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참을 먹으며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뒤늦게 훑어보았다. '신춘문예'에 가슴을 뛰던 때는 진작에 지난 터이라 심상하게 둘러보다가 시 부문 당선작이 좀 특이해서 옮겨놓는다(당선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39581&code=960205 참조). 제목이 '페루'다. 그리고 산문투로 돼 있다. 신춘문예 시의 전형성에서 탈피하고 있는 게 일단 호감을 갖게 한다. 게다가 페루,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게 라마, 마추픽추, 그리고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이던 차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어서 반갑다.

페루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07. 01. 07.

P.S. 윤성희의 소설집을 다룬 문학평론 당선작 '길위의 나무와 소설의 의무'(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40181&code=960205), <웰컴 투 동막골>을 다룬 대중문화평론 당선작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22371&code=960205)도 링크해놓는다.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유망한 평론 지망생들이 우리 주변엔 아직도 많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특히 대중문화(영화) 평론 분야는 강세라고 하는데, 이번 당선작 역시 수작이다(수상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03001&code=960205). '슬로베니아의 비평가 미란 보조비치'가 언급되기에 곧장 문학평론가 복도훈씨를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대학원 동문이다. 평단에 '동대 마피아'라도 만들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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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8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1-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도 페루가 소재던데요.
이번 신춘문예엔 페루가 대세군요.

로쟈 2008-01-08 21:11   좋아요 0 | URL
우연의 일치겠지만 재미있네요...

수유 2008-01-0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평론입상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평론.

로쟈 2008-01-08 21:12   좋아요 0 | URL
역량있는 젊은 평론가들은 많지만 평론집은 점점 읽히지 않는 기이한 시대입니다...

깐따삐야 2008-01-08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 이 부분 와닿네요. 고로, 페루에 가 본 것 같아요. 저도.^^

로쟈 2008-01-08 22:54   좋아요 0 | URL
머리를 좀 땋아본 사람들은 다 고향이 페루인 것이죠.^^

2008-01-09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22:05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대표작 두 권, <새벽의 약속>과 <하늘의 뿌리>가 번역돼 나왔다.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를 읽기 위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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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6   좋아요 0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로맹가리군요! 새벽의 약속과 하늘의 뿌리는 처음 보는 책들이네요.

로쟈 2008-01-07 19:33   좋아요 0 | URL
네, 연초부터 두툼한 책 두 권이 나왔습니다. 로맹 가리의 전기와 함께 읽어볼 만하지 않나 싶어요...

미귀 2008-01-13 15:55   좋아요 0 | URL
<하늘의 뿌리> 이래로 유럽에 생태운동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생태,녹색운동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저자가 자기 책이 불러올 그 후과까지 예상한 건 아니었다고 해요. 암튼 소설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움직'이도록 한.. 그 정도로 묵직하다는..

그리고 저 <새벽의 약속>은 로맹 가리 자전적 소설인데, 책 표지사진의 파일럿이 로맹 가리예요. 원서 사진 그대로... 전기도 좋지만.. 자서전이 정말 솔직해요....

기회가 닿으면 저도 로맹 가리 책은 전부 읽어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8-01-13 21:45   좋아요 0 | URL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들이 되는 셈이네요.^^
 

'라스콜리니코프 '두 모녀'를 살해하다'의 자투리 글로 쓰다가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자리를 만든다. 외국어 표기에 관한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러시아어 '라스콜리니코프(Раскольников)'를 영어로 음역한 표기는 'Raskolnikov'이다. 여기서 [l(ль)]'이 연음이기 때문에(구개음화된 [l]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l']이라고 표기하지만 보통은 경음 과 구별없이 [l(л)]로 표기한다.

해서 우리말로 적을 때도 '라스콜코프'라고 적어야겠지만(나도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이 경우 우리말에서는 자음동화가 일어나서 '라스콜코프'로 발음하게 된다. 짐작에는 그렇게 되면 어차피 원음과는 차이기 있기 때문에 연음 [l]을 'ㄹ'이 아니라 '리'로 옮기던 관행이 이 경우에는 계속 남아서 '라스콜리니코프'로 굳어졌다(나도 동의하는 표기이다). 역시나 같은 연음 [l]이 쓰인 '고골리(Gogol)'의 경우 '고골'로 표기가 바뀐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고리키(Gorky)'의 경우는 계속 '고리키'라고 표기한다(언젠가 국문과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고리키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다고 문의를 해온 적이 있는데, 짐작에 그는 'Gorky'가 아니라 'Goriky'를 검색했다).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 전공자들은 '라스꼴리니꼬프'라고 적는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외국어 표기 원칙이란 어느 정도 관행을 존중하고 임시변통을 허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융통성있게 적용해야 된다는 말이다.  

개정된 표기안에 따라 '도스토예프스키' 혹은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돼 오던 'Достоевский(Dostoevsky)'는 '도스토옙스키'라고 표기되고 있다(알라딘에서도 표제어를 그렇게 잡고 있다). 이 경우 '도스또옙스끼'라는 이형까지 가능해지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네 가지 표기가 혼용되는 수밖에 없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아직 러시아어 표기에까지는 주의를 두지 않아서 그냥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한 경우이다(언론이나 출판물에서 아직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옙스키'가 혼용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의 6장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다루고 있는데, 'Rushdie'는 예전에 '루시디'로 통용됐던 이름이다. 즉 국내에 번역돼 있는 <악마의 시>는 '루슈디'가 아니라 '루시디'의 작품이다('루슈디'란 표기는 내가 알기에 <분노>에서부터 등장했다). 'sh'를 [시]가 아니라 [슈]로 표기하는 걸 새로운 원칙으로 정한 탓이겠다(그리고 이를 관행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 가령 '푸슈킨'으로 표기돼오던 'Пушкин(Pushkin)'의 경우 개정 표기법에 따르면 '푸시킨'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물론 'Pushkin'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표기돼 왔었다). 'sh'를 [슈]가 아니라 [시]로 읽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해서 똑같은 'sh'가 나오더라도 이게 영어인지 러시아어인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읽어주어야 한다(원래 발음은 별 차이가 없다).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에이젠시테인'으로, 문학이론가 '슈클로프스키'가 '시클롭스키'로 표기되는 건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바뀐 이름들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기에 '에이젠슈테인'과 슈클로프스키'를 고수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부 언론의 공식 표기는 '발터 베냐민'이다. 심지어는 '월터 베냐민'이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쓴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429974 참조). '베냐민'으로 검색되는 책은 역시나 한권도 없다. 이 정도면 좀 우스운 원칙 아닌가? 한글로 외국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원칙은 가능하지 않다. 그저 근접하게 표기해주면서 우리말에서의 혼동/혼선을 피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프랑스 작가 'Balzac'을 왜 '발작'이 아니라 '발자크'라고 표기하겠는가?). '원칙'을 자주 바꿔가면서(외국어 표기안은 여러 차례 개정돼 왔다)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  

08.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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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월터 베냐민이 누군가요? ㅋㅋㅋㅋ

로쟈 2008-01-07 19:33   좋아요 0 | URL
실수라고 보야겠죠. 한데 '베냐민'이라고 교정돼 있어서 좀 코믹한 효과를 유발하지만...

와넬 2008-01-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르스타인 베블렌이냐 소스타인 베블렌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군요.

로쟈 2008-01-07 23:22   좋아요 0 | URL
그 경우는 모로 가든 '베블렌'이니까요. 고유명사 표기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이면서 해법이 잘 보이지도 않는 난제입니다...
 

영국의 평론가이자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 2007)는 지난 연말에 소개하기도 했고(http://blog.aladin.co.kr/mramor/1753545) 또 구입해서 처음 몇 장을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20개 장 중에서 6장까지를 읽었다). 한동안 제쳐두어다가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또 '특이한' 대목이 눈에 띄기에 교정해둔다(사실 이런 핑계로 페이퍼를 쓰다간 교정으로만 공치는 날들이 부지기수일 듯하다).

 

 

 

 

책의 7장은 존 케네디 툴(John Kennedy Toole; 1937-1969)이란 작가의 소설 <바보들의 연합(A Confederacy of Dunces)>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와 작품 모두 생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게코스키에 따르면 작가는 이 소설 한 권으로 "미국 남부 출신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이다." 그 '켄 툴'(그의 애칭)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이나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 등이라고 하니 그의 지명도를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아래 표지를 보니 소설은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다만, 차이라면 미첼이나 리와는 달리 "툴은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 "대작이라 자신하는 원고를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자, 낙담에 끝에 1969년에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124쪽) 그래서 그는 흔히 "위대한 유작 하나만을 내놓은 작가"로 기억되곤 한다고(실제로는 놀랄 만한 양의 미출간 원고들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뜻밖인 건 그의 책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는 점. '존 케네디 툴르'의 <조롱>(사람과책, 1995)이 그 문제의 책이다. 한술 더 떠서 <별을 좇아가는 길>(말과뜻, 1997)이란 책도 출간돼 있고(<조롱>은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수 있겠다). 짐작엔 '퓰리처상'이란 타이틀에 기대를 걸었던 듯한데, 독자들의 반응은 썰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충분히 다시 소개됨 직한 작품으로 보인다. 표지에서도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퓰리처상 수상 이후에 쏟아진 한 서평은 "가격 대비 웃음량으로 판단한다면 최대 할인을 감행한 올해의 작품은 <바보들의 연합>이다."라고 써놓았을 정도. 18개 언어로 소개되어 15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하니까 세계적인 밀리언셀러이기도 하고(한데, 어째서 한국 독자들에겐 외면 받았던 것일까?).   

 

켄 툴에 대해서는 책이나 읽게 되면 더 늘어놓기로 하고,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구절을 옮겨본다: "일반적으로 어떤 인물을 깊숙이 알게 되면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동정심에 이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알료나 이바노프바 노파의 아파트에서 두 모녀를 살해하고는 문 뒤에서 공포에 전율한다. 이 장면에서 독자 역시 수치를 느끼면서도 동정을 머금게 된다."(125쪽)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전당포 노파의 이름은 '알료나 이바노프바'가 아니라 '알료나 이바노브나'이다. 이게 저자인 게코스키의 오기인지 역자의 오타인지 모르겠지만(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정도면 타이핑상의 문제로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한데, 두번째 오류는 좀 심각한다. '두 모녀'를 살해했다니? 알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살해한 사람은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이다. 그러니까 '모녀'가 아니라 '자매'이다(저자가 엉뚱하게 적어놓았을 리는 없겠고, 역자가 어떤 단어를 옮긴 것인지 궁금해진다).

<죄와 벌>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의 경우에도 이런 오기/오역이 가능하다는 게 아무튼 좀 의외다. 덕분에 관련자료를 뒤적이다가 알게 된 것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새로운 버전의 <죄와 벌>이 방송을 탔다. 보아하니 국영인 '제1채널'에서 제작한 것인 듯하다(아마도 TV 시리즈물일 것이다). 아래는 1969년작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새로운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이다.  



이 영화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두 자매를 살해하는 장면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http://www.youtube.com/watch?v=BC682qfVvB4),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그러니까 아주 잔혹하게 묘사돼 있다(임산부나 노약자는 보지 마시길). 짤막한 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TAtwZ033Rtw 참조. 마르멜라도프와 소냐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한데, 이번 <죄와 벌>의 배역들 가운데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배우는 라스콜리니코프도 아니고 소냐도 아니다. 좀 뜻밖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 풀헤리야 라스콜리니코바이다. 러시아의 국민배우 엘레나 야코블레바가 맡은 배역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오래전 <인터걸>(1989)의 주연으로 알려진 배우이다). 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안제이 바이다가 연출했던 연극 <악령>에서도 레뱌드키나 역으로 출연한 인연이 있다고(이 연극은 2004년에 초연됐을 때 나도 봤는데!). 오랜만에 낯익은 얼굴을 보니 반갑다...

08.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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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5   좋아요 0 | URL
저는 러시아스러운(?) 얼굴들이 좋아요.^^

로쟈 2008-01-07 19:32   좋아요 0 | URL
러시아인들의 얼굴도 각양각색이긴 한데, 그래도 구별이 되긴 합니다. 딱 꼬집어서 특징을 말할 수는 없어도...

소경 2008-01-09 21:54   좋아요 0 | URL
이런 섬뜩한 장면을 오랫만에 보네요. 오한이 드는게..

로쟈 2008-01-09 22:09   좋아요 0 | URL
'러시아식'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06 00:15   좋아요 0 | URL
제게 있는 바보들의 연합 번역본은 제목이 <위대한 청개구리> 부제 20세기 동키호테 전.김영일 역 도서출판 예맥1981.퓰리처 상 받자마자 번역했나봐요.제가 구입해 읽을 때가 카트리나로 루이지애나가 폐허가 되었을 때인데 이 소설의 배경이 그 곳이라서 특히 기억에 남네요.물론 헌책방에서 구했습니다.분량이 많아서 독파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쟈 2008-06-06 20:26   좋아요 0 | URL
그렇게 소개가 됐었군요! 덕분에 많이 알게 됩니다.^^
 

새해를 맞은 지 일주일도 지나고 해서 연간 계획을 세워보았다. 그래봐야 해야 할 번역들과 써야 할 논문과 책 들의 주제 및 목록들을 작성해보는 것인데 밀린 것들이 많아서 거의 '천리마운동'을 필요로 하는 작업량이다(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김에 서재활동 계획도 잡아봤는데, 몇 가지 지표를 몰표치로 설정했다. 가령 현재 33만 4천명대인 방문자수를 50만명이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현재처럼 월 2만명 수준이 유지된다면 어렵지 않은 목표치이다), 그리고 즐찾수도 현재 1534명에서 2000명으로 늘리는 것(이건 쉽지 않은 목표치다. 이 서재를 찾을 만한 이들이 무한정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연간 600편의 페이퍼와 50편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매달 50편의 페이퍼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연간 50편의 리뷰는 좀 부담스럽다. 작년만 하더라도 나는 고작 두어 편의 리뷰를 올린 듯하니까. 한데 가끔 지면에 '북리뷰어'라거나 '인터넷 서평꾼'이라고 소개될 때면 좀더 걸맞은 명칭은 '페이퍼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뷰수를 늘려잡은 건 그런 겸연쩍음을 좀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설정한 것이다. 달랑 이런 내용만 적어놓는 건 또 멋쩍으므로 시 한편도 옮겨놓는다. 예전에 한번 올려놓았던 것인데(http://blog.aladin.co.kr/mramor/441226) 읽어본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므로 '재방'을 해도 흠이 되진 않을 듯하다. 제목은 '찔레나무 벌레의 모험'이고 한 10여 년 전에 쓴 것이다.

찔레나무 벌레의 모험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08. 01. 06.

P.S. 기억에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이란 구절은 닐 조단의 영화 <푸줏간 소년(The Butcher Boy)>(1997)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다. 인상적인 영화였지만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찾아 보니 "알콜 중독자 아버지와 자살 중독자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악마적인 성격을 가진 아들 프랜시... 타고난 천성과 환경 때문에 깨어져가는 그의 정신세계를 나타낸 작품"이라고 소개돼 있다. 엽기적인 '푸줏간 소년'에 비하면 '찔레나무 벌레'는 얼마나 온순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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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깨가 결리면 긴장을 푸세요. 로쟈님. 사는 게 다 그렇죠 머.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요 부분 참 좋으네요.^^)

로쟈 2008-01-07 08:44   좋아요 0 | URL
10년전 얘깁니다.^^; 깐따삐야님이 애독자신 거 같아요.^^

북극곰 2008-01-07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 1535번째...^^
즐겨찾는 서재보다 더 빠른 건, "연결"
로쟈님 "홈"은 여기??

로쟈 2008-01-07 13:47   좋아요 0 | URL
네, 당첨되셨습니다.^^ 따로 드릴 건 없지만.^^;

드팀전 2008-01-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부쳐 보이다..푸줏간 소년으로 번역되었더간요 ^^
달빛 요정 만루홈런이간 뭔가하는 팀의 <쩔룩거리네>인가 하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노래 가사 같아요.반복되는 구절들이 있어서 그런가.랩으로 만들어보세요.
기어 ..오르고 싶다..나는요..자작 나무.웃 오동 나무..헤이 헤이 오르지 못할 오동나무.

로쟈 2008-01-07 16:31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그 정도의 소질만 있어도 페이퍼나 쓰고 있진 않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