 넣는 탓에 기획하게 된 것이다. 편역서인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와 윤찬원의 <한비자>(살림, 2005)를 기존의 번역서들에 덧붙여서 읽어볼 수 있겠다. 새 정부도 들어서고 하는 김에 '제왕학'도 좀 알아두는 것이 신민의 자유와 권익을 챙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7.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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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촌스러운 사람이지만 로쟈님처럼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잘 안 읽었다죠. 근데 쓰신 글을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누가 머라해도 소신있게 한 가지만 밀고 나간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대단하단 생각도 들구요.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도 독특하고 재미있을 듯 싶네요.^^

로쟈 2007-12-29 13:20   좋아요 0 | URL
한가지만 밀고 나가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달인'의 경지가 되는 거겠죠.^^

수유 2007-12-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탁과 나보코프, 그리고 러시아 미술.
그리고 흥미를 안끌래야 안끌수 없는- 말이 요상하다요.
다윈 당신 실수한거야. 정도.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러시아미술사>는 저도 오늘 샀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을 열심히 채우고 있습니다..꾸역꾸역..^^

로쟈 2007-12-29 23:06   좋아요 0 | URL
이제 돈벼락 맞을 때까지 기다리시면 되겠습니다.^^;

이리스 2008-01-0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러시아 미술사 샀는데ㅇㅅ. ㅎㅎ 공선옥 소설은 촌스러워서 안 읽구요.. 으흠..

로쟈 2008-02-03 23:2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2007년의 마지막주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올해의 책' 한권을 발견했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가 그것이다(사실 귀가할 때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집어들긴 했는데 얼핏 롤프 데겐의 <오르가슴>(한길사, 2007)이 메인으로 다뤄진 것만 보고 그 아래 나보코프의 자서전에 관한 기사는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개인적으론 내년쯤에 번역서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그리고 예기치않게 책이 나와서 반갑고 흐뭇하다. 마치 연말의 '선물' 같은 책이다. 이번주에 <롤리타>에 대한 강의도 했고 내달에도 '보강'이 예정돼 있는지라 재빨리 읽어봐야겠다(물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지만 완독하진 않았었다)...

문화일보(07. 12. 28) '롤리타’ 작가 나보코프의 자서전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이때에 아무렇게나 골라진 풍경처럼 시간이 없는 상태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란, (…)그 무아경의 뒤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중년남자의 사랑을 그린 소설 ‘롤리타’로 20세기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듯, 이 자서전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때로는 현재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시공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순간적인 진공, 곧 죽음을 향해 가는 자연의 상태를 거부하는 나보코프만의 시공을 만들어낸다. ‘가장 예술적인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은 기억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간 사이의 싸움과도 같다. 이는 그의 굴곡 많았던 삶의 역정에서 기인한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국인과 프랑스인, 러시아인 가정교사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와 유럽 휴양지를 오가면서 나비와 나방 채집을 즐기며, 사랑에 빠져 시를 짓는 행복한 청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1919년 그의 가족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삶은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러시아 극우파에게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남동생 세르게이는 1945년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나보코프가 1940년 미국에 망명했을 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롤리타’(1955)로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에야 겨우 삶을 지탱할 경제적 여건이 생겼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1966년 이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보코프가 1947년 ‘롤리타’와 이 자서전을 동시에 시작했다는 점이다. ‘롤리타’에서 롤리타를 영영 잃은 험버트는 그녀와 영원 속에 남게 될 최후의 방법으로 자서전 집필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야. 나의 롤리타”라는 험버트의 최후의 독백처럼, 시간 안에 갇힌 비극적 존재라는 점에서 나보코프는 험버트와 다르지 않다.(엄주엽기자)

경향신문(07. 12. 29) 기억, 불현듯 솟구치는 빛

파격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죽기 11년 전 내놓은 이 책은 흔히 자서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책은 몇쪽을 넘기자마자 자서전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책은 시대 상황이나 개인 역사의 기술에 비중을 두지 않는다. 초점은 기억의 단편들이고, 펜 끝은 내면으로 향한다. 나보코프는 기억을 둘러싼 한 편의 옴니버스 드라마를 펼쳐놓았다. 물론 주인공은 나보코프 자신이다.

책은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총 15장으로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는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나보코프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자서전이라는 성격에 어울릴 것을 선별했으리라. 그런데 그 선별 기준은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기억의 대상은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 등이다.

나보코프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기억은 그렇게 불현듯 솟구친다. 나보코프는 그런 기억의 재생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체는 시각, 청각이 중추 역할을 한다. 책은 과거로 가는 길목마다 시청각적 묘사가 빛을 발한다. 책이 시적이면서도 육감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는 “그(유년) 시절의 인상들이란 시각과 촉각의 참된 에덴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각은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가령 ‘내 해군복에 달려있던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 잠이 깬 아침 창 밖 푸른 인동덩굴, 해가 번쩍거리는 강물, 낚시꾼이 버리고 간 눈부신 양철 깡통’ 따위가 기억의 열쇠이자 주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주제적 무늬를 이해하는 것이 자서전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주제적 무늬’란 과거 강렬하게 스쳤던 인상 같은 것이다. 책이 사소한 일상 속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주제적 무늬는 나보코프에게 성장의 나이테와 다름없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시적 언어로 묘사하는 대목이 많아 책은 한 번 읽고 이해하기 다소 버겁다. 이해하기보다 음미하는 자서전이라 해야 할 듯하다.

또 기억을 불러오는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와 나보코프는 기억을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라 감각 혹은 인상의 하나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유년의 기억을 어찌 이렇게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세세하다. 혹 기억을 변주한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닮았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 소설이라 한다면 이 책은 경험과 허구, 즉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15장 각각은 하나의 단편소설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같이 특색있는 글쓰기만큼이나 그의 이력도 유별나다. 나보코프는 곤충학자로도 유명하다. 나비 채집은 그의 오랜 취미이자 열정의 분출구였다. 7살 때 호랑나비를 보고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는 그는 “나비의 의태(擬態)의 신비에 끌렸다”고 말한다. 진화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비의 보호색이 그를 매료시켜 평생 나비를 쫓아다니게 만든 것이다. 형형색색의 감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나보코프의 글은 형형색색의 나비를 쫓아다닌 그의 일생과 닮았다.(서영찬기자)

0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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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9 17:01   좋아요 0 | URL
왜 나보코프가 좋은 걸까요.. 망한 귀족이라서? 롤리타 때문에?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합니다..
방학은 하였고 영화도 굉장히 좋은것들이 특집으로 걸리고 사야될 책들도 엄청나고 읽고싶은 책들도 많고
일본정도의 여행은 세 자매와 한 조카의 일정을 맞추다 보면 늘 떠나지 못하고 입씨름속에 계획만 세우고..
뭐 그렇습니다. 내일 책사러 나가야겠어요!!

로쟈 2007-12-29 18:48   좋아요 0 | URL
망명작가의 '노스탤지어'에 공감하시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