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자오신산의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시그마북스, 2010)이다. 저자에 대해 아는 바 없고 중국 인문서에 대한 신뢰도 확고한 편이 아니어서 망설였지만, 지난주에 교재형 책 <천재 예술가들의 신경질환>(아름다운사람들, 2010)을 구입해놓은 터라 같은 주제의 책들을 모아놓으려는 계산에서 구입한 것이다. 찾아보니 샤를 가르두의 <약점이 힘이 될 때>(다른세상, 2010)까지 갖춰놓아야 구색이 맞을 듯싶다. 사실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 같은 책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올라온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10. 23) 닮은 듯 다른 천재와 광인 미묘한 한끝 차이는 뭘까?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비극적인 자살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정신질환적 증세가 있을까. 천재성과 광기는 뇌의 해부학적이고 화학적인 근원에 있어서는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다는 말로 이 책은 시작한다. 또한 천재성과 정신질환을 구별하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경계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수이자 작가인 중국 자오신산이 쓴 ‘천재적 광기와 미친 천재성’(이예원 옮김, 시그마북스 펴냄)이다. 책은 아인슈타인, 피타고라스, 앙페르, 애덤 스미스, 가와바타 야쓰나리, 백거이 같은 천재들과 히틀러 같은 광기 어린 독재자의 정신세계를 살펴보고 천재의 창조력과 정신질환 사이의 관계를 찾아보려 시도한다.

또한 과학, 예술, 철학의 창작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천재 혹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는 통로라고 언급하면서 만일 그들이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들은 미치거나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설명한다. 천재의 창조력과 정신질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심리적·정신적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는 광기는 어떤 방향으로 분출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밝힌다. 세상을 창조하고 건설하거나, 세상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독일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 즉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가 대단한 대업을 완수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히틀러도 마찬가지로 화가나 위대한 건축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건물을 부수고 수천만명을 학살한 잔인한 인물,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을 최고로 잔인한 범죄자가 되었던 것이란 예를 든다. 저자는 정신질환과 천재성 사이의 교차점을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 베이징대학을 졸업했으며 교수, 작가, 상하이 세계박람회 고문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과학과 예술, 철학 분야에서 관련 저서 56권을 펴낼 정도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본문 중에 흥미를 끄는 한토막. “누가 물을 발견했지? 분명 물고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일생 동안 물속에 있으니까…”(김문 편집위원) 

10. 10. 24.  

P.S.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가장 확실한 눈요기감은 움베르토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열린책들, 2010)일 텐데, 비닐카버가 씌어 있어서 서점을 찾았을 때 '실물'은 보지 못했다. '궁극의 리스트'로 당분간은 유보해놓는다. '머스트리드'에 해당하는 책은 스티글리츠의 <끝나지 않은 추락>(21세기북스, 2010)이지만 책을 다음주에나 배송받을 예정이어서 따로 리뷰를 챙겨놓진 않는다(기사가 많이 떠 있다). 유엔총회 전문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스티글리츠가 주도한 <스티글리츠 보고서>(동녘, 2010)도 신간이지만 아직 알라딘엔 뜨지 않는다. 오늘 주문한 책들에 대해선 다음에 몇 자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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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0-10-25 14:38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좋아하는 책이 출간이 됐군요.천재와 광기의 그 심연의 사이를 알고 싶었는데 한 번 관심을 가지고 읽어 봐야 겠네요.~~ ㅋㅋㅋ
하기사 좋아하는 문학가들을 보면 뭔가 광기에 홀린 듯한 모습들이 보이는데 저런 책을 필독을 하고 싶네요.

로쟈 2010-10-26 08:24   좋아요 0 | URL
관심분야시군요.^^

루쉰P 2010-10-27 19:44   좋아요 0 | URL
완전 관심 분야죠. 그나저나 로쟈님은 대단하십니다. 일 하면서 알라딘 서재를 자주 들어가 보는데 하루에 한, 두편 씩 올라 오네요.^^ 저는 저번에 로쟈님과 박홍규 교수님의 강연에 참석했었습니다. 좋은 강의 너무 잘 들었습니다. 그 행사 참여하고 후기를 썼는데 알라딘에서 3만원 상품권을 줬습니다. 로쟈님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강연하시고 나서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다 나가는 분위기라 용기내서 인사를 못 드렸었습니다. 죄송해요^^;;;
 

최근 국제면의 가장 큰 화제는 연금개혁안을 둘러싼 프랑스의 대립 정국이다. 사르코지의 법안이 어제 상원을 통과했지만 노동계는 수용불가 방침을 밝혔다. 사태의 추이가 궁금한데, 프랑스 현지의 소식을 전하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어쩌면 '제2의 68혁명'으로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담고 있다.  

경향신문(10. 10. 23) [목수정의 파리통신]제2의 68혁명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폭발 직전이다. 연초부터 줄기차게 진행돼 왔던 총파업과 집회가 9월 이후, 7번째. 이 질긴 파업의 공식 이유는 연금개혁 반대지만, 한발자국 다가가서 보면 지금 프랑스는 신자유주의가 비틀어 놓고, 사르코지가 사정없이 밟아주는 반인간적인 사회시스템에 시민들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중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영화된 프랑스 텔레콤 직원의 연쇄자살 사태로 대변되는, ‘잔혹한 세상’을 이제 모두가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상원에서의 표결 결과와 무관하게 파업을 확대하겠다고 천명한 노조연합의 발표가 상황의 핵을 집어준다.

광역전철(RER)을 비롯한 전국의 모든 철도 운행이 중단 혹은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오를리 공항의 항공기 운항은 50%가, 샤를드골 공항은 30%가 취소됐다. 정유공장 파업, 석유저장기지 봉쇄로 이미 전국 주유소 3분의 1에서 기름이 바닥났다. 도로에서는 화물연대의 달팽이운행(서행) 파업으로, 평소보다 두 세배나 시간이 걸린다. 노동자의 도시 마르세유에서는 시위대가 공항을 세 시간 넘게 봉쇄했고, 기차역에서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연대해 선로를 점거했다. 프랑스에 온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도 파업으로 묶여있어야만 했다. 이쯤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심히 불편해진다. 그런데도 이 파업에 대한 지지율은 갈수록 치솟고 강도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만 간다. 71%. 파업에 대한 가장 최근 공식지지율이다.

지금의 파업정국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분노’, 집회장을 휩쓰는 최고의 구호는 “나는 계급투쟁 한다”이다. 로레알사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 집안의 진흙탕 재산분쟁, 그녀가 자신의 친구(?)인 사진작가에게 뿌려온 1조5000억원, 시장시절부터 사르코지가 로레알사로부터 받아 챙겨온 정치자금, 사르코지의 검은 돈을 관리해왔고 이번 연금개혁의 실무 장관인 노동부 장관 에릭 뵈르트, 베탕쿠르 집안에 회계담당으로 들어가 그들의 세금을 세탁해주던 장관의 마누라…. 한눈에 헤아리기조차 복잡한 이들의 추악한 커넥션은 연금개혁을 놓고 정부와 노동계가 벌이던 씨름 한가운데서 폭탄처럼 터져버렸고, 그 순간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규정되었다. “이미 우린 충분히 돼지처럼 일해왔다. 이제 인간답게 살 것을 요구한다. 너희의 금고를 털 차례다. 돈은 베탕쿠르의 금고에, 부자들의 금고에 있다.” 시위대의 요구는 이처럼 선명하다.

노조 위주로 진행되던 파업이 고교생들의 적극적 참여로 번진 것은 지난주. 현재 1100개의 고등학교가 총파업에 동참할 것을 결정했고, 프랑스전국학부모연합은 이런 학생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고교생들의 대대적인 참여는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그들은 68혁명을 비롯한 지난 세기에 프랑스가 진행해온 모든 사회적 투쟁에서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결이 주목할 만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노조집행부 같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지성과 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 너 미쳤니. 애들이 거리에 나섰잖아.” 한 여고생이 집회에 들고나선 피켓은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게 될 이 시퍼런 젊음과 사르코지의 야욕이 벌일 한판 승부를 예고한다. 귀막은 사르코지, 더 심각한 파업, 더 높은 파업지지율, 그 끝에는 새로운 프랑스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모두의 이마에 담겨있다. 이 무시무시한 파업 정국을 살아내면서 비릿한 활기를 코 끝으로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10. 10. 24.  

P.S. 칼럼에 이은 후속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10. 25) "사르코지 ‘부자 정책’에 본능적 계급투쟁”

프랑스 상원에서 지난 22일 연금개혁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찬성 177, 반대 153.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지만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상원에 연금개혁법의 250여개 수정안에 대한 일괄상정과 표결을 요청함으로써 다시 한 번, 토론과 합의를 요구하는 전 국민적 요구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부가 그들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지른 정신나간 짓”이었다고 주요 노조 ‘노동자의 힘(FO)’ 대표는 평했고, 우파언론 피가로지도 정부가 “법적인 대포”를 동원한 것으로 묘사했다.

법안은 이제 상·하원 합동위원회의 평가와 최종표결을 거쳐 효력을 갖는다. 야당은 1000개가 넘는 개정법안들을 내놓고 토론을 요구했으나, 집권당의 힘으로 사안은 신속히 처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상원의 표결이 현재 촉발된 투쟁의 끝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6개 노조연합 대표들은 표결이 진행되기 전, 결과와 무관하게 10월28일과 11월6일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 것을 천명하였고 이후 벌어질 시민들의 행보는 모두 사르코지 정부가 자초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 금요일 2주간 방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26일에 전국대학생연합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 것을 알리며 투쟁을 지속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린 파업을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파업을 계속한다”고 선언한 정유공장 노동자들에 의해 12개의 정유공장은 여전히 멈춘 상태이며, 철도파업도 2주째 계속되고 있다.

계급투쟁. 평균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도, 국민연금 금고가 큰 규모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 시민들은 그런데 왜 이다지도 격렬하게 정부의 연금개혁을 거부하는 것일까.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현 정치권이 행해온 불공정과 불평등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댕긴 주요인임을 지적한다. “사르코지는 부자들에게만 더 벌게 해주고, 우리에겐 더 일할 것만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를 레몬처럼 꼭 쥐어짠다”, “기업은 우리로부터 삶을 앗아가고, 정부는 우리로부터 연금을 앗아간다” “프랑스텔레콤처럼 많이 자살하진 않았지만, 우린 모두 우울증과 만성피로·긴장에 사로잡혀 있다”. 마리안지가 전국의 시위현장을 돌면서 담아온 증언들이다. 사람들은 연금개혁이 신자유주의를 강화하고 고착시키는 또 하나의 단계임을 알고, 반기를 든 것이다. “개혁이 필요하다면, 부자들의 금고를 털어라.” 시위대의 주문은 분명하다.

사르코지 3년, 명백해진 것은 “모든 사회관계에서 경쟁구조의 일반화, 공공기관을 비롯한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 시장의 논리”이며, 이에 대한 저항은 2005년 유럽헌법 국민투표 부결, 학생들의 투쟁으로 좌절된 ‘최초고용계약’ 등으로 이어져 왔다. 연금개혁의 반대투쟁에 이르러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계급투쟁이 이제 제대로 펼쳐지고 있다”고 사회학자 크리스치앙 라발은 분석한다.

이번 연금개혁의 첫번째 수혜자가 대통령의 형인 기욤 사르코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기욤은 보험회사 메데릭그룹 대표다. 이 회사가 개인연금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것은 2년 전. 내년 1월, 회사 규모 확대를 앞두고 보증공탁금고(CDC)와 국립신용금고(CNP)와의 합자를 이뤄냈다. 뒤의 두 회사는 국회의원과 전직 엘리제궁 비서관에 의해 운영되는 공기업이다.

대통령 형의 회사는 이번 개혁으로 생성될 개인연금 시장을 400억~1000억유로 규모로 내다보며 전체 시장의 17%를 차지할 것을 목표로 세우기까지 했다. 이 모든 국민적 분노를 산 연금개혁, 무리한 일괄처리의 압박 뒤에는 가족과 측근을 위해 한몫을 단단히 잡겠다는 사리사욕이 있었다. 무려 250여개의 조항을 개정하는 이번 과정에서 5년간의 의원 경력으로 40년간 일한 봉급생활자의 연금을 받는, 지나치게 큰 국회의원들의 특혜 조항들은 전혀 개정되지 않았다. “고통은 너희들의 것”이라고 말하는 가진 자들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20년 전부터 연 5주의 유급휴가를 누려온 프랑스인들이다. 그들은 자유, 평등, 박애가 짓밟힐 때 본능적으로 일어선다. 초강수 불통 권력자를 향한 그들의 계급투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목수정 |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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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24 18:1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혁명의 '힘'이 느껴지구요. 프랑스가 유럽을 대표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총대를 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10-10-26 08:23   좋아요 0 | URL
계급투쟁이란 구호가 다시 살아난 것에 주목하고 싶어요...

비로그인 2010-10-24 13:21   좋아요 0 | URL
말 그대로 "비릿한 활기"가 느껴집니다!
'새로운 프랑스'라는 표현에서 '새로운 유럽'과 '새로운 세계체제'까지 상상하는 건 좀 오버일까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로쟈 2010-10-26 08:23   좋아요 0 | URL
사르코지가 좀 '도와준다면', 오버가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LAYLA 2010-10-24 18:39   좋아요 0 | URL
유럽애들이 사실 별 생각없이 학교 가기 싫으니까 데모하러 나가는 거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던데...그렇게 쉽게 자기 의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부모님이 지지해준다는게 참 멋지네요

로쟈 2010-10-26 08:22   좋아요 0 | URL
그게 '기본'이 돼야겠죠...

자꾸때리다 2010-10-24 23:17   좋아요 0 | URL
그런데 한겨례 기사 보니깐 사실 야당도 연금 개혁안에 대한 마땅한 대안을 못 내놓고 있다고 하던데요... 사실 별로 기대는 안 하는데...

로쟈 2010-10-26 08:21   좋아요 0 | URL
후속기사도 읽어보시길...

mirror 2010-10-29 04:18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 대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외국인은 아마도 한국의 지식인들이 아닐가요? 프랑스 여론조사에는 과반수 이상이 통과된 법안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사람들도 다수가 연금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래전부터 공감하고 있고요. 다만 사르코지가 합리적인 토론을 제대로 하지 않고 밀어부치기 때문에 이런 소요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독일은 이미 2000년대 중반에 슈뢰더가 이런 개혁을 하면서 약 2년간 설득하고 토론했습니다.
혁명이라니요? 아마 혁명이란, 이상적인 프랑스를 머리속에 갖고 있는 한국의 자칭 좌파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거 같군요. 프랑스에 산다고 해서 프랑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적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죠. 환상속의 프랑스에서 그만 깨어났으면 합니다.
독일의 연금수령 나이가 아마 67세일 겁니다. 경제적으로 불가피하면 하는 것이죠. 땅파면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르코지는 쿠데타로 정권 잡았나요? 이런 사태는 프랑스의 후진적인 정치를 나타낼 뿐이지, 모범적인 현상은 아니죠. 총선에서 집권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준지 2달도 안되서 발생한 촛불시위가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의 모습을 나타내듯이, 이런 시위는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후진적 국가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거의 15년 동안 보수적인 대통령을 선거로 뽑아왔어요. 이런 나라에서 무슨 혁명인가요? 진짜 코미디입니다. 이런 소요사태에 흥분하는 한국 사람들은 더 웃기는 것 같고요.

Spidersens 2010-10-29 17:5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타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더 "사유"할 것 같은 프랑스지만, 현실은...

>> 촛불시위가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의 모습을 나타내듯이

후진적인 정치를 보여주는 예로 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보다는 촛불시위를 우리나라 대중이 가진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보고 있습니다. (주가를 조작하는 작전 세력에 개인투자자들이 당하듯) 당시 대중—저 자신도 포함해서—은 그럴듯하게 조작된 정보를 유포하는 정치 작전 세력에 취약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로쟈 2010-10-30 08:40   좋아요 0 | URL
혁명은 어지간 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보수적인'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프랑스도, 러시아도, 어쩌면 한국도...

mirror 2010-10-30 20:01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19세기에 살고 있는것 같군요. 지금의 시위가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인가 봅니다? ㅎㅎ...

범사 2010-11-13 21:14   좋아요 0 | URL
미러님은 '혁명'의 의미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국가체제가 전복되고, 왕조가 무너지고
'병커가 무너지고'
뭐 이런 거창한 역사적 사건들만 혁명인가요?

혁명의 사전적인 정의를 잘 모르시던가,
68혁명이 뭔지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그래서 어이없게도 사르코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냐고 반문을 하시네요.
19세기에 살고있다라...미러님은 25세기에 사시는듯^^
지금같은 우경화가 4세기 정도 계속되면 미러님의 혁명의 정의가 맞지않을까해서요.
 

'카운터컬처 통사'라고 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켄 고프먼과 댄 조이가 쓴 <카운터컬처>(텍스트, 2010). 문화이론적 개념으로 접근하기 쉬운 '카운터컬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는 게 아닌가 싶다(찾아보니 카운터컬처만을 다룬 책이 의외로 거의 없다). 그렇게 외연이 넓어지는 만큼 그 의미도 조금 옅어지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정확한 건 읽어봐야 알겠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0. 10. 23) 카운터컬처, 인류의 역사를 이끈 원동력

미국의 저명한 문화비평가 켄 고프먼과 댄 조이가 공동집필한 <카운터컬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주류 문화를 거스르는 카운터컬처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라고 설파한다. 카운터컬처란 말은 히피와 반전운동 등으로 점철된 1960년대 사회문화상을 분석한 시어도어 로작의 저서 <카운터컬처의 형성>(The making of a Counter Culture)에서 유래했다. <카운터컬처>는 "일정하게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주류 문화와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과정"이란 로작의 카운터컬처에 대한 정의를 바탕 삼아, 이런 문화운동이 인류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핀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유대인의 선조 아브라함에서 카운터컬처의 시원을 찾는다. 저자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위해 불을 훔쳐냈다는 단순한 사실보다는 당대 그리스들에게 가장 큰 죄악이었던 오만함의 상징이 근대 휴머니즘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천착한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성서의 기록보다는 그가 "유대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영구적 역할"을 제시했다거나 자발적 공동체주의를 실현한 혁명가라는 개혁파 랍비들의 재해석에 주목한다. 신화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상징체계라면, 고대 신화의 중심에 자리한 두 인물의 존재는 "카운터컬처적인 충동이 인간 본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어 스스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부터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를 관통하며 낭만적 사랑을 노래한 음유시인들,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20세기 초 파리의 보헤미안, 68혁명 세대의 거리의 광란, 그리고 오늘날의 해커에 이르기까지 카운터컬처의 장구한 역사를 풀어놓는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동양의 역사에도 눈을 돌려 도교와 선불교, 이슬람의 수피즘을 카운터컬처의 전형으로 소개한 점이다. 각양각색 카운터컬처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줄기로 문화의 직ㆍ간접 접촉과 더불어 '공명'을 들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소크라테스학파와 초기 도교 사상의 놀라운 유사성, 도교를 접한 적 없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초월주의에서 드러나는 도교적 특성 등을 공명의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

저자들은 카운터컬처의 근본적 특징으로 개성,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개인과 사회의 변화 수용 3가지를 든다. 특히 개성과 관련해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완전하게 탐구하고 표현하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막거나 방해하는 문화는 카운터컬처라고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저자들이 역사에서 가려 뽑은 카운터컬처 사례들이 모두 이 기준을 충족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세계화와 해커 관련 문화를 다룬 책의 마지막 장은 깊이있는 분석이 부족할 뿐 아니라,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한 저자들의 재기 넘치는 문체가 맥을 짚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스스로 카운터컬처적 속성이 강하다고 믿거나 역사를 종횡무진하는 지적 탐험을 즐기는 독자라면 권할 만하지만, 가볍게 읽고 쉽게 고개를 끄덕일 책은 아니다.(이희정기자) 

1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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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문학동네, 2010)이다. 얼마전 마이리스트에 적은 대로 <구덩이>(민음사, 2007)도 같은 작품의 번역이다(다만 번역 대본이 달라서 번역상에도 약간 차이가 있다). 단편 <포두단 강>은 <귀향 외>(책세상, 2002)에 수록돼 있다. 지면의 제약으로 자세히 다루진 못했는데, 그래도 관심만 부추길 수 있으면 소임은 다한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본문에 삽입한 사진은 작가의 가족사진이다.   

한겨레(10. 10. 23)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과 연민의 무덤 

러시아의 조지 오웰’로 불리는 작가가 있다. 철도 노동자 출신의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그의 작품 <코틀로반>이 혁명 후 러시아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로 소개되면서 그런 별칭을 얻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 유명한 단편 <포투단 강>에 나오는 구절에 그의 고민이 묻어 있다. “삶에 대한 무지도 가난과 배고픔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심각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플라토노프의 주인공들은 생에 대한 의구심과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괴로워한다. <코틀로반>에 등장하는 노동자 보셰프도 그렇다. 그는 서른 번째 생일날 공장에서 해고당하는데, 작업시간에 너무 자주 사색에 빠진다는 게 이유다. 어디선가 개가 짖어대자 “개도 답답할 테지. 나처럼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고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삶의 앞가림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수수께끼 축에도 들지 못한다. 대신에 그는 ‘일반적인 삶의 계획’에 대해 골몰한다. 모두가 당신처럼 사색에 빠진다면 일은 누가 하느냐는 핀잔에 그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답한다. 그는 몸이 편하고 불편한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진리가 없다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그런 진리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허약한 몸을 기꺼이 노동에 전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탈린시대의 러시아는 그에게 진리를 제공해주었을까.

또다른 노동자 사프로노프는 생의 아름다움과 지성의 고귀함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보잘것없고 사람들이 우울한 비문화적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해 한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건설하기 위해 스탈린이 기획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면서도 그가 느끼는 우울함은 가시지 않는다. “어째서 들판은 저렇게 지루하게 누워 있는 걸까? 5개년 계획은 우리들 안에만 들어 있고, 온 세계에는 진정 슬픔이 가득한 건 아닐까?”라는 게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이런 노동자들이 모여서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용 구덩이를 판다. ‘코틀로반’은 그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공사의 책임자인 건축기사 프루솁스키는 이 거대한 공동주택을 고안해낸 인물이지만, 정작 거기에 살게 될 사람들의 정신구조에 대해서는 느낄 수도,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 건물이 단지 악천후만 피하게 해줄 뿐인 ‘빈 건물’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희망이 아니라 인내일 뿐이다.

구덩이 공사가 마무리되자 노동자들은 당의 열성분자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만들기 위한 부농계급 철폐사업에 투입된다. 부농으로 지목된 농민들은 뗏목에 실려 시베리아로 보내지고 이제 노동자들은 집단농장 전체, 세계 전체를 돌봐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미래’라고 아끼던 고아 소녀 나스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노동자들은 소녀의 무덤을 만들어주며 비탄에 잠긴다.

이것은 분명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지만, 결코 조지 오웰 식의 풍자는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념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고 염려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1987년에서야 소련에서 공식 출간된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 사회주의는 플라토노프의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0. 10. 22.  

P.S. <코틀로반>과 관련해서는 영어 번역과 해설서가 훌륭하다. 로버트 챈들러와 올가 미어슨의 번역(2009)은 러시아본 결정판(나우카, 2000)을 옮긴 것으로 최초 출간본(1987)과의 차이도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어서 요긴하다. 플라토노프 전문가인 토마스 시프리드의 해설서도 작품의 맥락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러시아에서 나온 연구서나 해설서는 이번 겨울에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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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3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3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0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arlett34 2025-10-3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등장인물 중 곰(미시)은 진짜 곰? 아니죠? 곰 한마리가 ~~ 라는 표현과

로쟈 2025-10-3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입니다. 노동자가 되는.
 

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관한 기고기사를 옮겨놓는다. 바르가스 요사 문학의 이력과 그의 정치적 변신 등을 비판적으로 짚어주고 있다.   

대학신문(10. 10. 18)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아름다운 거짓말  

"문학은 불꽃이다”,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936~)가 1967년 베네수엘라에서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면서 내지른 사자후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문학, 현실의 부조리를 활활 태워버릴 문학을 천명한 것이다. 그 사자후는 2010년 바르가스 요사에게 크나큰 영광이 돼 돌아왔다. 노벨상위원회가 권력에 대한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개인의 처절한 저항(때로는 처절한 패배)이 담긴 작품들을 쓴 점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조리에 저항한 문학 천명, 노벨상위원회를 사로잡은 이유
바르가스 요사의 비판은 좌와 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71년에 쿠바 문인 에베르토 파디야의 자아비판 사건이 일어나자 바르가스 요사는 누구보다 더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아직 쿠바혁명이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시점이었는지라 바르가스 요사는 이들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1990년에는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 하에 있던 멕시코를 공산주의 체제보다 더한 독재로 묘사해 멕시코 국민의 공분을 샀다. 그것도 멕시코 방송에 출연해서, 또 몇달 뒤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멕시코 문단의 원로 옥타비오 파스 앞에서였다.

바르가스 요사의 사자후는 문학의 장에서도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론인 『가르시아 마르케스: 신성 살해 이야기』(1971)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작가들의 내면세계가 창작의 원천이다. 창작을 신의 지위에 대한 도전, 나아가 조물주의 창조 행위에 비유한 셈이니 문인으로서 자긍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사자후는 가히 명품이었던 것이다.

문학이 사회의 등불이라는 자부심과 집념으로 조숙한 성공 이뤄
작가가 조물주이고, 문학이 사회의 등불이라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바르가스 요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가 문학을 시작한 1950년대의 페루 현실과 문화적 토양이 너무나 척박했기 때문이다. 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 존경할 만한 선배 소설가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작가라는 자존심 하나로 겨우 버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파리 다락방의 문학청년이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척박한 국내현실을 벗어나고, 소위 세계의 문화수도에서 선진 문학조류와 접하고,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1958년부터 유럽 생활을 시작한 바르가스 요사의 조숙한 성공은 이러한 집념의 소산이다. 그의 출세작은 두번째 작품이자 장편소설로는 첫번째 작품인 『도시와 개들』(1962)이다. 이 소설은 1960년대에 국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소설 붐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스페인의 세익스바랄 출판사 문학상을 받는다. 라틴아메리카 작가로는 바르가스 요사가 최초였다. 이로써 바르가스 요사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단숨에 스페인어권의 촉망받는 작가가 됐다. 또 1960년대에 쓴 두 장편소설 『녹색의 집』(1966)과 『‘성당’에서의 대화』(1969) 역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33세에 이미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혔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아르헨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와 함께 소위 ‘붐’ 소설 작가 4인방으로 인구에 회자되었으니 세계적인 작가가 되리라는 꿈도 일찌감치 이룬 셈이다

 

이 4인방 중에서 가장 젊은 탓인지 바르가스 요사는 새로운 조류를 좀 더 쉽게 받아들였다. 1960년대의 작품들이 진중했다면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977)와 『새엄마 찬양』(1988) 등을 통해서는 유머와 에로티즘을 구사하며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문화에 접근했다. 그렇다고 1970년대부터 가벼운 작품으로만 일관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 종말 전쟁』(1981)과 『마이타 이야기』(1984) 등은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실패 원인을 성찰하고 있으며, 『염소의 축제』(2000)에서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헤쳤다. 



이러한 성과에도 필자는 바르가스 요사의 노벨상 수상이 유감스럽다. 물론 정치적 소신을 바꾸었다 해서 무작정 문제를 삼을 수는 없다. 또 그가 잠시 정치에 입문했다가 1990년 무명의 후지모리에게 패하는 과정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로 역인종차별을 당한 것도 일정부분 사실이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개탄하는 것도 당연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로의 투항, 신자유주의 수사학과 일치하기도 
 그러나 그 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문학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회고록 『물속의 물고기』(1993)를 보면 바르가스 요사의 변신이 단순히 좌에서 우, 혹은 진보에서 보수로의 여정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로의 투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바르가스 요사가 구사하는 인권,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의 수사학은 놀라울 정도로 신자유주의 수사학과 일치한다. 바르가스 요사에게 라틴아메리카가 나아가야 할 길은 서구의 발전 경로를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서구로의 투항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안데스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한 『케케묵은 유토피아』(1996)에서 잘 드러난다. 바르가스 요사는 서구식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원한 원주민들과 이들과 뜻을 같이한 지식인들을 인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으로 매도한다. 가령 바르가스 요사에게 원주민주의 소설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의 소설은 ‘아름다운 거짓말’일 뿐이다. ‘보편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젊은 시절 자신이 거의 유일하게 존경한 페루 선배 소설가까지 버리게 된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무슨 인연인가 싶다. 반쯤은 바르가스 요사에 이끌려 페루에 갔다가 그를 버리고 아르게다스를 택했으니 말이다.

필자 같은 이방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보편적 가치라는 잣대가 안데스의 식민성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인데, 바르가스 요사는 어째서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권력에 대한 바르가스 요사의 저항을 높이 평가한 노벨상위원회의 결정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구 잣대에 맞지 않는 이들을 치워버리는 데 기여한 문인에게 주는 상이 노벨문학상이란 뜻일까? 지금 필자에게 파리 다락방의 문학청년을 꿈꾸던 바르가스 요사의 치열한 모습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일 뿐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명품 사자후야말로 ‘아름다운 거짓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우석균_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10.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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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10-2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칠레 출신의 소설가 아리엘 도르프만을 보면서도 근래 비슷한 생각을 해 보는걸요. 도르프만은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지금도 미국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영어로 창작을 하구요.
도르프만 역시 중남미의 자산이 빈곤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그의 소설 <체 게바라의 빙산>을 보면 라틴 아메리카의 고유한 것으로 성욕을 말하는데, 그가 살고 있는 앵글로 아메리카는 그렇질 않은지 묻고 싶더군요.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창작기별로 꼼꼼하게 볼 필요가 있겠군요?

로쟈 2010-10-22 22:40   좋아요 0 | URL
네, 아웃라인을 잡고 읽는 게 유익하겠죠...

2010-10-22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10-10-2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은 다른 곳에는 어찌 링크 안하시나요^^

로쟈 2010-10-22 22:38   좋아요 0 | URL
거명이 안 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