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감독의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오늘 반납했다. 지난주에 빌렸으니까 며칠 연체했다. 그건 내가 풀타임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띄엄띄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났던 것처럼 나는 영화를 띄엄띄엄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그건, 영화속 에니스의 대사처럼, 내가 마음놓고 영화를 볼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해서, 나는 카우보이처럼 건성건성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다음 기회로 넘기면서).

역시나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감상과 함께 내게 남겨진 건 (아마도)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20년간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자의 과묵하고 절제된 감정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그러한 절제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본 몇 가지 리뷰들 가운데 한 편 정도를 옮겨오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몽롱하게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 궁극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리안은 이야기를 범우주적인 로맨스로 만들어낸다. 하긴 <타이타닉> 이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쓰는데,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평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그런 점이 내겐 좀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작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푸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나는 <타이타닉>을 아직도 보지 않았다).

몇 개 읽어보지 않은 영화평들 가운데,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씨네21(06. 03. 15)에 게재됐던 김소영 교수의 '가족을 지키려는 카우보이의 다짐, <브로크백 마운틴>'이다(이 칼럼을 고른 건 '고작 사랑 이야기' 범주를 약간은 벗어난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고 있어서이다).

-1963년 여름 그들은 양치기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간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홀)이다. 8월에도 산은 춥기만 하고, 먹을 것은 콩 통조림뿐이지만, 돌보아야 할 양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양치기인 이들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중인지라 양치는 일보다 다른 데 관심이 많다. 과묵하다기보다는 말을 요령있게 못하는 에니스와 촉촉하고 정감어린 시선을 가진 잭은 양을 잡아먹어볼까 하는 궁리도 나누고 그러다 사냥을 해(여전히 큰 동물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영화 관람이나) 상당한 양의 육포를 말리기도 한다. 와중에 에니스는 성장기 자신의 가족사의 고통을 잭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게이 카우보이 무비로 알려진 것처럼 둘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의 허심탄회한 섹스 후일담은 모두 난 원래 퀴어가 아니거든! 이다. 그렇게 육체의 고백과는 다른 언어적 고백을 털어놓고 나서도 이들은 남자친구로서의 가까움만이 아니라 게이로서의 성적 친밀성을 나눈다. 그 뒤로도 20년간이나. 와중에 하늘 아래 낮고 융성하게 깔린 와이오밍(실제로는 캐나다 로키)의 흰 구름과 푸른 산, 녹색 풀 그리고 은회색의 양떼들은 미니멀한 그러나 존재적 무게감을 가지고 프레임을 채울 듯이 비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만들곤 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사랑 때문에 어떤 비극성에 갇혀버리게 되는 인물을 숏의 프레임 안에서 다시 건축물로 구성된 프레임으로 가두고는 그 뒤쪽으로 구름이 흐르게 한다.

-에니스는 같은 성, 동성간의 사랑 때문에 사회적 터부가 만들어놓은 운명에 갇히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생의 다른 흐름을 느끼고 타게 되는 인물이다.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잭과 헤어진 뒤 길을 걸어가다 배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양쪽으로 기둥이 막아서 있고, 프레임은 다시 협소하게 재프레이밍한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시선을 보내자, 에니스가 뭘 보냐며 소리를 지른다. 프레이밍에 갇힌 사회화된 운명의 잔혹성이 의미화되는 이미지다. 동시에 주저앉은 에니스의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는 저 들판의 구름 그리고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울어진 나무는, 그럼에도 어떤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 관계를 선명하게 예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산에서 막 내려온 에니스가 두려워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프레임 안에 각인된다. 징후적이고 예시적이며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완벽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 장면과 대위점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숏이다. 자신의 딸(아내의 이름을 따라 알마 주니어다)이 결혼을 알리고 다녀간 뒤 에니스는 알마 주니어가 블루진 재킷을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건네주려고 하나 딸은 빌려 타고온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나가버린 뒤다. 에니스는 옷장을 열어 딸의 옷을 넣으면서 자신과 잭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담은 블루진과 셔츠 그리고 브로크백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를 본다. 그리고 청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예의 그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삼켜버리는 어투로 “내가 맹세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옷장을 급히 닫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브로크백 마운틴 엽서쪽으로 줌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착시 효과다. 옷장 문이 닫히고 난 뒤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밭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다. 전반, 흘러가는 구름에 대한 제한된 응답이다.

-영화는 대부분 워낙 미세하게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의 옷장 속에 보관되는 세벌의 옷, 잭, 딸 주니어 그리고 자신의 옷이 이 영화에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의미의 친족관계를 이루는 연쇄들이다. 그리고 이 연쇄가 때로는 족쇄가 되고 혹은 자유와 사랑, 웃음이 되어 이들의 생애에 굴곡과 흠집을 만들어낸다. 에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딸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사랑과 책임감이 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상처내긴 하지만 영화의 초반 에니스에 의해 그의 성장기가 이야기됨으로써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잭이 알마 주니어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은 그의 언어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소통적 언어로 기능한다. 에니스는 아내 알마에게만 아니라 이혼 뒤 잠시 상냥한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팻시에게도 말이전혀 안 통하는 고집불통처럼 군다. 특히 이미 딸 둘을 둔 뒤라 아내 알마가 조심하자고 잠자리에서 말하는데도, 내 아이를 갖기 싫으면 떠나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말이 아니라 폭언이다. 또 참고 참던 알마가 이혼한 뒤 에니스에게 낚시하러 며칠씩 외출하고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송어 한 마리 들고 온 적이 없다며 ‘퀴어 케이스’를 추궁하자, 자신과 잭의 관계를 모르면서 떠들지 말라고 주먹질 일보직전이다.

-착하기 그지없는 웨이트리스 팻시가 울면서 “에니스 델 마, 난 정말 당신을 이해 못해!”라고 털어놓자 “괜찮아. 뭐”라고 말을 흘리는 장면은 팻시의 반응 숏이 암시하는 것처럼 ‘차라리 목석도 너보다는 나을 거야’(실제 대사는 다르다)다. 영화에서는 잭이 좀더 분명한 동성애 커플 관계를 요구하는 것 같으나, 결혼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이성애 관계가 불가능한 사람은 에니스다. 그러한 에니스를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교훈은 절대 동성애 커플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9살인 에니스의 손을 잡고 가 황망하게 버려져 있는 게이의 주검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급격하게 처리된다. 또 잭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경과를 잭의 아내 로린에게 들으면서 에니스는 로린의 교통사고라는 설명과는 달리 잭이 남자들에게 맞아 죽는 끔찍한 린치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미묘한 톤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 플래시백이나 자의적 구성으로 보이는 판타즘 장면은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이와 비견되는 것이 영화의 편집 방식이다. 역시 두번의 파격적 몽타주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에니스가 알마에게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알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뒤 잭이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다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자명하긴 하지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수려한 과묵함이라는 스타일과 세팅 속에서 강한 성적 충격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에니스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이후 함께 살 것이라는 기대로 열몇 시간을 차를 몰아 달려온 잭을 에니스가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나서 일어난다. 잭은 멕시코로 가 성매매 거리에서 게이를 발견하고, 함께 골목으로 사라진다. 바로 거기에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잭 가족이 함께 먹을 홀리데이용 칠면조가 서빙되는 것이다. 앞서 부부간의 애널 섹스와 퀴어 로데오의 연쇄 그리고 게이간의 성매매와 가족 파티용 칠면조의 연결, 잭이 당한 교통사고를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 린치로 치환시키는 판타즘 장면들은 스타일적으로는 과묵한 이 영화의 깊은 성적 불안과 한 인간과 그 주변을 비극에 이르게 하는 소란한 오인과 오판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위의 부분들을 영화에서 다소 예외적인 장면으로 장치화해 그 충격들을 일정하게 거둬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게이 커플 관계, 반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잭보다 그 선택을 끝까지 거부하는 에니스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동성 파트너가 있으나, 딸들의 양육비를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 적어도 큰딸이 결혼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 에니스의 모습은 (게이지만) 그나마 책임감있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 영화는 커플로, 반려로 살 수 없어 불행했던 게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이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애쓰는 영화이기도 하다.(*사랑 이야기'에만 주목한 평자들이 주의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칼럼을 옮겨온 것이기도 하고.) 딸 알마 주니어가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에니스는 엄마와의 가족관계를 지키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영화는 물론 관계의 비지속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지만, 또 망가진 것을 다듬어 어떻게 생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부 해체되었으나 여전한)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해선 리안의 전작 <결혼 피로연>과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크리스 베리가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과 미국 게이영화들의 비교를 통해 지적했듯이, 동성애를 다루는 미국영화들이 너무 일찍 가족이 야기시키는 문제를 버렸다면, 리안은 버리고 떠나간 부분을 다시 정성스레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시야가 향하는 곳이 이성애 부부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루하지는 않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이런저런 문제들에 사려깊고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나 정감이나 열정 그리고 연륜은 좀 떨어지는 약간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절제된 형식미의 이면이 이런 어중간함이 아닌가 싶다.)  배우로서의 에니스는 앞서 말했던 웨이트리스 팻시와 춤을 추면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어중간하게 넣고 몸동작을 굼뜨고 어색하게 할 때 가능성이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보이와 상처받은 게이 역할을 잘 오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문제는 영화 내내 수염을 기르건 약간의 주름을 그려넣건 간에 나이가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10대 후반에서 39살까지의 나이 먹음의 낌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올 법한 체념과 지혜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이 먹지 않고 계속 청춘 게이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준 선물일까? 아니면 게이 하위문화로의 호소일까?

06.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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