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어쨌다구?'(http://blog.aladin.co.kr/mramor/18730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지만 몇 가지 오역들이 교정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미에 피력했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용은 적어두어야겠다. 그 전에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조금만 더 덧붙이면 <에쿠우스>의 극작가 'Peter Schaffer'는 '피터 셰이퍼'(62쪽)이 아니라 '피터 셰퍼'이며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을 주창하는 철학자 'Hubert Dreyfus'는 국내에 '허버트 드라이푸스'(306쪽)가 아니라 '허버트 드레퓌스'(혹은 '허버트 드레피스'로 소개되었다. 가장 유명한 푸코 연구서의 하나였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인터넷상에서>(동문선, 2003)도 그의 책이다(<인터넷에 대하여>라고 해야 한다. '하버트 드레퓌스'는 또 뭔지?).

 

 

 

 

그리고 <제3의 과학>(대영사, 1996)의 편자로 유명한 'John Brockman'은 물론 '존 브로크먼'(324쪽)으로도 표기될 수 있지만 <위험한 생각들>(갤리온, 2007)을 비롯해서 최근에 나온 책들은 모두 '존 브록만'이라고 읽어주고 있다. 통일시켜주는 게 독자들의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내 생각을 적자면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Le Mythe de Sisyphe'는 물론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다루고 있지만 통례에 따라 <시지프의 신화>라고 읽어주는 게 낫다(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론 <시지프 신화>). 그건 '카뮈'의 책이기 때문이다('시지프'가 아니라 '시시포스'라고 교정해주는 건 과잉친절이다).

 

 

 

 


몇 가지 오역들을 거론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의 출판물에서(TV 자막에서는 더 심하다) 여전히 빈발하고 있는 '-로서/-로써'의 혼동이 좀 교정되었으면 싶다(사실 '혼돈/혼동'도 혼동되기 쉬운데 그럼에도 시인들까지 혼동해서 쓰는 건 좀 어이없다. 얼마전 한 영화잡지의 칼럼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혼돈'이다).

가령 얼마전 서평을 쓰기도 했던(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8)에서도 서문에서부터 "공자가 제사를 중시한 것은 그 예禮로의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죽은 귀신의 은덕을 바라서가 아니었다."(18쪽)라는 오기가 나온다. 당연히 '예로서의 기능'이라고 표기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타일 수도 있지만(편집자에게서도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의문이다) 이런 실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더구나 책은 <논어>의 자구 하나하나를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언어는 전달수단으로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과적인 전달수단인 것도 사실이다."(220쪽)에 이르면 저자가 한문공부만큼 한글공부에도 신경을 써주었으면 싶은 것이고.

<지젝이 어쨌다구?>(새물결, 2008)에도 그런 오기가 한군데 나온다. "모더니즘이 동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해석적 준거틀로 신화를 이용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간극들에 무언가를 끼워넣음으로써 신화를 직접적으로 다시 쓴다."(54쪽) 얼핏 '준거틀로써'와 '끼워넣음으로써'가 호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해석적 준거틀로서의 신화'는 'the myth as the interpretative frame of reference'(30쪽)를 옮긴 것이다.

그럼 자질구레한 디테일들은 가급적 넘어가고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을 적도록 한다. 먼저 83쪽이다. 책의 1장인 '신화와 그것의 변쳔'에서 마지막 두 절(74-96쪽)은 내가 읽기에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대한 아주 요긴한 요약이다. 번역된 순서와는 달리 <죽은 신을 위하여>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므로 지젝이 먼저 제시한 자신의 생각을 이후에 상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죽은 신을 위하여>가 읽기에 버거웠던 분들은 이 대목만 꼼꼼하게 읽어도 좋겠다.

다시 돌아가, 83쪽의 한 대목은 이렇다.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자기 너머 피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문은 "As Hegel put it, what dies on he Cross is not the human incarnation of the transcendent God, but the God of Beyond himself."(50쪽)이다. 

여기서 '초월적 신'은 'transcendent God'을 옮긴 것이고 칸트철학의 번역어를 쓰자만 '초재적 신'으로 옮겨도 된다. 말 그대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뜻한다. 그걸 다시 받은 말이 'the God of Beyond '이다. 역자는 'Beyond'를 'himself'에 걸리는 전치사로 보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사다(그래서 대문자로 씌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다시 읽으면,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피안의 하나님 자신이다."

참고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이상 저 너머의 피안에 거하지 않고 (종교적 공동체의) 성령으로 변해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번해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공동체 그 자체가 새로운 영적 단계로 '변해가게' 하는 소멸하는 중개자/중간자이다." 여기서 '소멸하는 중개자'는 'vanishing mediater'를 옮긴 것이다(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옮겨졌다).

지젝의 기독교론은 기회가 되면 다른 자리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고 스핑크스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격언만을 여기에서는 챙겨두도록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남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다."(90쪽) "The Enigmas of the Egyptians were also enigmas for the Egyptians themselves."(56쪽) 

이 대목을 인용한 건 이 책이 아니라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잘못 옮겨졌기 때문이다(이 책의 몇몇 오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거기서는 똑같은 문장을 "이집트 사람들의 비밀은 이집트 사람들 자신을 위한 비밀이기도 하다."고 오역했다(224쪽의 각주). 지나는 김에 보태 적자면 지젝은 이어서 데리다의 '해체'가 갖는 문제점(아포리아)에 대해 지적한다.

"'해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해체적 정화는 우상화의 궁극적 형태이다. 타자를 해체하고 남는 것은 타자의 자리 - 메시아적 약속으로서의 타자성의 순수 형식 - 밖에 없다. 해체의 한계는 여기 있다. 즉 해체가 근원적이 될수록, 해체에 내재하는 해제 불가능의 조건 - '정의' 라는 메시아적 약속 - 에 의지해야 하는 정도도 커진다(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 메시아의 약속은 데리다의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며,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 원칙은 이러한 믿음이 환원 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 224쪽)

이 대목은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집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답변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마르크스와 아들들(Marx & sons)'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책은 조만간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http://blog.aladin.co.kr/balmas/1862975 참조). 곁다리로 지적하자면 인용문에서 "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는 오역이다. 원문은 "as Derrida himself has realized in the last two decades"(139쪽)에서 보듯이 현재완료형 문장이기 때문이다('20년 전'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깨달아온 것이다).  

이어서 148쪽. "여기에는 권력에 반대하는 '민중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문장은 오역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중의적이다. 무엇에 대한 불신일까? 'people as opposed to Power'에 대한 불신이다. 권력에 대립한다고 하는 민중에 대한, 그러한 민중상에 대한 불신이다. 즉, 여기서 표명되는 건 민중은 궁극적으로 권력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이다(지난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실망/환멸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때문에 1989년의 시점에서 동독의 지식인들은 '자유선거'에 반대했다. "만약 자유선거가 실시된다면 다수의 민중들이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적 소비주의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개의 경우 지식인과 민주주의는 불편한 관계이다.)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대목: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느끼고 있던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도 이와 동일한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은 'Some Western Social Democrats'의 번역이다. '서구의 몇몇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역이라고 해야겠다(혹은 '사민주의자들').   

'우울증과 행동'을 다루고 있는 4장의 끄트머리인 288쪽에서는 한번 잘못 읽은 오역이 몇 차례 반복되고 있다(사실 제목에서 'act'를 굳이 '행동'이라고 옮긴 것도 불만이다. 그간에 대부분의 번역서들에서 'action'과 구별하여 'act'를 '행위'라고 옮겨왔기 때문이다. 역자는 'action'에는 어떤 번역어를 할당하려는 것인지?). 내용은 좀 선정적인데, '강간'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어서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수치심이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떠맡은 수동성이라고 강조해왔다. 만약 내가 강간을 당했다고해보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수치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강간당하는 것을 즐겼다면, 나는 수치심을 느껴 마땅하다."(287쪽)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부끄러움은 오직 그러한 수동적 처지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자기는 부인하는 내밀한) 환상과 접촉할 때만 나타난다."

"가령 두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동적인, 이른바 해당된 여성이다. 다른 한 여자는 남자 친구가 자신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강간하는 공상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 만약 두 여자가 모두 강간을 당할 경우 두번째 여자가 첫번째 여자보다 훨씬 더 외상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강간이 '그녀의 꿈의 소재들'을 '외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실현하게 되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287-8쪽, 강조는 지젝)

강조된 부분의 원문은 "for the very reason that it will realize in 'external' social reality the 'stuff of her dreams"이다. 문제는 이것을 부연설명하는 대목이다.  "왜 그런가?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 그보다 표면 쪽에는 그혹은 그녀의 상상적인 그리고/혹은 상징적인 자기동일시가 있는데, 그 사이에 둘을 영원히 갈라놓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88쪽) 원문은 "why? There is a gap which forever separates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 from the more 'superficial' modes of his or her symbolic and/or imaginary identification"이다.

역자는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을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라고 풀어서 옮겼는데, 이 '주체의 환상적 중핵', 곧 '주체를 떠받치는 핵심적 환상'이 가리키는 것은 '주체라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내밀한 꿈' 혹은 '꿈의 소재들(stuff of dreams)'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환상)과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외적인 사회 현실') 사이에는 영원한 간극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환상의 핵심인 나의 존재를 (상징계 안으로 통합해 들인다는 뜻에서) 완전하게 떠맡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에서도 완전하게 떠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환상의 핵심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적 환상(fantasmatic kernel of my being)'이다. 미묘하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고 번역문은 계속 이를 혼동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존재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나의 존재를 너무 가까이할 때, 주체에는 아파니시스(성적인 욕망의 사라짐)라는 사태가 벌어질 뿐이다."라는 식으로 계속 오역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when I approach it too closely, when I get too near it, what occurs is the aphanisis of the subject"를 옮긴 것인데, 역자가 '나의 존재'로 받은 'it'이 가리키는 것은 '핵심적 환상'이다. 다시 옮기면, "내가 나의 핵심적 환상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그 환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 벌어지는 일은 주체의 아파니시스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의 존재라는 환상의 핵심'은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정하여 정리하면 이렇다.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에서 강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주체에게는 최악의 사태이며 가장 모욕적인 형태의 폭력이 될 것이다. 그 폭력은 나를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노출시킴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토대 자체를 뒤엎어버리고 만다."

 

 

 


 

5장('문화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로 넘어가서, 306쪽에 나오는 건 단순오역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를 건너뛰는 이러한 단락은 오늘날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허버트 드라이푸스)이나 인지과학적 불고(프란시스코 바렐라)에서부터 양자물리학과 동양사상의 결합(카프라의 물리학의 도), 심지어 해체론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고 하고서 '해체론적 진화론'과 '인지과학적 불교'를 도마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해체론적 진화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앞에서 'deconstructionist evolutionism'을 '해체론적 불교'로 오역하는 바람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9쪽의 인용문에 나오는 건 '멋진 오역'이다. '멋진 오역'이라고 한 건 우스개이고 사실 오역이 아니라 원서에 잘못이 있는 드문 경우다. 지젝이 데넷의 <해명된 의식>에서 인용한 대목: "'서사적 중력장의 중심으로서의 자기라는 생각'이 아직 내 독자적 사상으로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어떤 소설이 그걸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겠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그 책은 데이비드 로지의 <멋진 세계(Nice World)>였는데 해체론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이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중인 모양이다."

문학이론가이자 소설가인 데이비드 로지의 <아주 작은 세상(Small World)>(영웅, 1991)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멋진 세계>란 책도 썼나 싶었지만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로지가 쓴 소설은 'Small World'와 'Nice Work'였다. 그러니까 데넷이나 지젝이 'Nice Work'를 'Small World'와 혼동하여 'Nice World'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겸사겸사 바람을 적자면 두 권 모두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그리고 또 데리다를 다루고 있는 312쪽에서 'differance(디페랑스)'를 그냥 '차이'라고 옮겼는데, 소리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difference'와는 구별해주어야 하므로 '차연'이라고 옮겨주거나 '차이' 옆에 원어를 병기해주어야겠다. 그리고 'animal nature'을 '생물의 본성'이라고 옮기는 건 좀 특이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동물론은 데리다가 말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주제이다). 340쪽에서도 '주체적 입장(subjective position)'은 문맥상 '주관적 입장'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역자는 'existence'를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실존'이라고 옮겼는데 보통 일감은 '존재'다. '실존'이란 번역어가 적합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돼 있다. 'existence'의 번역은 내가 요즘 이론서 번역의 수준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이다). 그리고 343쪽에서 '부상하는 질서(emerging order)'는 '창발적 질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 린 마굴리스와 프리고진 그리고 복잡성 과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끝으로 흥미로운 내용 한가지. 현실과 허구(쇼)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결론에서 지젝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에 있는 마을 '셀러브레이션'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기획마을'인데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2,700여명이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미국식의 아담한 전원풍 마을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는 이 마을의 거주자들 또한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거나 혹은 '자신들의 삶을 무대 위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우리의 실제 사회적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떤 허구적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도피적 오락거리로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다 - 하지만 '리얼리티 쇼'에서는 마치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적 허구로 제공되고 레크리에이션(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어떤 면에서, 하나의 원이 그렇게 닫혀버린다."(384-5쪽)

인용문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은 'real-life re-creation'의 번역이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듯한, 이 가장 '전체주의적'인 마을이 '당신이 영혼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축복받은 마을'이라는 건 뭔가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나? 미국인들의 수수께끼?..

08. 02. 08.

P.S.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대해 시사IN에 쓴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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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8-02-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주문해 놓고 있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듯싶습니다. 사시인에 쓰신 것도 잘 읽었구요. 물론 저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 퍼갑니다. 감사감사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마니 받으시구요.

로쟈 2008-02-10 13:20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