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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와 파괴』역자 인터뷰 ―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 철학의 결합 

자기소개를 간략하게 해 달라. 지금까지 어떤 공부를 해왔는가?
원래 한국에서 전공한 것은 ‘러시아 문학비평사’, ‘러시아 근대 지성사’였다. 그런데 박사과정 중에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에 방향이 조금 변하였다. 대학 안의 분과제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유학을 할 때는 문화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미하일 리클린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어떤 인물인가?
이 책은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 리클린을 두 차례 만나서 인터뷰까지 했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유럽에서 자신의 책을 내고 있고,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등, 인류학적인 연구를 했었다. 하지만 박사학위는 ‘구조주의 연구’ 였다. 1980년대 중 후반, 당시로서는 운이 좋게도 베를린, 파리에서 현대철학의 흐름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데리다와 세미나를 오래했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해체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공부에 밑천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흐름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새로운 러시아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유럽의 현대철학을 주도하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그 내용을 잡지에 올리고, 책으로도 묶어낼 수 있었다.

『해체와 파괴』는 제목부터 뭔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어떤 의미의 제목인가?
해체와 파괴는 데리다와 하이데거에서 논점을 끌어다 쓰는 대구적인 표현이다. '해체'는 당연히 데리다와 해체주의에서 온 것이다. 파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근대 형이상학의 종점을 보면서 이야기 한 말인데, 이걸 끌어다 쓴 것이다. 물론 니체에게도 쓴다. 전통적인 사유의 '틀'을 조각내버리는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포스트 모던한 사유이다. 리클린 본인의 이야기로는 들뢰즈의 사유를 '파괴'라는 말로 설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과는 들뢰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나도 리클린을 만났을 때, 꼭 그 단어 밖에 없는가 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 사유에서 이야기 하는 '탈주선'의 사유를 리클린 자신은 파괴적인 선들로 이해한다고 이야기 했다. 국민으로서, 한민족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와 같은 '~로서'의 규정들을 비켜나가는 힘들, 이것들이 기존에 규정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선들을 만들 때 그 선은 분명 파괴의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해체'가 기존 전통철학의 고정된 틀을 깨는 동력이 된다면, '파괴'는 그런 규정들을 넘어서는 힘으로 볼 수 있겠다.

『해체와 파괴』에 대담자로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인가?
리클린이 90년대를 전후해서 유럽에 체류할 때, 본인이 생각하기에 유럽의 현대 지성,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뽑은 것이다. 다만, 지금과는 (시간적인) 격차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시의성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의 유럽 사유를 정리하는 의미에서라면 이들이 갖는 대표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본다.

향후 개인적인 작업 계획이 있다면?
내가 러시아 전공자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뭘 끌어와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적 담론이 구성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러시아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그것은 지금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황이 어떻다는 것과는 무관할 것 같다. 러시아가 거지나라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지적 자원은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고, 러시아 정치제도가 후진적이라고 해도 역시 그로부터 반발적으로라도 우리의 지적자원으로 유용하게 쓰일 것들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러시아 사유의 면면한 흐름들을 한국에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서구와도 비슷하면서도, 서구와는 다른 것들, 현재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을 조감해 보는 것은 러시아의 과거를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09.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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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철학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관계 규정', '지적자원으로 유용', '사유의 도정' 이라는 말에 대해서 음미해봅니다. '도정'과 '보리개떡'에 대해서도.

로쟈 2009-09-13 19:37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유머신 거지요?^^

목동 2009-09-14 08:39   좋아요 0 | URL
산행중 선배에게 '왜,,산을 다니십니까?' 물었더니,
"생각을 깨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도정'은 곡립의 등겨층을 벗기는 조작입니다.
저는 '사유의 도정'과 '생각을 깬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친께서 만들어 주신 "보리개떡"을 추억했습니다.
호밀가루 대신 사용한 '맥강'은 보리를 보리쌀로 몇 번
도정하면 나오는 보리가루입니다.
모친는 물먹인 '맥강'을 부풀리기 위해 '소다'를 넣고,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를 넣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시누대를 건 다음 모시천을 깔고, 그 천위에 어른 손바닥만한 맥강빵(보리개떡)을 찌셨지요.
저에겐 최초의 빵이었습니다. '사유의 도정'은 제 유년의
추억속에 남아 있는 '보리개떡'처럼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비열한 법치주의와 사법 불의

이번주에 눈에 띄는 신간은 저널리스트들이 쓴 역사서이다.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를 다룬 로렌스 라이트의 <문명전쟁>(다른, 2009)과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이란 부제를 단 브루스 왓슨의 <사코와 반제티>(삼천리, 2009). 미국사/문명사의 한 단면을 자세하게 파헤치고 있는 책들인데, 개인적으론 내용보다도 이런 책들을 쓸 수 있는 필자와 시장 조건이 좀 부럽다. 이번주 한겨레21의 커버스토리가 '소설 쓰는 시대'이기도 했지만(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722.html), 내가 좀더 부럽다고 생각하는 쪽은 '넌픽션 쓰는 사회'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 보는 사회'도 나름대로의 '문화'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넌픽션 쓰는 사회'가 좀더 전망이 있다고 본다.  

 

<문명전쟁>과 <사코와 반제티>는 언론리뷰에서 크게 다루어졌기에 군말을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사코와 반제티>의 경우 한국사회의 현실도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 또 그런 점에 주목한 기사도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09. 12) 왜 미국은 이들을 '전기의자'에 앉혔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미국 땅에서 두 남자는 강도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한다. 세계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했고 미국은 훗날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통해 잘못을 인정했다. 두 희생자 니콜라 사코,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신대륙 미국을 찾아 온 이탈리아 이민자였다. 각각 제화공, 생선장수로 일했던 둘을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한 인물로 기억한다. 사코는 가족을 성실하고 소중하게 대했으며 반제티는 문학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들에게는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에 공감했고 무정부주의 조직에서 활동했다. 

사코와 반제티가 미국에 온 지 12년이 지난 1920년 4월 15일 사건이 발생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소도시 브레인트리에서 현금가방 강탈 사건이 일어나 경리 등 직원 2명이 살해됐다. 경찰은 총과 총탄을 갖고 있던 사코와 반제티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두 사람은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반제티는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코는 아들에게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뚜렷한 물증이 없었지만 사형이 언도된 것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 물결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세기말부터 인권, 노동운동이 고양됐고 진보주의 진영의 사회개혁 요구가 거셌다. 무정부주의자 역시 사회개혁 요구 운동에 적극 가세했고 사코와 반제티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요구가 거셀수록 반대편의 대응 또한 거칠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국에서는 애국주의가 확산됐고 대대적인 좌익 검거 선풍이 불었다. 두 세력은 어떤 식으로든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보수세력은 사코와 반제티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자이고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피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무정부주의자 놈들"이라고 내뱉고 "미국인이라는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부름에 응한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공공연히 강조했다. 심리는 증인들의 모호한 진술과 피고에 대한 유도 심문으로 일관됐으며 반대로 무죄 입증 증거와 알리바이는 채택되지 않았다.

유죄가 확정되고 처형이 임박해지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사형 반대 운동에 나섰다. 런던, 시드니, 베를린, 로마,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시위가 있었고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버트런드 러셀, 마리 퀴리, 앨버트 아인슈타인, 업턴 싱클레어, 버나드 쇼, 로맹 롤랑, 이사도라 던컨 등 명망가들이 두 사람의 구명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1927년 사형이 집행될 당시 사코는 서른다섯, 반제티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이들이 실제 범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유죄를 의심한다. 하지만 객관적 증거 없이 사상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뤄진 처형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한 이름처럼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사코와 반제티는 그 뒤 그림, 소설, 시, 노래, 드라마, 연극, 오페라, 영화, 다큐멘터리 등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고 50년이 지난 1977년, 마이클 듀카키스 미국 매사추세츠주 지사는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듀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 사형 기념식에 참석해 "지금 이 사람들이 유죄냐, 무죄냐를 판결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면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매사추세츠 주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높은 수준의 정의가 사코과 반제티에게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2007년 미국에서 출판됐다.(박광희기자)   

한국일보(09. 09. 12) '사코와 반제티'사건에 투영된 한국사회

미국이 어려움 없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나라 역시 여느 나라 못지않게 심각한 대립과 고통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등을 읽으면 유럽의 백인이 원주민을 밀치고 들어온 그 순간부터 이 나라는 갈등과 혼돈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에는 노동운동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고 사용자와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립은 거세져 파업과 폭동이 잇따랐고 경찰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유입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영향을 받은 작가 잭 런던은 <강철군화>에서 사회주의자의 형제애를 그렸고 업턴 싱클레어는 <정글>에 사회주의를 꿈꾸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 보수층의 좌익 알레르기 반응은 극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겹치면서 애국주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무정부주의자 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전개됐다. 이탈리아 이민자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이른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그때 미국의 사법부는 법과 정의와 양심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역시 한때 일방적인 이념의 광풍에 휩싸여 살았다. 그 시기에는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감옥으로 끌려가고 목숨을 잃었다. 그때 우리의 사법부도,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다룬 1920년대 미국 사법부처럼, 인권보다는 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수십만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한국 노동자보다 훨씬 나쁜 조건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인권을 온전히 보장받지도 못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사코와 반제티 역시 이탈리아계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무시를 받았다. 혹시 우리가 이 땅이 좋아 찾아온 이주 노동자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돌아보아야겠다.(박광희기자) 

09. 09. 12. 

P.S. <사코와 반제티>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상기하게 된 건 엊저녁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뉴스이다. 박정희 군사정부하에서 '사법살인'을 당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보도였다. 관련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찾아보니 경향신문의 원희복 차장이 쓴 <조용수 평전>(1994)와 <조용수와 민족일보>(2004)가 출간된 바 있다(관련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22956). 나름대로 풍부한 내용을 담은, 한국판 '인저스티스'의 사례를 다룬 책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이 읽힐 때 '사법개혁'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일보(09. 09. 12)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유족 등 10명에 국가는 99억원 배상하라”

1960년대 초 북한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사진) 유족 등에게 국가가 99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0부(장재윤 부장판사)는 11일 ‘민족일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된 조 사장의 유족과 생존 피해자인 양실근씨 등 10명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며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조 사장의 유족 8명에게 총 23억원, 양씨 등 2명에게 6억원과 이자를 각각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조 사장의 유족과 양씨 등에 대한 위자료는 총 29억원이지만 사건 발생 이후 40여년 동안의 이자까지 감안하면 정부가 지급해야 할 실제 배상액은 99억여원에 달한다. 재판부는 “반국가단체인 북한 또는 그 구성원을 찬양·고무·동조한 자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쓰고 평생을 사회적 냉대 속에 각종 불이익을 당하였음이 인정되므로 정부는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민족일보 사건은 1961년 군부세력이 혁신계 진보성향의 신문인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간첩혐의자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북한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는 혐의로 체포한 뒤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처형하고 민족일보를 폐간조치했다(*폐간조치한 사건이다).

조 사장은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체포돼 같은 해 6월22일 제정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의 소급 적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해 12월21일 사형이 집행됐다. 양씨는 같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년6개월간 복역한 뒤 풀려났으나 1993년까지 정보기관의 감시 하에서 생활했다. 조 사장의 유족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사건 발생 47년 만인 2008년 1월 무죄선고를 받아냈다.(김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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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2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2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12 17:50   좋아요 0 | URL
자유당정권(말기)'진보당 사건'에 연루로 '조봉암'선생을, 5.16이후 박정권이 '북한찬양고무죄'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시켰군요. 조용수 사장은 조봉암 선생 구명운동까지 했는데, 특히 조용수 사장의 제2심판때 이회창 님이 민관인 심판관이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현재 백낙천 교수는 '포용정책2.0'를, 박세일 교수는 '선진화 포용통일론'(흡수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조용수 사장은 어떤 민족통일론을 주장했을까 궁금합니다.

결국 소비에트혁명이후 미국의 보수층도 무정주의자에 대한 잘못된 체감으로
'사코와 반제티', 우리 또한 북한과 관련하여 남한내 보수층이 자신들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사상범으로 몰아 죽임을 감행했군요.

올해 서거하신 두 분 전직 대통령도 한 분은 사법적 자의에 의해, 또 한 분은 정보기관의 강제 납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던 것을 보면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발전은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기획된 사법살인과 일반 사형이 스페인독감(1918-20)으로 4,000만명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절실히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요?

로쟈 2009-09-13 19:40   좋아요 0 | URL
'백낙청' 교수입니다. 오타가 났네요. 사법살인은 인위적 과실에 의한 것이니 자연재해와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죠. 요즘은 인재도 자연재화화되어 가고 있지만요. 지난주 임진강 사건처럼요...

2009-09-14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4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연수의 신작 소설집이 출간되어 이미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굳이 소개를 덧붙일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개인적으론 얼마전 작가를 가까운 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데,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등장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아서(당연한 일이지만!) 오히려 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서 '어색한 연기'를 한 줄 알았지만, 그냥 그는 평소 포즈가 어색했던 것이다!(작가들은 두 부류가 있는 듯싶다. 사교적 모임에서 발군의 입담과 화색을 자랑하는 경우와 저런 보릿자루가 다 있나 싶은 경우.)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예외적이지 않나 싶다.   

 

경향신문(09. 09. 11) 소설가 김연수 “고통에 대한 글쓰기가 곧 사랑의 경험”  

소설가 김연수(39)의 네 번째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의 수록작 ‘달로 간 코미디언’의 주인공 소설가는 이렇게 호언한다. 하지만 과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부터가 대체 쉬운 일일까. 김연수는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에 도전한다. 김씨가 2005년부터 지난 여름까지 써내려온 소설 9편을 모은 이 책은 ‘고통, 이야기, 이해’에 관한 슬프지만 따뜻한 이야기다.  



김씨가 펴낸 열 번째 소설이기도 한 이번 소설집에서 김연수는 작가로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이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까지는 내가 소설로 쓰고자하는 명확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나는…>을 끝내며 이제 내 얘기는 그만 쓰고 싶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2005년부터는 외부 세계에 나 자신을 맡겨두고 타인과 얼마나 소통되는 지점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소설을 통한 소통에 지극히 회의적이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소설로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는 그런 그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국의 여성 소설가는 17살 연하의 한국인 애인 ‘케이케이’의 고향 ‘밤메’를 찾아 한국을 방문한다. 케이케이는 미국 LA 폭동 때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통역사 혜미는 3살배기이 아들을 잃은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다. 혜미를 부르기 어려워 ‘헬프 미’를 본떠 ‘해피’라고 부르는 소설가. 소설가와 해피의 소통은 원활치 않다. ‘밤메’라는 지명은 어디에도 없고, 비슷한 곳을 어렵사리 찾아가도 그곳은 산업단지가 들어선 황폐한 곳이다. 초조한 마음에 소설가는 해피에게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화를 낸다.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말보다는 서로의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꽃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는데, 각자 혹은 함께 타오르는 불꽃의 온기를 그들은 공유한다.

“서로 소통이 안되니까 그게 고통이잖아”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시각장애인과의 대화를 통해 여자친구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는 ‘달로 간 코미디언’, 인도인 이주노동자와의 서툰 대화를 통해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역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소통에 이르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통의 이해는 무엇을 통해 이뤄지는가. 그것은 이야기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이야기, 이야기를 통한 소통, 그리고 이어지는 불통의 과정을 무겁지 않고 위트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수십년째 매일 도서관에 나와 책만 읽는 노인이 있다. 그는 사실 대공 업무를 담당했던 경찰관으로 그가 고문하던 도중 한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 그는 잠적해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읽으며 “단 한 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을 찾아 헤매지만 그런 이야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이야기는 자기가 쓰는 수밖에. 노인은 속죄의 의미로 그 이야기를 도서관 사서에게 털어놓고 자살한다. 사서는 노인의 고통이 전이된 듯 몸이 아파 휴가를 내려 하지만 상사는 자기보다 먼저 휴가를 가려는 후배가 못마땅해 고함을 지를 뿐이다.

김씨는 “점점 사회적 고통이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것 같다”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말만 계속하는 소설이 부질없는 행위 같지만 절망과 고통에 대해 쓴다는 것이 반어적으로 사랑의 경험들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영경기자) 

09. 09. 10. 

P.S. 기사를 보니 이번에 나온 소설집에서 단편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발표 당시에 읽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우화적이어서 별로 내키진 않았다(위트보다는 작위성이 마음에 걸린 듯하다). "수십년째 매일 도서관에 나와 책만 읽는 노인" 같은 인물이 주인공이면 나는 책을 덮는다('수십년'을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처리하는 소설을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작품집이란 '배치' 속에서는 또 다르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머지 작품들은 틀림없이 걸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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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1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11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통 불통 고통 자살로 이여지는 소설의 끝이 자위적인 느낌입니다.
오히려 사서에게 털어놓고 사서가 자살함으로서 고통의 전이야 말로
사람을 두 번 죽인다는 의미를 동시에 보여 줬다면?

로쟈 2009-09-11 06:31   좋아요 0 | URL
단편 하나만 놓고 보면 그런데, 다른 작품들과 같이 읽으면 의미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09-1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꿔다논 보릿자루입니다 ^^;

로쟈 2009-09-12 08:12   좋아요 0 | URL
네, 보릿자루형도 적진 않지요.^^;

2009-09-11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2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2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2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4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4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daisy 2009-09-1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설책의 표지로는 무척 새로워 보입니다. 내용도 좋겠지만 표지 때문에 사고 싶어지네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학교에서 어쩌다 뵙는 조**입니다. 개강했는데, 못 뵈었네요. 여기를 빌어 짧은 인사 드립니다.

2009-09-12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10-0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봤습니다. 말씀처럼 소설가 김연수 님도 출연하던데요. 여성은 반복된 경험속에서 빠른 규칙을 만들어 적응하는데, 남성은 그 현실속에서 더 헤메다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는듯 합니다. 조물주의 조화로운 계획일지 모르지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바다출판사, 2009)에 대한 서평기사다.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긴 하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몰입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 '정치가 저지른 모든 악행의 근원에는 종교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도 좀 지나친 것으로 여겨졌고 은근한 서구 근대 우월주의도 독서를 불편하게 했다. 포인트를 잡지 못해 꽤나 애를 먹으며 쓴 걸로 기억에 남을 만하다.   

한겨레21(09. 09. 14)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이유, 종교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란 부제가 붙어 있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바다출판사 펴냄)은 입장이 분명한 책이다.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곧,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이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사실 인류사의 대다수 문명과 시대, 지역에서 인간은 정치적 사안의 답을 구하려 할 때 신에게 의존해왔다. 곧 정치신학은 유구한 전통이자 인간 사고의 원시적 형태다. 하지만 서구에서 정치신학은 그에 맞선 17세기 계몽철학자들의 지적 반란과 도전에 의해 무너진다. 기독교 정치신학에서 탈피해여, 신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정치를 생각하고 말하고자 한 새로운 철학이 대두한 것이다. ‘정치신학’에 견주어 말하자면 이것이 ‘정치철학’이다.  

정치신학을 대체함으로써 정치철학은 서구 사회를 정치신학의 반대쪽 강기슭으로 옮겨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많은 문명이 정치신학에 예속된 강 저편에 남아있다는 점이고, 동시에 서구인들이 이룩한 ‘사고혁명’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시금 계시와 이성, 독단주의와 관용주의, 신탁과 합의, 신성한 소명과 통속적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목도하고 있고, 이것은 16세기 투쟁의 되풀이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는 정치신학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정치신학과 근대 정치철학의 논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그것을 재구성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머스 홉스이다.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1651)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인간을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보는 성서의 관점과는 달리 홉스는 인간 자신의 경험에서 모든 것을 끌어내고자 한다. “종교의 징조나 열매가 오직 인간 속에만 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의 씨앗 역시 인간 속에 있다는 점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홉스는 말했다. 그는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간에 모든 인간 행위의 기본 동기는 공포와, 무지, 욕구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법은 정치신학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홉스는 ‘지상의 신’이라는 절대 군주 형상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렇듯 정치신학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종교와 공익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 홉스의 가장 기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독일의 사례인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광신적인 신앙심이 더 이상 근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다만 그들은 종교의 도덕진리를 근대 정치생활과 화합시키고자 했고, 그것이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이자 ‘신’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더라도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언제라도 악용됐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종교의 시대’가 끝났으며 사적 신앙은 존재하더라도 정치신학은 부활될 수 없다는 확신은 아직 성급하다. 정교 분리주의는 아직도 도전이자 실험이라는 것이다. 책은 서구의 근대 사상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지만,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는 서구 우월주의적 편견도 간과하기 어렵다.  

09. 09. 10.  

P.S. 책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리바이어선>이라고 표기하는데, 기왕에 번역본들에서의 표기가 <리바이어던>인 만큼 통일시켜주는 것이 좋았겠다. 이 <리바이어던>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는 한 대목은 이렇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출간 이후 한 세기 동안 널리 비방을 당했다. 대부분의 비판은 교회와 정치신학자들로부터 날아왔고, 그들은 유럽 독자들에게 유서 깊은 기독교 체제를 벗어날 때 따를 위험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마다 홉스를 희생양으로 이용했다.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본 홉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인간은 더욱 짐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96쪽)   

내가 붙이진 않았지만 기사의 제목과도 연관이 있는 대목인데, 번역엔 약간의 착오가 있다. 세번째 문장의 원문은 "Hobbes treated human beings as little more than beasts, they said, and would only make them more beastly if he were listened to."(91쪽)이다. 부정의 뜻을 가진 'little more than'을 'a little more than'으로 잘못 본 듯싶다.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본 홉스"가 아니라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존재로 본 홉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문맥상으로도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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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10 04:31 
    [책] '사산된 신' 내용요약 — (via 로쟈)
 
 
목동 2009-09-1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삭 줍는 농부의 마음!

로쟈 2009-09-11 07:01   좋아요 0 | URL
벌써 수확의 계절인가요?^^
 

9월 한달간 고전 읽기 모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 강의한다. 이 참에 관련서들을 좀 읽어보려는 것이 개인적인 '계산'이고, 그렇게 읽은 걸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번역본만 일단 다섯 종을 책상 주변에 갖다 놓았다. 대조해가며 다 읽을 성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몇 대목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 관련서는 너무 많기 때문에, 당장에 펴볼 수 있는 책들만 추려놓는다(소장도서 중 상당수는 당장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돼 있어서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승계호 교수의 연구서를 읽어보는 게 개인적으론 가장 큰 목표다. 아래는 러시아어판 문고본의 표지.  


1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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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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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84년 4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12월 26일 (금)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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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곽복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19,800원 → 17,820원(10%할인) / 마일리지 9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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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9-10 16:28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 고전 읽기모임이구요, 강의도 특별하진 않습니다. 개요를 설명하고, 주요 대목을 해설하는 식입니다...

2009-09-10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0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10 10:46   좋아요 0 | URL
예,,읽고 있습니다.

로쟈 2009-09-10 16:27   좋아요 0 | URL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루체오페르 2009-09-10 16:17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소장하고 있는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백석현,야그 는 없네요.^^;
저도 원체 버전이 많아서 여러개 둘러보고 이게 가장 나은것 같아서 골랐는데
상당히 만족합니다. 구매 얼마후 품절인가 절판이 되어 보물이 되었죠.ㅎ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도 판이 많아서 고르다 하나 정해 아직
받아만 놓고 있네요. 서양철학에 대해 많은걸 알진 못하지만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좋습니다.
저명한 작품은 판이 너무 많아 오히려 고르기가 참 어렵네요. 고려할 것도 많고 그렇다고 다 볼수도 없으니까요,

로쟈 2009-09-10 16:27   좋아요 0 | URL
짜라두짜는 파격적인 시도였기는 한데, 해프닝 정도로 치부된 것 같습니다. 절파된 걸 보면요. 니체는 워낙에 많은 해석과 해석의 거품을 거느리고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에 오히려 난점이 많은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