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이어서 어머니댁에 가 닭죽을 먹고 왔다. 덕분에 '나가수'도 끝까지 보고(집에서라면 아이와 채널경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돌아오긴 했어도 기력이 좋아진 것 같진 않다. 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욕의 문제 같긴 하지만. 그런차에 지난 주중에 임시저장해놓은 페이퍼가 생각나 다시 불러왔다. 음식을 다룬 책에 손길이 가는 건 매우 드문 일이지만 <칼로리 플래닛>(월북, 2011)이란 책이 3년전에 나온 <헝그리 플래닛>(월북, 2008)과 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관심이 생겼다. 이를 테면, 나란히 보면 좋은 책이다. 그래서 서평기사도 나란히 불러모았다. 우리가 무얼 먹으며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국민일보(11. 07. 22) 불평등한 21세기 지구인 식탁, 그래도 한결같이 웃는다…왜냐고?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기차역에 사는 방글라데시의 12세 가출 소년 알라민 하산. 첫 열차로 도착한 승객의 가방을 택시 정류장까지 나르고 동전 몇 개를 확보했다. 운이 좋았다. 오늘 아침은 굶지 않아도 좋았다. 그가 역 바닥에 하루치 식량을 늘어놓았다. 롤빵 한 개, 홍차 두 잔, 흰 쌀밥 위에 채소 카레를 끼얹은 덮밥 두 접시, 그리고 담배 다섯 개비. 거리의 진수성찬은 그가 하루 종일 동료 짐꾼들과 주먹다짐하며 생계를 꾸려갈 1400㎉의 에너지를 제공해줄 터였다.

음식을 먹는 건 에너지를 얻는 행위이다. 빵과 밥은 잘게 부서져 분자 상태로 혈액에 흡수된다. 그 빵과 밥을 위해 인간은 하루를 산다. 인간이 에너지를 몸속에 넣고 배설하는 반복적 활동으로 생존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삶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다는 것, 하루에 얼마만큼의 식료품을 소비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삶을 얼마나 단단히 옭죄고 있는가. 그래서 누군가의 식탁을 엿보는 건 놀라운 관찰 행위가 된다.

환경 및 과학 분야 사진 저널리스트 피터 멘젤과 그의 아내이자 TV 뉴스 프로듀서 출신의 저술가 페이스 달뤼시오가 함께 제작한 ‘칼로리 플래닛’은 개인의 하루 식단을 한 장의 사진에 담은 포토 논픽션이자 요리 다큐멘터리이다. 세계 30개국, 미국 12개 주를 돌며 80명의 사람을 만나 그가 먹어치우는 음식들을 요리된 상태 그대로 한 자리에 모아 주인공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떤 잣대로도 평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들을 모아놓고 보니 21세기 어느 날 지구인의 하루 식단표가 완성됐다.

사진과 함께 음식 목록, 주인공 일상도 소개됐다. 당연한 얘기다. 미국 전쟁(베트남에서는 베트남전을 이렇게 부른다) 상이군인의 식생활은 그가 참전군인이고 세발 모터 카트를 운행할 수 있는 특별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덕분에 쌀국수와 돼지고기 스튜, 청어튀김, 돼지 간 등 2100㎉의 음식을 풍족하게 먹는다. 묽은 곡식 죽과 찐 밀가루 만두, 쇠고기 육수로 하루 고작 900㎉를 섭취하는 보츠와나의 간병인. 그녀 식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HIV 항 레트로 바이러스 약이다. 알약 네 알이 없다면 그녀 아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후대 역사학자는 현대 인류의 삶을 말할 때 ‘섭취 열량과 활동량의 극단적 불균형’을 지적할 게 틀림없다. 80명의 하루 식단을 살피다 보면, 투입과 배출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게 된다. 너무 많이 먹어 걱정인 대표주자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인이다.

175.3㎝, 135.6㎏의 15세 미국 여고생 맥켄지 울프슨은 체중 감량 캠프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침 식사로는 사과 팬케이크 2장과 칠면조 소시지 2개, 무지방 우유, 오렌지 주스를 먹는다. 점심은 샌드위치 샐러리 당근 샐러드, 저녁으로는 닭고기 샐러드 파스타 과일펀치가 준비돼 있다. 여기에 간식으로 사과 초콜릿푸딩 프레첼까지 총 1700㎉가 허락된다. 평소 식사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조만간 비만 수술을 할 예정인 미국의 전직 스쿨버스 운전사 릭 범가드너도 곡물 베이글과 브로콜리, 아이스티로 구성된 1600㎉의 다이어트 하루 식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예전이라면 한 끼로도 부족한 양. 그는 “과거에는 이걸 다 먹고 추가로 닭 3마리의 가슴살, 감자, 그레이비, 비스킷까지 먹었다”고 고백했다. 과식은 비만을 낳았고 비만은 릭에게서 직장을 앗아갔다. 쇼핑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20대 미국 여성 티파니 화이트헤드의 하루는 버거킹 치킨 프라이와 프렌치프라이, 닥터 페퍼로 시작한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양상추가 가득 든 시저 랩 샌드위치와 과일 스무디를 먹으려면 한 끼에 8달러는 투자해야 한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그녀에게는 벅찬 가격이다. 그래서 발길은 또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한다.

모두가 많이 먹어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케냐 마사이족 목축인 눌키사루니 타라콰이는 가뭄으로 가축을 대부분 잃어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한다. 우갈리(옥수수가루 죽) 400g과 바나나 1개, 우유 59㎖와 설탕 2큰술을 넣은 홍차 2잔이 그녀가 하루 종일 먹는 음식이다. 총 800㎉. 그녀 반대편에는 병적인 간식 중독증 환자 질 맥티그가 있다. 영국 런던의 학교 도우미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하루에 4개의 샌드위치와 비스킷, 소시지, 초코바, 초콜릿 케이크, 초콜립 칩까지 무려 1만2300㎉를 집어 삼킨다. 두 사람 모두 그대로는 살아남지 못할 게 분명하다. 800㎉보다 많고 1만2300㎉보다 훨씬 적은 중간지대 어딘가에서 타협은 이뤄져야 했다.

사람은 제 입으로 들어갈 음식 앞에서 오래 가식적일 수 없는 법이다.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수줍어하고 얼마쯤 자랑스러워했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70억 세계인의 삶을 한 권의 책에 통째로 복사해냈으니 저자들이 진정 영리하다 하겠다.(이영미 기자) 

 

경향신문(08. 02. 16) ‘우리가족 일주일치 식량입니다’

최근 ‘음식’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책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 세상)나 사샤 아이센버그의 ‘스시 이코노미’(해냄) 같은 책이다. 1년 전 이맘때쯤 나온 빌 버포드의 ‘앗 뜨거워’(해냄)도 빼놓을 수 없다. 건강이나 요리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는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음식이 오늘날 인간의 본질과 조건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삶을 유지하는 데 음식은 기본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회적 활동이다. 음식은 또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분짓는 기준이다. 인간만이 굽고 삶고 볶고 튀긴다. 음식은 우리를 규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번주 나온 ‘헝그리 플래닛’(원제 Hungry Planet)도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만하다. 부제처럼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라 할 만한데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획이 돋보인다. 전 세계 24개국 30가족이 1주일 동안 먹는 모든 식품들과 그 가족 구성원들을 사진에 담았다. 여기에 1주일치 식품의 상세 목록과 총지출 비용 등이 제시되고, 이들 음식을 둘러싼 가족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부부이면서 각각 저명한 사진기자, 작가인 두 저자는 아프리카 차드의 난민촌에서부터 남미 에콰도르의 안데스 산맥, 부탄 고원지대의 작은 마을, 그린란드 중동부 연안의 이누이트족 마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면서 그곳 가족들의 ‘음식 이야기’를 모두 265장의 사진과 글로 풀어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각 장을 여는 30장의 ‘가족사진’. 1주일치 식품을 앞에 둔 가족들을 거의 똑같은 구도로 잡아낸 사진은 다른 문화와 풍습을 가진 이들의 식단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배급 받은 밀과 옥수수 포대, 생수 한 통, 염소고기와 생선 조각, 과일과 야채 몇 개를 늘어놓은 수단 난민 가족의 휑한 식단과 온갖 육류와 스낵, 음료수, 패스트푸드 등으로 산을 이룬 미국 중산층 가족의 식단 사진을 비교해 보라. 또 선진국으로 갈수록 고기와 가공된 포장식품을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게 된다. 코카콜라나 맥도날드 햄버거 등 이른바 ‘글로벌 브랜드 식품’을 발견할 수도 있다.

1주일치 식품의 상세 목록과 총지출 비용을 비교해보는 건 어떨까. 예컨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사는 흑인 중산층 5인 가족의 1주일치 식품 총지출 비용은 31만4180원인 데 비해 아프리카 말리의 13인 가족은 2만4230원이다. 책 말미에 제시된 나라별 개황도 흥미롭다. 미국의 비만 인구 비중이 남녀 각각 32%, 38%인 반면 말리는 0.4%, 3.4%다.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도 각각 124.7㎏과 19㎏. 말리의 가족에게 대표 요리를 부탁했더니 토마토와 고추, 쌀, 양파 등 모든 재료를 그냥 넣고 푹 끓인 쌀요리가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보니 먹는 것에 대해 ‘좋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책에는 각 나라의 평범한 한 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풍경이 간결하게 그려졌지만 오늘날 세계의 식탁이 직면한 문제들이 날카롭게 포착돼 있다. 에콰도르 산간마을의 한 가족은 직접 기른 것들로 먹거리를 충당하면서 ‘포브레 페로 사나’(Pobre Pero Sana, 가난하지만 건강하다)의 삶을 영위한다. 반면 멕시코에선 코카콜라가 다른 마실 것들을 몰아내고 ‘가족 지정 음료’로 등극했다. 부탄의 한 가족은 아침과 저녁 식사가 똑같이 붉은 쌀밥, 고추, 시금치, 카레지만 미국의 한 가족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면서 오히려 패스트푸드를 더 많이 먹게 되는 고민에 빠져 있다. 프랑스에선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상징인 전문 식품점들이 사라지고 있고, 폴란드에선 미국 스타일의 패스트푸드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패스트푸드와 그 영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다이어트 열풍이 동시에 들어오는 기현상이 목도된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음식과 관련해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지구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영양 부족에서 비만으로의 변화다. 세계 각지의 식탁은 천차만별이지만 하나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더 많은 설탕과 정제 탄수화물과 지방을 섭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몇 억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한편에선 몇 억명이 너무 많이 먹어 과체중과 비만에 시달리는 곳이다. 저자들은 ‘과잉’의 현대 사회에 필요한 소박한 지혜를 세계의 장수마을로 유명한 일본 오키나와의 옛말에서 찾는다. ‘하라 하치 부.’ 배가 80% 부를 때까지 먹으라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음식 문화를 담은 30개의 메뉴로 만들어진 ‘음식의 세계지도’라 할 만한 책이다. 세계 각지의 음식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풍습도 알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책 속의 사진들 속에 ‘우리 가족’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 이번 주말 대형 마트에 가서 1주일치 먹거리를 구입할 생각이었다면 한번쯤 되묻게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라고.(김진우 기자)  

11.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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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TAS 2011-07-24 23:42   좋아요 0 | URL
오늘 구입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로쟈 2011-07-25 20:51   좋아요 0 | URL
네, 사진만으로도 성찬이더군요...
 

지난주 역사분야의 화제작은 이덕일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 2011)이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2000)를 바로 떠올리게 해준다. 아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요즘 해리 포터 시리즈에 잔뜩 빠져 있어서 몇권 주문하는 김에 나도 이 두 권을 어제 같이 주문했다. 조선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 읽을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텐데 큰일이다...

  

경향신문(11. 07. 24) “주류에 맞서다 죽은 윤휴 과연 우리세대는 떳떳한가”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 윤휴(1617~80)는 사약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여년 전부터 이 비운의 정치가를 주목했던 역사평론가 이덕일씨(5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는 당시 윤휴의 후손이 “아직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무엇이 300여년 전 죽은 선비를 그토록 ‘금기’로 만들었는가, 이 소장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을 내놓은 이유다.

 

지난 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 소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윤휴를 죽였던 당시 체제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학계의 정설과 다르면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풍토가 있어요. 인문학은 늘 세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사형당한 윤휴는 과연 우리 시대는 ‘떳떳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송시열에 덧칠된 신화를 벗겨냈다. 이번에는 그의 반대편에 섰던 윤휴의 삶을 조명하면서 다시 한번 송시열 계열의 노론 중심 역사관을 비판한다. “아직도 국사교과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했다고 가르치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를 죽였습니다.” 그는 송시열이 주장한 북벌이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잇겠다는 전략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효종의 군비 강화책을 사사건건 반대했으며, 북벌 총사령부격인 체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도리어 역모의 증거로 삼아 윤휴를 제거한 것 자체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성리학만을 만고의 진리로 삼아 유일사상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윤휴가 <중용>에 주석을 붙인 <중용신주>를 내놓으면서 주희와는 다르게 장·절을 구분하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일 정도였다.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었기에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었다. 흔히 당파싸움으로만 알려진 예송논쟁 또한 사대부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서 동격에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장은 “국상에 상복을 3년이 아니라 1년을 입으라는 주장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가족장을 치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윤휴는 ‘송시열의 나라’에 맞서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자사(중용의 저자)는 동의할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는 중국에서 청나라에 반대해 일어난 ‘삼번의 난’을 호기로 여기고 이때 북벌을 실시해야 한다며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다. 북벌에 앞서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와, 신분에 따른 호패의 차이를 없애는 지패제를 도입했다. 북벌이 추진되려면 나라와 백성들이 부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정책은 서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 소장은 “윤휴의 죽음 이후 조선은 다른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제국’이 돼 버렸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윤휴의 북벌론은 실현 가능했을까. 이 소장에게 이 질문은 본질이 아니다. 그는 정치와 학문의 ‘진정성’을 말한다. 북벌을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노론과, 실제 북벌 총책임자가 되길 원했던 윤휴의 삶은 어떻게 전승됐는가. “윤휴의 사상을 이은 강화 양명학자들이 일제에 맞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노론은 대거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황경상 기자) 

11. 07. 24. 

 

P.S. 송시열과 윤휴를 포함한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에 대한 소개는 이경구의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푸른역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이선아의 <윤휴의 학문세계와 정치사상>(한국학술정보 2008)은 학위논문인 듯싶다). 윤휴를 다룬 장의 제목은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인데, 윤휴의 '이단적' 주자 해석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윤휴 본인은 주자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신념을 가졌다. 하지만 송시열 등은 주자를 따르는 또 다른 길, 해석의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가 재건의 방향이 다르게 흐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가 제기한 대안은 정치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범위에서 유형원, 정약용 등을 통해 이어졌고, 국가주의적 기획은 영조, 정조의 정국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영조는 유학의 시비는 국가와 무관하다고 선언해 유학의 틀 내에서는 더 이상 시비가 강렬하게 전개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윤휴가 대한제국 끝 무렵인 1908년에야, 조선의 문제적 인물 수십 인과 함께 비로소 복권된 것은 권력화된 주자학의 독선이 드린 어두운 그림자일 것이다.(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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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24 12:15   좋아요 0 | URL
사실 이덕일이 주장하는 것들이 우리가 배웠던 것들과 유사합니다. 소위말하는 현대 주류 사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지요. 로쟈님도 국사책에서 윤휴가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서 송시열과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었다는 내용을 배웠을 것입니다. 전혀 새로울게 없습니다. 우리의 기억속에 이미 송시열과 노론은 나라를 망하게 한 세력이고 윤휴는 복권되어 있었습니다. 광해군과 같은 맥락이지요. 이덕일 말대로 노론이 아직도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면 국사 교과서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을리 없겠지요. 이덕일이 널리 읽히는 것은 소위 우리가 배운 것과 유사한 내용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지 뭔가 새로운 사관이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로쟈 2011-07-24 13:35   좋아요 0 | URL
핵심주장은 노론이 친일파가 되고 지금의 기득권세력이란 것 같아요. 학계도 포함해서. 그래서 논란을 부르는 것 같고요...

푸른바다 2011-07-24 14:07   좋아요 0 | URL
섵부른 음모론이지요.^^ 역사를 무슨 다빈치 코드류의 소설로 착각하는 분인 것 같아요. 굳이 현재의 추세를 들자면 영남 출신들이 재계와 정계를 장악하면서 조선시대 소외되었던 '영남남인'과 '영남북인'들이 재조명되는 흐름은 있는 것 같아요. 이황, 유성룡, 윤휴, 이익, 정약용이 남인이고, 남명 조식은 북인이며 북인 세력들이 광해군 시대를 이끌었지요. '실학'을 이야기 하면서 박지원이나 홍대용이 모두 노론이었다는 점은 숨깁니다. 역시 왜곡을 수반하는 말이긴 하지만 영남 세력이 대한민국 주류가 되면서 노론은 평가 절하되고 남인이 실학이란 이름으로 재조명됐다는 게 약간은 더 실상에 가까운 듯 해요. 제 국사시간 기억으론 송시열과 노론은 역사의 흐름에 저항한 기득권 세력으로 배웠어요. 로쟈님도 그렇게 배우지 않았나요? 이덕일의 주장은 이러한 흐름에 부합되어 오히려 각광을 받는 듯 싶기도 합니다. 그가 주류 학계와 다른 저항 세력인 듯 행세하는 건 책을 팔기위한 상술일 수는 있어도 전혀 현실과 부합되는 건 아닙니다.

lunar-altena 2011-07-24 16:26   좋아요 0 | URL
실학이 재조명 된거는 아무래도 민족주의 사학에 입각해서 뭔가 우리도 일본 침략만 없었으면 자본주의화 됐다는(자본주의 맹아론) 그런 '바람'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영남 출신들의 정재계 장악과 연관되서 생각해 볼점도 충분히 있는것 같구요.

뭐. 아!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지역대학 사학과를 나온 사람 입장에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서요. 고등학교 국사시간 때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잘 생각이 안나네요. 그점은 논외로 치고,(어쩌면 진보의 투철한 민중사관이 교과서에 실렸을 수도요) 제가 대전 지역 사학과를 나왔거든요. 송시열과 기호학파의 고향인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여기 교수님들(조선시대 전공, 특히 성리학)은 송시열에 상당히 긍정적이십니다. 뿐만아니라 서울의 유명대학의 조선시대 전공 교수님들도 노론쪽 학파가 많다보니 학계가 그 쪽으로 치우쳐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서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모 유명대학 교수님들의 입김은 학계에서 강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같이 된 원인이 노론-> 친일파 -> 기득권층 이란 도식에 완전히 부합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재미난 건 또 있습니다. 서울중심의 학계에서 소외된 지역대 교수님들은 각자 자기 지역 유학자들을 연구하시죠. 그런데 마치 자신이 그 옛날 최고 유학자의 학맥을 이었다면서, 옛날에 스승들이 논쟁했던 그대로 아직도 싸우십니다. 뭐 일반화 할수는 없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노론과 소론이, 남인과 서인 쪽 연구자분들이 다투고 계신다고 합니다. 참 웃기죠?

서울 주류와 지역 비주류, 그리고 지역들간에도 사소한 차이로 화합하지 못하는 점.
논어의 이런 구절이 생각나네요.
君子 和而不同하고 小人 同而不和니 (군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지만 어울리지 못한다.)
과연 지금의 일부 교수님들이 예전 유학자들만큼의 도량이나 될런지...

이런 면을 그냥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직도 노론과 주류 학계의 문제점은 해소되지 못한것 같습니다. 굳이 노론이 아니더라도,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과 불관용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죠. 그런면에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이 책의 목표는 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

푸른바다 2011-07-25 10:06   좋아요 0 | URL
이덕일 류가 조선과 한겨레에서 모두 대접받는 이유이기도 하죠.^^ 좌파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에 관심있기에 송시열과 노론은 수구반동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죠. 우파는 꼭 위에 기술한 이유만은 아니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송시열과 노론에 비판적입니다. 이는 한중일 삼국의 반주자학적 일반 경향이 일부 반영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송시열과 노론 주류의 고향인 충청도 지역에서 일부 지지 그룹이 있지만 그야말로 지역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제가 알기론 사학계에서 송시열과 노론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흐름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입니다. 대표적으로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이분이야 말로 학계에선 이단자로 볼 수 있죠. 학계에서 송시열과 노론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냈다간 수구보수로 몰리기 십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lunar-altena 2011-07-25 20:42   좋아요 0 | URL
예, 잘 들었습니다. 뭐 제가 학계 사람도 아니고, 자세히는 모르지요. 지역에서 중앙을 바라보는 창도 부족하고. 훔 그래도 말이죠. 훔 실명을 거론하기 그렇지만 서울대 사학과 출신 교수님들이 우암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지금의 국사학과 교수님들은 어찌되는지 모르지만, 현재 은퇴하시고 명예교수로 계신 분들, 제자도 많이 배출한 뭐 그런 분들이 몇몇 우암에 긍정적이시더라구요. 확실히 저희 지역(대전)은 우호적인 분위기 입니다. 또한 충북 쪽이 우암의 학술사업과 기념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1-07-25 23:15   좋아요 0 | URL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교수도 다양하니 송시열에 긍정적인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알기론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1-07-25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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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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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6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6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윌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민음사, 2011)와 피터 터친의 <제국의 탄생>(웅진지식하우스, 2011)에 이어서 문명/제국을 다룬 책으로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21세기북스, 2011)까지 출간됐기에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퍼거슨의 책은 '서양과 나머지 세계'가 부제다. 여름엔 미시사보다 거시사를 들여다보는 게 제격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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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1-1- 동양문명, 수메르에서 일본까지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한상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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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야기 1-2- 동양문명, 수메르에서 일본까지
윌 듀런트 지음, 왕수민.한상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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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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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국의 탄생- 제국은 어떻게 태어나고 지배하며 몰락하는가
피터 터친 지음, 윤길순 엮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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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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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견출판사 생각의나무가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는데, 소식을 접하자 마자 절판이 염려돼 구한 책은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이다(알라딘에는 이미 품절이어서 교보에서 구했다). 청 건륭제 때 편찬된 이 방대한 서물을 다룬 저자의 하버드대 박사학위논문이다. 건륭제 혼자만의 열람을 위해 편찬했다는 사고전서는 대략 3,600여 종, 36,000여 책, 79,000여 권 규모라 한다. 거의 책으로 쌓은 만리장성이라 할 만하다. 어제 교수신문에서 이 사고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접했다. 어림계산으로 200년이 걸리는 작업이라 한다. 한여름밤의 몽상일는지 모르지만 그럴 듯하게 여겨져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1. 07. 18) 우리 학계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빈곤

나는 2003년부터 7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朱子大全』과 『朱子語類』를 번역하는 연구팀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고전의 번역 과정에서 역주의 필요성 때문에 참고문헌을 뒤적이는 일은 모든 번역자들이 마주치는 일상의 다반사다. 거기에 수반되는 두통과 지끈거림은 겪어본 이들은 모두 공감한다. 오늘날에는 디지털 기술로 구축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절감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타이완 중앙연구원의 25사 원문 서비스, 그리고 문연각본 『四庫全書』를 디지털화 한 전자판 『사고전서』였다. 작업 도중에 정확한 서지사항의 표기를 위해 원문 확인이 필요한 경우 전남대 도서관 4층의 고한적실을 이용했다. 거기에는 상무인서관에서 출판한 『사고전서』의 영인본이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거의 매일 도서관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 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고전서』에 수록된 책들을 다 번역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이 총서는 현대적인 제책으로 1천501권이고, 한 쪽 당 10행 20자 원문이 4면씩 축소 영인돼 있다. 실제로 전체 분량은 단행본 6천여권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평균 쪽수가 1천쪽이라고 간주하고 일반적인 한문 고전의 번역 관행을 적용할 경우, 1만8천 권 정도로 이뤄진 학술 총서가 발행된다. 어림잡아 2만여권 내외의 번역물이 예상되는 것이다.

연인원 200명을 기준으로, 개인당 2년에 단행본 한 권씩 번역한다고 가정할 경우 약 200년이 소요된다.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학술 연구 교수의 수준을 적용해서 1인당 연간 3천600만원의 인건비를 책정한다면 1조 4천400억 원이 필요하다. 결국 1조 5천억 원 정도와 연인원 200명, 200년의 시간이 번역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현재 기준으로 5조원 정도의 예산을 300년 정도 투입하는 선이면 가능할 것이다.

2만권의 번역본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만나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四庫學’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의 내용은 중국학, 동양학, 고전학, 문화학, 신화학, 천문학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여러 가지 학문의 상호착종과 교차를 특징으로 삼는다.

현대적 용어를 빌리자면 ‘인지적 유동성(cognitive fluidity)’혹은 ‘개념 혼성(conceptual blending)’이라고 불리는 인지적 능력은 자신의 창발적 활동을 위해 이러한 지적 배경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포코니에와 터너가 말했다시피 ‘인간의 문화와 사고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인간의 문화와 사고는 이미 이용 가능한 정신적 구성물과 물리적 사물로부터 작동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고이지신’이란 이런 현대적 이해를 예언하는 고풍스런 전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는 주된 이유가 하나 있다. 어째서 우리 학계에는 겨우 100년을 유지하는 학술 계획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 인문학의 전통을 최초로 개인 문집을 남긴 최치원의 『계원필경』으로부터 잡더라도 벌써 1천300여 년이 흘렀다. 이 학문의 역사 속에 겨우 1세기를 지속 기간으로 하는 비전과 목표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을 생각해보면 왜소함과 답답함에 현기증을 느낀다. 학술계에서조차 이런 상상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영역에서인들 같은 것이 가능하겠는가.

1세대가 시작하고, 2세대가 골격을 세우며, 3세대가 지붕을 올려 완성하는 상상의 학술 생태계를 그려보는 우활한 몽상은 대체적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경ㆍ사ㆍ자ㆍ집의 四大江이 현대 한국어로 미래의 인지적 상상력과 만나서 문화의 꽃을 피우는 몽환경은 삽질이란 평이한 낱말의 사용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삽질이라는 낱말은 삽이 꽂혀야 할 곳으로서 대상화되는 저 자연의 사대강 속에서 자신의 깊은 의미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낱말의 의미는 가정된 대상과의 지칭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사용 속에서 발견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런 종류의 삽질을 위해서는 창조성이 폭발하는 무형의 문화 공간을 상상하고 그려내야 하는 도저한 상상력이 필요한 만치, 빈곤한 상상력에 감식안마저 무딘 누군가에게는 사대강이 콘크리트로 정돈되는 데 필요한 몇 년마저도 터무니없이 길게만 느껴지질 것이다.(이향준 전남대 박사후연구원·철학)  

11. 07. 23.  

P.S. <사고전서>의 번역자는 중국사 전공자로 <사고전서> 외 유익한 책을 여럿 우리말로 옮겼다. 벤저민 엘먼의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예문서원, 2004)도 그중 하나인데, 나머지 책들도 모두 구해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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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7-27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있는 글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정사 24사를 누군가 나서서 번역했으면 합니다. 사기는 완역이 나온 것 같은데 한서 삼국지쯤 가면 초역이고 그 이후는 번역이 아예 없는듯합니다. 만일 중국 정사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으면 여러 후속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학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완역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중국과의 교역이 이미 미국을 넘어선 시점에서 중국역사 연구의 시초는 바로 중국 24사의 번역이라고 생각하는데 꿈일까요.

중국 정사 24사는 뉴욕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 공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된 것이라 전혀 접근이 불가합니다. 쩝 (미국 공립 도서관은 정말 놀랍죠, 대학 도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요)




로쟈 2011-07-27 22:10   좋아요 0 | URL
24사 번역은 20년쯤 걸릴까요?^^;
 

잠깐 마트에 나가는 길에 우편함에서 꺼내든 책은 평소 두 권 분량으로 나온 '기획회의'(300호)이다. '한국의 저자 300인' 특집에 차출돼 나도 인문 분야 저자들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다. 다행이다 싶은 건 분량상 길게 언급하지 못한 저자들을 다른 코너들에서 '체크'해주고 있다는 점. '키워드별'로 살펴보고 '분야별'로 다시 한번 걸르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시대의 저자들이 궁금한 독자라면 유용한 자료로 삼을 만하다. 11개의 '분야별로 살펴보는 한국의 저자' 가운데, 내가 맡았던 '인문' 꼭지를 옮겨놓는다. 명단이 주어진 상태에서 몇 명을 더 얹어 작성한 것이다.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였다.

    

기획회의(11. 07. 20)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그들

한국의 저자 300인’에 특집에서 내게 ‘인문 분야’가 맡겨진 것은 '전문가 리뷰'의 인문 꼭지를 담당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내부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면 이런 무리한 일이 맡겨질 리 없을 테니까. 여하튼 청탁은 거절하지 못했고, 다만 너무 많은 저자가 할당된 이 분야를 조금만 더 한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역사분야를 제외한 인문분야를 다루게 됐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문학’과 ‘철학’을 근거지로 한 저자들을 짚어본다. 물론 여전히 분야별 경계가 모호하며(가령 역사학자의 사회비평은 ‘인문’ ‘사회과학’ ‘에세이’ 모두에 걸린다) 저자에 따라서는 여러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기에 형식적인 분류가 궁색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기회에 한국 인문출판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역사와 함께한 지난 14년, 그리고 <기획회의>의 발자취와 나란히 한 지난 13년 동안 활발히 활동한 대표 저자들을 더듬어보는 일은 개인적으로도 감회를 느끼게 한다.   

비평, 그리고 비평가들 
오래전 일이지만 러시아문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인문대학’은 학과보다 한 단계 큰 소속기관일 뿐이었다. 집회가 있거나 교련교육이 있을 때만 ‘인문대’는 따로 호명됐다. 나는 문학개론이나 종교학개론 같은 인문교양과목을 많이 듣긴 했지만 나의 자의식은 인문학 전공자라기보다는 문학 전공자, 내지는 외국문학 전공자 쪽이었다. 애초에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기에(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고3때 읽었다) 나는 문학과 철학분야의 저자들을 즐겨 읽었는데, 문학평론가 김현(불문학)과 김윤식(국문학), 그리고 김용옥(동양철학)과 박이문(서양철학)이 내가 길잡이로 삼은 이들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의 지속적인 학문적 욕심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김현을 제외하면 지금도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그때 받은 인상이 틀리지 않았다.   

김윤식은 자서전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등을 통해서 근대문학 연구자, 현장비평가로서의 삶을 한국 문학사 자체와 중첩시키고 있다. 그러한 ‘중첩’이 가능한 것은 그가 펼쳐온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글쓰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관은 이미 ‘전집’을 출간한 대가 비평가들에게도 공통적인 것이다. 한국 인문주의의 새 지평을 열었던 비평가 김우창은 시평집 <시대의 흐름에 서서>와 <정의와 정의의 조건> 같은 정치철학적 에세이를 통해 성찰의 보폭을 꾸준히 이어갔고, 유종호는 <나의 해방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과 같은 자전적 회고를 통해서 지나온 삶의 ‘결’과 ‘세목’을 재현해냈다. 비평가로서 그가 늘 강조해온 덕목을 몸소 보여준 것이면서,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의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비평가적 신념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신념의 비평가로선 백낙청도 빼놓을 수 없다. 전집의 버금하는 <백낙청 회화록>을 간행한 이후에도 그의 쉼 없는 관심과 열정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묻고,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되새긴다. 첫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와 같이 묶어서 다시 펴낸 것은 그가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의 ‘초심’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현재의 비평가’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개인적으론 20년 전에 읽은 비평가들의 신간을 여전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감동적이지만 한편으론 ‘비평’과 ‘비평가’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격세지감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어떤 시집이 나왔고 누구의 평론집이 새로 출간됐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게 80년대 대학가 하숙집 풍경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며 시대는 변하는 것이니까 왈가왈부할 수도 없다. 어쩌면 ‘지식인 시대의 종언’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은데, 지난 80-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비평가들의 이름을 지금은 자주 들을 수 없고 비평의 영향력도 쇠잔하다. <장소의 탄생>, <이상과 모던뽀이들> 같은 저작들은 계속 펴내는 시인이자 비평가 장석주는 오히려 ‘글쟁이’로 분류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리하여 비평가 김영찬의 평론집 제목을 빌면 <비평의 우울>이 우리시대의 한 가지 표정이다. 중견 비평가들의 이름이 묻힌 가운데에서도 ‘젊은 피’를 느끼게 해주는 건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이다.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로 김현 비평의 ‘레전드’를 재현할 기세인 신형철이 대표적이다. 그의 명민한 감각과 세련된 문체의 비평은 비평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으며 독자와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방향타이다. 가라타니 고진 ‘전담’ 번역자로 이름을 알린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서 시작된 ‘한국문학비판’ 연작을 통해 한국문학 ‘주류’와 ‘문단문학’에 대한 ‘얼터너티브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문학의 구조>로 계속되고 있는 작업이 그가 표방한 ‘장편비평’과는 별개로 비평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제시해줄지 관심거리다. 더불어 <시네필 다이어리>의 정여울도 대중문화 세례를 받은 세대의 비평가로서 영화와 철학, 대중문화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비평’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중후한 비평(혹은 무게 잡는 비평) 대신에 더 경쾌하고 더 확장된 비평의 세계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인 문학비평이 독자들의 시야에서 한걸음 물러나면서 비평의 카테고리를 장악한 것은 문화비평과 고전비평이다. 김용석의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그러한 경계의 지표가 될 만하다. 그는 문화전반과 일상에 대한 문화철학적 성찰을 통해서 일종의 ‘블루오션’을 개척했고 <깊이와 넓이 4막 16장>과 <서사철학> 같은 유례없는 책을 낳았다. ‘해리포터에서 피버노바까지’ 아우르는 넓이에서만큼은 견줄 만한 저자가 드물다.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비평 쪽의 새로운 강자는 이택광이다. 김용석이 ‘성찰’에 주안점을 둔다면 이택광의 방점은 ‘비평’에 놓인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와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통해서 그는 문화비평의 ‘이론과 실제’가 어떤 것인지 보다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사회학자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통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식 문화를 낯선 성찰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최근 작업은 파리라는 도시의 인문학에 집중되고 있다.    

고전 읽기와 철학 하기
자칭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리라이팅’을 통해서 고전 읽기의 새로운 붐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신영복의 <강의>와 함께 우리 고전과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한문학자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문화사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부지런한 한문학자들이 ‘잡문’을 쓰는 데에도 기꺼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문제적인 학술서도 여럿 펴냈지만 강명관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등의 책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와 선조들의 생각을 한층 친숙하게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안대회도 <선비답게 산다는 것>과 <고전 산문 산책> 등의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학술대중화에 자기 몫을 보탰다. 다산학 권위자인 박석무의 <조선의 의인들>도 이 분야에서 꼽을 수 있는 책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동양고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제고에는 김용옥의 역할이 가장 컸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절차탁마 대기만성> 등의 저작과 대중강연을 통해서 동양고전의 현재적 의의와 함께 번역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설파해왔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병행해왔지만 <논어한글역주>, <중용한글역주> 등 최근의 한글역주 작업은 그가 자신의 ‘본령’을 찾았다는 인상을 준다. 김용옥 못지않은 다작의 저술가 박이문은 불문학박사이자 철학박사라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서 일찍부터 쉽고 명징한 언어로 다양한 주제의 교양서와 철학입문서를 펴내왔다. 개인적으론 대학시절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에서 예술철학과 과학철학까지 넘나드는 다양한 분야의 사유를 그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절판됐지만 특히 <시와 과학>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책이다). 그의 여정은 ‘둥지의 철학’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통합의 인문학>과 <둥지의 철학>이 그 결과물이다.   

저술가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철학자로는 이정우를 꼽을 수 있다. 푸코 전공자이면서 들뢰즈 철학 연구자로 잘 알려진 그는 <세계철학사1>을 통해서 자신의 역랑과 함께 학문적 포부를 드러냈다. 김진석과 김영민은 한국적 현실에 착근한 사유와 고유한 개념어의 창출로 눈에 띄는 철학자다. <더러운 철학>을 통해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김진석의 철학적 화두는 ‘포월’과 ‘소내’이다. 90년대에 탈식민적 글쓰기를 문제로 내걸었던 김영민은 <동무론>,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등을 통해서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으로서 ‘동무’라는 자신만의 주제를 탐구한다.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라는 그의 <공부론>은 장정일의 <공부>,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촉발한 ‘공부론’ 유행 가운데에서도 이채롭다. 공부론과 관련해서는 장회익의 <공부도둑>과 김열규의 <공부> 같은 원로 학자들의 체험적 공부론도 눈길을 끈다.   

동양철학 전공자이면서 서양철학을 넘나들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신주는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삶과 만난 철학’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이 필요한 시간> 등은 철학이 삶, 그리고 대중과 만나게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문교양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대표 저자로 강유원도 빼놓을 수 없다. 서양고전의 강의와 마르크스 저작 번역에 힘쓰고 있는 ‘지식주의자’로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인문고전 강의> 등의 책을 펴냈다. 고전 읽기 바람을 타고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베스트셀러 저자도 탄생했는데, <철학콘서트>의 황광우,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김용규 등이 대표적이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김용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필두로 보다 본격적인 인문교양서 저술에 나서 앞으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고전과 함께 신화 관련서 또한 고정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분야인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져온 열풍은 그것을 비판하는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까지 낳았을 정도다. 이윤기에 이어서 신화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는 저자로는 <영혼의 역사>의 장영란을 들 수 있다. 더불어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의 정재서, <문학의 숲에서 동양을 만나다>의 김선자, <살아있는 우리 신화>의 신동흔 등이 신화 전공학자로 우리의 신화 읽기를 풍부하게 해주는 저자들이다.     

서평과 번역에 대한 관심
2000년대 들어서 고전 읽기와 함께 인문출판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건 책에 대한 책, 곧 서평집이다(이러한 풍경은 마치 비평의 시대가 저물고 서평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베스트셀러 30년>), 한미화(<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외에 최성일, 이권우(<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표정훈(<탐서주의자의 책>) 같은 출판평론가 1세대의 활동이 2000년대 벽두를 장식했고, 중반 이후로는 고명섭(서평기자), 이현우(인터넷 서평꾼)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최성일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시리즈를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평 영역을 구축한 글쟁이다. ‘책에 대한 책에 책’은 ‘책벌레들에 책’으로도 영역이 확장되었는데,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김풍기의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김상웅의 <책벌레들이 동서고금 종횡무진> 등이 그에 속한다. 서평과 함께 번역에 대한 관심도 200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현상으로 여겨지는데, 박상익의 <번역은 반역인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은 그 두드러진 성과다. 더불어 <개념어 사전>을 <철학>, <역사> 등을 펴낸 남경태는 전문 번역자가 일급 저술가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몇 가지 범주로 얼기설기 나누어서 인문 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독특한 색깔의 저자나 독립군적인 저자들은 이런 ‘그물망’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나무인문학의 강판권(<나무열전>), 풍수인문학의 최창조(<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스토리텔링 인문학의 최혜실(<스토리텔링, 그 매혹의 과학>) 등이 그렇고, 에세이스트로서 이어령(<문화코드>)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하나의 장르인 고종석(<감염된 언어>)과 전방위 공부꾼 고병권(<화폐, 마법의 사중주>) 등이 그렇다. 그러니 이 모든 저자들에 대한 얘기는 모두 흐트러트렸다가 다시 지어내야 온당할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동시대 저자로서 그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11.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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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7-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그려진 지형도를 보는 느낌인데요.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

로쟈 2011-07-22 14:06   좋아요 0 | URL
그런 걸 그려보고는 싶었어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7-2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좀더 큰 캔버스에 그려주시길...

로쟈 2011-07-22 14:50   좋아요 0 | URL
멍석이 먼저 깔려야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려볼 텐데요.^^ 생각만 하고 집어넣진 못했는데, 저자 유형학도 다뤄봄직합니다. '학자-지식인-글쟁이'론입니다...

canon 2011-07-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석주 문학에 대한 평가는 문단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23 00:35   좋아요 0 | URL
'독립군'이죠...

park6 2011-07-2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ㅎㅎ 그런데 로쟈씨께서 박이문씨 책을 인상깊게 읽으셨다니, 저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로쟈 2011-07-23 00:35   좋아요 0 | URL
주로 학부시절에 읽었고요. 평이하게 쓰시기 때문에 입문용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2011-07-23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7-2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시대의 인문 저자들이 한눈에 잡히는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넘 감사합니다. 하상 궁금했던 분야인데 한 번에 정리 됐네요^^

그나저나 저도 박이문 선생님 글을 처음 접하고나서 출간된 책을 거의 다 컬렉션화 했는데, 이사오면서 엔날에 출간된 반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어졌네요...현재는 7권만 보유중입니다. 엔날 국어 교과서에 '길'이라는 에세이가 실린 적도 있었죠.
저는 처음 단행본으로 <이성은 죽지 않았다>를 첨 접했네요...도서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쉬지도 않고 읽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할 겁니다..ㅎㅎ 근데, 제일 좋았던 책은 <노장사상>이었네요~ 로쟈님 서재에서 박이문 샘의 글을 보니 넘 반가운 나머지..ㅎㅎ

로쟈 2011-08-04 07:39   좋아요 0 | URL
<이성은 죽지 않았다>는 아마도 '중기 박이문' 정도 될 거 같아요. 저는 데뷔작인 <시와 과학>이 인상적이었어요. 자서전 <사물의 언어>도 반가운 책이었죠. 모두 지금은 '없는' 책들이네요...

미국사람 2011-08-04 0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같이 오늘은 무슨 책이 나왔나하고 들어왔다가 이 글은 오랬만에 꼼꼼히 읽어보았네요. 참 훌륭한 글입니다. 대충 저자들 그림이 그려지는 군요.

그리고 박이문 선생이 아직 살아계신가 보군요. 대학시절 학교 강연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 말보다는 글이 훨씬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외국에 오래 사셔서 그런지... 1930년생이시니까 우리 나이로 82살이시군요.

로쟈 2011-08-04 07:37   좋아요 0 | URL
네, 달변은 아니신 분이죠. 그리고 초기 글들이 더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