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 21호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온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히친스의 책을 다루려다가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가 출간되었기에 급하게 방향을 틀어 일독하고 쓴 글이다. 편집부에서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덕에 보다 깔끔한 모양새가 되었다. 처음 두 문단 정도가 요점이고(그러니까 '전체주의란 딱지'를 프레임화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나머지는 분량을 채우기 위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어차피 책을 직접 손에 들 독자는 많지 않아 보이니까...

시사인(08. 01. 30) 자유주의에 이용되는 전체주의란 ‘딱지’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는 만들 수 있지만 ‘굿바이 히틀러!’라는 영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탈린의 생일날 강제수용소 죄수들은 스탈린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에게 그러한 전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연설을 마친 뒤 당원의 열광적인 박수와 나치식 경례를 히틀러는 흡족해하며 받아들였지만, 스탈린은 전당대회에서 다른 동지와 똑같이 박수를 쳤다. 그는 자신을 ‘지도자’가 아니라 한갓 역사의 ‘대행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흔히 ‘전체주의’로 통칭되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이 ‘사소한’ 차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펴냄)에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묻고, 또 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도 나치즘과 차별되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로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이래 통용되는 ‘전체주의’라는 관념이 엄밀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일종의 ‘구멍마개’라는 점. ‘빨갱이’라는 용어처럼 ‘전체주의’라는 딱지는 모든 사유를 금지시키고 비판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래서 지젝은 묻는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그러한 질문에 이끌려 우리가 초대받는 곳은 마치 숭고한 그리스 비극과 쾌속 질주하는 롤러코스터를 한데 모아놓은 듯한, 현란한 이론적 향연과 진지한 숙고의 장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대규모 숙청과 기아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버리자 그들은 이번에는 인구를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된다. 그래서 매달 3일씩 ‘짝짓기의 날’을 정해 결혼한 부부가 동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고는 경비병이 순찰을 하면서 실제로 섹스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했다. 하지만 하루 열네 시간씩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인들은 경비병을 속이기 위해 사랑을 나누는 척하며 가짜 신음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 좀 비인간적인가?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지만 타자의 응시 아래에 놓여 있는 그와 같은 장면들이 성행위의 일부라면 어떨까? 오직 그런 타자의 응시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현대인,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
실제로 사생활과 성관계를 찍은 이런저런 동영상과 캠코더로 점령되다시피 한 것이 우리의 웹사이트이고 보면 이러한 물음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타자의 응시에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채워진다. 실제 삶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쇼’가 시사하는 것처럼 어떤 허구 세계가 우리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처가 되는 전도된 상황까지 빚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인간적 가치를 거부하는’ 전체주의보다 훨씬 나은 체제에 살고 있는가?
지젝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반(反)차우셰스쿠 쿠데타가 성공한 1991년에도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방문한 한 미국인 친구가 도착 일주일 만에 미국에 있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나라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다정하고 쾌활한 데다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라고 칭찬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속 목소리는 자신을 비밀 경찰이라고 소개하고, 루마니아에 대해 좋게 말해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은 이 책을 그 익명의 비밀경찰 요원에게 바치고 있다.
08. 02. 08.


P.S. 기사의 첫문단은 지젝의 글 '두 개의 전체주의'(http://blog.aladin.co.kr/mramor/885349)를 참고한 것이다. 기사에 들어간 사진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 강연회 장면으로 보인다(2006년 이후라는 얘기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주저 네 권의 하나인 이 책이 올해 출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형편이 좋았다면 번역을 맡을 뻔하기도 했던 이 책이 개인적으론 올해 출간을 가장 고대하는 책들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