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인지라 월요일이란 느낌을 가질 수가 없는데, 밀린 일들이야 어찌됐던 그런 휴일을 좀 느끼게 해주는 칼럼이 있어서 옮겨온다. 이미 한국문학사 속에 편입된 소설가 김연수가 오늘자 한겨레에 기고한 것이다. 몇 가지 이미지를 보충해놓는다.    

한겨레(06. 07. 17) 칠순 소피아 로렌의 누드사진보다 세월 녹아든 오드리 헵번이 아름답다

-거리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24쪽 분량의 단편소설이 있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려면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이란 노래를 들어봐야 한다. 그 노래를 지은 밥 딜런이 자기가 쓴 소설에서 가사를 따왔다니까.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이 노래를 들었지만,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것은 1993년 동숭아트홀에서 영화 <백 비트>를 볼 때였다. 비틀스의 초기 역사를 다룬 영화인데, 독일 함부르크를 향해 떠나는 배 안에서 고작 스무 살 안팎이었던 비틀스 멤버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한번 구르는 돌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물씬 들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구르는 돌처럼’이 입구에서 삶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노래라면 비틀스의 ‘나 살아가는 동안’(In My Life)은 뒤돌아보면서 부르는 노래다. 당시 <백 비트>의 영화 팸플릿에는 주인공인 스튜어트 셔트클리프를 추억하기 위해 존 레넌이 만든 노래라고 적혀 있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비틀스의 초기 멤버였던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에서 만난 사진작가 아스트리드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21살의 나이로 숨진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해서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나 살아가는 동안 그들 모두를 사랑했네”라는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그렇긴 해도 존 레넌은 이 노래를 너무 빨리 불렀다. 지금쯤 이 노래를 불렀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나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해 오지 오스본이 이 노래를 불렀다. 오지 오즈번도 이제 환갑이 2년 앞이다. 한때 자타가 공인한 악마의 목소리로 느릿느릿 ‘나 살아가는 동안’을 부르고 있는 오지 오즈번을 보노라면, 인생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거지에게 적선하겠지만, 내일은 그 거지가 될 수도 있다던 ‘구르는 돌처럼’의 가사처럼 어제는 악마의 목소리, 오늘은 늙은이의 푸념. 이런 인생이 어찌 멋지지 않을까.

-오드리 헵번(1929-1993)의 탄생 70돌을 기념해서 만든 책 <오드리 헵번>에 실린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살아가는 동안 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해가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오드리 헵번은 정말 아름답다. 젊은 시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그건 보톡스의 힘도, 성형수술의 힘도 아니다. 나이 든 오드리 헵번의 얼굴은 자신을 거쳐 간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람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그런 얼굴로 오드리 헵번은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

 

 

 

 

-그에 비하면 72살의 나이로 누드사진을 찍겠다고 나서 전 세계의 할머니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소피아 로렌(1934- )의 얼굴은 좀 징그럽다. 변하지 않는 미모라는 건 정말 끔찍하다. 변하지 않는 인생처럼.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봤다면 생각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생각이 어떻게 바뀌느냐는 점이다. ‘구르는 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도 바로 그 때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순간 발휘된다. 젊은이들 못잖은 탱탱한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때가 아니라.

-늘씬한 몸매가 보고 싶다면 젊음 여자 사진이 있는 달력을 사서 걸어놓으면 될 일이지, 굳이 소피아 로렌의 달력을 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나이 들어 머리 다 빠지는 먼 훗날에도 밸런타인 카드와 와인 보내줄 거지?”(내가 64살이 되면)라고 폴 매카트니가 노래했다. 소피아 로렌에게도 와인이나 한 병 보내줘야겠다. 밸런타인 카드는 빼고.

06. 07. 17.

 

 

 

 

P.S. '나 살아가는 동안'의 가사를 옮겨놓는다.

 

 

 

 

 

Beatles - In My Life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is places have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But of all these friends and lovers
There is no one compares with you
And these memories lose their meaning
When I think of love as something new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In my life-- I love you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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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7-17 23:33   좋아요 0 | URL
가사를 보고 있으니 노래를 따라하게 되네요. ㅎㅎ

로쟈 2006-07-18 00:17   좋아요 0 | URL
다른 곡들에 비해 특별히 더 좋아했던 곡은 아니지만 저도 하도 듣던 곡이라 귓가에 맴돌긴 합니다.^^

푸른괭이 2006-07-18 03:29   좋아요 0 | URL
김연수는 소설도 잘 쓰지만 에세이도 참 잘 쓰는 듯해요. 여러 모로 공감.

로쟈 2006-07-18 07:42   좋아요 0 | URL
그게 같은 거라고 봅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나 결국엔 사유와 성찰의 깊이 + 문장력이니까요...

stella.K 2006-07-18 10:43   좋아요 0 | URL
김연수가 대세로군요. 오드리 헵번 좋아해요. 소피아 로렌 좀 심하군요. 팔뚝보니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봅니다. 늙는 것이 추한 것마는 아닐텐데 외모지상주의가 걱정이군요. 물론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이놈의 사회분위기 좀 바뀌었으면 합니다.

퍼그 2006-07-19 00:43   좋아요 0 | URL
이 노래 가사가 이런 내용이었네요!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노래인데;;) 지나간 것들을 더 사랑한다니, 왠지 존을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군요.
 

최근에 출간된 <원본 백석 시집>(깊은샘, 2006) 관련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온다. 이숭원 교수의 노고가 담겨 있는 책인데, 백석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애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1912년생인 백석은 지난 1963년쯤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얼마전에 1995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돼 '충격'과 안타까움을 던져준 바 있다(그는 '동시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의 시를 읽는 건 그의 생애만큼이나 아련하다.

교수신문(06. 07. 17) 변형 없이 복원한 원형…“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51세, 국문학·사진)가 3년 전 <원본 정지용 시집>에 이어 지난 6월 <원본 백석 시집>을 펴냈다. 이 교수가 원본 시집을 연이어 두 차례 낸 것은 “석·박사 재학생들이 자료를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덜고, 이후 뜻풀이를 하는 데 들이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기본 텍스트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쉽게 심층 연구로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현대어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들, 행갈이가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임의로 바꾸지 않고 백석이 쓴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독자들이 ‘연구자 맘대로’ 재해석되었거나 변형되지 않은 시의 ‘원형’을 즐길 수 있는 것.

 

 

 

 

-그러나 <원본 백석 시집>을 내는 일은 ‘정지용’ 때보다 힘들었다. 시의 대부분이 2권 시집에 수록돼 있는 정지용과는 달리 백석의 경우 그의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는 33편이지만 그 외 신문과 잡지 등에 실린 시들이 70편을 넘는다. 따라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흩어져 있는 원문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 것. 이 작업은 제자인 이지나 박사가 했는데, 이렇게 자료를 모으는 데만 6개월이 넘게 소요됐다.

-원본 인쇄의 경우 편집도 힘들다. 시가 그림과 같이 게재된 경우, 그림이 글자를 잡아 먹어버려 그림을 지우고, 다른 시에 나오는 같은 글자들을 오려서 붙여 넣는 등의 작업을 했다. 매체가 다양해 너무 작거나 크게 인쇄되어 있는 활자의 경우 확대 및 축소를 통해 평균치로 만들어 비슷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겪는 고생이긴 하지만 그만큼 ‘원본 시집 작업’이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백석 시의 백미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꼽는다. 이 시에는 “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와 함께 많은 독자들이 백석의 절창으로 꼽는 시이다). 몰락한 외톨이가 된 처지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의 쓸쓸함과 절망적 상황을 반추하면서 힘겨운 세상살이의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는데 “백석 개인의 경험인 것 같다”며 진실해서 감동을 준다는 것. 이런 시들을 1940년대, 50년년에 찍힌 인쇄자를 통해 옛 냄새를 맡으며 감상할 수 있다.

-원전 백석 시집에는 이 교수만의 해석도 있다. 시 ‘쓸쓸한 길’의 ‘거적장사’는 ‘거적을 팔러 다니는 장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거적으로 둘러메고 지내는 장사’로 해석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시에 나오는 산가마귀의 울음과 서러운 땅버들의 소복 차림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런 식의 다년간의 연구가 바탕이 된 주석들로 인해 백석 시의 원형을 느낌과 동시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마련된 것.

-이 교수는 이번에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라는 연구서와 원본 시집을 한꺼번에 냈다. 두 권을 한 번에 냄에 따라 주변에서 “와”하는 탄성을 보내는 반면, 내심 아쉬움도 있다. <정지용 원본 시집>은 그 이전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를 먼저 내고 이후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보다 세밀하게 주석을 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이 생략된 것. 그래도 이 교수는 “1차적인 텍스트의 세밀한 분석과 이해보다는, 라깡이나 데리다 같은 외국 이론부터 끌어와 적용하는 요즘 연구자들이 텍스트의 정치한 해석이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정지용과 백석을 졸업한 느낌이다”라고 말한 이 교수는 이제 김소월부터 정지용 백석까지, 정말 좋은 시, 계속해서 읽힐 만한 문학적 감동을 주는 시들을 모아 왜 좋은 지 뭐가 좋은 지를 해설하는 해설서를 내기 위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백석도 정지용도 모든 시가 다 좋지는 않다”며 “건질 것은 7~8편 아니냐”라고 말한 황동규 시인의 말이 발판이 됐다. 이 교수의 작업을 통해 숨겨진 좋은 시를 맛보는 한편, 너무 익숙해 그 맛과 멋을 잊었던 시들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박수진 기자)

06.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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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17 12:0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

2008-03-2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의 세번째 평론집이 출간됐다. 두께에 비해 비싼 책이어서 서점에서 들었다가 놓은 적이 있는데(구입은 좀더 짬을 봐야겠다), 중앙일보의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란에서 다루고 있기에 겸사겸사 옮겨온다. 김교수는 시 전문 비평가로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지난 계절부터는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 가세했다(중앙일보에서 거들 만하군). 아무튼 같은 세대 비평가가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다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같이 늙어갈 터이지만 대가급 비평가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중앙일보(06. 07. 15)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곤 사이가 안 좋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대해선 경기를 일으키는 것쯤 이내 알아챌 수 있다. 비평가일수록 더 하다. 비평이란 게 참견하고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라서 그렇다. 가치가 배제된 비평은 세상에 없다. 해설에도 가치는 개입한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예외가 있다. 비평가 김수이(37)다. 말하자면 그는, 좀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평론가다. 최근 출간된 세 번째 비평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를 보자. 젊은 비평가이니만큼 김근.황병승.김언 등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은 쉬이 짐작했던 터다. 한데 정현종.최하림.정호승 등 시단의 중진을 정성껏 호명하고선 김혜순.김언희.김선우 등 여성시 계보를 죽 훑는다. 그러더니 불쑥 '지게꾼 시인' 김신용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민중시 계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민중시 계열이 대거 몰린 요즘의 생태시를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석사논문 주제가 김수영과 김춘수였다. 흥미로운 조합이다. 시대와 문학의 거리를 묻는 듯 보였다. 1997년 등단할 땐 기형도와 남진우를 파헤쳤다. 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시인들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고민도 읽혔다. 그러나 박사학위 주제는 서정주였다. 미당의 미학, 욕망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적 편력이다(*머 그래봐야 다 시인들(!)이지만, 다방면으로 두루 훑었다는 얘기는 되겠다. 즉,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것).

-오히려 김수이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현대시를 다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계파와 경향, 진영과 계보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진실한 문학이라면, 온몸으로 앓은 시라면 모두 보듬으려는 것이다. 하여 사방에 대고 잔소리만 해댄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만인의 편이라는 건, 만인이 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평론집 제목에서 '진화'는 두 가지 의미다. 진화(進化)와 진화(鎭火)를 동시에 뜻한다. 내일의 서정으로 나아가고 어제의 서정은 꺼트려야 진정한 서정이란 의미다. 부단히 움직이라는 다그침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몸가짐에서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을 읽는다.



-김수이에 따르면, 시인들은 '그리고'나 '그러므로'가 아닌, '그러나'와 '그럼에도'에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와 '그럼에도'에 존재해야 시다. 설명되거나 부연되어선 시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김수이에 따르면, 시는 요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요약되어선 아니 되는 것처럼.

06. 07. 16.

P.S. 저자를 평론가로 '호명'해준 문학비평가 황종연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평단에는 김수이만큼 부지런하게 시를 읽고 정확하게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도 드물다. 그에게는 국내의 어떤 유수한 시인의 언어도 낯설지 않으며 어떤 새로운 유행도 당혹스럽지 않은 듯하다. 김수이의 평론을 읽어보면 작품의 유형이 아무리 달라도 비슷한 높이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대상 작품이나 시인에게 잠복된 의식의 행로가 정연하게 검출되는 한편, 동시대 시의 역동적인 구도 속에 수려하게 배치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하니, 동시대 시의 지리부도 같은 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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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G8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이전엔 'G7+1'이라고 표기했던 듯한데, G8이라고 하는 걸 러시아도 당당히 '선진국'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하긴, 경제적으로야 아직 거기에 못 미치지만 외교적, 군사적으로야 못 끼여들 건 아니겠다. 오마이뉴스(06. 07. 15)에서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정인고 기자이고, 타이틀은 '푸틴, 피터 대제의 꿈에 도전하나'이다. '표트르 대제'를 '피터 대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러시아통은 아니고 영어권 보도을 종합해서 기사를 작성한 듯하다.

피터 대제의 야망이 반영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G8 정상회담의 공식로고(왼쪽)와 피터 대제의 청동기마상

-1703년 피터 대제는 핀란드만과 네바강의 어귀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영어 ST. PETERSBURG), 즉 '성베드로의 도시(상트 - 성, 페테르 - 베드로, 부르크 -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이 도시는 1712년에 완공된다. '성베드로의 도시'란 뜻도 가지지만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의 도시'란 뜻도 포함하고 있다). 서구 유럽 지향적 전제 군주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고, '서구를 향한 창', '북방의 베니스'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천국의 열쇠를 쥔 사도 베드로처럼 발트해로 나가는 열쇠이자 서구로 향하는 길목의 열쇠를 지니고, 러시아의 황실 문장인 '쌍두 독수리'처럼 동과 서를 바라보며 세계의 중심을 이곳에 건설하겠다는 피터 대제의 야망과 의지가 반영된 도시이다. 이제 피터 대제의 장엄한 모습은 G8의 로고 모델이 되어,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대작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 푸틴에 의해 그 꿈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서방 선진 8개국 회담의 올해 의장국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이번 G8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재건을 다짐하고 있다. 이번 G8회담의 공식 의제는 에너지 안보, 전염병 예방, 교육 세 가지다. 여기서 푸틴의 야심은 에너지 분야에 있다. 이미 올 1월 우크라이나와의 가스분쟁을 통해 전세계에 러시아의 야욕을 보여줬다. 냉전 시절 러시아가 핵무기 보유국으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했던 강국이었다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과거 소련시절 초강대국의 면모와 위상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Presid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Vladimir Putin

-한편 임기를 1년 남긴 푸틴은 이번 G8회담을 통해 자신의 인기와 권력을 더욱 견고히 하여, 순조로운 권력이양 또는 3선 전략을 추진하고자 한다. 러시아 대통령은 헌법상 연임만 가능하나, 헌법을 개정하거나 벨라루시와의 통합을 통한 신 헌법에 의해 장기집권의 길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인권 들먹이는 서방국들, 뒤로는 자원협력 손 내밀어

▲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콘스탄틴 궁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인공위성,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러시아의 자원'이라고 말했듯이,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포함한 풍부한 자원과 최근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으로 자원 부국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러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퇴보를 들먹이고 G8회담 보이코트까지 거론하며 러시아를 압박했던 서방국들도 러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실정이다.

-푸틴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푸틴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권위주의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서방 정치인들의 발언에, "민주주의는 감자가 아니다, 감자가 자라지 않는 곳에 감자를 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러시아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통해 서방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러시아는 주권국가이니 러시아의 내부 일에 간섭하지 말고 러시아를 존경하라, 그렇지 않으면 협력(에너지)과 상호이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시절의 대중 선동술을 이용해 G8의 의장국, 개최국의 모습을 러시아인들에게 보여주고 대국으로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에너지 무기화 정책의 선봉장인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부시와의 단판 승부를 통해 마지막 남은 WTO 가입 동의안을 매듭지어 러시아를 글로벌 경제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한다.

-제2선에서는 체젠문제, 인권문제, 민주주의 퇴보, 언론의 자유를 거론하며 러시아를 비난하지만, 제1선에서는 에너지 협력과 공동 경협 프로젝트 및 투자 제안을 하는 서방국가들의 딜레마를 푸틴은 너무나 적절하게 잘 이용하고 있다. KGB출신 답게 심리전과 전략의 대가이다. 300년전 피터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던 야망을 푸틴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G8 정상회담을 통해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 G8회담에 맞춰 새롭게 단장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06. 07. 16.

P.S. 한편에서는 G8 회담 반대시위도 있었던 모양이다. "양키 고우 홈!"이란 피켓도 보인다.

P.S.2. 동아일보의 칼럼 하나도 참고삼아 옮겨온다. 타이틀은 '푸티니즘'이고, 필자는 김순덕 논설위원이다.

동아일보(06. 07. 15) 어제 국제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 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을 게 틀림없다. 석유생산량 세계 2위인 러시아의 대통령답게 국민의 지지도가 유가와 동반상승해 70%를 넘겼다. 오늘부터 러시아에서 열리는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 참가자 가운데 이만한 인기를 누리는 지도자는 없다. 비결은 ‘강한 나라, 강한 리더’로 요약된다.

러시아 경제는 2000년 푸틴 대통령 취임 이래 연평균 6% 성장했다. 임금이 매년 10%씩 올라가니 국민은 대통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유가상승 덕이 크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이 없었다면 고도성장과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이 지금만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G8 정상회의에서 북한 미사일이니, 에너지 안보니 아무리 큰 의제를 외친대도 러시아인들의 귀엔 안 들릴 것 같다. 그들의 주제는 하나다. ‘다시 보라, 세계무대로 돌아온 위대한 러시아를!’

푸틴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의 증손녀 니나 흐루셰바는 ‘푸티니즘(Putinism)’이라고 했다. 스탈린 숭배, 공산주의, KGB 정신에 약간의 시장주의를 합친 변종 이데올로기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러시아인들은 극심한 혼돈과 빈곤을 체험하며 민주주의에 실망했다. 당당했던 소련과 러시아제국, 스탈린과 황제가 그리워졌다. 자유가 좀 없었지만 그건 일부 개인의 문제였다. 그때 일거에 혼란을 정리하고 국민을 사로잡은 영웅이 푸틴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자유민지주의와 더 멀어진 나라가 됐다. 경제는 물론이고 의회와 사법부, 언론까지 몽땅 크렘린 손아귀에 잡혀 있다. 부패와 비효율이 엄청나다. 오일머니만 믿고 산업경쟁력을 키우지 않는 대가도 언젠가 치를 것이다. 아무튼 푸틴이라는 ‘괴물’을 어찌 대해야 할지 G7 정상들은 고민스러울지 모른다.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는 무겁게 말하고 있다. “적으로 여기면 잘못이다. ‘표트르 대제(大帝)’ 같은 러시아 파워가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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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철학,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이지만, 그냥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고만 제목을 달았다(시는 철학을 그렇게 유혹한다).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을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이전에 쓴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내용을 많이 가져왔다. 다시 읽어보지 않아 무얼 쓴 건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은 창고에 넣어둔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물론 O15B의 아주 오래전 음반에 들어 있는 곡명이기도 하다.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네. 이 싸움은 중요한 것일세, 여보게 글라우콘!.. 적어도 시에 자극되어, 올바름과 그 밖의 다른 훌륭함(덕)에 무관심해질 만큼 되어서는 아니되네.”(플라톤, <국가>)

 

 

 

 

플라톤의 회상에서처럼 시와 철학 사이의 관계는 오래된 불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는 일은 이러한 불화의 내력을 들추는 일과 무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력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불화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놓는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원인, 혹은 조금 현학적으로 말해서, 불화의 발생론적 구조, 그걸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어떤 ‘오래된’ 불화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지속적인 관계이다. 끈끈한 인연이 아니고서야 서로가 서로를 불만스러워하는 티격태격의 관계가 반복/지속될 리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감으로 전화를 걸어서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인 것이다. 서로를 불편해하면서도 끝내 헤어지지는 못하는 연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시와 철학을 묶어주는 끈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서로에 대해 ‘넌 정말 아니거든!’이라고 겉으로는 넌더리를 내면서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라고 아쉬워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공통의 지반(地盤)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란 바로 언어, 곧 로고스(logos)를 말한다.

 

 

 

 

 

 

 

 


알려진 바대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시와 철학은 그 로고스의 두 자녀이자 아종(亞種)이다. 그것을 각각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라고 부르기로 하자(횡설수설을 시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시가 자기 나름의 로고스를 갖다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시와 철학이 규범적 범주라면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는 양태적 범주이며, 이 두 범주가 동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규범적 범주로는 변종적인 사태, 곧 ‘시적인 철학’과 ‘철학적인 시’ 따위를 포괄하여 다루지 못하겠기에 양태적인 유형학의 도움을 빌어서 시와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말해보자는 것이다.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양 극단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기표-논리의 극대화’와 ‘기의-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이런 시는 어떤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령 이 시 윤동주의 <팔복(八福)>만 하더라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는바, 이러한 반복은 비록 순수유희가 아닌 정서적인 강도의 강화를 지향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잉여’이다. 기의-논리 극대화의 관점에서라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이라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간단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적 로고스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철학적 로고스의 강경파들은 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시적 로고스는 단어들에 폭탄 세례를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키고자 한다(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이승훈의 비대상시 등의 계보는 전범적인 사례이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시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 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러시아어에서 '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이 자움어를 한국의 ‘미래파’ 시인들이라면 ‘시체들의 언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부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따라서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시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시는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한 건 따라서 자연스럽다.  


시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시는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시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요컨대, 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시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시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시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시의 언어가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이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

 

 


 

 

 

 

 

 

20세기 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로 특징지을 때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 혹든 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이고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스럽다.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 하지만, 이때 철학적 로고스에 치료의 방책으로 주어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 <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선호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로 오염되지 않은 인공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어는 자연어의 병리성이 극대화된 구제불능의 것으로 간주될 법하다. 하지만,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한편으론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 <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무엇보다도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이러한 구도하에서라면, 시와 철학의 오래된 불화에 대해서 다시금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미 들었던 비유를 계속 갖다 쓰자면,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관계란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관계이다.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인공어>로 가고자 할 때, 시적 로고스는 그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즉, 철학은 시를 밀어낸다. 가령,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부분

 


 

 

 

 

 

 

 

 

라는 시적 규정을 가지고 사유의 알고리듬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연어→시어>의 방향에서 철학적 로고스는 그 자신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영감을 시적 로고스로부터 제공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철학은 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휴일은 가죽과 망토뿐이네. 휴일이여, 나를 빌려가세요. 언제나 당신을 위해 숨을 쉬겠어요.

-김행숙, <8요일> 부분

 

 

 

 

 

 

 

 

 


에서처럼 철학적 로고스는 시의 가죽과 망토를 빌려다가 새로운 숨을 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철학은 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으며 스스로를 갱신해간다.


이 두 갈래의 방향이 모두 철학적 로고스의 길로 포함된다면, 시와 철학의 관계가 발생론적으로 밀고 당기는 ‘오래된 불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철학은 시라는 항성에 대하여 언제나 가깝고도 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자기의 존재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여보게 글라우콘, 무엇보다도 시를 조심하게나!”

 

06.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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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행숙 첫 시집을 읽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와,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항상 부러움과 주눅듦을 느끼며 로쟈님 글을 읽기는 합니다만, 이 글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열광적으로 즐겼습니다!! 브라보...............

미지 2010-07-1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06. 07. 16 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어 다시 보니, 지금은 10. 07. 16 으로 표기되네요 ^^ 인공적 시어 같은데요...^^