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위대한 세기: 피카소’전이 지난 20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피카소 작품들은 세계 20여 곳의 미술관과 재단, 화랑,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빌려왔으며, 대부분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에는 피카소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한 바 있는 작가 김원일씨가 이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적어놓고 있어서 옮겨온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피카소를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시기별 대작과 걸작 등 140여 점으로 만나는 이번 전시는 사실상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피카소 회고전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5만여 점의 작품과 92세로 붓을 거둔 생애 자체가 이제 20세기의 전설이 된 피카소의 대표작 140여 점을 모아 전시한 서울시립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그림을 동경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을 둘러보고, 그의 화집을 사모아 오다 몇 해 전 그의 전기를 썼던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위대한 점은 그를 현대미술의 한 유형에 가둘 수 없는 자유분방했던 창작혼에 있다. 1900년 촌티를 못 벗은 스페인의 지방 화가로 파리에 입성한 후 청색시대, 분홍빛시대, 짧은 원시미술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두루 섭렵하고 고전의 자기식 해석법인 ‘변형’의 또 다른 시도와 도자기 작업 끝에, 누구도 도달한 적 없던 최상의 경지를 정복한 피카소는 그야말로 시각예술의 모든 장르를 깨부순 활화산이었다.



-19세에 예술의 메카 파리로 나와 곤궁했던 초기, 가난한 이웃들의 애환을 슬픈 빛 청색으로 표현했던 ‘모성’‘곡예사, 어린이와 개’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단연 시선을 끄는 대작 ‘솔레르씨의 가족’은 가난한 양복점 주인의 가족을 정감 있게 표현한 청색시대의 걸작이다. 현대미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후 브라크와 함께 경쟁적으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실험했던 시기의 ‘비둘기’도 전시됐다. 사물을 각과 선으로 자르는 수법의 이 그림은 현대 추상미술의 시발점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의 세 번째 연인이었던 러시아 무용수 올가를 로마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고전주의로 복귀한 시기의 ‘우물가의 세 여인’을 통해 피카소 미술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빨간 카페트 위의 기타’는 평생 서로 질투하며 사랑했던 경쟁자 마티스의 색의 대비를 재해석케 하는 40대 피카소의 대표적인 주제다. 피카소의 대표적 걸작으로 흔히들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등을 연상하지만 ‘무용’을 제외해선 안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 엘뤼아르 등과 사귀기 시작했던 1925년에 그린 ‘무용’은 야만적이고도 난폭한 기법으로 파리 화단을 경악케 했던 작품이다. 나는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그 대작 앞에 오래 서있었다. 혼란스러운 꿈의 세계를 생생한 현실과 결합시켜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한 이 광란의 춤 그림 앞에서 ‘평면회화가 이제 갈 데까지 가버렸다’며 놀랐을 당시 파리 화단 평자들의 탄성이 들리는 듯 했다.



-당대 최고의 부르주아였으면서도 평생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을 거쳐 군부 프랑코가 무력으로 조국을 장악하자 격분하여 탁구대보다 큰 대작 ‘게르니카’(1937)를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 수 없는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 전시된 ‘미노타우로스’와 ‘우는 여인’도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광폭성과 전쟁에 수난 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모습이 스페인 내란의 참상을 상징하는 한편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의 현실참여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본 다섯번째 연인 도르 마르를 모델로 한 초상화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는데, ‘게르니카’가 색을 배제했듯이 초상화도 어두운 톤이 주조를 이룬다. 스페인 내란과 2차 세계대전이 피카소로 하여금 밝은 색조를 거부케 했던 것이다.



 

 

 

-피카소가 40대에 만난 네 번째 연인으로 청초한 마리 테레즈와 60대에 들어 만난 여섯 번째 연인 프랑수와즈 질로, 일곱 번째로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느 로크의 초상화도 보인다. 마리 테레즈는 관능적이고 부드럽게, 프랑수아즈 질로는 이지적으로, 로크는 현모양처로서 모성성에 입각하여 각각 달리 해석했다. 평생 일곱 여자와 산 그가 한 여성을 만날 때마다 그의 그림도 변모를 거듭했음을 보는 것도 피카소 그림감상의 포인트다. “소설가가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으로 자서전을 쓴다”고 말했듯,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올곧게 담겨 있다.



-피카소는 만년에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준 들라클루아, 벨라스케스,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변형’을 시도했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출품돼 있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실험을 되풀이했는데, 밑그림 자체가 곧 완성품으로 평가된다. 90이 넘어서까지 담배를 즐긴 그는 “이제야말로 늙었다. 그러나 담배 맛은 20대 시절 그대로다”라고 말했듯.‘담배 피우는 남자’를 많이 그렸다. 관음증에 시달린 말년의 애교 넘치는 펜화 수채화와 함께 담배 문 남자상도 여러 점이 전시된 게 볼만 했다.


-그 동안 서너 차례 피카소 그림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세계 23곳의 기관 및 개인 소장처가 협조하에 그의 전 생애의 그림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미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자신의 교양 수준 점검을 위해 일차 관람해볼 만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다.

06. 05. 23.

 

 

 

 

P.S.  미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피카소 전 초대권을 얻은지라 한번쯤 시간을 내보려고 한다. 영어판 대형화집도 우연히 염가로 구한지라 나름대로의 '준비'도 된 듯하다. 더불어, 미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아트북스, 2003)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디자인하우스, 1996)을 꼽아본다. 전자는 도서관에서 대출했고, 후자는 소장도서지만 아마도 박스에 있는 듯하여 이 또한 대출해야 할지 모르겠다. 8월에는 몇 마디 더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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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님이 쓴 책 피카소에 대한 전기도 꽤 좋은 책입니다.

로쟈 2006-05-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작가를 닮았다면 진중한 맛이 있겠습니다.

바람돌이 2006-05-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전시도 보고 싶어요. ㅠ.ㅠ

로쟈 2006-05-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료가 좀 되는 듯하더군요...

해적오리 2006-05-24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의 '이재현의 가상 인터뷰' 꼭지는 최근에 <모크샤>(싸이북스, 2006)가 출간됨으로써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 편을 다루고 있다.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이 '가상 인터뷰'들 가운데 내가 전문을 다 읽은 건 이번 헉슬리 편이 처음이다. 그건 그만큼 이 신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코너에서 번듯하게 소개하려고 했지만, 지난 주말 한겨레의 리뷰를 비롯해서 언론에서 비교적 크게 다루고 있기에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해서 몇 마디 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해서, 일단은 그 '대안'으로 이 가상 인터뷰를 옮겨오고 몇 마디 군소리를 덧붙인다.

-영국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 그의 대표작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고전 소설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ㆍ1932)이다. 원래 이 소설은 그의 친구인 생물학자 홀데인(J. B. S. Haldane)이 에세이 <다이달로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the Futureㆍ1923)에서 미래 사회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묘사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쓰여졌다.

-헉슬리보다 먼저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도 에세이 <이카로스 혹은 과학의 미래>(Icarus, or The Future of Scienceㆍ1924)에서 홀데인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로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려고 시도한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가상적 미래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953년 헉슬리는 정신과 의사 입회 하에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이래 10년에 걸쳐 메스칼린 네 번, LSD 네 번, 사일러사이빈 두 번 등 총 10번의 환각제 복용에 의한 환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메스칼린은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이 애용했던 페요테 선인장에서, LSD는 맥각균으로부터, 사일러사이빈은 멕시코 무당들이 신성시했던 버섯으로부터 합성 추출해낸 환각 물질이다. 헉슬리는 자신의 환각 체험에 기대서 사이키델릭 문화의 고전, 또는 히피의 경전이라고 이야기되는 에세이 <지각의 문>(1954), <천국과 지옥>(1956) 등을 집필했다(*<지각의 문>에서 그룹 '도어즈'이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헉슬리는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와 더불어 20세기 사이키델릭 문화의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최근 한국에서 선생님의 저서가 번역되었습니다. <모크샤>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약물 복용에 의한 환각 체험을 다룬 각종 에세이, 칼럼, 강연, 인터뷰, 서신, 르포 등을 엮은 책이지요. ‘환각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헉슬리: 모크샤(Moksha)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해방 또는 해탈을 뜻한다네. 내가 말년에 쓴 다른 소설 <섬>(1962)에서 가상의 섬 주민들이 복용하는 환각제의 이름이기도 하지.



현: <멋진 신세계>의 등장 인물들은 ‘소마’(Soma)라는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소마와 모크샤는 어떻게 다른가요?

헉슬리: 소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통치 수단이고, 모크샤는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중독성이 있는 소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도피를 하게 만들지만 모크샤는 그렇지 않네.

현: 선생님의 관점이 바뀐 것이로군요. 그 사이에 선생님의 환각 체험들이 있었던 것이구요.

헉슬리: <지각의 문>에서 썼던 것처럼 우리 지각의 문은 평소에 흐려져 있네. 내 주장의 요점은 환각 체험에 의해서만 그 흐려진 지각의 문이 열린다는 거지.

 

 

 



현: <지각의 문>이라는 구절은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인용한 것이고, 록 그룹 도어즈의 이름은 바로 선생님의 글 <지각의 문>에서 따온 것이지요?

헉슬리: 판타지 소설 <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알려진 C. S. 루이스의 <위대한 이혼>도 바로 블레이크의 그 작품과 연관이 있네만, 블레이크의 원작에서의 해당 대목은 이러 하다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인다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나타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를 이미 닫아버렸기에/ 그의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현: 블레이크는 <신곡>의 단테나 <실락원>의 밀튼과는 달리, 지옥을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장소로 보았던 거로군요.

헉슬리: 그렇지. 블레이크의 관점에서는 천국이야말로 지각이 통제되어 있는 권위주의적인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지. 블레이크의 목적은 관습적인 윤리와 제도적 종교의 억압적 성격을 사람들에게 밝히려고 했던 거야. 그 당시로서는 매우 전복적이고 선구적인 주장이었지.

현: 그럼, 선생님은 환각제의 복용을 옹호하시는 겁니까?

헉슬리: 나는 환각제 복용이 부정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고 중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고해 왔네. 다만 우리의 제한된 지각의 틀을 넘어서는 초월의 계기를 환각제 복용이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지.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환각제를 복용하면 좋다는 얘기야. 환각제를 달리 정신 활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현: 그러니까, 선생님의 주장은 일부 환각제가 술이나 담배, 혹은 의사가 처방해주는 각종 수면제나 진정제보다도 훨씬 더 그 사회적, 문화적 효용이 뛰어나다는 것인가요?

 

 

 


헉슬리: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도 덜하고 부정적 효과도 없다네(*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옹호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가끔씩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마초 파동'은 도덕적 알리바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 인류는 알콜 중독으로 인해서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리고 있어. 이러저러한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금지한다고 해서 환각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환각제를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게 내 주장이야. 내가 해 본 바로는 메스칼린, LSD, 그리고 사일러사이빈은 대마초보다도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덜한 반면 그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난 환각제일세.



현: 저는 해보지 않아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헉슬리: 환각 체험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초월은 인간 정신 속의 또 다른 가능 세계로 가는 것이네. 이 세계는 평소에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인데, 환각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일세.

현: 그 초월적 환각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체험에 의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 건지요?

헉슬리: 크게 보면 한편으로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종교나 예술에서의 초월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 반면에 환각제는….

현: 그렇지만 환각제의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헉슬리: 아까 얘기한 대로 그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담배나 술보다 덜 하다니까 그러는군, 자네는. 문제는 그것들에 빠져서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길을 찾는 거야.

현: 하지만 환각제 복용은 한국에서 아예 토론의 여지가 없는 이슈예요. 무조건 나쁘다는 거지요.

헉슬리: 그것은 사회문화적 관습에 해당하는 것이네.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과학적, 심리학적, 정치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한국에서는 애당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일 뿐이네. 내 관점에서는 의사가 처방해주는 신경안정제야말로 아편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라네. 어쨌든 간에 모든 마취제, 흥분제, 진정제, 환각제들은 원시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태고적부터 쓰인 것이지. 그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편은 인민의 종교”라고 했던 것이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저작이 오오키 고오스케의 <마약-뇌-문명>(정신세계사, 1991)이다. 요점은 우리 뇌 안에 마약 수용체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마약복용도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마약에는 체내마약과 체외마약이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마약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한가지는 체내마약으로서의 도파민이 문명의 산파라는 것.  

현: 그 말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패러디한 것인데요.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헉슬리: 아닐세. 내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로운이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버나드 쇼와 마르크스, 레닌에 대한 내 평가를 담고 있는 인물들일세.

현: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사회주의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환각제의 복용은 사상적인 범죄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으로 처리가 되어왔습니다.

헉슬리: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네. 내 관점에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 한다든가 배기량이 더 큰 차를 사려고 한다든가 아이들을 일류대학 보내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중독 현상이라네.

현: (허걱!) 선생님 말씀은 마치 그런 일들이 범죄일 수도 있다는 걸 함축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헉슬리: 그렇게 타협적, 패배주의적으로 얘기해버린다면 자네는 ‘짝퉁’ 지식인에 불과한 거라네. 내 주장은 이 모든 것에 관해서 편견 없이 차근차근 제대로 따져보자는 것일세.

현: 글쎄요?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짝퉁이 명품보다 더 인기가 있어요.

헉슬리: 그럴수록 환각 체험이 더 필요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네. 내 책에서 말했듯이 “환각 체험은 아름다움과 참됨,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라네.

현: (헉) 더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선생님 주장은. 아무튼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06. 05. 23.

 

 

 

 

P.S. 참고로, 한국대중문화의 키워더 가운데 하나인 '대마초 사건'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대중예술평론가인 이영미이며, '한겨레21'(546호, 2005. 02. 02)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노래 군기, 확실히 잡다'.

-1975년 대마초 사건은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기막힌 사건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포크나 록을 하던 가수 윤형주·김세환·신중현·김추자·이장희 등과 영화감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 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중예술인들을, 대마초를 피웠다고 구속하고 공식 활동을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대마초 바람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이즘에서 우리나라 청년문화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것과 일치했으나 미국의 반전과 평화, 반청교도주의를 표방했던 ‘60년대 정신’과는 달리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의 새로운 대중문화·생활문화 세대교체 바람이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말하자면 미국 청년문화에서 대마초나 마약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월남전 징집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던 것에 견줘,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회의식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젊은이들이 대마초에 대해 마약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삼베의 재료인 대마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담배 피우듯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호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의 청년문화가 그다지 높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전 사회를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어했던 유신정권으로서는 그 정도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허용할 수 없었다. 파시즘은 취향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왔으며, 노래나 영화 같은 예술은 물론이고 패션이나 언어습관까지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미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외래어로 된 가수 이름은 양파들(어니언스), 토끼소녀(바니걸즈), 김세나(김세레나) 등으로 바꿔야 했고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토요일밤에>)의 가사가 “긴 머리 분홍치마”로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어떻게든 이 체제에서 살아남아 활동을 계속해보려던 이들의 노력은 확연했다. 조영남은 방송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태양은 묘지 위에”를 “대지 위에”로 바꿔 불렀고, 쉐그린은 아예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 나갔죠.… 바로 그때 이것 참 큰일났군요. 아저씨가 오라고 해요./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짧은 치마 입고 명동 나갔죠.”(<어머님 말씀>) 같은 ‘건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일찌감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건전가요를 지었던 신중현은 1975년에 나온 음반에서 <뭉치자> 같은 노골적인 건전가요를 지어 부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그는 대마초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구속됐다.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대중예술사의 전·후반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이전까지는 일부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포크와 록이 1974년 드디어 어니언스의 <편지>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으로 남진과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요가 되고, 영화계에선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던 상황은, 대마초 사건으로 급전직하의 국면을 맞이했다. 상당수의 대중예술인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포크와 록은 트로트 등 기성의 취향과 결합해 기성 가요계로 편입됐다. 이제 가수들은, 청바지가 아니라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대마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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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24 10:26   좋아요 0 | URL
**님/ 퍼가셔도 됩니다. 한데, 이미지 하나가 먹통이 됐네요...

비로그인 2008-09-03 08:57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인데, 막간 창고 정리를 한다. 이미 모스크바 통신에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란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에 관한 대목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2004년 7월초에 씌어진 그 글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업그레이드 버전은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때문에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문체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는 편이 좋겠다). 나머지는 나의 수다이다(단, 이 '수다'는 18세 이상만 접근가능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갑작스레 ‘정치론’을 꺼내들기 전에(*이 '정치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겠다) 내가 몇 마디 거들었던 소설은 김훈의 <현의 노래>였다. 나는 김훈의 문체를 얘기하면서 그의 ‘허무주의’를 지적했고, 보다 구체적으론 그의 허무주의가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는 걸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란 구절을 제시하면서 ‘질퍽거리는 구멍’을 김훈 문학행위의 핵심으로,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아갈마’(=숨겨진 보물)로 규정했다. 지젝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그의 문학행위는 그 ‘질퍽거리는 구멍’을 중심으로 순회한다.

이에 대해서 ***님은 (어제 읽어보니까)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뿐이라고 반박하는 답글을 달아놓았는데, 좀 의외의 답글이다. 내가 제시한 건 그것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 ‘질퍽거리는 구멍’의 주인은 “왕의 죽어 썩어가는 육체를 피해 도망친” ‘아라’이다. 나는 인용한 구절에서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라고 했다. 즉, ‘야로=김훈’이며, ‘질퍽거리는 구멍=허무주의의 근거’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하면, ‘질퍽거리는 구멍’은 ‘아라의 성기’일 뿐이라는 ***님의 지적은 ‘야로’는 ‘김훈이 아니라 야로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반박’으로서 성립하는 것인지? 혹은 ***님은 그것이 ‘반박’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건 메타언어로서의 비평 원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겠다(혹 진담이라고 밝혀주신다면, 다음 번에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도록 하겠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얼마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묘사는 음(陰)과 양(陽), 즉 암컷-수컷의 대립과 교접을 근간으로 구축돼 있다(‘여자-남자’라고 말하는 건 김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암컷-수컷’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시리즈의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라는 음(陰)과 암컷(성)이야말로 (야로가 아니라) 작가 김훈이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 채워 넣어야 할 구멍이고, 먹여 살려야 할 구멍이며, 궁극적인 미스터리이자 ‘적막’이다. 나는 이 또한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1866).

내가 개진한 것은 그러한 상식을 좀더 보충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충하는 김에 더 확장하자면,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vagina)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로서의 팔루스(phallus)에 대응하는 ‘여주인-기표(Mistress-signifier)’라 할 만하다. 라캉에게서 팔루스가 생식기관으로서의 남근, 즉 페니스(penis)와 구별되듯이, 바기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음문(陰門), 즉 불바(vulva)와 구별된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의 이행, 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니스’에서 ‘팔루스’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면(그리고 <‘징후’에서 ‘징환’으로> 또한 주요한 표어이다), 우리는 거기에 <‘불바’에서 ‘바기나’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기표’의 짝으로 ‘여주인-기표’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소쉬르/야콥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바,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구조주의자’ 라캉의 맥심이다. 실제로, 라캉은 야콥슨과 깊은 교우를 가졌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소개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을 알게 되며, 야콥슨은 프랑스에 갈 때마다 라캉의 집에 머물곤 했었다(레비 스트로스의 회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의 전회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킴과 동시에,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으로 전회시킨다. 그 전회는 <‘랑그’에서 ‘랭귀스테리’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는바, 알다시피 ‘랭귀스테리’란 ‘랭귀지(언어)+히스테리’이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 라캉의 ‘또 다른’ 맥심이 나올 수 있는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가 그것이다(물론 이건 그가 직접 언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것이다.)

단순하게 대비시켜 말하자면, <에크리>(1966)의 저자로서 구조주의자 라캉이 ‘무의식의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 데 반해서(그의 주된 관심은 ‘상징계’였다), 흔히 ‘후기 라캉’이라 불리는 탈구조주의자 라캉은 ‘언어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돌린다(그의 주된 관심은 ‘실재’였다). 조이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실, 이 ‘언어의 무의식’에 관해서라면, 이리가레와 함께 라캉의 ‘나쁜 딸들’의 하나인 크리스테바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바, 그녀의 <시적 언어의 혁명>(1973)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그녀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가리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가 일약 프랑스 지성계의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바흐친, 말, 대화 그리고 소설>(1967)을 발표함으로써이다(그녀가 26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일부 오역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안 그래도 상당히 난해한 논문이지만). 해서 요컨대, 라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야콥슨에 대한 참조는 기본적이며, 크리스테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흐친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다시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 해부학적으로 ‘팔루스’란 단어는 원래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 즉 클리토리스를 가리키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여 혹은 상실의 기표”를 뜻한다(욕망은 언제나 이러한 결여와 관련된다). 그것이 ‘기표’라는 점에서, 음경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 ‘결여/상실’의 기표라는 점에서는 음핵과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여성의 음핵은 결여한/상실한 남성적 음경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해서 팔루스는 페니스, 즉 남근이 아니지만 ‘남근적’이라는 이유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바기나는? 해부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그것은 ‘결여의 결여’, ‘상실의 상실’의 기표이며, 미스터리의 기표이고 ‘여주인-기표’이다. 즉, 남성에겐 미스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남성’은 다 드러나 있다!), 남성에게는 결여가 결여돼 있으며, 상실이 상실돼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바기나는 ‘지옥’의 기표이며, 팔루스가 결여/상실하고 있는 것은 그 ‘지옥’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하고만 관련짓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욕망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바로 ‘결여의 결여’와 관련된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이며,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는 자’가 무엇인가를 갖고자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자 욕망한다(즉 소유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에 대한 욕망도 있다). 주인-기표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면, 여주인-기표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안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여주인’ 행세를 한다. 즉 칼이 아니라 칼집이 주인이며, 마개가 아니라 구멍이 주인인 것이다. 즉, 여주인.



다시, 야로의 말, 김훈의 말을 보자.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여/상실이며, 부재이고 적막이다. “이 빨아당기는 속살” 앞에서,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이다. 속수무책이다. 왜인가? 그는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여의 결여이고, 상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인-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그는 여주인-기표를 욕망하며, 상실이고자 결여이고자 한다.

나는 게이에의 욕망, 팔루스를 제거함으로써 상상에서건, 실제에서건 ‘여성’(=암컷)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구멍(=바기나)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지배하는 ‘여주인’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구멍으로, 부재로, 결여로, 상실로, 적막으로, 미스터리로, 지옥으로 여주인은 주인을 할딱이게 하며 지배한다(천문학에서의 反물질 혹은 ‘암흑물질’은 이 여주인-기표의 천문학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혹 이런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페미니즘 버전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거울상?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다)를 구성하면서 여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것에 대하여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자, 그는 그것이 편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답한다(즉, 남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친족의 체계’도 이론적으론 가능한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건 사실이고 따라서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오른손잡이에 대한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러기가 쉬웠을 뿐인 것. 라캉의 욕망이론이나 ‘팔루스’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렇다면, 유표적 언명으로서 “여성은 없다”란 그의 테제의 거울상 버전은 “남성은 없지 않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이상한 것은, 즉 유표적인 것은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없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남자가 없지 않다고 상상해봐?”). 오, 없지 않아서 불행한 것들이여!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을 것들이여!..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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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 못볼 걸 봐서..........황급히 스크롤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로쟈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경고'해두지 않아서 죄송합니다(한데, 사진이 아니라 '누드화'일 뿐인데요)...
 

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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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3:19   좋아요 0 | URL
**님/ 서재주인에게만 생색을 내시나요?^^
 

 

 

 

 

리안 감독의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오늘 반납했다. 지난주에 빌렸으니까 며칠 연체했다. 그건 내가 풀타임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띄엄띄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났던 것처럼 나는 영화를 띄엄띄엄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그건, 영화속 에니스의 대사처럼, 내가 마음놓고 영화를 볼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해서, 나는 카우보이처럼 건성건성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다음 기회로 넘기면서).

역시나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감상과 함께 내게 남겨진 건 (아마도)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20년간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자의 과묵하고 절제된 감정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그러한 절제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본 몇 가지 리뷰들 가운데 한 편 정도를 옮겨오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몽롱하게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 궁극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리안은 이야기를 범우주적인 로맨스로 만들어낸다. 하긴 <타이타닉> 이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쓰는데,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평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그런 점이 내겐 좀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작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푸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나는 <타이타닉>을 아직도 보지 않았다).

몇 개 읽어보지 않은 영화평들 가운데,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씨네21(06. 03. 15)에 게재됐던 김소영 교수의 '가족을 지키려는 카우보이의 다짐, <브로크백 마운틴>'이다(이 칼럼을 고른 건 '고작 사랑 이야기' 범주를 약간은 벗어난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고 있어서이다).

-1963년 여름 그들은 양치기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간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홀)이다. 8월에도 산은 춥기만 하고, 먹을 것은 콩 통조림뿐이지만, 돌보아야 할 양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양치기인 이들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중인지라 양치는 일보다 다른 데 관심이 많다. 과묵하다기보다는 말을 요령있게 못하는 에니스와 촉촉하고 정감어린 시선을 가진 잭은 양을 잡아먹어볼까 하는 궁리도 나누고 그러다 사냥을 해(여전히 큰 동물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영화 관람이나) 상당한 양의 육포를 말리기도 한다. 와중에 에니스는 성장기 자신의 가족사의 고통을 잭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게이 카우보이 무비로 알려진 것처럼 둘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의 허심탄회한 섹스 후일담은 모두 난 원래 퀴어가 아니거든! 이다. 그렇게 육체의 고백과는 다른 언어적 고백을 털어놓고 나서도 이들은 남자친구로서의 가까움만이 아니라 게이로서의 성적 친밀성을 나눈다. 그 뒤로도 20년간이나. 와중에 하늘 아래 낮고 융성하게 깔린 와이오밍(실제로는 캐나다 로키)의 흰 구름과 푸른 산, 녹색 풀 그리고 은회색의 양떼들은 미니멀한 그러나 존재적 무게감을 가지고 프레임을 채울 듯이 비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만들곤 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사랑 때문에 어떤 비극성에 갇혀버리게 되는 인물을 숏의 프레임 안에서 다시 건축물로 구성된 프레임으로 가두고는 그 뒤쪽으로 구름이 흐르게 한다.

-에니스는 같은 성, 동성간의 사랑 때문에 사회적 터부가 만들어놓은 운명에 갇히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생의 다른 흐름을 느끼고 타게 되는 인물이다.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잭과 헤어진 뒤 길을 걸어가다 배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양쪽으로 기둥이 막아서 있고, 프레임은 다시 협소하게 재프레이밍한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시선을 보내자, 에니스가 뭘 보냐며 소리를 지른다. 프레이밍에 갇힌 사회화된 운명의 잔혹성이 의미화되는 이미지다. 동시에 주저앉은 에니스의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는 저 들판의 구름 그리고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울어진 나무는, 그럼에도 어떤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 관계를 선명하게 예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산에서 막 내려온 에니스가 두려워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프레임 안에 각인된다. 징후적이고 예시적이며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완벽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 장면과 대위점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숏이다. 자신의 딸(아내의 이름을 따라 알마 주니어다)이 결혼을 알리고 다녀간 뒤 에니스는 알마 주니어가 블루진 재킷을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건네주려고 하나 딸은 빌려 타고온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나가버린 뒤다. 에니스는 옷장을 열어 딸의 옷을 넣으면서 자신과 잭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담은 블루진과 셔츠 그리고 브로크백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를 본다. 그리고 청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예의 그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삼켜버리는 어투로 “내가 맹세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옷장을 급히 닫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브로크백 마운틴 엽서쪽으로 줌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착시 효과다. 옷장 문이 닫히고 난 뒤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밭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다. 전반, 흘러가는 구름에 대한 제한된 응답이다.

-영화는 대부분 워낙 미세하게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의 옷장 속에 보관되는 세벌의 옷, 잭, 딸 주니어 그리고 자신의 옷이 이 영화에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의미의 친족관계를 이루는 연쇄들이다. 그리고 이 연쇄가 때로는 족쇄가 되고 혹은 자유와 사랑, 웃음이 되어 이들의 생애에 굴곡과 흠집을 만들어낸다. 에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딸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사랑과 책임감이 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상처내긴 하지만 영화의 초반 에니스에 의해 그의 성장기가 이야기됨으로써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잭이 알마 주니어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은 그의 언어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소통적 언어로 기능한다. 에니스는 아내 알마에게만 아니라 이혼 뒤 잠시 상냥한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팻시에게도 말이전혀 안 통하는 고집불통처럼 군다. 특히 이미 딸 둘을 둔 뒤라 아내 알마가 조심하자고 잠자리에서 말하는데도, 내 아이를 갖기 싫으면 떠나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말이 아니라 폭언이다. 또 참고 참던 알마가 이혼한 뒤 에니스에게 낚시하러 며칠씩 외출하고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송어 한 마리 들고 온 적이 없다며 ‘퀴어 케이스’를 추궁하자, 자신과 잭의 관계를 모르면서 떠들지 말라고 주먹질 일보직전이다.

-착하기 그지없는 웨이트리스 팻시가 울면서 “에니스 델 마, 난 정말 당신을 이해 못해!”라고 털어놓자 “괜찮아. 뭐”라고 말을 흘리는 장면은 팻시의 반응 숏이 암시하는 것처럼 ‘차라리 목석도 너보다는 나을 거야’(실제 대사는 다르다)다. 영화에서는 잭이 좀더 분명한 동성애 커플 관계를 요구하는 것 같으나, 결혼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이성애 관계가 불가능한 사람은 에니스다. 그러한 에니스를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교훈은 절대 동성애 커플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9살인 에니스의 손을 잡고 가 황망하게 버려져 있는 게이의 주검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급격하게 처리된다. 또 잭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경과를 잭의 아내 로린에게 들으면서 에니스는 로린의 교통사고라는 설명과는 달리 잭이 남자들에게 맞아 죽는 끔찍한 린치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미묘한 톤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 플래시백이나 자의적 구성으로 보이는 판타즘 장면은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이와 비견되는 것이 영화의 편집 방식이다. 역시 두번의 파격적 몽타주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에니스가 알마에게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알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뒤 잭이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다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자명하긴 하지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수려한 과묵함이라는 스타일과 세팅 속에서 강한 성적 충격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에니스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이후 함께 살 것이라는 기대로 열몇 시간을 차를 몰아 달려온 잭을 에니스가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나서 일어난다. 잭은 멕시코로 가 성매매 거리에서 게이를 발견하고, 함께 골목으로 사라진다. 바로 거기에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잭 가족이 함께 먹을 홀리데이용 칠면조가 서빙되는 것이다. 앞서 부부간의 애널 섹스와 퀴어 로데오의 연쇄 그리고 게이간의 성매매와 가족 파티용 칠면조의 연결, 잭이 당한 교통사고를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 린치로 치환시키는 판타즘 장면들은 스타일적으로는 과묵한 이 영화의 깊은 성적 불안과 한 인간과 그 주변을 비극에 이르게 하는 소란한 오인과 오판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위의 부분들을 영화에서 다소 예외적인 장면으로 장치화해 그 충격들을 일정하게 거둬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게이 커플 관계, 반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잭보다 그 선택을 끝까지 거부하는 에니스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동성 파트너가 있으나, 딸들의 양육비를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 적어도 큰딸이 결혼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 에니스의 모습은 (게이지만) 그나마 책임감있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 영화는 커플로, 반려로 살 수 없어 불행했던 게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이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애쓰는 영화이기도 하다.(*사랑 이야기'에만 주목한 평자들이 주의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칼럼을 옮겨온 것이기도 하고.) 딸 알마 주니어가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에니스는 엄마와의 가족관계를 지키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영화는 물론 관계의 비지속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지만, 또 망가진 것을 다듬어 어떻게 생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부 해체되었으나 여전한)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해선 리안의 전작 <결혼 피로연>과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크리스 베리가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과 미국 게이영화들의 비교를 통해 지적했듯이, 동성애를 다루는 미국영화들이 너무 일찍 가족이 야기시키는 문제를 버렸다면, 리안은 버리고 떠나간 부분을 다시 정성스레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시야가 향하는 곳이 이성애 부부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루하지는 않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이런저런 문제들에 사려깊고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나 정감이나 열정 그리고 연륜은 좀 떨어지는 약간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절제된 형식미의 이면이 이런 어중간함이 아닌가 싶다.)  배우로서의 에니스는 앞서 말했던 웨이트리스 팻시와 춤을 추면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어중간하게 넣고 몸동작을 굼뜨고 어색하게 할 때 가능성이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보이와 상처받은 게이 역할을 잘 오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문제는 영화 내내 수염을 기르건 약간의 주름을 그려넣건 간에 나이가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10대 후반에서 39살까지의 나이 먹음의 낌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올 법한 체념과 지혜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이 먹지 않고 계속 청춘 게이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준 선물일까? 아니면 게이 하위문화로의 호소일까?

06.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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