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가 내년 6월경 한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자인 박미애 박사가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 넣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2. 11) 글로벌 리스크는 세계시민사회를 도래시키나

울리히 벡의 신간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글로벌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벡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세계적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미국의 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한파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국한되었던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의 경제위기는 유럽의 최북단 조그만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의 파괴력을 피해갈 수 있는 곳,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글로벌 위험지대에 앉아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이 어느 때보다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86년 11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7개월 후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당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불편함을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적확하게 포착한 그의 분석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험을 이슈화하고 논의함으로써 성찰적이게 된다는 근본 명제로 벡은 산업적 현대와 구분되는 제2의 현대를 기록하는 한편, 현대 안에 내재된 자기혁신의 힘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벡은 과거의 진단을 한층 강화하고 확대하여 ‘글로벌 위험사회’를 논한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동안 재앙과 리스크 역시 세계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리스크와 ‘위험’,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하는 개념의 세분화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사태로 서구 민주주의의 자기신뢰를 파괴한 국제적 테러리즘,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현실화된 기후재앙,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와 같은 ‘큰 리스크’가 현대사회의 근본 토대와 인간 실존의 자명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재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도쿄와 런던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가능성, 유전공학의 획기적 발전이 가져올 인간형질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공격 등 벡이 책 서두에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앙의 시나리오는 묵시론적 종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선배들을 쫓아 벡 역시 세계몰락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몽된 성찰적 현대성 속에 더 이상 자기극복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 인간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스 요나스가 말한 의미에서) ‘공포의 발견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지난해 독일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출판 이후 나온 비판 중 하나는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 같은 태도, 벡이 ‘연출하는’ 재앙 시나리오의 과장된 측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재 전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무색해진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큰 리스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했던 합리적 위기대처 수단만으로, 즉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찰만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리스크와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성찰적 습득은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 성찰이 총체적 경제파국으로의 추락을 불러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벡의 말은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가 또 다른 리스크를 불러온 작금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테러공격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한다. 리스크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일어날 경우 경제적으로 보상할 수도, 기술적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대량학살 무기가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때는 이미 늦다. 기후재앙으로 해수면이 높아진다면, 때는 이미 늦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에 선취하여 그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과 딜레마가 글로벌 리스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함께 관리하는 세계시민사회
그러므로 글로벌 위험사회는 인류를 ‘전부 아니면 무’라는 상황 앞에 세우는 사회이며,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예측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벡은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부터 ‘세계주의’의 계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과 영향을 어느 한 지리적 장소나 공간으로 제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원칙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는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적 타자를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한다. 종교, 피부색, 국적, 삶의 상황,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실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강요로 인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비록 강요된 세계주의라 하더라도, 규범적 원칙일 뿐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편 먼 타자를 가까운 내부 타자로 수용하고,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긍정적 가치로 해석하는 세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내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감수성과 인식을 함축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모든 사회 계층에, 모든 국가에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무엇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거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기후재앙이 일어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사하라 사막과 히말라야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누구보다 서민계층을 힘들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크를 결정하는 것은 선진국이고 리스크 결정에 따른 위험의 피해를 입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이 세계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와 ‘글로벌 통치’이다. 우리 모두가 비자의적으로 세계위험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구적 책임윤리’를 발전시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벡은 비정부조직들과 사회운동들이 서로 연합한 초국가적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국가간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점차 (국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세계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글로벌 통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벡은 언뜻 글로벌 리스크를 연출하는 경고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이지만, 미래 세계시민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박미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사회학 박사)

08. 12. 17.

P.S. 영어본으로는 <세계위험사회>란 책도 지난 1999년에 출간된 바 있다. 작년에 나온 독어본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업그레이드 버전일까?.. 내친 김에 울리히 벡이 지난 가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도 옮겨놓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겨레(08. 10. 24)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순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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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9 21:39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 

오늘 연거푸 서평을 읽게 된 책은 지난 가을에 나온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이다. 사실은 이미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380365)에 꼽아놓고 "저자에 대해서 급 호감과 관심을 갖게 한다.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려다 말았던 책인데, 챙겨두어야겠다"고까지 적었더 책이다. 하지만 챙기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평들을 읽으니 다시금 관심이 되살아난다(서평을 보니 '인문학산책'보다는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소개기사와 함께 교수신문의 서평을 옮겨놓는다(다른 서평은 지면에서 읽은 거라 옮겨놓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이 책의 강점인 듯싶다. 책은 연말에 읽어볼 계획이다(지금은 연말이 아니란 말인가?)...

 

부산일보(08. 10. 04)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아야 민주사회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일명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란다. 물론 그 자체로 사실이라기보다 그만큼 취약한 노동 환경을 빗댄 말이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한국인이 있다면 그것은 '인맹(人盲·110쪽)'일테다. 색을 구별 못하면 색맹이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니,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면 당연히 인맹이 된다.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있는 사회'(신성림 옮김/동녘)는 철학서다. 하지만 난해하고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읽는 도중 자신을 성찰하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교양서다. 저자는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그 골격을 '사회적 품위'에 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 철학교수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1995년. 벌써 13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국내에는 처음 번역됐다. 그럼에도 그의 주제어인 '품위'나 '모욕사회' 등의 개념은 일찍부터 국내 철학교수들의 논문과 저술 등을 통해 잘 알려졌다. 책보다 개념이 먼저 수입된 경우다. 다시 말해 진작 번역됐어야 하는 철학서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 책이 첫 출간된 1995년보다 오히려 지금의 한국사회에 더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절차) 민주주의가 달성된 지 10여 년. 하지만 사회, 문화, 경제 전반의 일상 민주주의는 오히려 양극화라는 암초에 걸려 교착상태가 됐다.

그런 가운데 사람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딱히 노동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을 기계나 동물로 취급하는 경우를 자주 마주친다. 사생활이 위협받는 감청이나 검열 문화, 장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도 그런 사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욕의 주체다. 모욕은 지극히 사적인 용어이지만, 그럼에도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속성을 지녔다. 아니 사적인 모욕은 스스로 예방해 피할 수 있지만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모욕은 그럴 수조차 없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어떤 사회는 장애인용 설비를 마련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장애인들의 독립성을 확보한다. 반면에 또 다른 사회는 다른 사람의 '선의'에 주로 의존한다. 후자는 당연히 모욕 사회다. 특히 그럴 만한 여유를 가진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200쪽)" 그런데 그 사회적 모욕은 대부분 제도의 결핍에서 생성된다. 결국 제도를 바꿔야 모욕사회에서 품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 테다.

책은 4부 16개 주제 글로 구성됐다. 주제 글은 모욕, 권리, 거부, 시민권, 속물 등 서로 다른 낱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중요하게 연결돼 있다. 그 낱말을 하나씩 이어가다 보면 시나브로 '품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된다.(백현충 기자)

교수신문(08. 12. 15) 인간의 존엄성은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1996)는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이나 A. 매킨타이어의『덕의 상실』(1981)이후 철학계에서 제시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상사회론 중 하나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이다. 저자에 따르면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

저자에 의하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이다. 그런데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시킬 합리적인 절차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분배의 인간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분배의 인간적 방식이 고려되지 않는 한, 세제나 복지제도를 통해 분배적 정의가 이뤄지더라도 인격적 모욕이 사회제도적으로 자행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저자가 구상한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이로써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인격적 존엄성을 훼손키지 않도록 한다. 또한 저자는 인격적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는 것보다중요한 일이며,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격적 존엄성은 지켜질 수가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존 롤스가 말한 사회 경제적 차원의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했다. 이런 소극적 규정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저자는 ‘모욕감’이나 ‘긍지’, ‘자존감’, ‘자부심’, ‘친밀함’, ‘동정’ 등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가 평소 간과했거나 뭉뚱그려 보았던 마음의 다양한 결들을 상세히 기술하며, 얼핏 주관적 차원에만 머무를 것 같은 이런 심리들이 ‘품위 있는 사회’와 관련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혀준다. 이때 저자는 분석철학적 치밀함과 밀도를 일단 접고 ‘품위’나 ‘모욕’에 얽힌 풍속사적 뒷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근대의 ‘속물적 예법’이 ‘사생활’이라는 개념을 낳고, 그것이 다시 ‘개인’에 대한 자각을 형성하며, 이것이 토대가 돼 ‘존엄성’과 ‘모욕’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완성됐다는 주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분석이나 이야기만으로는 ‘품위 있는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적 원리가 무엇인지 적극적이고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저자는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과 『1984』에서 음영법으로 묘사한 형제적 사회주의가 자신이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사회상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저자를 이끄는 근본이념은 체제지향적인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일 것이다.

사해동포주의와 인간존엄사상에 입각해서 저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신분이나 소속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자로 규정하고 업신여기는 사회는 결코 품위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설령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거나 특정 집단 내에서 인격적 평등이 보장되더라도 그런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盲’이 지배하는 저급한 사회일 뿐이다. 아리안 민족들만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장애인이나 유태인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고 학살한 나치정권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저급한 사회를 건설했었다. 오늘날에도 인간-맹들이 지배하는 ‘속물사회’는 인간을 민족이나 국적에 따라 분류한 후, 외국인 근로자들 차별하고 멸시한다.

속물사회는 같은 국민들 내에서도 비중 있는 사회에 타자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교한 장치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도 한다.그런데 평자가 ‘사해동포주의’라고 표현한 말은 조지 오웰이나 저자의 표현법에 따르자면  인간들 사이의 형제적 평등 관계를 의미할 것이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인종이나 직업,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에서 동등한 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적 평등관계는 모든 인간이 人格的으로 평등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이 그 누구도 타인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격적 평등이 모욕과 차별을 금지하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인격이 존엄하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저자는 인간 존엄성 정당화 이론들을 분석한다.

저자는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 유형을 비교한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적극적 정당화이다. 칸트가 인간의 존엄성을 정당화할 때 근거로 삼기도 한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적인 특성들이 인간을 존중해야할 근거가 된다. 반면 회의적 정당화는 인간에게 그런 선천적 특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이 두 번째 입장은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인간존중의 원천으로 여긴다.

인간 존중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세 번째 길은 소극적 정당화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해야할 적극적이거나 회의적인 근거는 없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은 피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있다고 소극적 정당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저자는 이 소극적 정당화론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면서 칸트의 적극적 정당화론이 지닌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목적결정능력’, ‘자기입법화능력’, ‘도덕적 주체능력’, ‘합리성’ 등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들은 능력의 정도에 따라 서열을 나눌 수 있는 것이어서 평등한 존중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 칸트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소유하고도 사람은 비도덕적일 수 있는데, 칸트는 단지 그런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마저 존중해야한다고 불합리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칸트는 인간적인 특징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중받을 권리를 지녔다거나, 현재 그런 특징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중받을 권리가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해 칸트는 가령 『판단력비판』에서 태아나 갓난아이의 예를 들면서 인간들의 인격성의 차이를 깊이 있게 논했다. 그런데 저자가 칸트를 단순화시켜 비판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행해지는 이런 비판은 대개 선각자들이 전개한 사상의 전모를 균형있게 다루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 축소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영향사적으로 저자가 ‘인격적 평등’과 ‘인간존엄성’ 이념을 칸트에게서 전승받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품위 있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이념은 ‘인격적 평등개념’과 ‘인간존엄성’사상이다. 그런데  회의적 정당화는 사실상 인격적 평등개념을 주관성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다른 한편 ‘인간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정당화의 근거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저자는 “모욕을 포함해서 모든 학대를 근절하라는 요구 자체는 어떤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도덕적 행동의 전형이 학대를 막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정당화가 끝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관적 도덕감에 의존하는 저자의 이런 생각과 달리 현실적으로 이런 소극적 정당화도 인간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전제하지 않는 한, 결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비록 모든 경우에 대해 완벽하게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선험적 존엄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형태의 정당화도 성립될 수 없다. 

저자는 주요개념을 제시하고 난 후에는 그것에 딸린 하위개념들을 다루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 가족개념들의 타당성 근거를 확정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저자는 유기적 연관성을 쉽게 파악하기 힘든 주제어들을 산발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서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내용을 쫓아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저자는 제 2부 제 1장에서 ‘존중의 정당화’라는 대주제를 제시하고 나서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들’, ‘내재적 가치의 제한조건’, ‘근원적 자유’와 같은 소주제들을 다룬다. 이런 제목만 보아서는 대주제와 소주제, 하나의 소주제와 다른 소주제 사이의 개념적 연결 관계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질 않는다. 그런데 내용을  읽다보면 실제로는 각각의 주제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개념의 근원에 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처음부터 친절하게 이들 주제나 개념들을 명확하게 해주지 않은 것일까. 독자에 대한 친절이 아쉬웠다. ‘품위’라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과연 사회이념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 책이 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이런 문제점을 독창적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그 성공여부와는 별개로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이진오 서울대 강사·철학)

08. 12. 16.

▲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가? 2008년 12월 8일 비정규교수 농성장은 경찰에 의해 박살이 났다.

P.S. 한국사회가 속물사회이자 모욕사회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는 비일비재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강사의 처우문제이다. 얼마전에는 500일 가까이 계속된 비정규직교수 농성장의 천막이 경찰에 의해 순식간에 박살나는 '사건'도 벌어졌다(현 정부 들어서 하도 극악한 사태들이 많이 벌어지는지라 뉴스 거리로도 취급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이란 프레시안의 기획연재(http://www.pressian.com/article/serial_article_list.asp?series_idx=313)가 총체적인 문제제기를 담아가고 있다. 한번 둘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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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품위 없는 사회, 품격 없는 국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12 22:47 
    내일자 '책읽는 경향'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이름은 이 책을 여러 번 언급한 지금도 입에 익지 않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요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정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필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로 돼 있다. 그러고 보니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노보 찬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듯싶다(<보노보

낮에 교수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3'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정현백 교수의 칼럼이다. '경방고수'들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끌었는데, 짐작엔 두 주 전 한겨레21 표지기사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3895.html). 그래서 일부를 같이 옮겨놓는다. 대학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칼럼과 함께 일독해볼 만하다. 더불어, 돌이켜보면 '자료'가 될 날도 오겠지...

교수신문(08. 12. 15)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이 사라진 시대, 당신들은 왜 침묵하는가

한국 지성을 논할 때에, 이를 대학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신문>이라는 지면의 특성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논의를 대학과 대학인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정보통신의 발달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한국 사회 곳곳이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은 가장 큰 변화를 강요당한 곳의 하나일 것이다. 치열한 대학 간의 경쟁, 위로부터의 개혁 압박, 대학의 양극화, 교수평가, 대학 및 학술행정의 전산화, 국제화의 압박 등이 그것이다. 대학은 이제 분주함이 그 일상이 됐고, 교수들은 게으를 권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런 대학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대학이 ‘지적 자유’라는 명분아래 안일함을 추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학에서 학문연구의 열기가 넘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계획에 근거한 대학개혁 몰아붙이기, 연구업적이나 평가의 계량화 등은 학문의 생산성은 높이되 ‘지성의 천박화’도 증가시키는 기이한 양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60년을 돌아보자면, 한국의 지성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중기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치열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화 따라잡기’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유학을 통해 서구의 지적 수준을 따라잡고자 했고,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부르짖으며 비판적 학술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과정에서 이런 지성계의 활동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현실화하면서, 한국 사회에 지적 역동성을 부여했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자기희생은 한국에 관심을 가진 국제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은 한국의 지성이 그 지적 긴장감과 역동성을 잃어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 비약해야 할 시점에서 한국의 지성은 주저앉아 버린 것이 아닐까. 대학평가, 학술지 평가, 연구논문에 대한 엄격한 심사시스템 등을 통해서 과거처럼 치밀한 연구 없이 그저 글을 써대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연구윤리도 강화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연구도 정밀해졌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지적 연구물들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중심부 학계의 모드에 끌려 다니고 있다. ‘왜 이 땅에서 이런 연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다.

출판 분야에서도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옥석을 가릴 수 없는 춘추전국의 시대,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업주의와 선정성이 판을 치고, 국내 학계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명한 외국서적의 번역서가 여전히 날개 돌린 듯 팔리고 있다. 나 스스로도 독서대중에게,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서적을 권장해야 할지가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거기에다가 서적들은 내용보다는 디자인과 크기로 한 몫을 보니, 저렴한 작은 문고판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쉬엄쉬엄 읽은 것도 목가적인 시대의 이야기가 돼 버렸다. 

바로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지성계는 피로감에 젖어 있다. 양적 연구업적을 강요하는 대학의 현실에 쫓길 뿐 아니라 몰아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급류 속에서, 지고의 도덕성을 부르짖으며 함께 해온 동료들이나 나 자신이 어느덧 ‘욕망의 주체’로 변신해버린 것을 발견하며 선뜻 놀라는 모습이 오늘 날의 한국 지성인일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에 뒤이은 자기성찰의 과정은 거의 부재하다. 소비자본주의의 끝없는 추구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대해 회의하는 의식혁명이나 문화혁명은 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는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글은 곳곳에서 출판되고 인구에 회자되지만, 왜 폭력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변화는 시도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성장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한국 지성의 인습성은 매일매일 대중매체를 메우는 진보-보수논쟁에서도 확인된다. 여전히  정치적, 문화적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핵심은 교과서 필자의 저작권, 공권력이 교과서 내용에 개입하는 절차민주주의의 문제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문제의 본질을 다시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호도한다. 올해 들어와 급격히 후진하는 민주주의 문제에 지식인들은 침묵한다. 거기에다가 보수/진보논쟁을 채우는 논리는 얼마나 천박한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닌 합리성과 체통을 우리 지성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보수논객들의 주장은 2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녹음테이프 돌리기’이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변화된 사회, 변화된 대중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촛불시위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요구와 욕구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방식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는 한국 지성의 성찰성 결여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서 한 단계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할 8,90년대에 이르러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모든 부담은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주어지고, 이들은 좌익세력으로 폄하된 채 고립돼 있다. 이쯤 되면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즈음, 구조적 한계를 넘어 분배정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크게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한국의 지성계는 침묵하고 있다. 그 대신에 언론을 메우는 것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계산하는 정치세력에 의한 보수-진보 편 가르기의 천박한 논리들이다.

나는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미네르바와 관련한 경제논객들의 이야기를 읽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인터넷의 경제토론방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경(제토론)방고수들은 50~60명 정도라고 한다. 모두가 계급장을 뗀 인터넷에서 하루 10~30만 명이 들어와 읽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각고의 글쓰기 노력과 경제지식을 요한다. 이들은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정체를 밝힌 한 보험회사 직원은 자신의 일과를 밝혔다. 아침 6시 30분에서 출근 두 시간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직장생활, 그리고 다시 밤 10~12시에서 그는 인터넷을 찾거나 글을 쓴다.



그들은 왜 이런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한 경방고수는 1997년 경제위기 때 줄 서서 아들이 돌잔치에 받은 금붙이까지 바친 이후 겪은 씁쓸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경제지식을 챙기고 또 가능하다면 無知로 피해를 보는 서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것이다. 이들 경방고수들이 염려하는 것은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민의 관점에 설 것을 선언한다. 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은 사라졌는가. 전문성과 대학의 경쟁력 제고를 표방하며, 지식인은 침묵해야 하는가.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저항하고 있는 역사교사들의 안간힘을 지켜보면서 당신들은 침묵해도 좋은가. 경제위기 속에서 존재를 위협당하는 작은 자들의 잔혹한 현실에 당신들은 침묵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에 전임교수들이 계속 침묵해도 좋은가. 이제 이 위기의 시대는 다시 한국 지성인의 건강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정현백 성균관대·사학)

한겨레21(08. 12. 05)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 경방고수 가운데 정부 발표를 쉽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상승미소’. 본명이 이명로인 그가 11월24일 다니는 회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0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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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6 13:56   좋아요 0 | URL
인터넷 공간이니 자유롭게 하는 거죠.제도권 학자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로쟈 2008-12-16 15:29   좋아요 0 | URL
제도권 학자들이 자기 몫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지식인의 죽음'이란 말도 나오는 거겠죠. 아마도 이젠 기대할 수 없는...
 

월요일 아침부터 씁쓸한 기사를 읽는다. 안 그래도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이 내년에 책정되어 대운하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차에(하긴 현 정부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긴 하다) 지난 5월 '대운하 양심선언'을 통해 4대강 정비사업이 실제로는 대운하 사업이라는 걸 폭로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연구원에 대한 징계를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이 역시 당초 징계는 없다는 당국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재앙의 물길'이라며 관련 전문가와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있지만, "대운하 물길 따라 돈이 보인다"는 권력과 권력유착 집단의 탐욕은 꺾일 기세가 아니다. 그들의 의지대로 된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노예제 과두정 사회다(이런 발언도 조심스럽다.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걸 가장하는 듯싶어서다). '주인'의 눈밖에 났다고 내쫓기는 사회의 다른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지난 1년간 민주주의가 진전됐다고 보는 여론이 30%에 육박하는 조사결과도 뜻밖이다. 90%가 반대해도 개의치 않을 정권인데, 30%나 지지한다니...

한겨레(08. 12. 15) '대운하 양심선언’ 김이태 연구원 ‘징계’ 추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이 지난 5월 대운하 관련 양심선언을 한 김이태 연구원(48)을 7개월이나 지난 지금 뒤늦게 애초 약속과 달리 징계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건기연 관계자는 14일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12일까지 김 연구원 1명에 대해서만 내부 특별감사가 있었다”며 “이르면 이번주 김 연구원에 대한 내부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난 5월 양심선언 파문 때는 ‘징계 계획이 없다’고 하다가 조용해지자 다시 약속을 어기고 징계 절차를 밟는 걸 보면 외부의 압력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건기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의 압력이 있어서 파면 등 중징계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사자인 김 연구원도 “지난 금요일까지 보름간 감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원이 수주한 용역(연구 주제, 성격 등)이 외부에 유출됐고 이는 ‘원규’(연구원 규정) 위반이라는 취지의 감사였다”며 “징계를 전제한 감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심선언 당시 징계하지 않겠다고 정부와 건기연이 밝혀 그런 줄 알았는데 믿은 내가 바보였다”고 덧붙였다. 건기연은 지난 5월 김 연구원의 양심선언이 파문을 일으킬 때, 당시 공석이었던 원장을 대리해 우효섭 부원장이 “김 연구원을 징계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연구원은 지난 5월23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대운하에 참여하는 연구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건기연이 국토해양부로부터 연구용역 의뢰를 받은) 한반도 물길잇기 및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운하 계획”이라고 폭로한 바 있다.

지난 9월 부임한 조용주 연구원장은 “특별감사는 감사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용을 잘 모른다”며 “징계 여부는 징계위원회를 열어봐야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근철 건기연 노동조합 위원장은 “감사는 비상임이며, 우리 노조 집행부조차도 감사 이름을 잘 모른다”며 “모든 감사와 징계는 연구원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져 왔다”고 반박했다. 연구원의 조순제 감사, 김석진 감사실장과는 전화 통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때마침 국토해양부는 15일 ‘4대강 종합 정비 마스터플랜’을 발표한다. 국토부는 또 이번주 안으로 건기연과 ‘4대강 정비방안’에 대한 25억원짜리 용역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건기연 내부에서는 이 때문에 정부가 4대강 정비와 대운하를 추진하는 데서 걸림돌이 될 제2의 양심선언에 대비해 김 연구원을 희생양 삼아 미리 경고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송창석기자)

경향신문(08. 12. 15) '대운하·형님 예산’ 기습복원… 與지도부도 몰라

새해 예산안 파행처리가 남긴 그림자는 ‘대운하·형님 예산’ 논란이다. 당초 하천 정비 예산과 경북 포항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중 1000억원을 삭감키로 한 여야 합의가 막판 뚜렷한 이유없이 무산되면서다. 민주당이 즉각 “여당의 사기극”이라며 반발, 정국의 변수로 떠오른 양상이다. 여당 내부에서도 ‘갈등’의 조짐이 엿보인다.

당초 여야는 12일 오전까지만 해도 소위 ‘대운하 의심 예산’, ‘형님(포항) 예산’에서 500억원씩을 삭감키로 잠정 합의한 상태였다. 그 결과 SOC 예산 총삭감 규모는 6000억원이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열린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서 이들 예산은 대부분 정부 원안대로 통과됐다. 포항 예산의 경우 일부(167억5000만원) 줄었지만, 모두 4370여억원으로 전년 대비 95%가 증가했다. 하천 정비 예산도 삭감없이 1조6500여억원으로 확정됐다.

이 같은 ‘대운하·형님 예산’의 ‘기습 복원’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열쇠를 쥔 이한구 예결위원장과 여당 예결위원들의 ‘독주’로 정리되는 흐름이다. 이들은 당 지도부의 권고도 무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이 “이한구 예산”(우제창 예결위 민주당 간사)이라며 이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장 여야 협상이 최종 결렬된 12일 밤 10시 무렵만 해도 ‘대운하·형님 예산’ 1000억원 삭감은 불변이었다. 당시 예결위 관계자는 “이미 이 위원장과 정부가 협의해 안을 정리한 것이 있다. 그 속엔 하천정비·포항 예산 1000억원 등 모두 3조7000억원을 삭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여야 협상은 깨졌지만, 향후 정국 부담 등을 감안해 그 시점까지 합의된 내용은 존중한다는 취지였다. 다만 이들 예산을 예비비로 돌려 민생예산에 쓰도록 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자정 무렵 기류가 갑자기 흔들렸다. “합의가 깨진 만큼 한나라당 방침대로 SOC 예산은 5000억원 삭감한다”(이사철 의원)는 예결위 내부 기류가 전해졌다. 명분은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민주당 요구가 “구체성이 없는 정치공세일 뿐”(이한구 위원장)이란 지적도 덧붙었다. 이들 예산의 경우 국토해양부 소관이어서, 보건복지가족부 소관의 민생·복지 예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예산 원칙상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그 때문에 원내 지도부의 삭감 방침을 전하자, 김광림 의원 등 예결소위 위원들이 “절대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실제 홍준표 원내대표 등 원내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기습 복원’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13일 새벽 3시쯤 홍 원내대표는 부대표단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고 당황한 채 이한구 위원장을 찾아가 격론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여야 관계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격한 항의의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홍 원내대표는 14일 “그(형님 예산 복원) 부분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이 위원장에게 물어보라”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의 ‘배후설’도 제기된다. 여야 관계 파탄까지 감수한 중대 사안을 예결위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1차적으로는 마지막까지 이한구 위원장과 예산안 조율을 해온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의혹의 눈초리가 가고 있다. 안 그래도 이들 SOC 예산 삭감에 대해 기재부가 줄곧 난색을 표해온 터다. 여기에 더해 “이 위원장이 ‘형님 예산’과 ‘대운하 위장 예산’을 지킨 것은 청와대에 충성하기 위한 행태”(최인기 민주당 예산심사위원장)라는 청와대나 이상득 의원 쪽의 ‘개입’ 의혹도 제기된다.(김광호깆자)

경향신문(08. 12. 15) “이명박 1년, 민주주의 후퇴” 국민 63%가 응답… “진전됐다”는 29.3%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난 1년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후퇴했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목했다. 분야별로는 ‘사회적 평등’에서 민주주의가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후퇴한 것으로 평가됐다.

경향신문이 연말을 맞이해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진전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현대리서치에 의뢰, 지난 13일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95% 신뢰 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결과 응답자의 63.2%(매우 후퇴 21.0%, 다소 후퇴 42.2%)가 지난 1년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답했다. 민주주의가 진전됐다는 답변은 29.3%(매우 진전 3.3%, 어느 정도 진전 26.0%)로 나타났다.

지난 1년간 민주주의 후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문(집단)은 이명박 대통령으로 25.2%였으며 이어 정부(21.7%), 한나라당(13.6%), 야당(8.4%) 순이었다. 지난 1년간 분야별 민주주의 진전 여부를 묻는 조사에서는 언론자유, 인권, 사회적 평등, 시민권리 등에서 모두 후퇴했다는 답변이 진전됐다는 것보다 많았다.

먼저 언론자유에 대해서는 ‘후퇴되었다’가 50.0%(매우 후퇴 16.3%, 다소 후퇴 33.7%)로 ‘진전되었다’ 43.4%(매우 진전 7.5%, 약간 진전 35.9%)보다 6.6%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인권 민주화에 대해서는 후퇴가 48.8%(매우 후퇴 13.2%, 다소 후퇴 35.6%), 진전이 41.4%(매우 진전 6.9%, 약간 진전 34.5%)로 집계됐다. 사회적 평등은 후퇴 의견이 60.0%(매우 후퇴 20.4%, 다소 후퇴 39.6%), 진전 의견이 33.0%(매우 진전 4.6%, 약간 진전 28.4%)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63.7%가 ‘비민주적’이라고 답했다. ‘민주적’이라는 의견은 30.8%였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계층(부문)은 부유층으로 55.0%였으며, 다음으로 대기업(23.6%), 중산층(4.4%), 일반 서민층(4.0%), 중소기업(3.8%) 순이었다.(안홍욱·선근형기자)

0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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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2-15 10:23   좋아요 0 | URL
다른짓은 다해도 되는데 운하만은 안했으면 좋겠네요..
후손에 후손까지 가도 완전히 수습할 수 없는 일을 어쩌려고..
정말 밤에 잠이 안옵니다.

로쟈 2008-12-15 23:39   좋아요 0 | URL
체념과 냉소를 단련시키나 봅니다...

연두부 2008-12-15 10:47   좋아요 0 | URL
다른짓도 안됩니다....쩝

로쟈 2008-12-15 23:4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이 따로 없어요...
 

최근의 관심사 중 하나는 노예제다.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 모두 교차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제정 러시아를 지탱했던 경제적 토대는 '농노제'였지만 사실상 내가 러시아 농노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무엇인지 자문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관련분야의 책이 없는 건 아니므로 그간에 무관심했던 탓이 크다(당장은 미국의 노예제와 러시아의 농노제를 비교한 책과 농노의 회고록을 관심도서에 올려놓았다). 부가적으로 관심을 갖는 주제는 '고대 노예제'다. 이건 모리스 핀리의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로 일단 카바하려고 한다('모던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작품일까? 1장의 제목도 그냥 '근대 이데올로기'이건만). 최근에 나온 마르크 페로 편집의 <식민주의 흑서>(소나무, 2008)는 너무도 반가운 책인지라(내용은 제목 그대로 아주 암울하지만) 당연히 독서 목록에 포함된다. 현재는 상권만 나왔는데 하권도 빨리 나오면 좋겠다. 한데, 조선시대 노비제에 관해 알기 위해서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노예제 농노제의 이론
중촌철 지음 / 지식산업사 / 2000년 5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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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농노.노예
역사학회 / 일조각 / 1998년 12월
20,000원 → 20,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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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
모시스 핀리 지음, 송문현 옮김 / 민음사 / 1998년 11월
14,500원 → 13,050원(10%할인) / 마일리지 7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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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 노예제
정진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6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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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4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4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4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22   좋아요 0 | URL
역사비평 2002년 여름호에 제임스 팔레를 다룬 김성욱 논문에 우리나라 노비에 대한 팔레와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쟁이 나와 있어요.그리고 전세계의 노예제를 다 다룬 책은 <노비,노예,농노> 일조각 이 좋아요.경제사 공부할 때도 좋은 책이죠.
그리고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선 이영훈 씨도 경제사 실력을 바탕으로 노예제를 비롯하여 조선 신분제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좀 안타까워요.그 쪽 연구에만 몰두하면 좋을텐데 너무 정치색이 진한 발언을 많이 해서...실력 있는 학자인데...

로쟈 2008-12-15 00:29   좋아요 0 | URL
딱 제가 찾던 책이네요. 감사.^^ 이영훈 교수는 수량경제사가 주전공인가요? 예전엔 김용섭 교수의 농업경제사 정도가 학계에서 평가받는다고 들었었죠...

2008-12-15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50   좋아요 0 | URL
안병직-이영훈(낙성대 연구소 학파) 인맥은 맑스 경제학 및 경제사에서 시작하다가 근대경제학으로 넘어오면서 수량경제학을 수용했다고 봐야죠.그 중요성을 강조하니까요.김용섭 씨는 농업분야에서, 조기준 씨는 기업가 역사 분야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대표로 꼽히고 있습니다.해외 한국학 연구자들도 이들의 연구서는 공부하지요.낙성대 학파에게 또 중요하게 영향을 준 해외학자는 나카무라 사토루입니다.

로쟈 2008-12-15 00:57   좋아요 0 | URL
<식민주의>란 책을 보면 유럽의 관료제 자체가 주변부(식민지)에서 동력을 얻었다고 기술하더군요. 영국의 경우에도 1945년 이전엔 '인도행정청만큼 전문성과 규모를 갖춘 관료제 기구가 없었다고 하니까, 관료제 국가의 발전야말로 식민주의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일본의 경우는 어떤지가 궁금하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5 14:38   좋아요 0 | URL
일본의 식민지 관료기구 중 외국인들도 중시하는 것은 만주국입니다.그때 만주인맥은 조선인 출신들과 커넥션을 이루어 박정희(이 양반도 대표적인 만주인맥이지요)의 한일국교 정상화 작업 막후 인물로 활약하게 됩니다.예전 통산성이 있던 시절에 찰머스 존슨이 만주국 시절 일본관료를 연구해 유명해졌지요.

나비가 된 시지프스 2008-12-15 04:45   좋아요 0 | URL
조선시대 노비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라는 외국인의 시각으로 조선사를 다룬, 그래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 수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이라는 책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