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Beliving is seeing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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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전에 사둔 책을 불쑥 끄집어 내어 뒤적거린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데, 이것은 아사 버거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를 뒤집은 것이다. 믿는 것(believing)이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인식틀이자 제도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저자 스타니젭스키는 우리가 보기(seeing)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beleing)들에 대해서 폭로하고자 한다.

사실 번역서의 제목인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같은 제목의 푸코의 마그리트론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그리트/푸코가 문제삼은 것 또한 이미지와 재현 사이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입견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당수의 도판을 통해서(도판이 흑백이란 것이 좀 아쉽다) 저자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간명하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저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이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38쪽)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논증한다기보다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해 암시하고 있는데, 가령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의 좌대 위에 올려놓고 <샘>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변기를 미술로 바꾼 것은 미술사가들이 25,000년 전의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라 명명한 것(빌렌도르프의 비너스)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는 대목들이 그렇다(41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본격적인 본론을 아직 남겨놓고 있다. 좀더 빽빽하고 무게 있는 책이 기다려진다.

존 버거의 <이미지>(원제는 <보는 방법>)과 함께(버거의 책도 아쉽지만 흑백 도판이다) 미술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38쪽) 여기서 미술을 '인간'으로 바꾸면,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도달하고 있는 결론과 동일하다. 즉,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일종의 미술(개념)의 고고학인 것이다. 하여간에 그런 저자의 도발적인 문구, 혹은 곰브리치의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문구로 우리의 미술 교과서가 시작된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미술을 배우며, 또 미술의 얼굴이 바닷물에 씻겨져 가는 걸 보며 싱긋이 미소지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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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1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미술 개념의 고고학'을 다룬 간결한 책은 그야말로 푸코 에피스테메 이론의 미술 개념에 대한 적용이더군요.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의 핵심적 주장은 결국 '근대미술'이란 '미술'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탄생하고 또 기능하는 '근대적' 개념, 발명품이니만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모든 보편명사는 사실상 고유명사에 불과하다'는 푸코나 여타 인근 사상가들의 주장을 미술이라는 개념에 충실히 적용한 것으로 간결하지만 흥미로운 적용/분석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미술(美術)'이라는 이 19세기에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조합된, 혹은 보다 정확히는 발명된, 일본말이 자신만의 개념적 지형과 정치학을 갖는 역시 또 하나의 '고유명사'라는 점이 추가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다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이 우리말본은 책의 내용에 비해 장정이나 디자인이 좀 허술하고, 그리 미학적이지 못한 공백이 많은데다, 그에 따라 책값이 부피나 분량에 비해 좀 '쎄진'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기호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13
폴 코블리 지음, 조성택 외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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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기호학 입문서가 아니라 기호학사 입문서이다. 즉 기호학의 ABC가 아닌 기호학사의 ABC가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이다(그런데,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기호학은 곧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역사 그 자체이다'). 그 ABC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스위스 출신의 20세기 언어학자 페르낭드 드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논리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이다. 저자는 이들로부터 파생되는 20세기 기호학이라는 방대한 지적 모험을 매우 간명하면서도 요령있게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좀 감질나기는 하지만, 기호학이라는 고급 풀코스 요리의 맛보기로는 제격인 듯싶다.

모든 모험이 그렇듯이 기호학적 모험에도 몇몇 뛰어난 영웅들이 있다. 소쉬르에서 바르트, 방브니스트, 그레마스, 데리다(물론 그의 그라마톨로지는 기호학에 비판적이다)에 이르는 계보, 그리고 퍼스에서 모리스, 시벅, 에코로 이어지는 계보, 거기에 야콥슨과 러시아 형식주의와 체코 구조주의(프라하학파), 소련의 문화기호학으로 이어지는 계보 등. 기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가장 애를 먹이는 것은 이들 계보들의 기호학적 구상과 사용하는 개념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인데(가령 소쉬르의 '기호=기표+기호'의 2원적 모델인데 반해서 퍼스의 '기호=표상체+대상+해석체'의 3원적 모델로 되어 있다.), 저자의 쉬운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제법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은 기호학에 대한 어수선한 지식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입문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저자가 제시한 '더 읽기'를 참조하여 앞으로 한참 더 읽어야 하는 여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 풀코스의, 세미오시스를 통한 기호계(세미오스피어)로의 여정 또한 '읽기의 모험'으로서 손색이 없지 않을까?..

사족으로 한두 가지 오역을 지적하고자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보리스 엑센바움'(135쪽)은 '보리스 에이헨바움'이라고 표기해야 하고, 프라하학파의 '얀 무카로프스키'(146쪽)는 '얀 무카르좁스키'가 맞는 표기이다. 무카르좁스키의 제자 '펠릭스 보딕카'(157쪽)도 (내가 알기엔) '펠릭스 보디치카'로 해야 한다. 그리고, 138쪽의 '1822년 짜르주의에 대항한 10월혁명주의자'는 '1825년 짜르주의에 대항한 12월혁명주의자'의 오역이다(원서가 잘못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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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 - 맑스주의.해석학.포스트모더니즘, 문예과학이론신서 28
숀 호머 지음, 이택광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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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읽히지 않는 이론가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맑스주의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는 물론이고, 아직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조차 번역되고 있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런데, 이 제임슨의 저작들을 총체적으로 개괄적이면서도 예리하게 비평하고 있는 숀 호머의 번역서를 보면 왜 사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요점은 두 가지다. 그의 이론의 난해성, 그리고 연구자들의 무성의.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까지 달고 있는 번역서가('문장의 미묘한 뜻에 대해 자세하게 답변해준 이 책의 저자 숀 허머에게도 고마움을...') 이토록 무책임하고 무성의하게 번역될 수 있는지는 놀라울 정도이다. 비록 오역의 향락이라 할 만한 지젝의 <향락의 전이>에는 다소 못미치지만, 이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오역의 전범이다. 제임슨이나 호머의 문장이 다소 난삽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어나 구의 누락에서 인명 바꿔치기, 문맥 거꾸로 이해하기 등 오역의 모든 구색을 갖춘 번역문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덕분에 원서를 읽게 됐지만).

어쩌다 발견하는 오역은 즐거움을 주지만, 간혹 정확한 번역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짜증스럽다.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제대로 된 교열/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것도 실망스럽다. 게다가 '물론 이 책이 개론서라고 해서 만만한 독서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20쪽) 토를 달고 있는 역자의 서문을 다시 읽자니 개탄스럽다. 만만하지 않은 책은 번역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이 책에서 오역은 두루 산재해 있지만, 특히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 2장, 3장에 집중돼 있다(사실 뒷부분은 자세히 읽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맑스주의는 실천으로부터 제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투쟁과 미래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투사할 필요성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이다.'(159쪽)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맑스주의는 무엇보다 실천의 철학이 아닌가?(역자도 이상하게 생각해야 했다.) 원문은 'Marxism cannot be severed from practice...'이다. '맑스주의는 실천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인데, 역자는 (아마도) severed를 served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애교이다. excess(과잉)을 난데없이 '중층결정'으로 번역하고, 시니피앙(기표)/시니피에(기의)는 서로 바꿔 번역했다. 만프레드 프랑크의 말을 제임슨의 말로 옮기고, 하버마스의 '미완의 기획(프로젝트)'는 '미완의 기억'으로 탈바꿈시켰다. 긴 문장을 인용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인데, 압권 중의 하나를 보자.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주의 개념은... 환형적 제곱의 사고를 촉발한다.'(80쪽) 환형적 제곱의 사고라니? 'a squaring of the circle'를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말 그대로, 원을 정방형으로 만들다, 즉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 문맥상 그것은 맑스주의의 생산양식 개념이 제임슨의 '구조적 역사주의'(역설적이지 않은가!)를 어떻게 설명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제임슨의 전유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역자의 몰이해는 여전한데, 그가 '들뢰즈의 극장'에서 무얼 보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환타지'라고? 물론 거기엔 오역의 음란한 환타지도 당연히 포함돼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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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글 감사 덕분에 돈 굳었습니다.하하

자꾸때리다 2011-01-0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택광이 이런 사람이었나요? ㅎㄷㄷ

clsv2948 2014-07-2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구입할 뻔 하다가 <로쟈>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읽고 안사기로 했습니다.
휴~~~쓸데없이 돈 날라갈 뻔 했습니다.
 
그림자 영혼 - 오늘의 작가 2
정찬 지음 / 세계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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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대해서 지인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정찬의 <그림자 영혼>은 그 연장선상에서 읽은 작품인데, 솔직히 먼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를 권한 작품이었다. 이른바 소설은 <악령>에 대한 정찬식 '다시쓰기'인데, <변신>의 최수철식 다시쓰기였던 최수철의 <매미>와 마찬가지로 별반 재미를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이 두 소설은 모두 부도덕하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따르자면, 인간 실존의 어떤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부도덕하다. <그림자 영혼>을 읽고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이나 발견한 것이 없으니 (적어도 나에겐) 충분히 부도덕한 셈이다. 한국 작가들을 폄하해서 하는 얘긴 아니지만, 이야기(서사성)가 강하면 깊이가 없고, 주제가 무거우면 이야기가 실종되는 걸 여러 차례 목도하게 되는데, 정찬의 관념소설인 <그림자 영혼>은 당연히 후자이다. 이 소설엔 소설의 실체는 없고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연극무대로서의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김일우의 장광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김일우가 러시아문학 전공자이고, 또 연극이라는 테마가 연극으로서의 삶, 정신분석(의식/무의식의 드라마)과 연계가 되기 때문에, 충분히 동기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이 앵무새처럼 맑스철학은 떠든다고 해서 그가 맑스를 표절했다고 볼 수 없듯이, 러시아 기호학자 로트만의 문화론을 들먹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의 줄거리를 형성하는 부친살해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프로이트의 창안이지 정찬의 그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점. 작가는 그런 점에서 너무 편한 구도를 선택했고, 인물의 복잡성을 전혀 복잡하지 않게 묘사함으로써 단순화시켰다. 더불어 신을 (인간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자의 일종으로 취급함으로써, 신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일우는 나다'라는 명제가 독자에게 가능하지 않도록 그를 일탈적인 인물로 제시함으로써 독서의 재미를 반감시켰다.

재미있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김일우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서 점심 대접을 받는데, 그런 상황에서 점심 식사 얘기가 나오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점심식사는 곧 시작되었다. 풍성한 식탁은 아니었지만 씀바귀, 버섯무침, 간장에 절인 매실 등이 입맛을 돋구었다..'(158쪽) 같은 대목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 정신과 의사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워지기에. 덕분에 이 소설은 전혀 입맛을 돋구지 못한다.

작가도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직하긴 하다. 시종 화자는 자신의 무능력을 변명하고, 작가는 후기까지 붙여놓고 있다. 즉 이 소설은 <악령>을 베낀 것이라고. 일종의 축소 번안소설일 테다. 하지만, <악령>의 재미마저 축소 변질된 것은 유감스럽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의사가 되지 못했다. 나의 자괴감은 여기에 있다.'(171쪽) 화자은 이 작품에서 의사(=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자괴감을 가질 만하다!

'보고서의 방향과 결론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170쪽). 우리의 작가는 아주 정직하다. 당연히 독자로선 못마땅하다. 그는 심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을 붙들고 늘어졌어야 했다. 따라서 결국 이런 결말에 이르는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한잔의 술을 앞에 놓고 연구실의 어두운 창가에 앉아 있다. 보고서를 작성해 나가면서 내가 느꼈던 캄캄한 무력감과 함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한잔의 술이 내 곁에 있는 것이다.'(172쪽). 여기서 작가의 비밀을 엿볼 수가 있다. 그에겐 무력감과 함께 한잔의 술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조금 수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작품들은 집어던지고 싶다. 이런 걸 읽음으로써 더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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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에른스트 곰브리치 외 지음, 정진국 옮김 / 민음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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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전에 <장난감 말에 대한 명상>이란 에세이가 내가 접한 곰브리치의 유일한 글이었다. 얼마전 필요 때문에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을 찾았는데, 뜻밖에도 절판이었다. 국내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그의 <미술 이야기The Story of art>가 스테디셀러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에 견주어볼 때 의아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책을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대신 손에 든 것이 이 책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책은 미셸 푸코의 전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과 곰브리치와의 대화이다. 그러니 보다 정확하게는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미술사가로서 자신의 학문적 자화상이다. 세 장으로 구성돼 있는 책의 1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그리고 2차 대전시 영국 런던에서의 피난생활 등이다. 전시에 그는 BBC의 독일방송 통역원으로 일했는데, 히틀러의 사망소식을 다우닝가의 처칠에게 전달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안정된 직장이 없던 차에 우연한 계기로 쓰게 된 <미술 이야기>는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청소년을 위한 미술사로 기획된 대중적인 그 책을 그의 동료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것. 이후의 삶은 비교적 탄탄대로였다.

2장, 3장에서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표현으로 시작되는 <미술 이야기>에서부터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학문적 관심과 방법에 관한 얘기들이 오고간다. 특이하게도 그는 동물행동학자인 로렌츠와 틴버겐의 영향을 언급하는데, 미술사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동물학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내 접근 방식은 항상 생리학적인 것입니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의 뿌리를 잡고 싶습니다.'(149쪽)(조류의 <각인행동>을 <자취>로 옮긴 것은 옥의 티이다.) 더불어서 그는 독일적 미술사의 전통을 대변했던 파노프스키와 자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는데, 예술을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포퍼주의자(Popperian)로서 그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듯하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가 <정확한 과학>(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한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저가 그냥 <미술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겸양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미술사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209쪽) 다만 합리적 포퍼주의자로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해 감탄하면서 예술작품을 더 잘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는 만큼 감동받는 것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이다.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유럽의 전통 문명>이라고 간단히 말한다: '미술가는 우리 문명의 대번인입니다.... 위대한 예술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삶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과거의 유산과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안타갑게 생각해야겠지요.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고 벨라스케스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겨야 하겠지요.'(213쪽) 측은한 축이 아닌 감사하는 축에 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곰브리치를 좀 읽어야겠다!(그런데 이 책도 절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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