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인데, 막간 창고 정리를 한다. 이미 모스크바 통신에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란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에 관한 대목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2004년 7월초에 씌어진 그 글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업그레이드 버전은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때문에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문체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는 편이 좋겠다). 나머지는 나의 수다이다(단, 이 '수다'는 18세 이상만 접근가능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갑작스레 ‘정치론’을 꺼내들기 전에(*이 '정치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겠다) 내가 몇 마디 거들었던 소설은 김훈의 <현의 노래>였다. 나는 김훈의 문체를 얘기하면서 그의 ‘허무주의’를 지적했고, 보다 구체적으론 그의 허무주의가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는 걸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란 구절을 제시하면서 ‘질퍽거리는 구멍’을 김훈 문학행위의 핵심으로,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아갈마’(=숨겨진 보물)로 규정했다. 지젝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그의 문학행위는 그 ‘질퍽거리는 구멍’을 중심으로 순회한다.

이에 대해서 ***님은 (어제 읽어보니까)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뿐이라고 반박하는 답글을 달아놓았는데, 좀 의외의 답글이다. 내가 제시한 건 그것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 ‘질퍽거리는 구멍’의 주인은 “왕의 죽어 썩어가는 육체를 피해 도망친” ‘아라’이다. 나는 인용한 구절에서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라고 했다. 즉, ‘야로=김훈’이며, ‘질퍽거리는 구멍=허무주의의 근거’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하면, ‘질퍽거리는 구멍’은 ‘아라의 성기’일 뿐이라는 ***님의 지적은 ‘야로’는 ‘김훈이 아니라 야로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반박’으로서 성립하는 것인지? 혹은 ***님은 그것이 ‘반박’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건 메타언어로서의 비평 원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겠다(혹 진담이라고 밝혀주신다면, 다음 번에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도록 하겠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얼마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묘사는 음(陰)과 양(陽), 즉 암컷-수컷의 대립과 교접을 근간으로 구축돼 있다(‘여자-남자’라고 말하는 건 김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암컷-수컷’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시리즈의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라는 음(陰)과 암컷(성)이야말로 (야로가 아니라) 작가 김훈이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 채워 넣어야 할 구멍이고, 먹여 살려야 할 구멍이며, 궁극적인 미스터리이자 ‘적막’이다. 나는 이 또한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1866).

내가 개진한 것은 그러한 상식을 좀더 보충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충하는 김에 더 확장하자면,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vagina)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로서의 팔루스(phallus)에 대응하는 ‘여주인-기표(Mistress-signifier)’라 할 만하다. 라캉에게서 팔루스가 생식기관으로서의 남근, 즉 페니스(penis)와 구별되듯이, 바기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음문(陰門), 즉 불바(vulva)와 구별된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의 이행, 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니스’에서 ‘팔루스’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면(그리고 <‘징후’에서 ‘징환’으로> 또한 주요한 표어이다), 우리는 거기에 <‘불바’에서 ‘바기나’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기표’의 짝으로 ‘여주인-기표’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소쉬르/야콥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바,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구조주의자’ 라캉의 맥심이다. 실제로, 라캉은 야콥슨과 깊은 교우를 가졌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소개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을 알게 되며, 야콥슨은 프랑스에 갈 때마다 라캉의 집에 머물곤 했었다(레비 스트로스의 회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의 전회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킴과 동시에,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으로 전회시킨다. 그 전회는 <‘랑그’에서 ‘랭귀스테리’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는바, 알다시피 ‘랭귀스테리’란 ‘랭귀지(언어)+히스테리’이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 라캉의 ‘또 다른’ 맥심이 나올 수 있는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가 그것이다(물론 이건 그가 직접 언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것이다.)

단순하게 대비시켜 말하자면, <에크리>(1966)의 저자로서 구조주의자 라캉이 ‘무의식의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 데 반해서(그의 주된 관심은 ‘상징계’였다), 흔히 ‘후기 라캉’이라 불리는 탈구조주의자 라캉은 ‘언어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돌린다(그의 주된 관심은 ‘실재’였다). 조이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실, 이 ‘언어의 무의식’에 관해서라면, 이리가레와 함께 라캉의 ‘나쁜 딸들’의 하나인 크리스테바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바, 그녀의 <시적 언어의 혁명>(1973)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그녀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가리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가 일약 프랑스 지성계의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바흐친, 말, 대화 그리고 소설>(1967)을 발표함으로써이다(그녀가 26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일부 오역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안 그래도 상당히 난해한 논문이지만). 해서 요컨대, 라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야콥슨에 대한 참조는 기본적이며, 크리스테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흐친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다시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 해부학적으로 ‘팔루스’란 단어는 원래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 즉 클리토리스를 가리키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여 혹은 상실의 기표”를 뜻한다(욕망은 언제나 이러한 결여와 관련된다). 그것이 ‘기표’라는 점에서, 음경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 ‘결여/상실’의 기표라는 점에서는 음핵과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여성의 음핵은 결여한/상실한 남성적 음경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해서 팔루스는 페니스, 즉 남근이 아니지만 ‘남근적’이라는 이유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바기나는? 해부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그것은 ‘결여의 결여’, ‘상실의 상실’의 기표이며, 미스터리의 기표이고 ‘여주인-기표’이다. 즉, 남성에겐 미스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남성’은 다 드러나 있다!), 남성에게는 결여가 결여돼 있으며, 상실이 상실돼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바기나는 ‘지옥’의 기표이며, 팔루스가 결여/상실하고 있는 것은 그 ‘지옥’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하고만 관련짓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욕망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바로 ‘결여의 결여’와 관련된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이며,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는 자’가 무엇인가를 갖고자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자 욕망한다(즉 소유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에 대한 욕망도 있다). 주인-기표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면, 여주인-기표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안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여주인’ 행세를 한다. 즉 칼이 아니라 칼집이 주인이며, 마개가 아니라 구멍이 주인인 것이다. 즉, 여주인.



다시, 야로의 말, 김훈의 말을 보자.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여/상실이며, 부재이고 적막이다. “이 빨아당기는 속살” 앞에서,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이다. 속수무책이다. 왜인가? 그는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여의 결여이고, 상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인-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그는 여주인-기표를 욕망하며, 상실이고자 결여이고자 한다.

나는 게이에의 욕망, 팔루스를 제거함으로써 상상에서건, 실제에서건 ‘여성’(=암컷)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구멍(=바기나)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지배하는 ‘여주인’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구멍으로, 부재로, 결여로, 상실로, 적막으로, 미스터리로, 지옥으로 여주인은 주인을 할딱이게 하며 지배한다(천문학에서의 反물질 혹은 ‘암흑물질’은 이 여주인-기표의 천문학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혹 이런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페미니즘 버전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거울상?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다)를 구성하면서 여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것에 대하여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자, 그는 그것이 편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답한다(즉, 남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친족의 체계’도 이론적으론 가능한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건 사실이고 따라서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오른손잡이에 대한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러기가 쉬웠을 뿐인 것. 라캉의 욕망이론이나 ‘팔루스’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렇다면, 유표적 언명으로서 “여성은 없다”란 그의 테제의 거울상 버전은 “남성은 없지 않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이상한 것은, 즉 유표적인 것은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없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남자가 없지 않다고 상상해봐?”). 오, 없지 않아서 불행한 것들이여!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을 것들이여!..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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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 못볼 걸 봐서..........황급히 스크롤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로쟈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경고'해두지 않아서 죄송합니다(한데, 사진이 아니라 '누드화'일 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