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은 중의 하나는 '아고라포비아'. 마침 엊그제인가 아고라를 주제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 '최전선의 민주주의'를 읽은 터여서 같이 묶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세히 다룰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언제부턴가 서재에 글쓰기가 '차포 떼고 장기두기'처럼 돼버렸다. 시간이 부족하고 책이 옆에 없다. 일에 쪼들리는 탓이고 책은 여기저기 분산돼 있는 탓이다. 거기에 체력도 부실하니 기껏해야 '빅장'이나 부르는 것이 현재로선 나의 최선이다. 이러다 판이 끝날까 염려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모' 수준의 정리다. 먼저 칼럼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2 .12) [여적]아고라포비아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란 독특한 문답법으로 폴리스 사람들과 토론을 벌여 진리 터득을 도왔다. 그 장소가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이었다. 아테네 아고라의 경우 가로 700m, 세로 550m로 꽤 너른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민회, 재판, 사교, 상업 등 사회활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곳도 아고라였다. 아고라는 여론형성과 의사소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 나아가 소통 자체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아고라포비아(광장공포증)는 낯선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 등 공공장소에 혼자 있게 되면 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증상이다. ‘포비아’에는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비행공포증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장공포증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이유로 다중이 모인 상황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한다. 가령 지각을 자주 하는 신입 회사원이 모두 일에 열중한 사무실에 들어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때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다. 이게 심해지면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가 포털 다음의 초기화면에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에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고라포비아가 떠오른 건 공연한 연상작용 탓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고라는 지난해 광우병 촛불 정국에서 문자 그대로 인터넷 소통을 위한 광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족벌신문들에 대한 광고불매 운동에 공간을 제공했다. 이런 것들이 정권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게다가 현재 사이버모욕죄 입법 추진이 강행되고 있다. 미네르바 사건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쯤되면 촛불 이후 경찰 조사로 이미 기가 꺾인 아고라가 ‘후퇴’를 결정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이 정권이 기존 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모욕죄 신설에 매달리는 모습에는 아고라포비아의 증세가 역력하다. 그렇다면 이 증세를 치료할 방법은 없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언론 장악을 획책하는 정권에 제대로 된 아고라, 소통의 공간 조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병세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부터 일이 꼬였으니 아고라포비아의 치료는 애시당초 무망한 것이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2. 12.  

P.S. 바우만의 글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 2005)에 수록돼 있다. 책은 세계화 이후의 전망에 관한 저명한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의 글모음인데,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바우만의 글 또한 독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아쉽게도 원문과 대조해보진 못한다(따로 영어로도 발표했을 듯싶지만 출처를 알 길이 없다). 말미에 실린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담을 두어 달 전에 읽은 바로는 썩 좋은 번역은 아닌데 말이다('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였던 부르디외를 '프랑스 단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라고 소개한 대목은 역자의 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참고로, 그라스와 부르디외의 대담 '자본주의를 길들이자!'는 1999년 12얼 5일에 독일 브레멘 라디오방송국에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대담의 독어판 요약은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에 실렸으며 영어판은 '더 네이션'(2000. 07. 03)지에 '아래로부터의 문학(A Literature From Below)'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2002년 3-4월호)지에는 '진보적인 복고(The 'Progressive' Restoration)'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두 판본이 서로 약간 다르며 국역본은 뉴레프트 리뷰 판본과 일치한다(영어, 불어, 독어본은 http://www.homme-moderne.org/societe/socio/bourdieu/entrevue/gras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럼 바우만의 글로 넘어가서, 그가 말하는 아고라란 무엇인가? 우선 바우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개념, 오이코스(oikos)와 에클레시아(ecclesia)를 소개한다. 각각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오는 말인데, 전자는 "온화하지만 때로는 드센 사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 즉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주 드물게 찾아가지만 우리의 모든 삶과 관계된 공공의 사안들이 규제되는 먼 곳에 놓인 영역"이다(번역이 좀 감질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하며 오이코스는 사적인 영역이고, 에클레시아는 공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세번째 영역이 바로 아고라다. "아고라는 완전히 사적인 것도 아니고 완적인 공적인 것도 아닌 공간이며, 동시에 일정한 정도로 양자의 일부를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다."(4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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