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교수신문의 '출판 트렌드'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으로 들여다 본 책들의 풍경'을 다루고 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근간에 나온 '책읽기 책'들을 구경해본다는 의미가 있다. (픽션들을 잘 챙기지 않은 탓에) 몇 권의 책은 나도 기사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교수신문(09. 07. 06) 우리는 모두 통한다… 책으로 들여다 본 책들의 풍경
카를로 프라베티의 장편소설 『책을 처방해드립니다(Calvina)』(김민숙 옮김, 문학동네, 2009) 한국어판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소설의 일부분이다. 네 번째 꼭지 제목인 ‘남자애야, 여자애야?’로는 다소 미흡하다. 전체 내용은 ‘칼비노야, 칼비나야?’라는 식의 제목이 걸맞다. 이 소설은 양자택일로 일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거양득한다. 둘 중에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서도 둘 다 얻는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역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성취한 바 있다. 거의 모든 격언이 그렇듯,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의 문제 또한 삶과 죽음의 극한 대비(혹은 그것의 들이밂)보다 앞뒤 맥락이 더 중요하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김정환 옮김)
아무튼 프라베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부인은 책을 처방한다. 노부인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창백한 남자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아침에 열 쪽, 정오에 또 열 쪽, 그리고 자기 전에 스무 쪽 읽으세요.” 독서가 정신건강을 돕는다는 게 그 이유다.
서평집을 두 권이나 펴낸 ‘회사원 철학자’는 회사원이 아니라 ‘철학자’다. 회사에 다닌다고 철학박사학위 소지자를 ‘일반’ 회사원이라 할 수는 없다. 인문학 서재의 주인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으로 여겼다. 맞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 지음, 산책자, 2009), 바꿔 말해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을 운영하는 ‘곁다리 인문학자’는 세칭 명문대를 다녔다. 그는 문인자격증을 갖고 있다.
나는 로쟈가 20대인 줄 알았다. <한겨레21> 칼럼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린 필자 사진을 보고선 30대로 생각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는 이제 40대에 들어섰다.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니고 『죄와 벌』의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다. 로쟈는 “로지온의 애칭이다. ”고전에 대해 약간 배타적인 나는 로쟈의 고전론에 반발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삶은 당당한 삶이고 기품 있는 삶이다.” 과연 그러하고, 정말 그래야 하나?
『Calvina』에도 살짝 등장하는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관이 외려 미덥다. 칼비노가 말하는 고전은 다시 읽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여기서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이제야 읽고 있지만 별로 안 부끄럽다. 로쟈가 우리말로 옮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인터뷰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확실히, 깬다. 노벨상은 거부하지만 상금은 받겠다고 했다니.
『번역가의 서재』(한길사, 2008)는 번역가 김석희의 ‘역자 후기’ 모음으로, 첫 10년간의 번역 작업을 정리한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1997)에 이은 두 번째 10년 동안의 매듭이다. 번역가는 세 번째 ‘역자 후기 모음집’을 펴내면서 은퇴하길 바란다.
루이스 버즈비의 『노란 불빛의 서점』(정신아 옮김, 문학동네, 2009)은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도 한때는 거의 매일 서점을 드나들었다.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마음은 뜨겁게 불타오르는데 몸은 조용히 가라앉는 그 비밀스러운 곳”(뒤표지)은 서점일까, 도서관일까. 도서관일 것도 같지만 서점이 정답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서점 취업문을 두드린 버즈비는 서점에서 10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을 7년 했다. 지금은 현업에서 손을 뗀 상태지만 일주일에 다섯 번은 서점에 간다는 그가 부럽다. 디지털도서관이 도서관이 아닌 것처럼 인터넷서점은 서점이 아니다. 인터넷서점에선 뜨겁게 불타오르는 마음과 조용히 가라앉는 몸이 연출하는 ‘황홀한’ 형용모순을 체험하게 어려워서다.
조지 오웰과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점에서 일한 적이 있는 작가다. 산문선집 『코끼리를 쏘다』(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2003)에 실린 「서점의 추억」에 나타난 오웰의 헌책방 점원 경험담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내가 서점을 경영하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는, 책방에 있는 동안 책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 서점의 16살짜리 알바였던 망구엘은 서점에 들른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며 강한 문학적 영감을 얻는다.
“출판인은 ‘책의 공화국’을 꿈꾼다. 책을 통해 지성과 이성의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책의 공화국에서-내가 만난 시대의 현인들, 책만들기 희망만들기』(한길사, 2009) ‘책머리에 부치는 말’을 마무리하며 종로서적 폐업의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참으로 의미 있는 문화적 인프라를 우리 사회는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고마움의 표현으로 ‘책머리에 부치는 말’을 맺는다. “고맙습니다./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되어/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책 공화국’의 일개 시민인 것이, 책 동네 주민의 한사람인 것이 참말 감사하다.(최성일 출판평론가)
09. 07. 12.
P.S. 말이 나온 김에 '서평집' 혹은 '독서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신간을 몇 권 더 꼽자면, 이권우의 <죽도록 책만 읽는>(연암서가, 2009)와 장석주의 <취서만필>(평단문화사, 2009), 그리고 구본준, 김미영의 <서른 살 직장인, 책읽기를 배우다>(위즈덤하우스, 2009). 앞의 두 저자는 각각 도서평론가와 문학평론가이니 '업자들'의 책이고, 뒤엣책은 기자인 두 사람이 '책읽기'에 대한 답을 찾아 취재여행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독서 에세이'라기보다는 '독서인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업자'가 아닌 순수 직장 독서인의 책으론 성수선의 <밑줄긋는 여자>(웅진윙스, 2009)도 신간이다. 굳이 더 소개가 필요하진 않겠지만, 제목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긋는 남자>에서 따온 것이다. 특이한 책으론 도서관 사서들의 이야기를 적은 스콧 더글라스의 <쉿, 조용히!>(부키, 2009). 이 또한 '독서 에세이'라기보다는 '사서 에세이'라고 해야 할 듯하니 새로운 하위장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