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학술서'라고 할 만한 책은 단연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이다. 주중에 서점에 들렀을 때 표지를 보기는 했지만 '열녀의 탄생'이란 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리뷰를 보니 강명관 교수의 '대작'이다. 850쪽이 넘는 분량이 대작이란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부제는 '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 이미 제목과 부제가 내용을 다 짐작하게 해주는데, 그럼에도 물론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책은 한국사회 여성 차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꼼꼼하게 짚어준다. 리뷰를 읽어보니 문제는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편, <내훈> 등의 핵심 텍스트들이고, "<열녀의 탄생>은 18세기 이후 종법제에 입각한 가부장적 친족제도가 완벽하게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 텍스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의 대뇌에 장착돼 어떤 파급효과를 낳는지, ‘열녀’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치밀하게 파고든다." 저자의 노고와 열정이 인상적이다. 책은 지난주에 출간된 강준만 교수의 <어머니 수난사>(인물과사상사, 2009)를 떠올리게 해주어, 서평기사를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16) 여성은 조작된다, 지금도 쭉~

누나는 대학, 남동생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둘 다 합격했다. 아버지는 누나한테 진학 포기를 종용했고 공부 잘하던 딸은 거기에 따랐다. 자신을 희생한 누나와 그 남동생의 그 뒤 인생은 흔히 미담기사의 재료가 되거나 인기 있는 방송 드라마로 등장했다.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 오누이가 있었는데 이번엔 오빠가 대학, 여동생은 중학교에 시험을 쳐 둘 다 합격했다. 가난했던 그 집 어머니가 둘 중 하나한테 학교를 그만두라고 종용한다. 누구한테? 열에 아홉, 아마도 열에 열 모두 여동생 쪽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하며 그런 성차별은 과거지사라고 말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대학 인문분야 학생들 다수가 여학생이다. 그런데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가운데 여성은 한두 명뿐이다. 교수 공채 때 여성은 아예 처음부터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치권을 보든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보든, 검사 판사를 보든 우리 사회 힘 있는 분야에서 실세를 점하고 있는 쪽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남성이다. 임금격차와 승진기회, 가사노동 모두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 우리 현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이 많이 낳지 말라고 닦달하더니 이젠 많이 낳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낮은 출산율과 관련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쪽도 주로 여성이다. 따라서 “작동방식만 다를 뿐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제하에서 살고 있다”는 게 강 교수 생각이다.

<열녀의 탄생>(돌베개)은 이 유구한 우리사회의 성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전적들을 섭렵한 철저한 문서검증을 통해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더듬어 올라간 강 교수의 10여년에 걸친 노작이다. ‘열녀’(烈女)가 무엇인가? “열행(烈行)을 실천한 여성”이다. 열행의 대종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공인된(또는 공인될) 성적 상대자(대부분은 남편)에게 자신의 성적 종속성을 천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거나 신체의 일부 또는 신체 전부를 희생하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을 위험에서 구하거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거나 목숨을 버리는 행위다. 남편의 병구완을 위해 허벅지 살을 도려내 피와 살을 먹이거나 외간 남자한테 잡힌 손목을 잘라버리는 행위, 개가를 거부하며 코나 귀를 베어버리거나 굶어죽는 행위, 임진·병자 양란 때 겁탈에 저항하다 학살당한 일 등이 이에 포함된다. 나라가 문을 세워 이들을 표창하고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준 게 정려(旌閭)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정려의 대상으로 뽑힌 열녀는 거의 목숨을 버린 경우다. 선조 이후 열녀 553명 중 임진왜란과 직접 관련된 열녀는 441명이고 이들 중 죽지 않고 열녀가 된 여성은 단 4명, 1%도 되지 않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열녀나 열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말조차 없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절부’(節婦), ‘열부’(烈婦)란 말이 일부 사대부들의 글에 등장한다. 절부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여성이며, 열부는 열행을 감행한 남편 있는 여성이다. 열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열행까지 포함한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절부는 아내가 죽어도 새장가 들지 않고 수절한 남편인 ‘의부’(義夫)와 짝을 이뤘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남편 잃은 여성의 재가, 삼가는 전혀 허물이 되지 않았으며,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라 남녀 모두의 선택이었다. 게다가 결혼한 여성이 남자 집(시댁)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여성의 친가(처가)에 들어와 사는 게 일반적 관행이었다. 이런 풍경은 조선 전기까지 대체로 유지됐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의 ‘경국대전’에서 ‘의부’란 말이 사라지고 개가를 하는 여성의 후손들에겐 벼슬길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 법·제도상으로는 가부장제가 어느 정도 정비됐으나 본디 윤리적 성격이 강한 열행, 열녀를 법·제도로 장려하고 강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를 가족의 연장으로 본 조선의 성리학 사도들이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본디 대등했던 ‘남성=여성’ 관계를 ‘남성>여성’의 위계적 관계로 바꾸고, 여성들이 그것을 자연스런 인간본성으로 받아들인 뒤 남성에 대한 종속성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까지 내던지게 만드는 더욱 강력한 장치가 필요했다. 이 종속적 윤리의 내면화, 이념적 세뇌를 위한 텍스트, 유교적 가부장제의 욕망을 윤리의 이름으로 여성의 대뇌에 설치해 그것을 끝없이 복제함으로써 종속적 여성을 대량으로 자동제조해내는 프로그램이 바로 국가-남성이 독점한 인쇄물이었고, 그 대표가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편, <내훈>이었다.  

<열녀의 탄생>은 18세기 이후 종법제에 입각한 가부장적 친족제도가 완벽하게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 텍스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의 대뇌에 장착돼 어떤 파급효과를 낳는지, ‘열녀’의 역사를 축으로 삼아 치밀하게 파고든다. <소학>은 결코 아이들 교육용 책이 아니었다. 난해한 남성용 한문서적인 소학(나중에 언해본도 나옴)은 성리학 사도들을 길러내는 의식화 작업의 실천원리였다. 경국대전의 차별적인 여성 조항들이 모두 주자가 중국 고대 고전들에서 따와 편집한 이 소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시 대부분 중국 <고금열녀전> 등에서 얘기를 따와 그 가운데서 능동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부분들을 제거해버리고 재편집한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여성의 종속성 내면화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여성용 책이다. <내훈>은 주로 위기시의 열행을 기록한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일상적인 열행을 담았다.

오누이 이야기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강 교수에 따르면 “‘나’는 권력적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다. 예전에는 국가-양반(남성)이 <소학>과 <삼강행실도>와 <내훈>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들을 양산해냈다면, 오늘날엔 국가-자본(테크놀로지)이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그들의 욕망을 대뇌에서 대리복제하는 개인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정말 나일까? <열녀의 탄생>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 가족계획 지도원(오른쪽 끝)이 농촌 여성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있다.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된 1962년 당시 교육 내용은 산모 나이 35살까지 3년 터울로 4명의 자녀만 낳자는 것이었다.

한겨레(09. 05. 09) '극성 엄마’ ‘속물 엄마’ ‘부패 엄마’ 만드는 사회

‘한국 생활사’ 집필을 평생 작업으로 구상중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어머니’라는 존재 안에 농축된 한국형 가족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파헤쳤다. 책 제목이 <어머니 수난사>다. <입시전쟁잔혹사>에 이어 넉 달 만에 선보인 생활사 단행본이다. 그런데 왜 ‘수난사’인가. 강 교수가 볼 때 한국의 어머니들은 생존을 위해 각개약진해야 했던 사회에서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과잉 순응’ 전략으로 ‘투사’가 됐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입시전쟁 투사, 치맛바람 투사, 자녀결혼 투사, 부동산 투사. 전투의 일선으로 내몰린 이들에겐 사는 게 축복일 리 없었다. 싸움으로 점철된 역사는 고난의 역사, 시련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자기희생’의 상징이자 실체로 자리잡았다.  

이런 어머니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건으로 강 교수는 한국전쟁을 꼽는다. 전쟁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고 피붙이의 중요성을 실감케 함으로써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물론 ‘강한 어머니 만들기’에는 정부도 한몫했다. 1955년 정부는 5월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는데, 이를 통해 전파시키려고 했던 것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이었다. 해마다 어머니날이 오면 대통령 담화가 발표됐고, 언론은 “자녀의 빛나는 생을 위하여는 자기 몸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앞다퉈 강조했다. 이즈음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부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자유부인>이 반향을 일으키자, 정부와 사회단체들은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도려내 복약시켰다는 ‘허벅다리 부인’의 사연을 발굴해 맞세우기도 했다.

60년대에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전투적인 가족계획이 추진되면서 가족 구성과 어머니의 구실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돈 쓰고 로비도 불사하는 것을 가리켜 ‘치맛바람’이라 이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부와 언론은 공모한 듯 거세게 치맛바람을 질타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모든 궂은일은 어머니가 떠맡게 하는 구조를 온존·강화하면서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문제의 책임을 어머니들에게 돌리는 수법은 이후 지속되는 어머니 수난사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복부인’과 ‘신사임당’이 공존한 70년대를 거쳐 입시전쟁에 질적 전화가 이뤄지는 80년대가 열렸다. 입시전쟁도 점차 제도화·체계화의 길을 밟는데, 더는 어머니의 희생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계급전쟁’의 양상을 띤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머니가 동원할 수 있는 경제력의 크기와 현명함 또는 영악함”이 중요했다. 8학군 신드롬과 함께 중산층의 강남을 향한 질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97년 외환위기는 ‘강한 어머니’를 다시 호명했다. ‘남편 기 살리기’를 강조하는 신현모양처론이 유행하는 가운데 한쪽에선 ‘아줌마 때리기’가 본격화됐다. 아줌마 때리기는 기혼 중년여성의 가족 이기주의와 공공의식 부재를 문제삼았다. “어머니는 찬양하고 아줌마는 때려라”였다. 아줌마를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이런 심리를 강 교수는 ‘자궁 가족’ 이기주의로 규정한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위해 벌이는 투쟁은 아름다워도 너의 어머니가 너를 위해 벌이는 투쟁은 추하다는 이중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런 어머니 수난사를 야기한 주범으로 ‘가족주의’를 지목한다. “자궁 가족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일부 어머니들은 ‘복부인’이 되기도 했고 ‘마담뚜’의 도움을 받아 ‘정략결혼’의 수익성을 최대화하고자 했다. 일부 어머니들은 ‘기러기 엄마’가 되기도 했고, ‘원정출산’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경제적 능력이 못 되는 어머니들은 ‘우골탑’ 대신 ‘모골탑’을 쌓았다. 많은 어머니들이 극성 엄마, 속물 엄마, 부패 엄마 노릇을 불사했다.”

문제는 이렇게 험난한 어머니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강 교수는 이를 일러 “모두가 희생자요 모두가 불만인 체제”라고 한다. 비극은 이 체제의 덫을 벗어날 속시원한 방도를 누구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진보진영을 향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투쟁의 틀을 벗어나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라”고 주문한다. “당장 어머니들의 육아 부담을 제도적으로 덜어주는 게 백날 ‘신자유주의 타도’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 극복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도 어머니가 투사가 되어야만 하는 잔혹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세영 기자)  

09. 05. 16. 

 

P.S. '여인 잔혹사'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영화가 두 편 있다. 한국 최초의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한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와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인데, 짐작엔 <물레야 물레야>에 대한 호평 때문에 <자녀목>이 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두 편 다 원미경 주연작이며, <자녀목>은 그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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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16 16:46   좋아요 0 | URL
'열녀' 이야기도 나왔으니 '효자/효녀/효부'에 대한 책도 나와야 할 것 같군요^^ 사실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녀'도 중요하지만 '효자/효녀/효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9-05-16 21:09   좋아요 0 | URL
네, <효경>에 대한 비슷한 연구서도 나올 법하네요...

딸기 2009-05-17 14:06   좋아요 0 | URL
저는 잘 몰랐는데, 강명관 교수가 대단한 분인가봐요.
책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

로쟈 2009-05-17 14:51   좋아요 0 | URL
한겨레 쪽에도 칼럼을 쓰시죠. 연구서 네 권을 한꺼번에 펴내기도 하시고...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5:31   좋아요 0 | URL
강명관,강준만 둘 다 기성논리에 도전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지요.그리고 글 읽는 맛이 있어서 좋아요.강명관의 한겨레신문 토요일 고정칼럼은 끝난 것 같던데요.

로쟈 2009-05-20 21: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칼럼들을 묶어도 읽을 만한 책이 나올 거 같습니다...
 

이번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이다. 3대 비판서를 백종현 교수가 혼자 힘으로 완역한 셈인데, 이로써 최재희(이석윤)판 3대 비판서가 수십 년만에 완전히 세대교체되었다.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역자가 '한국의 칸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겠다. 여하튼 덕분에 한국어로 칸트를 읽어볼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됐다(나는 대학 2학년 때인가 최재희판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그만 둔 기억이 있다). 물론 온전한 세대교체 및 한국어 번역의 정착은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철학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읽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가령 학술논문에서도 백종현판 칸트가 인용된다면 비로소 '한국어본'의 소임을 완수하게 되는 것). 한국어로서 칸트는 아직 '젊은' 철학자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16) 근대 정신세계 혁신, 그 파괴와 건설의 완결편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었고 많은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 의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노르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 문장의 주인공이 바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근대 철학의 혁신자이자 계몽 정신의 산마루였던 칸트는 파괴자였던 것만큼이나 건설자였다. 그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정신의 새 건축물을 세웠다. 이 파괴와 건설의 논리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이 세 비판서 가운데 마지막 저작 <판단력비판>이 칸트 전문 연구자 백종현 서울대 교수의 번역과 주해를 거쳐 새롭게 나왔다. 앞서 백 교수는 <실천이성비판>(2002)과 <순수이성비판>(2006) 번역·주해본을 펴낸 바 있다. 이로써 칸트 3대 비판서가 백종현판으로 완역됐다. 40년에 걸친 칸트 연구의 결실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칸트의 이미지는 파괴자라는 말이 주는 격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는 단조롭고 엄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걸어다니는 시계가 그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후년의 칸트를 칸트 생애 전체로 확대한 모습이다. 젊은 시절 칸트는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기 당구를 즐기고 살롱과 클럽을 드나들고 흥겨운 대화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교계의 총아, 멋쟁이 신사가 칸트였다. 그랬던 그는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정교수 취임을 전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칸트는 사교계에 발을 끊고 은둔자가 됐다. 그 무렵 하나의 거대한 문제가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이었다. 골방에 틀어박힌 칸트는 고투에 고투를 거듭한 끝에 10여 년 뒤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순수이성비판>(1781)이다. 칸트는 이 책에 이어 7년 뒤 <실천이성비판>(1788)을 완성했고, 다시 2년 뒤 <판단력비판>(1790)을 세상에 내보냈다. 3대 비판서를 완성한 후의 칸트는 젊은 날의 습성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노인이 돼 있었다.

칸트가 세 주저에 ‘비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가 계몽정신의 아들임을 보여준다. <순수이성비판>의 초판 머리말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든 것이 비판에 부쳐져야 하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라고 규정한 뒤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오직, 그 자신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 이성이 모든 것을 비판에 부친다면, 이성 자신도 그 비판의 법정에 서야 할 것이다. 이성이 이성 자신을 소환해 심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칸트 비판철학의 놀라운 전환이다. 인간 이성이 이성 자신을 규명함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과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간해 내는 것이 이성 비판의 제1과제라고 칸트는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비판이란 이성 자신의 기능과 능력을 밝히고 그 한계를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서 그 한계를 모르는 이성은 가차 없이 탄핵당한다.  


칸트의 비판 작업은 정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냈다. 이성의 자기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우리 정신이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 인식을 통해서 사물 자체의 존재가 확실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인간 이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상세계의 창조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신이 담당하던 창조자 구실이 인간의 이성 안으로 옮겨졌다. 세계 존재의 근거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의식의 규정을 받는다는 이 발상, 신의 업무를 인간의 업무로 바꿔놓은 이 발상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그렇게 의식이 창조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제멋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엄격한 법칙을 따른다. 이렇게 의식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의 법칙’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면, 그런 자연의 법칙 안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의지로써 세계를 바꾸고 도덕적 이상을 구현해 가는 정신 능력의 근거를 규명하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물론 이때도 정신은 엄격한 내적 법칙 곧 도덕법칙을 따른다. <판단력비판>은 이 두 저서 사이 가교 노릇을 하는 책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 사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행위하고 실천하려면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마음의 능력의 원천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칸트가 먼저 탐구하는 것이 ‘미적(미감적) 판단력’이다. 이 미적 판단력 규명이 이후 철학적 미학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룬다. 나아가 칸트의 미적 판단력은 현대의 정치철학에도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한나 아렌트의 ‘정치 판단 이론’은 칸트의 이 판단력비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명섭 기자)     

 

세계일보(09. 05. 13) 칸트 3대 저작물 완역 마침표 찍다

서양의 세 문화기둥인 그리스·로마 문화와 과학, 기독교 사상은 칸트에 이르러서야 최초로 통합됐다. 그는 이 세 문화기둥을 동시에 한 시야에 두고 반성하며 설명했다. 한국 철학사와 정신사에 칸트 철학이 미친 영향도 지대했다. 한국에 칸트 사상이 유입된 것은 20세기 초. 우리 사회가 19세기 말부터 서양전통에 합류한 게 계기가 됐다. 우리 사회 저변에는 유교적인 가치 체제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서양의 가치가 사회 유지의 잣대가 되고 있다. ‘사회 정의’라는 문제만 하더라도 ‘서양 법사상’이 사회 유지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흐름의 핵심에 ‘칸트’가 있다. 칸트 철학은 우리보다 앞서 서양철학을 받아들였던 일본을 통해서였다. 한국 철학박사들 중 ‘칸트’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는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보다 많은 수치다. 

이처럼 철학사에서 칸트의 비중이 컸으나, 그간 그의 사상이 ‘동일 학자의 일관된 설명’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인 ‘순수이성비판’(1781년)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은 그의 인식론을 잘 담아냈으나, 한 학자가 풀어낸 경우는 없었다. 각기 지식(眞)과 행위(善)의 영역을 논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더해 감정 영역인 ‘미(美)’의 문제를 다룬 ‘판단력 비판’을 한 사람이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백종현(59)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성과는 눈에 띈다. 백 교수는 최근 ‘판단력 비판’(아카넷)을 내놓으며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 이정표를 찍었다. 일본 저작물을 답습하던 관행을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을 한 학자가 완역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책을 출간한 아카넷 오창남 편집장의 설명이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3대 저작물을 내놓았듯 백 교수도 3대 저작물 번역에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 2002년 ‘실천이성비판’에서 시작해, 2006년 ‘순수이성비판’를 거쳐 올해 ‘판단력비판’을 번역하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백 교수는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 저수지’에 모이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이 저수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칸트 철학이 우리 사회에 주는 뜻은 각별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의 여러 가치를 논했던 칸트 철학은 ‘인간 소외’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는 현실에서 더 유용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치’가 있는데, 이 가치를 가치있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칸트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어요. 사람이란 결함이 있는 존재인데, 이를 극복하는 가치있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나오지요.”

우리 사회의 좌우갈등과 빈부격차 등 문제점도 칸트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법률적 평등과 시민적 자유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면 갈등의 강도가 낮아진다고 백 교수는 설명한다. 사회의 소외층 혹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백 교수는 “소외층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며 “약자가 감사하다고 여기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3대 저작물 완역은 일본 영향을 받았던 선배 학자들의 한계를 건너뛰었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또 통일되지 않았던 철학 언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는 점도 의미 있다. 일례로 그간 국내 저작물에서 ‘오성’(깨닫는 능력)으로 번역됐던 독일어 ‘VerStand’(아는 능력)는 본래의 뜻인 ‘지성’으로 풀이했다. 백 교수는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서 더 나아가 4대 저작물의 하나로 그의 종교 철학을 다룬 ‘순절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번역하고 있다. 2∼3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번역이 끝나면 칸트 사상의 ‘진선미성’(眞善美聖)이 완결되는 셈이다.(박종현 기자) 

09. 05. 15.  

P.S.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로는 백종현 교수의 <존재와 진리>(철학과현실사, 2008)가 있지만 입문서도 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옮긴 카울바하의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서광사, 1992)가 예전엔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김상봉 교수의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한길사, 1998)는 짐작에 우리말로 씌어진 가장 쉬운 칸트 소개서가 아닐까 싶다('쉽다'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책들과의 비교에서만 의미를 갖지만). 칸트 전공자인 김상봉 교수는 언젠가 <판단력 비판>을 옮기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나는 김상본판이 백종현판보다 먼저 나올 줄 알았다.  

개인적인 바람을 적자면, 승계호 교수의 입문서 <칸트>가 꼭 좀 번역/소개됐으면 싶다. 영어권의 칸트 입문서로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이 읽힌다는 건 자랑할 만한 일 아닐까. 정작 이런 책을 번역하는 데에는 국내 학자들이 왜 인색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바람을 더 적자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번역 이후에 백종현 교수가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마저 번역해주면 좋겠다. 한국의 헤겔 전공자나 헤겔학자들은 임석진판을 넘어서는 <정신현상학> 번역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므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부지런한' 칸트 전공자가 아닐까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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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6 00:16   좋아요 0 | URL
정말 감사드려야 할 일인거 같아요.

로쟈 2009-05-16 00:30   좋아요 0 | URL
일당백이라고 해야겠어요. 덕분에 동료 철학 전공자들이 좀 민망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2009-05-16 0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5-16 15:57   좋아요 0 | URL
가히 '감동적'인 소식이군요.ㅎㅎ 백종현 선생님 덕분에 칸트를 읽지 않을 핑곗거리가 또 하나 줄은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16 21:10   좋아요 0 | URL
사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동료 학자들에겐 '민폐'인데요.^^;

푸른바다 2009-05-16 16:51   좋아요 0 | URL
최재희 역이나 전원배 역의 순수이성비판도 휼륭한 편이었으니, 칸트는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행복한 철학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석윤 역 판단력 비판이 가장 한자가 많고 딱딱했는데, 새 번역이 기대되는 군요. 말씀대로 백종현 교수님이 정신현상학 마저 새로 번역하신다면, 우리나라 번역사에 신기원이 이루어지겠군요^^

로쟈 2009-05-16 21:1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백종현판을 안 읽어봤는데, <판단력비판>부터 읽어보려고 합니다...

푸른바다 2009-05-16 22:53   좋아요 0 | URL
백종현 판이 가장 나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하지만 아직 칸트가 우리말로 완전히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백종현 판에서 기존의 번역에서 사용되던 '오성'을 '지성'으로 바꾸었지만, 우리말에서 흔히 사용되는 '지성'이 과연 칸트 철학 체계에서 'Verstand'에 대한 적절한 번역인지는 의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말에서의 '지성'이 칸트의 'Verstand'보다 포괄적이고 개념의 지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Verstand'는 칸트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용어이고 따라서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한국말은 없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Verstand'는 감관을 통해 들어온 지각들에 대한 좁은 의미의 '판단'인 반면 우리말에서 '지성'은 넓은 의미의 지적인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칸트의 Verstand로 한정되기에는 지성이 일상 생활에서 너무 빈번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에 오히려 칸트 이해를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차라리 관례대로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오성'을 그냥 Verstand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편이 혼돈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말씀하신 대로 지식인들이 '백종현 판'을 한국어 저본으로 받아들이고 꾸준히 인용하고 그 개념들을 공유했을 때, 비로서 칸트의 한국말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성'의 경우 과연 칸트적 의미의 Verstand로 좁혀지기에는 너무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아닐까 싶군요.

로쟈 2009-05-16 22:20   좋아요 0 | URL
'지성' 번역에 대해서는 저와 뜻이 같으시네요.^^ 역자가 독어 'Verstand'야 잘 이해하시겠지만 한국어 '지성'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간과하신 게 아닌가 싶었어요. 게다가 국내 로크 전공자들은 '인간 오성론'을 아직까지는 '인간 지성론'으로 바꿀 의향이 전혀 없는 듯싶으니, 독자로선 어차피 '지성'과 '오성'을 다 알아야 합니다. '도덕형이상학'을 '윤리형이상학'이라고 '의역'한 것도 저는 공감하기 좀 어렵습니다...

푸른바다 2009-05-17 09:35   좋아요 0 | URL
존 로크의 'Human Understanding'은 오히려 우리말 '지성'에 좀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uman Understanding'은 데카르트의 'Bon Sens'와 통하는 개념이고 칸트의 'Vernunft'와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에서 존 로크의 'Human Understanding'을 '悟性'이라고 번역할 때도 포괄적인 이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悟'는 우리나라에서 '깨닫다'로 이해되듯이 어떤 포괄적인 이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존 로크의 'Understanding'에 대한 역어였던 '悟性'이 더 좁은 개념인 칸트의 'Verstand'의 역어로서 채택 되었는지도 궁금하더군요^^

칸트도 수차례 번역되고, 데카르트, 흄, 버클리의 책도 대부분 번역되어 있는 판에 유독 근대 인식론의 진정한 출발인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만 번역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제가 알기론 1970년대 초반 휘문출판사에서 간행한 조병일 선생의 발췌 번역본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캉이 '프로이트에로의 복귀'를 외치 듯, 화이트헤드는 '존 로크로의 복귀'를 외치는 듯 싶은데 우리 말로는 복귀할 곳이 없는 셈입니다^^

로쟈 2009-05-17 10:34   좋아요 0 | URL
서지에 밝으시네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이런 개념들을 처음 접하면서 '오성'이란 말이 입에 익었기 때문에, '悟性'이란 어원적 의미를 참조하지 않고도 그냥 쓰게 돠는데요.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게 '지성'으로 깔끔하게 대체되기 어렵다면, 결국 독자들은 '하나 더' 알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것이죠. 차라리 고정시켜서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인지 의문입니다(그래서 저는 '초인'을 '위버멘쉬'라고 음역하는 것도 '전문가적 오버'라고 생각합니다). 독어의 Verstand를 결국 영어권에서는 intellect가 아니라 Understanding으로 옮기는 것 아닌가요? 차라리 쓰던 말의 의미역을 좀 확장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푸른바다 2009-05-17 19:08   좋아요 0 | URL
서지에 밝기는요^^ 로쟈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아무튼 저도 로쟈님 의견에 동감입니다. '오성'이라는 말을 사용한지도 벌써 100년(?)년 가까이 된듯 싶고, 일관되게만 사용한다면 학적인 추론이나 대화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칸트적 의미의 '이성'이나 '오성'도 웬만큼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듯 싶구요. 저는 '위버멘쉬'로 번역해 놓은 전문가들을 보면 왠지 '라파엘 전파' 미술가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물론 그분들의 학문적 노력과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구요^^ 불경의 한역 과정에서 '번역어'가 '원어'로 바뀐 사례는 있는 것 같습니다. Nirvana가 무위로 번역되다가 음사인 '열반'으로 바뀐 경우겠지요. 이 경우 무위가 이미 도가철학의 핵심 용어이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는 차원에서 발생한 필연성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초인'의 경우 니체외의 다른 철학체계에서 사용된 적이 거의 없는 니체 번역용 '신조어'에 가깝기 때문에 '위버멘쉬'의 의미를 초인에 부여해서 쓰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이라도 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초인'하면 니체를 떠올릴 터이니 '초인'의 의미만 잘 해설되어 있다면 니체철학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5:40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대양출판사 번역본(한상범 역)에는 '인간지성론'으로 되어 있네요.
1978년 초판 81년 중판.이 역본은 해설이 정말 자세하고 저자 연표도 자세해서 좋아요.

푸른바다 2009-05-17 15:59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이야 말로 서지에 밝으시군요^^ 저는 그런 번역본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한상범씨 책은 완역인지 모르겠네요^^ 로크의 원저 자체가 난삽하고 길고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영어로도 축약본이 더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축약된 영어본 2종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조병일 번역본은 축약본도 아닌 발췌본입니다^^ 언제 헌책방에서 찾아 봐야 할 것 같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6:38   좋아요 0 | URL
역자가 "이 발췌에 대해서는 역자가 책임을 짐.골자는 다 들어가 있음"이라고 밝혔어요.영어본 중에도 발췌본이 있는데 역자는 그 책들은 참고하지 않았다네요.대양출판사 세계사상대전집은 헌책방에 있을 거에요.저는 낱권으로 몇권 구입했는데 고물상에서 구입한 것도 있어요.
댓글 수준이 높군요.자세히 읽어봐야겠네요.
<니이체 철학의 현대적 조명>(청람)에 실린 정동호 논문제목이 '위버멘쉬는 누구인가'네요.

bam 2009-05-17 07:10   좋아요 0 | URL
김상봉 선생님의 번역본도 올해 안에 나올 것입니다. 지금 번역은 일단 끝냈고 옮긴이 주 다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후일 두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재밌을 듯 하네요. 칸트번역에 대한 백종현 선생님의 노고는 정말 이루말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이고,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경우, 1쇄에 나왔던 사소한 오역과 오류들을 다음쇄 찍을 때 교정하고 했던 모습도 좋았습니다만, 번역본을 볼 때 가끔 참을 수 없이 싫은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대표적으로 칸트가 라틴어를 사용한(또는 인용한) 대목에서 '고어'의 느낌을 살리시고자 한문으로 번역한 점. 어쨌듯 백종현 본이 최재희나 전원배 번역본보다 물론 나쁠리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기존의 번역어들에 대한 몇 몇 수정이 백종현 본을 읽을 때 치명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거든요. 오역의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어 선택의 문제랄까, 백종현 선생님도 연배가 꽤 있으셔서 그런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을 부러 선택하시는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아주 가끔 <접속사>의 번역이 부적절하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한 가지 더: transzendental (이하 tr.)과 a priori (이하 ap.) 의 번역 / 백종현은 transzendental을 '초월적'으로, a priori를 '선험적'으로 번역합니다. 그 전에는 대개 tr.을 '선험적'으로, ap.를 '선천적'으로 번역되었었는데, 그런 기존의 관행이 ap.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innatus(본유적/선천적)와 ap.를 혼동시키기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ap.를 '선험'으로 번역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r.에 있습니다. transzendental이란 개념은 칸트 자신이 창안해낸(혹은 칸트 시대에 창안된)개념입니다. 물론 tr.은 스콜라철학의 transzendentalia(초월자/직역하자면 초월적인 것들)과의 일정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과거에 '초월'은 'transzendent'의 번역어였고, transzendent와 transzendentalia는 중세 스콜라의 신학적 맥락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종현 선생님은 transzendentalia와 tr.의 관련성 때문에 이를 '초월적'이라 번역하고, 기존에 '초월/초재'라 번역되던 transzendent를 '초험'이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초월'이란 역어는 니체의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번역할 때와 꼭 같은 난점을 가지게 됩니다. '초월'이나 '초인'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혹은 읽었을 때, 저는 언제나 super-natural 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저에게만 해당하는 극주관적인 느낌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칸트의 tr.은 그 자신이 설명하듯 ap.와 밀접한 개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둘이 서로 치환되어 사용되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죠. 칸트는 'a priori한 인식'이란 표현으로 '대상 일반에 대해 가능한 순수하고도(경험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을 의도하고 있고, transzendental이란 표현으로는 'a priori의 가능성을 문제삼는/탐구하는'이라고 설명합니다. <순수이성비판> 머리말의 유명한 구절 중에 "transzendental Philosophie는 a priori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이다."라는 말도 있는데(정확하진 않습니다), 어쨌듯 '초월'이란 역어는 이상합니다. 이런 사정때문에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tr.의 번역에 있어서도 '선험'을 사용하곤 합니다. 한편 김상봉 선생님은 tr.과 ap.의 연관성을 고려하시고 tr.을 '선험론적'이라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저는 백종현 번역본을 읽을 때, transzendental이라는 표현을 '선험론적'으로 모두 바꾸어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요. 또 tr.은 이후 하이데거나 프랑스철학에서도 많이들 사용되는 개념인데, 번역할 때는 보통 a priori랑 구별 없이 둘 다 '선험적'으로 번역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17 10:25   좋아요 0 | URL
댓글로만 읽기에는 아까운 지적이신데요.^^ 김상봉판도 기대가 됩니다(갑자기 '칸트 르네상스'라도 된 듯싶네요). 저도 오래전 읽은 기억으로 '선천적/선험적'을 '선험적/초월적'으로 바꾸고 transzendent인가를 '초재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을 읽은 듯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학술용어/전문용어의 경우 의미상의 맞대응어를 찾기는 어렵고, 그걸 고정시키고 사용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정/사용에 얼마간의 '근거'나 '적합성'을 고려해야겠지만요. 더불어 이해의 용이성도 중요하게 고려해야겠구요. 이런 대목에선 같은 전공학자들끼리도 합의가 어려운 듯싶어요. 들뢰즈 번역어들의 경우도 그렇고. 그게 물론 학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골탕'먹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번역된다는 걸 과연 모두 알아야지만, 칸트를 이해할 수 있고, 들뢰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좀 소모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푸른바다 2009-05-18 14:20   좋아요 0 | URL
초인에 대한 님의 느낌이 극주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에겐 꼭 super natural의 느낌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super natural한 힘을 가진 자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는 '초능력자'이지 '초인'은 아닌 것 같네요^^ 유리 겔라를 초능력자라고는 해도 초인이라고 하면 어색하듯이 말입니다. '초인'이란 말은 일상어에선 명사로 보다는 '초인적'이란 형용사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때도 니체적인 의미의 초인과는 물론 다르겠지만 '초능력'과도 매우 다른 보다 현실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말은 유리 겔라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를들어 야구에서 '초인적인 역투'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형용사적으로 사용된다는 건 초인의 경지에는 달성할 수 없다는 걸 전제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초능력 보다는 현실적인 개념으로 제겐 느껴집니다.

이육사의 '광야'에도 초인이 등장하는 데, 이 개념이 니체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super natural한 힘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독일어에서 ubermensch도 어차피 신조어니 이의 간결한 번역어인 '초인'에도 니체가 ubermensch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다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네요. 위버멘쉬하면 전 왠지 '어륀지'가 연상되어 웃음이 나옵니다.

로쟈 2009-05-17 22:31   좋아요 0 | URL
네, 하지만 '위버멘쉬'론자들은 동일한 사안이라고 생각지 않는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5-17 23:04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니체가 이 땅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서양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집이 2회나 간행된 철학자도 니체가 유일한 듯 싶고... 번역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마음에 맞는 번역어를 고르는 것은 '오역'만 아니라면 어느정도 자유의 영역에 속하겠죠. 하지만 이 번역어의 생존 여부는 민중이 얼마나 그 번역어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초인이라는 번역어는 니체가 이땅에서 읽힌 이래 영원회귀와 함께 니체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였고, 니체를 읽으면서 느꼈던 수많은 개인적인 감정들과도 얽혀 있습니다. 전 아무래도 위버멘쉬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마 많은 니체 독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주에는 눈에 띄는 신간이 많지 않다. 물론 그래도 항상 몇 권 정도는 읽어볼 만한 책이고, 소장해 둘 만한 책이다(백종현 교수 번역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도 출간됐지만 너무 고가여서 일단은 관망하기로 했다). 예술분야의 책 가운데 '이주의 책'으로 꼽을 만한 것은 이자벨 밀레의 <미완의 작품들>(마음산책, 2009). 책은 제목만으로도 얼마간의 값어치를 한다. 즉, 영감을 준다! 이런 책은 내용보다도 저자가 처음 구상을 하고 거기에 걸맞은 작품들을 고르고 원고를 써나가는 과정 자체가 더 흥미로울 듯싶다(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래서 저녁에 외출을 했다가 아예 사들었다. 미켈란젤로의 노예상들에서 조르주 페렉의 <'53'일>까지 11점이 저자가 다루는 미완성 작품들의 목록인데, 물론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 책 또한 '미완성'이다. 사실 10점이나 12점이 아닌 11점만을 다룬 것도 그런 미완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저자의 고려이다. 내가 만약 '미완의 작품들'이란 책을 쓴다면 어떤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시간이 좀 나면 혼자 궁리해봐야겠다...    

  

서울경제(09. 05. 16) 미완의 작품 그 비밀을 들춰보다 

'논 피니토(non finito)'. 미완성의 미학을 일컫는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당시 사람들이 발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유난히 미완의 작품이 많았다. 의문과 탐구가 미완까지 용인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19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塋墓) 구상을 지시받는다. 하지만 중간에 변덕을 부린 교황과 메디치가를 비롯한 다른 권력자들의 주문으로 영묘 제작은 진행과 중단을 되풀이했다. 때문에 40년 뒤 완성 시점에 '노예상(像)'들은 영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른 주문에 밀려 미완성으로 남은 것.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거장의 손길은 돌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노예상은 마치 대리석 안에서 숨쉬던 인간이 뚫고 나오는 찰나를 보여주는 듯 생생하다. 지금은 피렌체에 5점, 루브르 박물관에 2점이 전시중인데 사람들은 이 노예상 속에서 메디치가와 교황의 주문으로부터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항상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던 미켈란젤로의 저항과 고통,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베르디 이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꼽히는 자코모 푸치니(1858~1926)의 오페라 '투란도트'에는 열정이 담겨 있다. 60대의 푸치니는 웅장한 이야기와 새로운 곡풍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하고자 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푸치니는 그러나 3막을 작곡하던 중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뒷부분은 당시 토리노 음악원장이던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 1926년 4월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이 작품의 초연을 맡은 토스카니니는 "이것으로 거장의 작품이 끝났습니다. 그 분은 여기까지 작업한 후 돌아가셨습니다"라며 다른 지휘자에게 자리를 넘겼고 객석은 눈물 바다가 됐다.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가 188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40년간 건설 책임을 맡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은 건축가 사후에도 건설 중이며,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는 일부러 끝맺음 단계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프랑스 작가인 이 책의 저자는 미완의 작품들은 초고와 걸작의 중간지점에서 작품 제작과정에 대한 비밀을 완성된 작품보다 더 많이 드러낸다고 소개했다. 음악과 문학, 미술을 넘나들며 11개의 미완을 보여준다.(조상인기자)  

09.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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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5-16 04:43   좋아요 0 | URL
와 이 책 너무 재미있어보이네요.
언제나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

로쟈 2009-05-16 10:03   좋아요 0 | URL
저랑 '감'이 비슷하시네요.^^

2009-05-17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0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 표지를 전송받았다. 시안은 확인했지만('서재'가 컨셉이다) 표지 최종판은 나도 처음 본다. 표지에 박힌 몇몇 인물 사진이 교체된 걸 알겠다. 페이퍼로 옮겨놓으니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데, 여하튼 이런 모양새의 책이 내주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래도 기다리신 분들께는 좋은 '기념품'이 되면 좋겠다(내용의 대부분은 내가 그동안 서재에 풀어놓은 것들이므로 아주 낯설지는 않으실 테니까).   

 

09. 05. 15. 

P.S. 이미지상으로는 잘 읽히지 않는데, 부제는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이다. 제목이 뜻하는 바는 '책머리에'에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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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의 인문학 서재 제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18 13:21 
    예정대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가 오늘 출간됐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배포가 될 듯싶고, 일반서점에서는 이르면 수요일부터 구매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오늘 밤에나 책을 받아볼 듯싶은데, '기념'으로 책의 제사(에피그라프)도 소개한다. 지난번에 표지 이미지를 올려놓았으니 의당 '제사' 차례이기도 하다. 사실 책장을 열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것이 '제사'(혹은 '헌사')이지만 거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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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5-16 21:1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연두부 2009-05-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이런 일을 진행하고 계셨군요..축하드립니다...꼭 사 볼께요 ㅎㅎ

로쟈 2009-05-16 21:15   좋아요 0 | URL
몰래한 건 아니고, 작년부터 예고됐던 일입니다.^^;

김도마 2009-05-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어떻게 편집이 되었나 궁금하네요~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로쟈 2009-05-16 21:15   좋아요 0 | URL
극히 일부(?) 글을 수정하고 편집한 책입니다...

푸른바다 2009-05-1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7번 째 댓글이네요. 뒤늦게 나마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많은 책들을 출간하시기 위한 신호탄으로 알겠습니다^^ 표지 디자인에는 직접 관여하셨는지요? 어째 사르트르가 빠졌네요^^

로쟈 2009-05-16 21:16   좋아요 0 | URL
왼쪽 하단에서 발견하실 수 있을 텐데요.^^ 책도 독자가 있어야 낼 수 있는 것이죠.^^;

키노 2009-05-1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인문학 책들이 어려운 내용들만 담은 것이 많았는데 로자님이라니까 급관심^^ 출간을 축하합니다

로쟈 2009-05-17 22:30   좋아요 0 | URL
네, 너무 어렵지 않은 글들을 고르려고 애썼습니다.^^;

Sati 2009-05-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드디어군요. 축하드려요. 장바구니에 넣고 메일로 축하선물(?) 보내드릴게요.

로쟈 2009-05-17 22: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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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좀 뒤늦게 꼽아본다. 밀린 일들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다가 잠시 한숨 돌린 터인데, 이달에 따로 시간이 날 것 같지도 않으니 얼른 몇 자 적어두어야겠다. 흔히 '5월을 푸르구나'라고 하지만 요즘 같아선 '5월도 무덥구나'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열치열의 독서를 5월부터 해야 하다니...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고른 책은 서울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강, 2009)이다. 왜 여성작가들에게만 소설을 의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울을 배경으로 각각 한 편씩의 단편 소설을 써낸 아홉 명의 여성작가들은 제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지금의 한국문학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이 그려내는 서울은 누구의 서울이 아니라 우리의 서울이다. 북촌이나 삼청동, 홍대 앞이나 혹은 강변북로 그리고 숱하게 우리의 발짝이 찍힌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남성 작가들의 신작 소설을 두 권 골라본다. 박성원의 네번째 소설집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문학동네, 2009)와 전성태의 세번째 소설집 <늑대>(창비, 2009). 후자는 특이하게도 몽골을 배경으로 한 소설집이다. 몇 년전에 표제작을 읽고 강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평을 참고해봐도 좋겠다.  

표제작 <늑대>는 아스팔트 포장길로 상징되는 ‘자본의 검은 혓바닥’이 몽골의 순정한 초원을 잠식해 들어가는 양상을 인상적으로 그린다. 거구의 수컷 늑대를 사냥하려는 ‘솔롱고스 사업가’는 한국과 자본의 몽골 침탈을 대리하는 인물이다. “국경이 사라지고 그저 자본의 의지만으로 굴러간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나 하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몽골인 촌장은 그의 침탈에 협조하는 대가로 수익을 챙기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점으로 서술된 아래의 문장들은 사회주의 몰락 이후 몽골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를 슬프지만 아름답게 요약한다.      

“한잔 수태채가, 게르에서 하룻밤 잠이 돈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장작을 패는 노동이, 늑대를 쫓는 동행이 벌이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게르 천창으로 빛나는 별과 스미는 달빛이, 지나는 바람과 흩날리는 눈이 역시 돈의 현영(現影)처럼 손님들을 끌어왔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단순히 초원과 자본 사이의 대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잠든 골짜기를 깨우는 낡은 총소리로 상징되는 뜻밖의 결말은 여러 겹의 모순이 충돌하고 확산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향해 소설을 열어 놓는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씨가 고른 책은 김경임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홍익출판사, 2009)이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아니라 '바늘'일까 궁금할 뿐),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다룬 책이라 한다(관련서 두 권의 이미지를 같이 붙여놓았다). 추천의 변을 보면,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란 부제가 붙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출간되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국제적 시각을 갖게 되었고, 꾸준한 연구 결과 이 책을 펴낼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란 유럽인들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 붙였던 별칭이다."  

덧붙여 책의 장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세계 유수의 문화재 약탈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약탈의 현장으로 안내하면서도 약탈당한 문화재의 사연과 현황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란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4장 ‘그들은 어떻게 문화재를 돌려받았을까’나 제5장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언제 돌아올까’는 저자의 이런 일관된 관점의 소산이다. 덴마크에서 아이슬란드로 돌아간 고문서와 미국에서 헝가리로 돌아간 성 스테픈 왕관 등의 반환 사례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나 몽유도원도, 이토오가 반출해 간 수많은 규장각 도서 문제 등과 맞물리면 우리의 현재 문제가 되고 바람직한 미래가 된다."  

안 그래도 어제 몽유도원도 관련기사가 떴었는데, 내용인즉 이렇다. 우리 문화재이지만 일본의 국보가 돼 있는 현실을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선 전기 회화를 대표하는 안견(安堅ㆍ1418?~1453?)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13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전망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오는 9월로 예정된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을 위해 ‘몽유도원도’ 소장처인 일본 텐리(天理)대학 측과 전시대여를 협의 중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텐리대와 구두로 대여 합의를 끝냈고 협약서 작성 절차를 거쳐야 전시가 확정된다”고 11일 밝혔다. ‘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청 이전 개관전, 1996년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조선 전기 국보전’ 때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1447년 4월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내용으로 사흘만에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작품 대부분이 전칭작(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인 가운데 진품임이 확인된 유일한 현존 작품이다. 안평대군이 발문해 신숙주와 박팽년 등 당대 명현 21명이 찬시를 써 그 가치가 더욱 높다. 1453년 계유정란 이후 사라진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49년 재일교포 고미술상이 팔기위해 ‘몽유도원도’를 한국에 들여왔지만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본 도쿄의 고미술화랑 류센도(龍泉堂)로 넘어간 작품을 이후 1950년대 초 덴리대가 구입했다. 일본은 ‘몽유도원도’를 국보로 지정했다.(서울경제)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하이데거의 <횔덜린의 송가>(서광사, 2009)이다. 이번에 <횔덜린 시의 해명>(아카넷, 2009)까지 출간됨으로써 <횔덜린의 송가 '이스터'>(동문선, 2005)까지 포함하면 얼추 하이데거의 횔덜린론이 무엇인지 알아볼 정도로는 소개된 게 아닌가 싶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하이데거는 40여 년의 후반기 학문적 인생을 횔덜린과 대화하면서 보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는 2천년 이상의 서양 사상사 전체와 작별하고 미래 사상사를 여는 전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존재론이 역사-정치철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횔덜린의 송가: 게르마니엔과 라인강』은 이 길고 긴 대화의 첫 대목이다. 이것은 철학이 시와 만나는 가장 극적인 장면에 해당한다. 이 책이 있어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이데거 얘기가 나온 김에 몇 권 추가해놓는다. 김유중 교수의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 2007)는 아직 손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무슨 이야기가 쓰여졌을지 궁금한 책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예술론을 집약해놓은 책 <숲길>(나남, 2008)과 하이데거 예술론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김동규의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그린비, 2009) 등도 묶어서 읽어보면 좋겠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은 대학원 시절에 읽었으니 어느덧 십수 년 전이다. 다시 읽으면 만감이 없지 않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얼마전에 다룬 바 있는 알리샤 쉐퍼드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프레시안북, 2009)이다(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2779680 참조).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두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틴이 제목을 감당하고 있는 '기자들'이다. 이번에 같이 나온 당시 편집장 벤 브래들리의 회고록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프레시안북, 2009)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의 자서전까지 곁들이게 되면, 아주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듯하다. 아예 워터게이트(혹은 닉슨)를 다룬 영화들까지 포함할까.  

 

예상할 수 있는 추천의 변은 이렇다. "알리샤 C. 셰퍼드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은 미국 정치사와 언론사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두 기자들의 취재 과정을 중심으로 추적한 의미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자기보전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생태와 이를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 쉽게 깨우쳐 주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대중 교양서이다." '자기보전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생태'가 닉슨에게만 국한됐을 리는 없는데, 이후엔 왜 이런 '특종'이 안 나오는 것인지 문득 궁금하다. 특종 정신의 실종인가?..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구정화의 <퍼센트 경제학>(해냄, 2009)이다. 제목만 보면 경제통계를 다룬 책이겠구나 싶은데, 실상도 그러하다. "통계수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경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계수치에 관한 지식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1인당 국민소득 정도나 알고 있을 뿐 그 이외의 통계수치는 거의 깜깜한 수준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경제 관련 통계수치를 거의 망라하다시피 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추천의 변이다.  

그런데, 사실 통계야 '디테일'이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일단 '큰 줄거리'가 아닐까. 언제 '바닥'을 칠 것이며, 언제 '불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 한국경제와 세계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같은. 그런 점에서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푸른숲, 2009)와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2009)에 먼저 눈길이 간다. <퍼센트 경제학>은 부교재로 읽어도 좋겠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산책자, 2009)다. 책은 오래전 <아메리카>(문예마당,1994)로 출간된 적이 있다. 이번에 역자가 재번역하고 편집도 새롭게 하여 나왔다. 원저는 1986년에 나온 책. 추천사에 따르면,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  <아메리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그의 미국 여행 체험에 근거한 것으로, 미국 여행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묘사는 주로 속도, 사막 그리고 미국 생활의 형이상학에 집중되어 있다.(...)  보드리야르의 ‘미국론’은 미국이 실현된 유토피아로서, 노쇠한 유럽과 비교해 완승한 근대성을 대변한다고 결론지을 때 극에 도달한다."    

이번에 나온 책에는 유진 리처즈의 사진집 <우리 미국인들(Americans We)>(1994)에 수록된 사진들이 여러 장 포함돼 있다.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편, 보드리야르의 시선이 외부자의 것인 만큼, 골수 아메리칸(Made in America)의 아메리카 이야기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살림, 2009). '종횡무진'이란 말이 빌 브라이슨만큼 잘 어울리는 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7. 과학 

과학분야의 책으로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건 김제완의 <겨우 존재하는 것들 2.0>(사이언스북스, 2009). 제목에 '2,0'이 들어간 것은 예전에 동명의 책이 출간됐었기 때문이다. 같은 저자가 쓴 <겨우 존재하는 것들>(사이언스북스, 1993)이 그것이니까 16년만에 2.0이 나온 셈. 대단한 '과작'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은 발견하기가 너무 어려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중성미자를 일컫는 말이다. 저자는 물리학이 겨우 존재하는 것들로 이뤄진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학문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제목과 추천사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소립자 물리학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작년 5월에도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사이언스북스, 2008) 등을 읽을 만한 책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아직 안 읽었으니 물리학 베스트셀러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2008)와 같이 한번 더 묶어놓는다. 대학도 졸업한 마당에 명강의로 소문난 교수들의 물리학 강의를 언제 또 들어보겠는가.(흠, 그래도 5월엔 시간이 안 날 듯싶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최민식의 사진집 <낮은 데로 임한 사진>(눈빛출판사, 2009)이다. 예전에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 1996)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벌써 오래전이다. 작가의 근황을 둘러볼 수 있는 책일 듯싶다. 추천의 변을 읽어보니 "<낮은 데로 임한 사진>이란 최민식이 자신의 사진 30여 점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부산 피난 시절부터 인간과 삶의 본질을 깨달아 알게 된 사진가는 하루도 빼지 않고 50년 동안 셔터를 눌러왔다. 늘 소리 없이 발언을 하고 있는 그의 사진들만 보다가,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구수하다. 그리고 최민식의 사진들은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비도 오고 했는데, 어떤가, 이런 사진. 좋지 않은가.  

9. 교양

이한우 기자 꼽은 교양서는 인디고 아이들이 지은 <정세청세>(궁리, 2009). "정세청세란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를 줄인 말이다. 그 청소년들은 우리나라 아이들이다. 부산에 있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함께 인문학을 공부해 온 아이들이 그동안 쌓은 내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단 의미가 있다."는 책이다(인디고 아이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1044893 참조). 다시 둘러보니 꾸준히 책을 펴내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편향된 사교육 신자들도 '반성'을 좀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 사진은 하워드 진을 찾아간 인디고 아이들의 모습.  

한 인터뷰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0399.html)는 이렇게 끝맺는다. "인디고 아이들은 “청소년들이 깨어 있지 않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부조리를 느끼면서 그것을 바꾸려는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열쇠는 인문학이다. 우리말로 인문학이라고 번역되는 말들을 보면 그 성격이 자유로우면서도(Liberal Arts) 인본적(Humanities)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답은 거기에 있는 걸까. 앞서 어른들의 ‘진짜 사회’에 물음을 제기한 참가자는 “나의 가치가 이 세상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이들이 만들어낼 다음 세대의 인문학이 기대된다.    

10. 비정규직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의 주제로 이달에는 ;비정규직'을 골랐다. 장귀연의 <비정규직>(책세상, 2009)으로 먼저 개념에 대해 정리를 한 다음에(같은 저자의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책세상, 2006)을 골라도 무방하겠다),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이후, 2009)과 <부서진 미래 -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삶이보이는창, 2006)로 '실습'을 해보면 되겠다. 만약 비정규직 문제가 남의 문제라고 여겨진다면 당신은 '대한민국 기득권자'다. MB와 함께 각별히 조심하면서 남은 인생을 즐기길 바란다. 나머지 '대한민국 떨거지'들은 '벼랑 끝'에 서서 '부서진 미래'를 내다보며 해법과 방책을 모색해 보아야겠다. 계절이 좋긴 하나, 어쩌겠는가... 

09. 05. 12.   

P.S. '이달의 고전'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골랐다. 완독하지는 않더라도 몇몇 문단을 자세히 읽어볼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가령, 1권에 나오는 '행복한 삶' 같은 주제를 놓고 숙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고전은 두고두고 읽는 책인 만큼 그냥 부담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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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5-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책 소개보다 몽유도원도 전시 소식이 눈에 확 뜨입니다. 구두협약까지 갔다면 거의 성사된거군요. 일본의 경우 쉽게 구두협약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니...
9월에 서울 갈 일이 생겨버렸어요. ㅎㅎ

로쟈 2009-05-13 08:33   좋아요 0 | URL
저는 김윤식 교수의 기행문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일본의 국보라는 걸...

노이에자이트 2009-05-14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의 자랑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헌책방 거리와 인디고 서원이지요.하워드 진 동무까지 만나다니 대단합니다.

로쟈 2009-05-15 22:46   좋아요 0 | URL
지젝 원고도 받아내고 그랬지요.^^

드팀전 2009-05-1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달에 한번쯤 인디고 가서 책을 사는데요...그냥 가보는거죠.제가 팔아준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만 어차피 살거 가끔씩은..그곳에서도 그런 심정이지요. 그런데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지난번에 가서는 책진열방식을 조금만 바꾸어도 좋을거라고 이야기했어요.책을 쌓아서 진열해놓거든요.아래에 어떤 책이 있는지 옆에 쌓아놓은 책과의 간격이 좁아서 안보입니다. 일괄적으로 15%정도 틀면 아래까지 다 보일텐데하고 말했습니다. 약간만 틀어주는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드는데 그걸 ^^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정도 트는 것은 기본아닐까 싶은데 다음번에 가서 한번 봐야지요.ㅋㅋ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예전에 <불황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종서적에서 나온적이 있었는데...영어 원제도 같아요.2008이 하나 더 붙은 걸 보니 다른 책일 듯 보입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9-05-15 22:45   좋아요 0 | URL
직접 가보면 그런 문제가 눈에 들어오겠지요.

2009-05-23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