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좀 유치한 습성이 있어서, 8월이자 여름의 마지막날이 되면 이성복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을 떠올리곤 한다(10월의 마지막밤에는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속의 여인'을 듣고, 그날이 화요일이면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을 하나 더 듣고 하는 식이다). 손에 잡히는 그의 시선집을 들춰서 몇 편의 시들을 서둘러 읽어보았다. 가령 표제시인 '그 여름의 끝'은 이런 식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소위 '연애시편'들로 묶여진 <그 여름의 끝>은 표제작에서도 보듯이 몇몇 선명한 이미지들을 뽐내지만 나로선 관념적/추상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고 시인이 말미에 적을 때, 나는 그 장난이 '연애'와 '연애시' 전체에 두루 해당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추상적 타자(=당신)를 두고 벌이는 감정의 자맥질은 비록 그것이 순도 높은 경우일지라도 맥빠진 서정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거기에 비교되는 것이 시인의 데뷔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다(시집의 제목이 시인의 바람대로 '정든 유곽에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가령, 언제 읽어도 가슴 뻐근한 시 '여름산' 같은 경우는 어떤가?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열기와 금속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톱처럼 하늘을 끊어낸다 은빛 날개가 곤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여름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산은 무겁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모습만 보여준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에 등장하는 '그 여자'는 '당신'과 같은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이성복은 '당신'이 아닌 '그 여자'에 관해서 쓸 때 그다운 시를 쓴다). 해서 여기엔 긴장이 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가령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절망이다.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를 오르는 여인들"에 대한 절망이고,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다. 그들을 생각하는 절망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우는 척하는 절망이다(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날을 고백하고 있는 아포리즘집 서두에 시인은 "나는 언저리를 사랑한다/ 언저리에는 피멍이 맺혀 있다"고 묘비명처럼 적었다. 이성복의 뜨거운 시들은 그 언저리에서 나온 피멍의 흔적들이었다. 그 흔적은 <그 여름의 끝>에서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물방울'의 흔적은 '피멍'에 비하면 약소하며 엄살스럽기까지 하다(연애시편들이야말로 엄살과 주책의 파노라마 아닌가?). '그 여름의 끝'에서 '여름산'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06.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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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8-3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파도치는 사진 넘 멋져요. 어떻게 하신 거에요? 정말 시원하네요

로쟈 2006-08-3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사진을 갖다 붙여놓았을 뿐입니다...

라이더 2006-08-3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 그림 잘 보고 갑니다. 글은 머리가 아파서;; 좀 쉴려고 알라딘 왔기 땜시. 미안요.

푸른괭이 2006-08-3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은 그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던 듯. 글구, 첫 시집은 뭣 때문인지 늘 <정든 유곽에서>로 각인되어 있네요. 어떻든, 안타깝게도, 이성복 시인도 더 이상 시를 쓰지는 못할 듯. 그렇게 보면, 김춘수, 서정주 같이 '평생' 시를 쓴 시인은 정말 대단해요.

로쟈 2006-08-31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생 쓸 수 있는 시들은 따로 있죠. 자신이 안 다치는 시, 가령 무의미시 같은...

lastmarx 2006-08-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건네 주는 로맨스는 없나 보네요. ^^ 해마다 이성복을 읽으시는군요. 저도 그런 편인데. <그 여름의 끝>에서 제가 좋아하는 짧은 시 세 편입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70005165701

로쟈 2006-08-3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같은 건 태고적 이야기 같은데요(^^;). 연애를 밝히는 편도 아니고 소질도 없는지라...
 

어젯밤에 조회수를 보고 예상한 바이지만, 오늘로써 이서재에 10만명이 다녀갔다. 돌이켜보니 지난 2003년 11월 21일에 '나의 서재'에 최초로 페이퍼를 올린 듯하다. 그러니까 2년 9개월 가량이 지났고, 그간에 '즐찾'은 오늘 현재 777명이 되었다. 특별한 감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숫자들이 잠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쨌거나 이런 흔적들을 남기게 되었다니 그간의 처신이 깔끔했다고는 볼 수 없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래전에 써두고 재작년에 인용해두었던 시를 한번 더 호출한다. 그리고 그때 적어두었던 몇 마디까지. 시는 '중세의 가을'이란 제목. 그리고 사이사이 이미지는 모두 아브라멘코라는 러시아 화가의 그림들이다. 

oil abstract landscape painting In Mexico

나는 흔한 일들의 구세주, 아주 흔한 일들에 파묻혀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밥 먹듯이 구원하리라!

acrylic cityscape painting Landscape with Sun

나는 천성이 좀 게으른 편이어서(나보다 게으른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로맨스도 귀찮아 하고 여행도 즐기지 않는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돈이 없다는 것이지만(나는 ‘돈 없는’ 오블로모프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그런 거지?”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여행을 안 좋아하시나봐요?” “제가 좀 게을러서요.” 대신에,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다. 일상을 좋아한다는 말은 “숨쉬는 걸 좋아해”란 말처럼 어폐가 있으므로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숨쉬는 건 중요해.”
 
oil winter landscape painting Little Cypress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란 건 물론 숨쉬는 걸 포함해서 밥 먹는 것, 걸어다니는 것, 뛰어다니는 것, 신문보는 것, 책보는 것(이게 나의 변변찮은 직업이다), TV뉴스를 보는 것, 잠자는 것, 꿈에서 군대에 또 가거나 수학시험을 보거나 간혹 날아다니는 것 등등이다. 아이가 하루하루 분유를 먹으면서 자라나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한 일상들로 채워지며 쑥쑥 성장해 왔으며, 앞으로는 그와 같은 속도로 쪼그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흔한 일들’이란 우리의 DNA에 새겨진 일들이다(내가 생물학을 좋아하는 이유인바, 생물학은 내가 철이 들어서야 ‘발견한’ 학문이다).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간과하는 어떠한 슬로건이나 이론도 신뢰하지 않는다. ‘흔한 아픔’에 대한 시.
 
acrylic figurative art painting Loo 1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엉덩이는
흉악한 세월처럼 울었다 울음이 지워진 자리에
환한 햇빛이 찾아와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마른침을 뱉으며 구두끈을 다시 묶었다

흔한 아픔이 있다
정육점에는 정육점 창고에는
이골이 난 갈비들이 쇠갈고리에 매달려
지난 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오, 죽음이 무거운 게 아니리!)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푸짐한 엉덩이는
예언자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오죽 울렸으나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다
정육점은 고기값을 흥정할 따름이다

정육점에 팔려가고 또 팔려간다
정육점은 돈을 벌고 도로를 닦고 공장을 짓고 대학을 세우고 노래를 부른다
정육점은 공화국을 바꾸고 정육점은 21세기를 준비한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를 생각하며 나는 우는 시늉을 했다
곧 마른침을 뱉으며 다시 구두끈을 묶었다

acrylic abstract art painting Metaphysical Room

'정육점에서'란 시인데, "흉악한 세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은 내가 그나마 일상적으로 하는 일은 ‘우는 시늉’을 하며 ‘구두끈’을 다시 묶는 일 정도이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는 나를 슬프게 하고 애닯게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마른 침’을 뱉는 것 정도이다. 나는 게으르며 더불어 좀스럽다. 그래서 부끄럽다. 나는 일진이 나쁜 것인가? 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어쩌면 근사한 일이 생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7-7-7이면 나쁜 일진도 아니잖은가?..
 
oil still life painting Flowers and a Seashell
 
여하튼 나로선 이 흔해빠진 일들에 대한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턱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걷잡을 수 없다. 구제 불능이다!..
 
06.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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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8-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치없이 옹달샘에 와서 물만 먹고 갑니다.^^

마노아 2006-08-3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수서재군요. 네번째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인상적이네요. 님의 시도 좋습니다. 특히 첫번째 시와 그 설명이요. ^^

2006-08-31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06-08-3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엔 '바토스'가 있어요.(나는 '바토스'를 파토스와 (낭만적) 아이러니의 결합으로 보는데요.) 그래서 좋았는데, 왜 시 쓰기를 그만 두셨나요? 하긴 나도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 ;;;--

로쟈 2006-08-3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iYi님/ 감사합니다...(물은 셀프입니다.^^)
마노아님/ '장수'서재가 되나요? 이제 세살배기인데.^^
**님/ 제가 넒은 세상에 일조하고 있군요.^^
푸른괭이님/ 마흔이 넘으면 다시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이네파벨 2006-08-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시와 그림과 글....
숙연해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6-08-3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08-3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로쟈님 스스로에겐 '자조'이자 '자족'일지 모르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글을 부탁드립니다.

philocinema 2006-08-3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님의 글이 제 삶에 많은 보탬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감상할 수 있기를...

로쟈 2006-08-3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감사합니다. 제가 지옥에 가진 않겠네요.^^
risper3님/ 군대에 계시다면 좀더 '선정적인' 사이트들을 둘러보심이(물론 저도 간혹 포르노를 보여드리긴 하지만)...

hikrad 2006-09-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가 '흔한 일'은 아니지요^^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6-09-0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흔한 '일상'의 축적이 흔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곤 하지요.^^
 

필요 때문에 '나폴레옹'에 관한 이미지들을 검색하는데, 느닷없는 포르노 이미지들까지 끼어 있었다. 알고보니 <나폴레옹>이란 제목의 포르노 필름이 있었던 것. <나폴레옹>(이탈리아, 1998).

Наполеон. Анальный секс.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

이게 포르노비디오필름을 취급하는 러시아 사이트에 링크돼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아주 요지경의 세상이었다(세상은 넓다!). 포르노(혹은 AV) 산업이라면 이웃나라 일본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그건 그만큼 일본의 조직사회가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복종/굴종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면으론 이탈리아 또한 만만찮아 보인다. 틴토 브라스만 해도 그냥 '소프트'해 보이니까. 차이라면 일본 포르노가 대략 시나리오 불문이라면 이탈리아는 좀 '클래식'하다는 정도. 적어도 '포르노세계사' 내지는 '포르노 세계문학사'를 찍어대는 걸 보면(덧붙이자면, 포르노의 경우에도 '클래식'은 판매랭킹이 많이 떨어진다. 대중들은 '클래식'이라면 포르노도 잘 보지 않는 것!).

러시아는 거기에 비하면 아직 아마추어이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포르노'산업'이라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유통되지도 않았었기에. 이전에 '범성욕주의자의 근대철학사'란 페이퍼를 만든 바 있는데, 이 페이퍼는 거기에 짝이 될 수도 있겠다('로망스 대 포르노'란 글도 참조할 수 있겠다). 자체 검열상 스틸사진들을 올려놓을 수는 없고, 포스터 정도만 옮겨놓는다(모두 러시아어로 출시된 것들이다). 아주 일부만. 이 목록에 마르키스 드 사드나 자허 마조흐가 올라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햄릿> 정도 되면 웃음이 나오고, <이상한 포르노 나라의 앨리스>나 고골 원작의 <비이> 정도 되면 입이 벌어진다...

 Маркиз Де Сад.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마르키스 드 사드>(이탈리아, 1996)

Барон Фон Мазох. Садомазо и фетиш.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폰 마조흐 남작>(이탈리아, 1998)

Гамлет.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햄릿>(이탈리아, 1996)

Робин Гуд.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로빈훗>(이탈리아, 1995)

Декамерон.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데카메론>(이탈리아, 1997)

Белоснежка и семь гномов.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이탈리아, 1996)

Алиса в стране Порно Чудес.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이상한 포르노 나라의 앨리스>(미국, 1996)

Вий.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비이>(러시아, 2002)

그리고, 러시아에서 최근에 제작되고 있는 포르노시리즈 <백야: 상트 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잉여효과도 챙길 수 있다(관광상품 수준이다). 4편까지 나온 모양이다.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1.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1>(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2.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2>(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3.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3>(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4.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4>(러시아, 2001)

참고로, 러시아 포르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로는 이문영,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러시아 포르노그래피 연구"(슬라브학보, 제21권 2호, 2006)가 있다. 동영상보다 아카데믹한 쪽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06. 08. 29.

P.S. 러시아 포르노그래피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앞에서 거명한 논문의 결론으로부터 간략하게 인용하면, "제정 러시아는 종교에 의해, 스탈린 집권 이후 소련은 이념에 의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과 그 문화적 표현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그 결과 포르노그래피가 전자의 경우에는 봉건적 가치에 대한 비판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통제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하였다..."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 이후 현대 러시아의 포르노그래피는 한편으로는 과거 시기 포르노그래피의 정치성을 계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포르노그래피는 소련시기에는 공공의 문화영역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등장함으로써 과거 권력에 의해 강요되어온 획일적 성담론에 대한 극복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근대 초기 포르노그래피의 비판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의 성 상품화 논리를 온전히 반영하는 보수적 매체가 되어버린 서구 포르노그래피가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문화상품으로 수입되어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모델이 되었다... 선정성과 상업성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대 러시아 포르노그래피가 섹슈얼리티의 담론의 다양화와 표현의 자유의 신장, 이것이 상징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2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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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9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화법을 빌자면, <저 동네>도 잘 되는 게 쉬운 건 아니죠. 열심히 '온고지신'하고 새로운 문법을 창조해내야 살아남지... -_- // [백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의 패러디, 아니면,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의 밤들] 패러디인가요??
// 그나저나, 다른 캐릭터야 성인이니까 그렇다치고, 우리의 저 앨리스 양은 <이상한 포르노 나라>에서 대체 뭘 한다요? ;;;--

로쟈 2006-08-2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 앨리스는 충분히 과년한 앨리스인데요...

이리스 2006-08-29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척 고루한 코멘트입니다만.. 여긴 초등학생도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곳 아닌가요? 이런것을 올려도 문제가 아니될런지..

로쟈 2006-08-2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려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포르노' 구경을 하려고 번거롭게 알라딘까지 드나들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porno'란 단어만 검색해도 널린 게 포르노인 걸요. 더불어, 저는 포르노가 하나의 (하위적)'장르'라고 생각합니다...

SMOKE 2006-08-3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요즘 초등학생들을 모르시는군요.......

마늘빵 2006-08-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근데 별로 야할거 같진 않아요. -_- 모름지기 포르노는 보고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그냥 저거 봐서는 별 반응이 안생길듯.

로쟈 2006-08-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러시아 작품들 빼고는 저도 별로 보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이리스 2006-08-3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핫.. 그.. 그렇군요.. -_-;;;
 

러시아 영화 <리턴>(2003)이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어 제목을 따서 '리턴'이라고 붙인 모양인데, 제목 자체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만큼이나 짜증스럽다. 집을 나간 뒤 아무 소식이 없다가 12년만에 귀환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대면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므로 그냥 우리말 '귀환'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제목을 붙이는 게 타당했다('리턴'이라고 붙이면 관객이 더 드나?). 

 

영화는 여하튼 지난번에 소개된 러시아 영화 <러시안 묵시록>과는 레벨이 좀 다르다. 감독 즈뱌긴체프(1964- )의 데뷔작이면서 2003년도 최대의 문제작이었고, 그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기도 하다(영어 표기를 음역해서 '즈비야긴체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즈뱌긴체프'가 맞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TV에서 영화와 함께 메이킹 필름을 부분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비디오CD를 갖고 있는데, (지난여름을 아쉬워 하는 의미에서)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에 언제 시간을 내야겠다.

이 영화의 개봉소식은 아침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읽다가 접하게 된 것인데 마침 티켓링크에서 소개기사를 제공하고 있기에 옮겨놓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개봉 이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다. 가능하다면... 

티켓링크(06. 08. 29) <리턴> - 성장의 아픔에 관한 끔찍한 우화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제 안드레이(블라디미르 가린)와 이반(이반 도브론라보프)은 12년 만에 갑자기 집에 돌아온 아버지(콘스탄틴 라브로넨코)와 마주하게 된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어색한 두 형제는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해 낚시여행을 떠나지만,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버지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가 않다. 1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친절하지 않아서 진짜 아버지가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는 사이 형 안드레이는 아버지에게 묘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동생 이반은 자신을 꾸짖기만 하는 아버지가 밉기만 하다.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미움과 갈등만이 남은 세 부자의 여행은 계속되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는 심산인지 인적이 없는 섬으로 두 아들을 데려간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 감독의 데뷔작 <리턴 The Return>은 무시무시한 성장드라마다.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두 형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는 평온했던 삶을 뒤흔들어 혼란을 가져오는 테러리스트에 가깝다. 가족을 떠나있던 12년에 대해서 어떤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로선 소비에트 해체 이후 '12년'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 그저 자신의 목적과 방법대로만 여행을 강요하는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래서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말썽쟁이 동생 이반에 비해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 안드레이의 모습이 더 유약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두 형제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웅덩이에 빠진 자동차를 빼내는 방법이나 배의 노를 젓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는 폭력과 질타를 일삼는 아버지에게 대들거나 순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의지를 시험받는다. 마침내 아버지와의 갈등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형제는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끔찍한 비극을 마주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리턴>이 보여주는, 아직 여리기만 한 마음 한구석을 섬뜩한 칼날로 도려내는 성장의 고통은 아버지를 죽여야했던 오이디푸스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2003년 베니스영화제는 이 외면하기 힘든 한 편의 '끔찍한 우화'에 황금사자상을 선물했다.

HOT  우리에게 낯선 러시아 영화지만 <리턴>이 주는 재미는 적지 않다. 특히 악동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갖춘 이반 도브론라보프의 매력적인 연기가 쏠쏠한 웃음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COLD 등장인물이 적고(영화 중반부터는 세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진폭이 작아서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

06. 08. 28.

P.S. 참고로, 러시아 관객의 지적에 따르면, 영화속 아버지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변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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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알바 주연의 영화 <슬리핑 딕셔너리>(2002)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 섬이다. 아버지의 유업인 원주민 계몽사업을 위해 영국군 청년장교 존이 섬에 오게 되는데, 총독은 그에게 원주민 최고의 미인인 셀리마(알바)를 ‘슬리핑 딕셔너리’로 붙여준다.

‘슬리핑 딕셔너리’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원주민 언어를 가르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존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거부하지만 곧 셀리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영국과 원주민 양편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법적으로도 금지돼 있다. 이들의 사랑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해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를 읽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생각은 텍스트간(더 나아가 ‘문화간’) 번역의 중재자로서의 번역자(혹은 통역자)의 위치와 운명이라는 게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비교불가능한 것을 비교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등가성의 창출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 동시에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하녀! 

그러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리게 한 건 번역의 ‘일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리쾨르의 <번역론>이 지닌 ‘특수성’이다. 그의 지적대로 ‘이국적인 것의 시련’과 ‘비교불가능한 것의 충격’이 번역의 대전제이지만, 리쾨르는 언어 내적 번역을 외적 번역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러한 시련/충격을 흡수해버린다: “(내적 번역에서처럼)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국어를 번역하는 번역자가 하는 일이다.”(121쪽) 이로써 “(언어) 내적 번역과 언어 외적 번역 간의 가교가 이루어진다”고 리쾨르는 주장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러할까?


로빈슨이 간결하게 정의한바 “포스트식민주의는 지리적/언어적 전치와 지배와 복종으로 서로 얽혀 있는 동력에 의해 야기된 심리/사회적 변형들인 통문화적 권력을 바라보는 방식이다.”(29쪽) 하면, 문제는 단순하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까? 가령, “어떻게 멕시코의 스페인어로 씌어진 텍스트를 미국 영어로 다시 써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의 구성원에게 지니는 의미를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구성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할 수 있는가?”(47쪽)


또한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시위대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고전적인 사례는 번역의 문제가 언어 내적 번역에서도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번역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관계가 국가들간의 (이념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FTA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세계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거기엔 굴곡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곡률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걸 평평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균등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텍스트번역에서건 문화번역에서건 번역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이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수행 가능한 작업”(100쪽)이다.


다만, “번역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발생하는 내적 저항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회상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번역이라는 이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작업”(118쪽)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며, “이국성을 가진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117쪽)가 그 두 주인이다. 번역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는 이국화/외국화(foreignizing)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domesticating)가 번역의 두 가지 양태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론에 따르면, 이때의 저자와 독자는 추상적인 무국적자가 아니다. “문화의 번역불가(능)성은 가장 첨예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계 지역에서는 실제 해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 국경의 양측에 걸쳐 있는 ‘멕시코인들’(그리고 몇몇 ‘북미인들’까지도)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경험을 양쪽 언어로 번역한다.”(47쪽) 역설적이지만, 이렇듯 “이론적으로는 어렵고 고된,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쉽고 순조로운”(리쾨르, 100쪽) 것이 번역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우리의 일상이기까지 하다.

 


번역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흔히 ‘바벨 이후’를 거론하지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 역사적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 이후’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가 하느님께 징벌을 받아서 각기 다른 말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 ‘바벨 이후’가 뜻하는 바라면, 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바빌로니아에 억류시킴으로써 언어가 다른 이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 ‘바빌론 유수 이후’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의 기원이기도 하다.

 

번역의 역사적 기원이 암시해주는 것은 최초의 번역적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제국의 정복/점령과 그로 인한 권력의 분화, 그리고 이산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신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속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여 순응적이거나 ‘협력하는’ 신민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제국으로서 번역의 역사에 대한 초기의 관심 영역 중 하나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통역가들의 선발과 훈련이었다.”(22쪽) 이것이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탄생 배경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전체 포스트식민 세계가 번역의 장으로 계속해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번역은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언어 텍스트의 의미상 전달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이다. 이렇게 번역은 처음으로 번역을 형성해준 식민 권력의 분화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49쪽) 물론 이러한 참여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번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을 요약하자면, (ⅰ)번역은 식민화의 채널로서 교육에 필적하며, 교육과 연관되고, 제도와 시장의 명백한 혹은 숨어 있는 통제를 받는다, (ⅱ)번역은 식민주의의 붕괴 이후 계속된 문화적 불평등을 위한 피뢰침이다, (ⅲ)번역은 탈식민화의 채널이다(51쪽)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번역이 식민화의 채널이면서 동시에 탈식민화의 채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하고 있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번역과 번역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 성찰, 정치적 성찰이다.

 

<슬리핑 딕셔너리>에서 존과 셀리마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며 영국군과 원주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존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셀리마와 재회하게 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이 정념론적인 차원의 확인은 번역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리쾨르가 제안하는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119쪽)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속에서 셀리마는 존(영국)과 자기 부족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 모두를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언어적)환대’의 요청 때문에. 그러한 환대의 공간은 지리적으론 접경지대이며, 사회적으론 교통공간이고, 문화적으론 혼합공간이며 인종적으론 혼혈공간이다(셀리마는 혼혈이다).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리쾨르, 89쪽)으로서의 번역은 그러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행복한 도전’이다. 더불어,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처한 이주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뼈아프다. 번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행복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06. 08. 27.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본래는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대한 서평을 기획했었지만, 너무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게 되어 8매 정도를 쓰다가 접었다. 그리고는 결들여서 쓰고자 했던 리쾨르의 <번역론>과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을 중심으로 구도를 다시 짰다. 로빈슨의 책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긴 하지만, 정독할 만한 성격의 책은 아니다.

 

리쾨르의 <번역론>은 읽어볼 만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국역본의 편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한 본문에 비하면 너무 장황하다싶은 해제 '논문'이 책의 성격을 딱딱하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실 본문의 각주들도 미주로 돌리는 게 가독성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교정상의 실수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85쪽의 역주18)에서 낭시의 책은 <경계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이며, 128쪽 역주23)에서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는 문학과지성사가 아니라 청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건 전영애 교수의 첼란 연구서(학위논문)인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이다. 그리고 앙리 메쇼닉에 대한 각주는 같은 내용이 해제(53쪽)와 본문(154쪽)에서 반복되고 있다. 85쪽 역주19)에서 "도야는 독일 신인본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데..."라는 건 교정이 안된 문장이다. 117쪽에서 "이국성을 가진 있는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가..."도 마찬가지이다. 71쪽 역주3)에서는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오기됐다. 그리고, 62쪽에서 '각주(各主)'의 한자는 엉뚱하다. '각주(脚註)' 아닌가?

 

여하튼 이런 실수들이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이 조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분량에 비하면 저렴한 책도 아닌데, 좀더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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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8-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번역과 슬리핑 딕셔너리가 겹쳐지는 부분이 교묘하네요. 언어적 환대와 육체적 접대를 동시에 제공하는 주체들이 저 바벨의 성 주변에는 아주 많았겠군요. (바벨 그림도 무지 멋집니다.^^)

로쟈 2006-08-2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인상에 남는 영화는 아니지만, 글이 딱딱해질 거 같아서 집어넣어본 거죠. 사실 번역이란 게 허드렛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구요...

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선정적이네요(=재미있네요) ㅋㅋㅋ 실상, 번역이라는 것 자체는 허드렛일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문'인데...

은라라 2011-08-3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환대라는 의미가 와닿ㅈ 않네요. 중요한 키워드 같은데요.
누군가를 환대한다 에 나오는 '환대'를 말씀 하신 것 맞지요.
그리고 번역을 허드렛일 일이라고 하는 건.. 좀
번역 자체는 초고의 지성인(모든 책은 아니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허드렛일로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