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고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928797). 읽어야 할 너무 많은 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겪는 피로를 잠시 씻어주는 책이다. 비록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나름대로는 아주 열심히 실행하고 있지만 말이다(저자가 전제하고 있다시피 어떤 책에 대한 독서와 비독서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읽은 책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도 앞에서 읽은 것을 망각하기 시작하니까). 사실 비독서는 오히려 독서의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비독서는 '독서의 부재', 즉 책에 대한 무관심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듯이 당신이 3백 50만권의 장서를 갖고 있는 도서관의 사서라면 '훌륭한 사서'가 되는 비결은 제목과 목차 외에는 책을 절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비독서야말로 '비정한 독서'이면서 '슬픈 독서'가 아닐까? 

내가 읽지 않은 허다한 책들의 목록에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도 들어 있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저작은 지난 세기의 가장 탁월한 구조주의 인류학자가 20년을 공들여 쓴 것이다(그는 20년 동안의 오전 시간을 순수하게 이 시리즈에 바쳤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불어본은 물론이지만 나는 <신화학>의 영어본은 갖고 있지 않다(이건 비용도 만만찮은 문제이다). '신화학'을 나의 잠정적인 마지노선으로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비독서의 마지노선. 하지만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만큼 나의 전선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해서 '여생의 책'으로나 분류해놓은 책을 생각보다 일찍 집어들게 되었다(러시아어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마빈 해리스의 강력한 비판(<문화유물론>)에 따르자면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을 차려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평생에 걸쳐 애호하던 서양 클래식 음악에 가깝다. 그럼에도/그렇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의 야구경기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경기를 보듯이 <신화학>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혹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감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여생의 책'이고 '여생을 준비하는 책'이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 현실에서 잠시 여생을 꿈꾸어본다. 불과 몇 년 전 소개기사를 태곳적 기사인 양 옮겨놓는다(아래는 러시아어본 레비스트로스 선집 <가면의 길>의 표지). 

한겨레(05. 08. 08) 레비-스트로스, 그 ‘지성의 빙산’ 을 캐다

구조주의 이론을 개척한 프랑스 사상가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1-날것과 익힌것>(한길사)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판됐다. 책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각오와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인내심이 있는 독자”라면 두 팔을 벌려 반길 소식이다. 다만 “그냥 한번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날것과 익힌것>은 모두 네 권으로 이뤄진 <신화학> 시리즈 가운데 첫번째 책이다. 출판사 쪽은 ‘꿀에서 재로’, ‘식사예절의 기원’, ‘벌거벗은 인간’ 등의 부제가 붙은 나머지 세 권을 앞으로 매년 한 권씩 차례로 번역할 계획이다(예정대로라면 올해 완간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내에 번역 소개된 레비-스트로스의 저술로는 <슬픈 열대>(한길사)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등이 있다(*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도 떠올린 것이지만 <야생의 사고>가 누락됐다). 인류학적 기행문(<슬픈 열대>)이거나 각 예술장르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거나(<보다 듣다 읽다>) 사상적 편력을 돌아보는(<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저술들이다. 그의 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 ‘정수’를 전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의 본격 연구서인 <친족의 기본구조>를 비롯해 <오늘날의 토테미즘> 등은 아직 번역되지 못했고, <구조인류학>은 1950년대에 잠시 출판됐다가 절판된 상태다(*오류이다. 1950년대에 나온 건 <구조인류학>의 불어본이고 국역본은 지난 1983년에 나왔었다).

그러니까 9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를 휩쓸고 있는 구조주의 이론가 가운데, 유독 레비-스트로스만은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등과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난해한 이론 전개와 다양한 문화권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번역을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국내에 필요한 만큼의 번역 인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적으로도 영어판·프랑스어판만 존재했던 <신화학>이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명성은 있는데 그 실체는 분명치 않았던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신화학> 시리즈는 레비-스트로스가 1950년부터 시작해 1970년에 집필을 마친, 말 그대로 기념비적 저작이다.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 800여개를 서로 교차시키며 신화에 대한 논리·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개별 신화의 감춰진 의미와 전체로서의 신화의 실체를 드러냈다. ‘현상 뒤에 숨은 보다 근본적인 실체로서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그의 방법론은 방대한 이 저술의 전체를 관통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의 각 악장을 차용한 서술 방식은 ‘구조 속에서 비로소 분명해지는 개별의 실체’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혜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화학 1>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학술서다.

08. 02. 24.

P.S. 레비스트로스의 육성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들어볼 수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73chpnKKhQ 등).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으로 여러 권 갖고 있지만 그래도 또 탐나는 것의 하나는 2006년에 새로 나온 러시아아본 <신화학>이다. 차례대로 네 권의 표지이다(영어본 표지는 단색에 제목만 박혀 있어서 멋이 없다). 







이 네 권을 서가에 꽂아놓으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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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2-24 12:36   좋아요 0 | URL
부질없는 욕망처럼 보이긴 한데, 펭귄문고같이 이쁜 책들 보면 정말 읽게될 일 없을것 같으면서도 사버리게 됩니다. 위의 책들도 정말 디자인의 승리로군요. ^^;

로쟈 2008-02-24 21:41   좋아요 0 | URL
가격도 저렴합니다. 11,000-12,000원. 제일 두꺼운 4권은 좀 비싸서 그 두배 정도.

드팀전 2008-02-25 09:14   좋아요 1 | URL
책 모양이 예쁘군요.

로쟈 2008-02-25 17:09   좋아요 0 | URL
저 정도면 소장해둘만 하지요. '장식'으로라도.^^

2008-02-2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5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